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47화 (47/221)

< 『국내편 - 047』 >

『국내편 - 047』

그렉 알렉산더.

대구 블루윙즈에서 벌써 3시즌 째 활약하고 있는 선발 투수로,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확고부동하게 다져놓은 외국인 용병이다.

한국 프로 야구 첫 시즌부터 16승을 거두고, 이듬해 21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쥔 그렉 알렉산더는 에이스다운 안정적인 피칭으로 1회 말, 대전 호크스의 타선을 공 9개로 잠재워버렸다.

내가 1회 초 대구 블루윙즈의 타선을 완벽하게 막아내며 뜨겁게 타오를 준비를 마친 대전 호크스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더그아웃에서 휴식을 취하며 다음 이닝 대구 블루윙즈의 4, 5, 6번의 타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다시 한 번 머릿속에 그려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글러브를 들고 다시 마운드로 향해야만 했다.

“미안하다. 다음엔 한 방 갈겨줄게.”

마운드로 향하는 내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정현우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1번 타자임에도 2구만에 배트가 나가며 유격수 땅볼로 아웃이 되어버린 그였다.

1번 타자로서 너무 성급한 면이 있었지만, 무조건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반대로, 내가 홈런을 맞았다고 정현우 선배가 날 비난할 순 없는 거다.

투수와 타자는 그 역할이 다르고, 그 책임 또한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네. 부탁드립니다.”

살짝 웃으며 대꾸하자 정현우 선배가 믿어보라는 말과 함께 수비 위치로 달려갔다.

대구 블루윙즈의 4번 타자는 이규환이다.

굉장히 유명한 선수다.

대전 호크스의 장태훈 선배만큼이나 국내 대표 거포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항상 꾸준한 성적으로 대구 블루윙즈의 4번 타자 자리를 4시즌 동안이나 꽉 움켜쥐고 있었다.

거구의 이규환이 배트를 길게 쥐고 어깨에 살짝 걸치고 있는 서 있는 타격 자세가 너무 여유롭게 보였다.

왼쪽 발이 한 발 정도 바깥쪽으로 열린 오픈 스탠스였는데, 파워가 워낙 좋아 장타나 홈런을 꽤 잘 만들어냈다.

흔한 말로 걸리면 그대로 넘겨버린다고 할 정도였고, 현 국내 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장외 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장태훈 선배보다 정교함은 떨어졌지만, 힘 하나는 정말 무시무시한 타자다.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

이규환의 타격 자세로 봤을 때, 가장 취약한 코스다.

거기에 패스트볼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이규환을 상대로 초구부터 파워 커브로 카운터를 잡고 가겠다는 황대훈 선배의 사인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쇄애액 휘익~ 퍼엉!

“스트라이크!”

정확하게 원하는 코스에 파워 커브를 집어넣었다.

이규환은 거리를 가늠하듯 배트를 슬쩍 내밀어 보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두 번째로 황대훈 선배가 요구한 구종과 코스는 컷 패스트볼로 몸 쪽 타자 무릎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슬아슬한 지점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면 고맙고, 볼 판정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위치였다.

퍼엉!

정확하게 원하던 지점으로 공이 들어갔다.

황대훈 선배는 미트를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주심에게 스트라이크가 아니냐는 어필을 해봤지만, 아쉽게도 주심은 낮았다는 판정을 내렸다.

“볼!”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이규환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자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유 가득한 표정은 누가 봐도 자신 있다는 얼굴이었다.

세 번째 공은 조금 전에 던졌던 지점에서 공 반개 정도 더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컷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주심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이규환이 살짝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2스트라이크 1볼.

누가 봐도 투수가 유리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도 없고, 어설프게 유인구를 던질 수도 없다.

황대훈 선배는 이규환을 슬쩍 바라보고는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컷 패스트볼.

제대로 들어오면 타자는 눈 뜨고 코 베인 격으로 꼼짝 없이 당하고 말겠지만, 제구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주심은 고민 없이 볼을 선언한다.

문제는 볼이 선언되면 이후 같은 코스를 공략하기가 쉽지 않아진다는 사실이다.

주심 머릿속에 이미 볼이라는 인식이 심어지게 되니 공을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때는 타자에게 잡힐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

관건은 칼날 같은 제구력이다.

‘던질 수 있다.’

자신 있다.

오늘은 어느 곳이든 포수 미트가 원하는 곳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긁히는 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컨디션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와인드업을 하고 곧바로 공을 던졌다.

쇄애애액.

퍼엉!

