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51』 >
『국내편 - 051』
“에바!”
강의실을 나오던 금발머리의 늘씬한 여자가 자신을 부른 사람을 돌아봤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사귄 단짝 친구 정혜영이 예쁘게 웃고 있었다.
“강의 끝난 거야?”
정혜영의 물음에 에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제출해야 할 리포트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한숨을 푹 내쉬며 시무룩하게 대답을 하는 에바의 모습에 정혜영이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래. 4과목이나 중간 고사를 리포트로 대체해야 하거든.”
“시험을 리포트로 대체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그러니까. 그냥 시험을 보는 게 편한데.”
정혜영이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에바가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 빙긋 웃고는 말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너도 꽤 바쁜 것 같은데?”
에바의 물음에 정혜영이 곁으로 다가서며 팔짱을 꼈다.
“실은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에바랑 같이 갔으면 해서.”
“가고 싶은 곳?”
에바의 눈동자에 호기심과 궁금증이 떠올랐다.
“오늘 시간 괜찮지?”
난감하다는 듯 대답을 하던 에바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정혜영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포트를 해야 하는데… 혜영이, 네가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니 어쩔 수 없잖아?”
“아싸! 그럼 가자!”
팔을 잡아끄는 정혜영의 행동에 에바는 힘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는 건데?”
에바의 물음에 정혜영이 가보면 안다며 대답을 피했다.
에바와 정혜영이 정문으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학생들이 두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올해 갓 입학한 신입생 정혜영과 1년 전, 미국 교환 학생으로 한국에 온 에바는 이미 학교 내에서 가장 유명했다.
2026년 한국대학교 수석 입학생 정혜영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명했다.
전국등수 1, 2등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학업 성적에 웬만한 연예인보다 예쁜 얼굴과 몸매로 인해 그녀의 고향은 물론, 전국적으로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에바는 미국 교환 학생으로 정혜영보다 1년 먼저 한국대학교를 다녔다.
그녀가 미국 명문대인 컬럼비아 대학생이라는 사실도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건 바로 압도적인 미모였다.
눈부신 금발 머리에 173cm의 늘씬한 키와 굴곡진 몸매를 한 번이라도 본 남자들은 누구든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했다.
“저런 여자들이랑 사귀는 놈은 누굴까?”
한 남학생의 푸념에 곁에 있던 친구가 작게 대답했다.
“전생에 나라를 세 번쯤은 구한 놈이겠지.”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한국대학교에 다니는 수재들의 대화치고는 상당히 유치했다.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혜영과 에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들의 시선을 유유히 받아넘기며 교정을 빠져나갔다.
정혜영의 손에 이끌려 지하철을 탈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던 에바는 막상 도착한 장소가 야구장이라는 사실에 환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즐거워했다.
“야구 좋아했어?”
에바의 물음에 정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야구광이라서 항상 보다보니까 지금은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스포츠야.”
“그래?”
“에바는 좋아하지 않아? 미국에서는 야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잖아?”
“당연히 좋아하지! 나도 미국에 있을 때, 항상 아빠, 엄마랑 야구장에 다녔어. 우리 가족 모두 필리스(Phillies)의 광팬이거든.”
“필리스면… 필라델피아 필리스(Philadelphia Phillies)?”
“맞아!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그 이전 때부터 필리스의 팬이야.”
정혜영은 에바가 야구를 좋아한다는 말에 활짝 웃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에바, 네가 야구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솔직히 걱정을 했었거든.”
“나도 처음에는 어딜가나 걱정했었는데, 야구장에 오니 정말 기분이 좋아.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잖아. 헤헤!”
에바의 소녀 같은 웃음 소리에 정혜영은 그제야 에바가 20살처럼 보였다.
처음에 에바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보다 3~4살은 나이가 더 많은 언니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니 20살로 동갑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16살에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했다는 점이다.
수재 소리를 항상 들어왔던 정혜영으로서는 에바 앞에서만큼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티켓부터 끊자.”
미국에 있을 때는 수시로 야구장에 다녔던 에바였지만, 한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야구를 관람하지 못했다.
알고 지내는 친구들 중에는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이 없어서 꼼짝없이 야구를 끊고 살아야 했던 에바로서는 단짝처럼 지내는 정혜영이 야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종종 야구장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경기는 며칠 전부터 티켓이 매진이야.”
“뭐?”
에바는 깜짝 놀라서 정혜영을 바라봤다.
한국에서 야구가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스포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부터 티켓이 매진이라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최고의 스포츠인 메이저리그도 특별한 경기를 제외하고는 며칠 전부터 매진이 되는 일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경기거나, 대단한 라이벌전이야?”
매진이 되는 경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에바로서는 당연히 두 경우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벤트는 없어. 그리고 오늘 경기를 치르는 두 팀은 라이벌도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며칠 전부터 티켓이 매진이라는 거야? 혹시, 한국에서는 항상 모든 경기가 이렇게 매진인 거야?”
“한국에서 야구가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스포츠인건 사실이지만, 그런 일은 없어.”
정혜영의 말에 에바는 더욱더 의문스러웠다.
“오늘 경기가 대단한 이벤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굉장한 이벤트가 될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뜻이야?”
“오늘 원정팀 선발 투수가 엄청 대단한 투수거든!”
“대단한 투수?”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에바로서는 세계 최고의 프로 리그인 메이저리그를 항상 봐왔기 때문에 당연히 메이저리거들이 세계 최고의 선수고, 가장 대단한 선수들이었다.
