< 『국내편 - 052』 >
『국내편 - 052』
-차지혁 선수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현재 타율 1위에 빛나는 강남 맨티스 4번 타자 강태호 선수와 크로이 러셀 선수까지 연속타자 삼진을 잡아내며 7회 말, 강남 맨티스의 타선도 철벽처럼 막아냈습니다. 특히, 홈런 12개로 홈런 단독 선두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 크로이 러셀 선수는 차지혁 선수를 상대로 세 타석 연속 삼진으로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제는 무서울 정도네요. 시즌 초, 신인 투수가 타자들에 비해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차지혁 선수는 벌써 4번째 선발 등판입니다. 이 정도면 모든 구단에서 차지혁 선수에 대한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공략 방법까지 제시가 되었을 시점입니다. 그럼에도 차지혁 선수는 보란 듯이 타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피칭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앞으로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참 궁금합니다.
-차지혁 선수처럼 구속, 구위, 제구가 모두 뛰어난 투수를 상대로 공략법이 있겠습니까?
-세상 그 어떤 투수도 완벽할 순 없습니다. 투수는 사람이고, 사람은 기계처럼 언제나 항상 같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현 시점에서 차지혁 선수를 공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를 노리고 집중적으로 타격에 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호길 해설위원께서 제시하신 차지혁 선수의 공략법이라는 것이 결국은 차지혁 선수 스스로 흔들릴 때를 노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참, 어려운 공략법입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하면 차지혁 선수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선발로 등판하지 않으면 영영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그거 참 타자들에게는 불행스러운 말이군요. 하지만, 차지혁 선수에게도 분명한 약점이 존재합니다. 약점을 알기 위해선 우선 앞서 있었던 3경기 선발 기록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3경기에서 26이닝을 소화하면서 90타석을 상대했고, 무실점을 달성했죠. 총 투구수는 330개, 37개의 탈삼진과 2개의 볼넷, 9개의 피안타를 맞았습니다. 피안타율은 고작 0.1이고, 매 이닝 1.5개의 탈삼진 즉, 세 명의 타자 중 한 명은 삼진을 잡아낸다는 위력적인 피칭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차지혁 선수의 이닝당 투수구가 12.6개로 한 타자당 평균 4개 정도 밖에 공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내 투수들 가운데 차지혁 선수만큼 공격적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타자들을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간단하게 말씀하셔서 차지혁 선수가 던지는 대부분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 안에서 놀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죠. 차지혁 선수의 제구력이 정교한 점도 있겠지만, 소위 말하는 볼질을 하지 않는 투수로 유인구조차 스트라이크 존 안에서 이뤄지고 있으니 타자들에게는 이 점이 유일한 공략 해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지혁 선수가 던지는 대다수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니 그 점을 노리고 타격에 임하라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차지혁 선수가 구사하는 구종으로는 포심 패스트볼, 파워 커브, 컷 패스트볼뿐입니다. 어느 하나만 노리고 타석에 서기에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주호길 해설위원께서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어느 구종을 노리고 타석에 서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차지혁 선수가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과 컷 패스트볼의 구속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3가지의 구종 중 2가지가 같으니 남은 확실한 한 가지를 노려야죠.
-파워 커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죠. 저라면 파워 커브만 노리고 타석에 설 겁니다. 나머지 공들에 대해서는 커트에 집중해야겠죠.
-하나만 확실하게 노린다는 말씀 고민해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정말 저 투수가 신인이라고?”
에바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7이닝 동안 고작 2개의 안타만 맞았고, 무려 11개의 탈삼진을 잡아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기록도 대단하지만, 에바가 믿을 수 없는 건 차지혁의 피칭 스타일이었다.
거의 모든 공이 스트라이크 존의 구석을 노리고 있었다.
간혹 한 가운데를 던질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95~96마일의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로 타자들을 압도했다.
‘루키라면 절대 저럴 수 없어!’
어렸을 때부터 메이저리그만 봐온 에바였기에 야구를 보는 눈에 있어서는 결코 수준이 낮질 않았다.