우타자인 이규환의 입장에서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이 살짝 꺾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기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스트라이크? 볼?

이규환이 주심을 돌아봤다.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굳어 있던 주심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과감하고도 역동적으로 제스처를 취했다.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미치겠네! 이게 스트라이크라고요? 누가 봐도 볼인데?”

이규환의 거친 음성에 마운드까지 들렸다.

스트라이크라 선언해도 할 말이 없는 공이었지만, 이규환은 대놓고 판정에 불만을 드러냈다.

선수들 중엔 이규환의 판정에 대한 강한 어필이 고의적인 행동인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방금 공은 정말 기가 막혔다.

같은 코스를 지속적으로 공략한다면?

제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구속, 구위 모든 게 너무 좋아서 제대로 된 타격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규환 정도의 타자가 던진다는 확신을 갖고 배트를 휘두르면 홈런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겠지만, 투수와 포수가 바본가?

대놓고 던질 리가 없으니 타자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거다.

“더 이상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면 퇴장이야.”

주심의 경고에 이규환이 사납게 노려보다 몸을 홱 돌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난 얼굴과 몸짓이었지만, 마운드 위에서 지켜보는 내 눈엔 연극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주심을 흔들겠다는 속셈이겠지.

자신의 판정이 정말 옳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이런 점이 베테랑의 장점이고, 무서운 점이다.

신인 타자였다면 볼을 스트라이크라 선언해도 제대로 된 어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어깨가 축 늘어져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을 거다.

베테랑이기에 이규환은 스트라이크도 볼이 아니냐 우기며 딱 적정선까지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고 물러난 거다.

“오늘 판정이 완전 컴퓨터보다 더 정교합니다.”

황대훈 선배가 주심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이규환만큼이나 베테랑인 황대훈 선배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쓸 때 없는 소리.”

말은 그렇게 해도 주심의 표정이 한결 풀어져 있었다.

이규환으로 인해 살짝 굳어 있던 표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앞으로 방금 전과 같은 코스는 지속적으로 스트라이크 콜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구 블루윙즈의 5번 타자는 외국 용병 애덤 코든으로 외야수지만, 수비력에 집중한 라인업에서는 지명 타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타격 능력이 뛰어났다. 아니, 외국 용병에게 타격 능력은 가장 우선시 되는 부분이니 당연했다.

‘코스 확인부터 하고 가자는 거군.’

황대훈 선배는 초구를 이규환을 삼진으로 잡아버린 같은 코스의 컷 패스트볼로 요구했다.

아무래도 이규환의 어필이 주심의 마음을 어느 정도로 돌려놨는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스트라이크 선언이 되면 안심하고 던질 수 있는 코스가 된다.

조금 전보다 더 현란한 무브먼트를 자랑하며 정확하게 미트에 공이 틀어 박혔다.

“스트라이크!”

주심은 변함 없이 스트라이크 선언을 했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타이밍에 당연하다는 듯 콜을 했으니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스트라이크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머리에 박힌 거다.

황대훈 선배의 포수 마스크 뒤쪽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타석에 선 애덤 코든은 살짝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볼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런 코스를 파고들어오면 도저히 답이 없다는 행동 같았다.

‘반 보 붙었어.’

애덤 코든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반 보 정도 달라붙었다.

바깥쪽 코스를 컷 패스트볼로 공략하니 그에 걸맞는 대응법을 찾을 수밖에 없는 거다.

당연히 그런 대응에 황대훈 선배와 나는 몸 쪽을 공략하는 빠른 포심 패스트볼로 쉽게 카운트를 가져갈 수 있었다.

몸 쪽을 송곳처럼 파고드는 150Km 초반의 포심 패스트볼과 바깥쪽을 헤집어 놓는 컷 패스트볼은 당장 공략할 방법이 없다.

제 아무리 대단한 타자라도 첫 대결에서 안타를 뽑아내는 건 힘들다.

“스윙! 삼진 아웃!”

이규환과 마찬가지로 공 4개로 애덤 코든을 삼진으로 잡아내곤 다음 타자를 바라봤다.

유경석. 대한민국 국가대표 중견수로 엄청나게 넓은 수비 범위와 빠른 발, 거기에 천부적인 타격 재능까지 갖추고 있는 대구 블루윙즈의 프렌차이즈 스타.

