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46』 >
『국내편 - 046』
1만 5천(2020년 증축) 명의 관중들이 꽉 들어찬 대전 한밭 야구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2026년 프로 야구 개막식이기도 했지만, 모든 언론과 야구 관계자들의 시선을 집중 받고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와 야구 관계자들이 그 어떤 구장보다도 많이 관람을 신청한 상태였다.
작년 2025년 시즌 9위의 대전 호크스와 2위의 대구 블루윙즈의 대결은 어찌보면 뻔한 결과였다.
딱히 관심을 가질만한 경기는 아니었다. 그나마 집중을 받았던 이유가 대구 블루윙즈가 9년 째 개막식 패배가 없다는 것이 일부 기자들과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했다.
올해 개막식에서 승리하면 10년 연속 개막식 승리 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엉뚱한 이유로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대구 블루윙즈 박 감독이 완전 작정을 하고 나왔네. 라인업이… 작년 한국 시리즈 베스트 멤버다.”
6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는 김추곤 선배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지혁아, 긴장할 것 없어. 그냥 박살을 내버려. 우리 팀에는 데뷔전 완봉승을 기록한 송진욱 코치님이 계시잖아? 너도 계보를 이어가야지.”
황대훈 선배의 말에 곁에서 글러브를 주무르고 있던 정현우 선배가 한 마디를 더했다.
“이왕이면 혁선 선배의 신인 데뷔전 최다 탈삼진 기록까지 같이 노려라.”
“혁선 선배가 10개였죠?”
“그래, 그러니까 딱 1개만 더 보태서 11개로 기록 싹 갈아치워라!”
“진짜 이러다가 오늘 역사적인 날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오늘 관중도 꽉꽉 찼으니까 제대로 역사 한 번 기록해줘야지!”
“마운드는 지혁이가 지킬 테니까, 우리는 오늘 지원 점수나 팍팍 내주자!”
“오케이!”
“당연합니다! 오늘은 우리 대전 호크스와 차지혁의 날입니다!”
떠들썩한 더그아웃 분위기에 감독과 코치들 모두 밝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신인 투수가 개막전에 선발 등판한다고 우려와 걱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팀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믿음.
신인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란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친선 경기에서 보여줬던 압도적인 투구 내용과 시범 경기 내내 흔들리지 않았던 컨디션까지 팀 선수들 가운데 내가 마운드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졸 신인 선수에게 보여주는 믿음 치고는 너무 과분했지만, 내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야수들이 저토록 밝으니 나 역시 절로 힘이 샘솟았다.
역사에 남을 충격적인 데뷔전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불신을 오늘 단 한 경기로 종식시켜버리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데뷔전 완봉승, 최다 탈삼진 기록 따윈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안정적인 투구로 마운드를 확실하게 지켰으며, 게임 전체를 지배했다는 평가만 받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유명 여자 배우의 시구가 끝나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박살내러 가자!”
정현우 선배의 과격한 파이팅에 선수들 모두 힘껏 기합을 내지르며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와아아아아아!
마운드를 향해 걸어가는 나를 향해 야구장을 찾아온 관중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내질렀다.
중간, 중간에 야유도 섞여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응원하는 목소리가 훨씬 더 컸기에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운드가 높았다.
그라운드 위에 우뚝 솟은 탑처럼 느껴졌다.
시야가 탁 트였다.
포수와의 거리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고, 온 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손에 쥔 야구공이 내 몸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자신감이 팽배한 상태에서 첫 번째 연습 투구를 했다.
쇄애애애액!
퍼- 엉!
관중들의 함성 소리를 관통하는 미트 파열음이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일깨우는 것 같았다.
‘오늘… 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왼손을 불끈 쥐며 온 몸으로 전해지는 무한한 자신감과 흥분감을 천천히 달랬다.
“플레이볼!”
주심의 외침에 포수인 황대훈 선배가 미트를 안쪽을 팡팡 치고는 곧바로 사인을 보냈다.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
미리 약속한 개막전 초구였다.
‘지혁아, 개막전 초구로 네가 어떤 투수인지를 모두에게 강렬하게 알려줘!’
황대훈 선배는 경기 전 어깨를 푸는 과정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고졸 신인 투수가 어째서 개막전 선발로 선정되었는지 확실하게 알리라는 뜻이었다.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포수 미트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타석에 서 있는 대구 블루윙즈의 1번 타자 최태수의 통산 타율과 출루율은 더 이상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바깥쪽 볼에 약하고, 몸 쪽 볼에 강하다는 데이터도 무시했다.
한 가운데다.
오늘 첫 번째 공을 가장 빠른 포심 패스트볼로 장식한다라는 생각만을 머리에 담았다.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주위 사물이 하나, 둘 지워지며 마지막에 남은 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포수 미트뿐이다.
넣는다.
하늘에서 벼락을 쥐고 내던지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신처럼 왼손에 쥔 새하얀 야구공을 포수 미트에 꽂아 넣는다.