한국 프로 야구 선수가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한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면 알 수도 있을 거야. 얼른 가자!”
“티켓을 구할 수 없다면서?”
“미리 예매를 해뒀지!”
정혜영의 준비성에 에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와 함께 야구장으로 들어섰다.
야구장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두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자들은 하나 같이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쳐다봤고, 여자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에바와 정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구장으로 들어선 에바와 정혜영은 곧바로 3루 뒤쪽 지정 테이블석으로 향했다.
“여기다!”
정혜영이 자리를 확인하고는 에바에게 말했다.
“뭐 먹을래?”
“글쎄? 뭐가 있는데?”
“다 있지!”
“음… 맥주나 먹을까?”
어렸을 때부터 야구장에서 아빠가 맥주를 먹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꼭 나이가 들면 야구장에서 맥주를 먹겠다 다짐을 했던 에바였다.
“에바랑 나는 정말 잘 맞는 거 같다! 나도 야구장에서 맥주를 꼭 먹어보고 싶었거든! 내가 가서 맥주랑 치킨이랑 사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같이 가자.”
“아니야, 사람들도 많아서 복잡하니까 내가 혼자 갔다 올게. 선수들 몸 푸는 거 구경하고 있어.”
홀로 남은 에바는 경기 시작 전이라 양 팀 선수가 그라운드에 나와 몸을 푸는 모습을 구경했다.
미국에서 메이저리그만 봐왔던 에바에게 한국 프로 야구는 생소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선수가 있는지도 몰랐고, 솔직히 딱히 관심도 없었다.
별 생각 없이 가만히 한국 선수들의 몸 푸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바는 좌우에서 갑작스럽게 큰 소리로 환호하는 관중들로 인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
-차지혁이다!
-차지혁 선수!
한 선수가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자 에바로서는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열광적인 환호였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광적이다 싶을 정도로 소리를 내지르는 통에 귀가 다 먹먹했다.
‘차지혁?’
한국말에 굉장히 서툰 에바였지만, 이름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의 앳된 얼굴의 선수였다.
미국 사람들과 다르게 한국 사람들은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얼굴들이 많았기에 얼굴과는 다르게 나이가 좀 있는 선수인가 싶었다.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낸 그 선수는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에 담긴 사인볼을 원정팀 응원석의 관중들에게 던졌다.
다른 어떤 선수도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꺄아아악! 차지혁이다! 여기도 주세요! 차지혁 선수! 여기도 주세요!”
에바의 바로 옆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러댔는데, 놀랍게도 정혜영이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맥주와 치킨을 내려놓고는 사인볼을 던져주는 선수를 향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소리를 내질렀다.
정혜영과 단짝이 된지는 고작 2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번도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에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혜영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인볼을 던져준 선수는 바구니가 비어버리자 관중들을 향해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는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
“히잉! 나도 사인볼 갖고 싶은데…….”
아쉽다는 듯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입을 삐죽거리는 정혜영에게 에바가 물었다.
“방금 사인볼을 나눠준 선수는 엄청 유명한 슈퍼 스타인가봐?”
슈퍼 스타가 아니라면 팬들이 저런 열광적인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에바는 몰라? 차지혁이잖아. 우리 대전 호크스의 자랑스러운 슈퍼 신인 에이스!”
“루키라고?”
에바가 또 다시 놀란 눈으로 정혜영을 바라봤다.
루키가 저런 열광적인 환호성을 받는다는 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몇몇 선수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 슈퍼 스타들보다는 인지도가 낮았다.
신인 선수라면 올해 첫 시즌이라는 소리다.
한국 프로 야구가 언제 개막을 했는지 알 순 없지만, 미국보다 빨리 개막을 했다 하더라도 불과 한 달을 조금 지났을 시점이다.
그 짧은 기간 내에 저런 인지도와 인기를 얻기란 메이저리그 슈퍼 루키라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지혁이 어떤 선수냐면…….”
정혜영이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차지혁에 대해서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며 에바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신인 투수가 개막전 선발로 데뷔해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는 사실과 이후 2경기에서도 선발로 등판해서 한 경기는 8이닝 무실점, 나머지 한 경기는 완봉승을 거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해외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서도 1라운드 지명이 확실했던 차지혁이야. 그런데 국내에 남았고, 우리 대전 호크스의 선수가 됐지!”
자랑스럽게 말을 하는 정혜영이었다.
학교에서 남자들이 말을 걸어도 항상 무시하며 남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그녀가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바로서는 자연스럽게 차지혁이라는 신인 투수에 대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설마, 오늘 저 루키가 선발로 등판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주말도 아닌데 이렇게 큰 잠실 구장이 매진이 되겠어? 내가 오늘 표를 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아빠한테 부탁해서 인맥을 총 동원해서 겨우 구한 티켓이란 말이야. 어떤 사람들은 차지혁 선수 로테이션까지 미리 계산해서 티켓을 구해놓는다고 하던데, 나도 그럴까 생각 중이야.”
투수 로테이션이라는 게 항상 일정하게 흘러가는 게 아니다.
일정한 등판 간격이 정해져 있지만, 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예상과는 어긋날 경우가 생긴다.
무엇보다 그렇게 일정이 어긋나버리면 전체적인 로테이션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기에 특정 투수의 로테이션을 미리 계산하고 티켓을 예매해놓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혜영이 미리 티켓을 예매한다고 하니 도대체 차지혁이라는 투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에바로서는 오늘 경기가 무척이나 기대가 됐다.
< 『국내편 - 05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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