14년의 프로 생활로 인해 2년 전부터 노쇠화로 인한 기량 하락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 선수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구 블루윙즈에서 6번 밑으로는 밀려나지 않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좌타자인 유경석은 몸 쪽으로 바짝 붙어서 날아오다 살짝 꺾이며 스트라이크 존으로 파고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우타자에게는 먼 바깥 쪽 코스가, 좌타자인 유경석에게는 위협적인 몸 쪽 코스가 되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2스트라이크 2볼 상황에서 결정구로 삼은 건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걸치고 들어가는 파워 커브였다.

몸 쪽을 지속적으로 공략하다 처음으로 던진 바깥 쪽, 그것도 파워 커브에 배트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루킹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2회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3타자 연속 삼진으로 이닝을 마쳤다.

삼진을 잡았다는 것보다 기쁜 건 역시 우타자 바깥쪽을 걸치고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이 심판의 눈에 익었다는 점이다.

대구 블루윙즈 타자들이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이 공에 대처하게 될지 모르지만, 쉽지만은 않을 거란 사실이다.

2회에 던진 투구수는 13개.

1회까지 더하면 21개.

박수가 절로 나올 피칭 내용이다.

“이거 참.”

유정학 단장은 마운드 위에 오연하게 서 있는 차지혁의 모습이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대전 호크스의 단장으로서 차지혁을 얻기 위해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계약을 체결했지만, 솔직히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했었다.

대전 호크스의 단장으로서 상당부분 불이익을 감수한 계약이었다.

물론, 대전 호크스가 얻게 될 이익이 엄청나지만, 국내 계약 수준과 비교했을 때 통상적으로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어야만 했다.

그런 것들을 다수 포기하고 차지혁을 얻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차지혁이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뒤집어 써야 했기에 시즌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조여 온 건 사실이었다.

상당히 신경을 썼다.

잠까지 줄여야 할 정도로 바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유정학 단장은 차지혁의 모든 것들에 대한 보고를 직접 받았을 정도였다.

그렇게 집중 관리 대상이었던 차지혁은 고맙게도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아니, 정말 야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누구보다 훈련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며, 선배들과의 사이도 원만하게 지내고 있었다.

고졸 신인 선수로서 당연한 자세였지만, 워낙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보니 거만을 떨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걱정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 개막전 선발로 등판한다는 소식에 우려가 됐다.

고졸 신인 투수가 견뎌낼 수 있는 중압감이 아니라 여겼다.

백유홍 감독을 찾아가 선발 로테이션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월권 침해까지 감행했다.

감독과의 불화야 시간을 두고 회복하면 되지만, 차지혁이 개막전에서 난타를 당해 자신감을 잃거나, 슬럼프에 빠지면 그 피해는 절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차지혁은 결국 개막전 선발로 등판했다.

그리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피칭으로 강팀 대구 블루윙즈 타선을 꼼짝도 못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마운드 위에서 차지혁은 또 다시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쳤다.

중견수 너머 펜스 뒤, 잔디밭에는 대전 호크스의 팬들이 직접 제작한 플라스틱 판넬이 여덟 개나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판넬에는 단 한 글자만이 쓰여 있었다.

K.

삼진을 뜻하는 글자로 차지혁이 타자를 삼진으로 잡을 때마다 판넬이 하나씩 추가가 되었고, 어느덧 그 숫자가 8개였다.

“5이닝 무실점, 8탈삼진이라… 허!”

고교 리그 때부터 역대급, 역대급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어째서 고졸 신인 투수에게 수천만 달러를 보장하며 계약을 하려고 했는지 다시금 이해가 갔다.

세계에서 야구에 관한한 최고의 눈을 지녔다 자부하는 이들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다.

선수의 재능과 실력을 파악하는 일에는 도가 튼 자들이다.

그들이 수천만 달러를 안겨가며 계약을 하려고 했으니 더 이상 차지혁의 실력과 재능에 의구심을 갖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국내 언론부터 시작해서 얄팍한 지식으로 차지혁의 미래를 예견하며 비난과 악플을 달아대는 이들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유정학 단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퍼펙트군.”

벌써부터 퍼펙트를 거론한다는 것이 참 우습지만, 유정학 단장은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주먹에서 땀이 스며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졸 신인 투수가 데뷔 전, 그것도 개막전에서 퍼펙트를 달성한다면?

“전 세계가 뒤집히겠군.”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야구계가 발칵 뒤집히는 일대 사건이 된다.

더불어.

“프론트가 바빠지겠지.”

최소 2년.

차지혁이 아무리 대다한 성적을 거둔다 하더라도 최소 2년 동안은 문제가 될 것 없다 여겼다. 그런데 오늘 경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나고 있었다. 그로인해 기간이 단축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 『국내편 - 047』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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