“후우우우우.”
와인드업과 동시에 호흡을 천천히 들이켰다.
어느 순간 호흡을 멈추고는 전장을 향해 내달리는 전투마처럼 발을 차올리고는 힘껏 뻗었다.
릴리스 하는 순간 몸의 회전축을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교차하며 온 몸에 모은 힘을 왼손에 집중해서 발산시켰다.
평소보다 릴리스 포인트가 뒤에서 형성되었지만, 온 몸의 힘이 하나로 뭉쳐졌다는 것에 만족했다.
쇄애애애애애-!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가열찼다.
공간을 찢으며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퍼- 어엉!
제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공은 포수 미트가 놓여있던 자리에서 공 한 개 정도 위로 올라갔다.
“스, 스트라이크!”
주심의 콜이 들렸고, 고막을 뒤흔드는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타석에 서 있는 최태수는 살짝 벌어진 입으로 얼음처럼 굳어 있었고, 황대훈 선배는 포수 미트에서 공을 꺼내지 못하고 넋 놓고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아…….”
162KM.
전광판에 찍혀 있는 구속은 나조차도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던진 최고 구속이었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 주니치 드래건즈와의 친선 경기에서 던졌던 161Km를 깨버렸다.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차지혁!
열광적인 홈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공식 기록이다.
국내 토종 투수가 국내 프로 리그 경기에서 162Km의 강속구를 던졌다.
이건 기록으로 남는다.
지금까지 국내 토종 투수가 기록한 공식 기록은 159Km였다.
여기서 2Km를 더했다.
더욱이 160Km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뛰어넘었으니 관중석에서는 난리가 날 만했다.
다시 던지라면 못 던질 것도 없다.
하지만, 제구가 잡히질 않는 공을 무턱대고 또 던질 순 없다.
이번 1구로 마지막이다.
더 이상 160Km에 이르는 공을 던지진 않을 생각이다.
더욱이 지금은 4월 11일.
아직까지 한국 날씨는 투수들에게 협조적이지 못했다.
5월 중후반에서 6월 초반은 되어야 정상적인 구속이 나온다.
그 말은 방금 1구는 상당히 무리를 했다는 뜻이다.
오키나와처럼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공을 몇 번만 더 던져도 단번에 몸에 무리가 온다.
고작 한 경기를 위해 몸을 망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건 일종의 시위다.
개막전 선발에 고졸 신인을 내세웠다고 비난과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력 시위.
더불어 내가 어떤 투수인지, 백유홍 감독이 어째서 날 선택했는지를 똑똑히 알려주고자 하는 선전이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야구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내 이름을 연호하는 홈 구장 팬들에 대한 팬 서비스로도 확실했다.
타석에 서 있는 최태수가 사냥꾼 앞에 선 연약한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세에서 완전히 짓눌려버렸다.
수 년 동안 축척되어 있던 상위팀의 선두 타자로서의 자부심 따윈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극단적일 정도로 배트를 짧게 쥐고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100마일! 100마일! 100마일! 100마일!
관중들이 하나 같이 ‘100마일’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빠른 강속구를 보고 싶은 거다.
시원스럽게 포수 미트에 박혀 들어가는 야구공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싶은 거다.
관중들의 응원 목소리는 나를 더욱더 거대하게 만들었고, 반대로 타석에 선 최태수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이번에는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높은 볼이었지만, 이미 심리적인 압박감에 짓눌려버린 최태수는 빠른 포심 패스트볼이 눈에 확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극단적으로 짧게 잡은 배트가 공보다 살짝 빠르게 돌았다.
작정하고 배트를 반 박자 빠르게 돌렸지만, 구속과 코스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기에 허무하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제구가 된 포심 패스트볼로 굳이 전광판을 확인하지 않아도 구속을 알 수 있었다.
대략 150Km 초반 정도일 거다.
지금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구속이다.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쉽게, 쉽게 던질 수 있는 구속인 거다.
아니나 다를까, 전광판을 확인하니 152Km가 찍혀 있었다.
관중들 사이에 약간이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세 번째 공을 던졌다.
“아웃!”
스트라이크 존 아래를 가까스로 걸치고 지나가는 파워 커브에 최태수가 주심을 돌아보며 항의를 했다.
이거 어떻게 스트라이크냐, 낮았다, 판정이 잘못됐다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주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리자 최태수도 눈치껏 항의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스트라이크 판정은 전적으로 주심의 몫이고, 그의 결정권이다.
선수가 항의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찍혀서 불리한 판정을 받기도 한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만, 주심도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란 듯이 불만스럽게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는 최태수에게 2번 타자 원성훈이 어깨를 다독였다.
둘 사이에 몇 마디의 말이 오가고 원성훈이 타석에 들어섰다.
원성훈 역시 배트를 짧게 잡고 있었다.