더욱이 가족 모두가 야구를 좋아했고, 아버지의 경우 웬만한 해설자들보다 야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서 덩달아 에바 역시 야구 지식이 상당한 편이었다.
“에바가 보기에도 정말 대단하지?”
정혜영의 눈은 백마 탄 왕자를 본 여자와도 같았다.
“저건 대단한 정도가 아니야. 정말 엄청난 거라고!”
역대급 신인 소리를 들으며 매년 메이저리그에 등장하는 수많은 투수들도 차지혁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이는 없었다.
리그 수준을 떠나 신인 투수로서의 배짱 자체가 급이 달랐다.
거기에 한국 프로 리그 수준과는 상관없이 에바의 눈에도 차지혁의 구위와 구속, 제구력은 충분히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것처럼 보였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을 대다수의 타자들이 제대로 치지 못하는 것과 친다 하더라도 구위에 밀려 범타 처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지혁이 우리 대전 호크스와 계약을 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정혜영의 말에 에바는 경기 시작 전, 차지혁이 해외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서 1라운드 지명 후보였다는 말이 떠올랐다.
메이저리그에서 1라운드 지명 후보의 선수들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들이다.
단순히 야구를 상당히 잘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야구 재능을 갖춘 이들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0.01%의 초천재들이라 부를 만 했다.
“어째서 메이저리그와 계약을 하지 않은 거야?”
에바로서는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자부심, 부와 명예까지 모든 것이 세계 최고의 프로 리그인 메이저리그였으니 야구 선수라면 당연히 메이저리그로 향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1라운드 지명 후보라면 이미 성공 가능성도 컸고, 기본적으로 돈 역시 굉장히 많이 벌 기회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한국에 남았으니 에바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기는 한데, 차지혁 선수가 한 말이 난 정말 가슴이 와 닿았어.”
“뭐라고 했는데?”
“국내 최고 투수가 세계 최고 투수라는 걸 보여주겠다고 했거든. 멋있지? 나 인터뷰 기사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한 느낌을 받았었어. 저런 자신감을 가진 야구 선수를 야구 팬으로서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난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
정혜영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바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문제였지만, 어쨌든 저런 자신감에 실력까지 겸비한 선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겼다.
대전 호크스의 공격이 끝나고 8회 말이 되자 마운드에 차지혁이 다시 올라왔다.
굉장히 공격적인 피칭으로 투구수의 여유도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차지혁 파이팅!”
대전 호크스의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마운드에 오른 차지혁에게 환호성과 응원을 보냈다.
정혜영 역시도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활기찬 모습으로 열렬하게 응원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굉장한 미모를 자랑하는 정혜영과 에바였는데, 열심히 응원까지 하니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두 미녀를 화면에 담아냈다.
경기가 진행되기 전 전광판 옆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화면에 정혜영과 에바의 모습이 나타났다.
남자들은 대형 화면에 아찔할 만큼 아름다운 미녀들이 나타나자 저마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차지혁 역시 포수가 2루로 송구를 하는 바람에 등을 돌렸다가 화면에 나타난 정혜영과 에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지혁이 순간적으로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자, 정혜영이 돌발적으로 양손을 머리위로 올리며 하트를 만들었다.
누가 봐도 차지혁을 향해 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고, 그걸 본 많은 기자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국내 리그를 초토화 시키고 있는 신인 투수와 연예인보다 더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만한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난 몰라!”
정혜영은 충동적으로 했던 자신의 행동에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국이라면 별 것도 아니었지만, 한국 사회가 어떤지 지난 1년 동안 겪어본 에바로서는 부끄러워하는 정혜영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팬이 선수를 좋아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에바의 말에 정혜영이 ‘그렇지?’라며 말을 하고는 다시 차지혁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목소리나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헛스윙! 타자 아웃!”
주심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마운드에 서 있던 차지혁이 왼손을 하늘로 번쩍 치켜드는 승리의 세레모니를 했다.
2경기 연속 완봉승.
지금까지 4번 선발로 등판해서 4승을 챙겼다.
무엇보다 경이적인 건 4번의 승리 중 3번이 완봉승이고, 그 중 또 한 번은 노히트노런이란 사실이다.