초구에 162Km의 말도 안 되는 강속구를 던졌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3구 만으로 1번 타자를 잡았기에 많은 공을 보지 못한 2번 타자로서는 신중한 자세로 타격에 임할 수밖에 없다.
자료나,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투수와 타자가 맞붙으면 누가 유리할까?
간단하다. 투수다.
무조건 투수가 유리하다.
투수는 타자의 타격 자세만 보고도 어느 정도 장단점을 파악 할 수 있다.
반대로, 타자는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의 모습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이미 나에 대한 기본적인 데이터가 각 구단별로 마련되어 있겠지만, 이제 첫 번째 공식 경기를 치르는 투수인 만큼 절대적으로 데이터가 부족하다.
구종, 구속, 코스, 패턴 등 모든 것이 생소하고 데이터의 양이 적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162Km의 강속구를 던졌다.
데이터가 분쇄기로 직행해도 할 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는 오로지 개인적인 훈련으로 완성한 타격폼만으로 타격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해 감각적으로, 센스를 발휘해서 순수하게 타격 재능과 실력만으로 날아오는 공의 구질을 파악하고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1번 타자가 3구만에 삼진을 당했으니, 2번 타자에게 요구할 벤치의 작전은?
역시 간단하다.
최대한 많은 공을 봐라.
개인의 자존심이나 성적보다는 팀을 위한 행동이다.
야구는 9회까지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 스포츠다.
1회 초, 2번 타자에게 초구는 그냥 지켜보라는 작전이 나올 확률이 100퍼센트라 자신할 수도 있었다.
퍼엉!
“스트라이크!”
과감하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져 놓고, 2구 사인을 기다렸다.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높은 볼 포심 패스트볼.
1번 타자 최태수와 같은 위치다.
배트가 나오더라도 좋은 타구가 나올 수 없고,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볼 카운트 하나 올라갈 뿐이니 부담 없다.
“볼!”
선구안이 좋았는지, 벤치에서 2구까지 지켜보라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원성훈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3구를 때리면서 파울타구를 추가했다.
2스트라이크 1볼의 상황에서 황대훈 선배가 바깥쪽 공 하나 정도 빠지는 볼을 요구했고, 그대로 포수 미트가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해 던졌다.
틱!
배트에 빗맞은 공이 1루 쪽 라인을 타고 힘없이 굴러갔고, 재빨리 황대훈 선배가 라인 안쪽에서 공을 잡아 1루로 던졌다.
이걸로 2아웃.
타석을 향해 느긋하게 들어서는 대구 블루윙즈의 3번 타자 김재호.
클린업 트리오의 선봉장인 김재호는 매년 3할의 타율에 20개 이상의 홈런과 3할 중반의 출루율을 자랑하는 2루수로 수비 능력이 조금 부족해서 그렇지 타격 능력만큼은 10개 구단의 모든 2루수를 통틀어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역시 프로 10년 차의 베테랑인가?’
앞서 상대했던 1번, 2번 타자들과는 마주하는 느낌부터 달랐다.
황대훈 선배가 안쪽을 파고드는 컷 패스트볼을 요구해왔다.
데이터에 의존한 구질과 코스 공략이다.
초구에도 과감하게 배트를 돌리는 성격이 강한 김재호였기에 그의 약점으로 평가 받는 몸 쪽을 노리자는 뜻이다.
거기에 맞추는 능력이 상당히 좋은 타자였으니 포심 패스트볼보다는 컷 패스트볼이 좋다는 의견.
데이터와 황대훈 선배의 오랜 프로 경력을 믿고 과감하게 컷 패스트볼을 몸 쪽으로 찔러 넣었다.
딱!
초구를 노리고 들어왔다는 듯 김재호의 배트가 벼락처럼 공을 쪼갤 듯 튀어 나왔다.
포심 패스트볼이었다면 장타를 맞았을지도 모를 타격이다.
그만큼 깔끔한 스윙으로 나와 황대훈 포수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공략할지 예상을 하지 않았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타격이었다.
오직 한 가지만 부족했다.
컷 패스트볼을 예상하지 못했고, 예리하게 꺾인 볼은 배트 안쪽을 맞고 3루수 정면으로 통통 튀며 굴러갔다.
3루수 메이슨 발레타가 편안하게 타구를 잡아 1루에 송구해 1회 초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완성했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데뷔전 첫 이닝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차지혁.
기록일 : 2026년 4월 11일.
상대팀 : 대구 블루윙즈.
IP(이닝) : 1.
H(피안타) : 0.
R(실점) : 0.
ER(자책점) : 0.
HR(피홈런) : 0.
BB(볼넷) : 0.
HB(사구) : 0.
SO(삼진) : 1.
TBP(상대한 타자수) : 3.
NP(총 투구수) : 8.
당일 최고 구속 : 162KM.
“멋지군!”
1루 내야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차동호는 자신이 테블릿pc에 차지혁의 경기 기록을 꼼꼼하게 작성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 『국내편 - 04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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