나머지 한 경기도 8이닝 무실점 경기로 승리 투수가 되었으니 4게임에서 35이닝을 책임진 무시무시한 이닝이터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불과 4게임뿐이지만, 승률 100퍼센트에 8이닝 이상을 확실하게 책임지는 선발투수.
한국 프로 야구 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까지 모두 포함시켜도 시즌 초반부터 이런 엄청난 성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투수는 오로지 차지혁 한 사람 뿐이었다.
대전 호크스의 원정 팬들은 승리의 여운을 느끼기 위함인지, 차지혁 선수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인지 경기가 끝났음에도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에바와 정혜영도 마찬가지였다.
“나왔다!”
정혜영의 말처럼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던 차지혁이 경기 시작 전처럼 바구니에 사인볼을 담아 원정 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중석으로 다가왔다.
대전 호크스의 팬, 혹은 차지혁 선수의 팬이라 자처하는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차지혁의 이름을 연호했고, 차지혁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답을 하고는 바구니에서 사인볼을 꺼내 관중들을 향해 가볍게 던져줬다.
“여기요! 차지혁 선수! 여기도 줘요!”
정혜영이 양팔을 마구 흔들며 외쳤고, 사인볼 하나가 정혜영의 앞까지 날아왔다.
“잡았다!”
정혜영은 두 손으로 사인볼을 잡아들고는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며 행복해했다.
“에바! 나 사인볼 받았다! 헤헤!”
천진난만하게 좋아하는 정혜영의 모습에 에바도 웃으며 축하해줬다.
마음 같아서는 에바도 사인볼 하나 얻었으면 싶었지만, 정혜영처럼 호들갑을 떨기엔 먼 이국땅의 낯선 시선들이 너무 불편하기만 했다.
차지혁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인볼을 모두 관중들에게 던져주고는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모의 아나운서와 당일 수훈선수 인터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 여시 같은 게 왜 저렇게 차지혁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거야!”
“야! 너 옆으로 떨어져! 뭘 그렇게 들러붙어서 인터뷰를 하는 거야!”
“아나운서가 차지혁 선수한테 너무 붙어 서 있는 거 같지 않아?”
TV로 중계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모의 아나운서는 차지혁 선수에게 과도할 정도로 바짝 붙어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부 여성팬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불만을 토해냈는데, 정혜영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때, 대전 호크스 선수들이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하는 차지혁 선수의 뒤로 다가가서는 큰 물통에 담긴 파란 빛의 이온음료를 머리위로 쏟아버렸다.
차지혁 선수에게만 집중된 음료 세례였지만, 아나운서가 너무 바짝 붙어 있었기에 함께 음료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보통 경기직후, 벌어지는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물이나, 음료 세례는 짜릿한 역전승이나, 완봉승 같은 경우가 아니면 잘 생기지 않았기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들도 미리 언질을 받는다.
아나운서의 경우 갑작스런 물 세례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카메라맨이 약속된 신호를 주면 슬쩍 뒤로 빠지며 괜한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차지혁의 인터뷰를 담당한 미모의 아나운서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리 유지도 하지 않았고, 카메라맨의 신호에도 꼼짝 하지 않았다.
더불어 아나운서는 음료가 머리위로 쏟아지자, 깜짝 놀라며 차지혁 선수의 품으로 파고들기까지 했다.
신인 아나운서도 아니고, 2년 가까이 수훈 선수 인터뷰를 해왔던 아나운서로서 할 행동이 아니었다.
고작 몇 초 정도만 안겨 있었을 뿐이지만, 일부 극성스러운 여성 팬들은 저마다 잔뜩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저 불여우가 뭐하는 거야! 아우! 진짜!”
에바는 마치 자신의 애인이 다른 여자에게 유혹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흥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는 정혜영의 모습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인터뷰를 마친 차지혁 선수가 더그아웃 쪽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마지막까지 경기장에 남아 있던 팬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김하연? 이 불여우가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이거지?”
어느새 핸드폰으로 아나운서의 정보를 검색하고 원수처럼 액정 화면을 노려보는 정혜영이었다.
< 『국내편 - 05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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