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44화 (44/221)

< 『국내편 - 044』 >

『국내편 - 044』

기습번트(sudden bunt).

타자가 투수를 상대로 평범하게 타격 자세를 취하다가 갑작스럽게 번트를 대는 행위로 장필성은 몸 쪽으로 날아오는 포심 패스트볼을 정확하게 배트에 갖다 맞추고는 그대로 1루를 향해서 내달렸다.

국내 최고 수준의 리드오프에게 주력은 기본 옵션이다.

기습번트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도 그렇지만, 정상적인 수비를 하고 있던 3루수 메이슨 발레타도 황급하게 타구를 잡기 위해 뛰어봤지만 1루로 던지기 전에 이미 장필성은 베이스 근처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무리 빠르게 송구를 뿌린다 하더라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메이슨 발레타가 고개를 흔들며 내게 공을 건넸다.

“미안.”

기습번트라 하더라도 막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선 엄연히 수비수의 책임이다.

더군다나 타자는 상대팀 리드오프였으니 기습 번트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갖고 있어야 했다.

그걸 알기에 발레타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괜찮다며 희미하게 웃어줬다.

어설프게 되지도 않는 송구를 했다가 공이 뒤로 빠져버리면 장필성을 2루나, 3루까지 보낼 수도 있었으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것만 하더라도 발레타는 충분히 내게 도움이 됐다.

마운드에 돌아와선 1루 코치와 뭔가 이야기를 하는 장필성을 힐끔 바라봤다.

귀로는 1루 코치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은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평균 40개 정도의 도루를 했었지?’

도루 능력도 굉장히 뛰어난 편이다.

특히 신인인 첫 해에는 무려 53개나 되는 도루를 하면서 도루왕 타이틀까지 거머쥔 장필성이었다.

이듬해 도루를 하다 손가락 골절을 당하면서 도루 시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도루 성공률은 국내 선수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났다.

의외의 기습번트로 주자를 내보내고 말았지만, 투구 밸런스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투구 직후 번트 타구를 잡기 위해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였기에 살짝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는 있었다.

그러는 동안 2번 타자 좌익수 배상현이 타석에 들어섰다.

현대 야구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지만, 빛을 보기 힘든 자리인 2번 타자는 여러 가지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야만 한다.

팀 내 희생 번트를 가장 많이 대기에 번트 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삼진을 잘 당하지 않아야 하며, 히트앤드런 작전이나, 주자의 도루를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센스도 갖춰야만 한다.

즉, 타격 능력이나 센스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팀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부산 샤크스의 2번 타자 배상현은 두루두루 괜찮은 수준이라 불릴 만했다.

배트를 짧게 쥐고 있는 배상현은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있었다.

투수로서 배상현처럼 홈플레이트에 달라붙어 있는 타자는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우선 몸 쪽 공을 던지는데 있어 굉장히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예외다.

지금까지 마운드에서 타자가 맞는다는 생각으로 공을 던져본 적도 없고, 항상 제구력에 중점을 둔 피칭을 했기에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타자를 맞추는 일이 거의 없었다.

탁탁탁.

1루 주자로 나간 장필성이 보란 듯이 베이스와의 간격을 상당히 떨어트린 상태에서 양발을 넓게 벌리고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오른발로 땅을 소리 나게 파헤쳤다.

주자가 도루를 하겠다며 위협하는 행동으로 투수의 신경을 건드려서 투구를 방해하는 거였다.

장필성이 뭘 하든 무심하게 그를 쳐다보다 이내 빠른 속도로 포수 미트를 보고 공을 던졌다.

쇄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1구는 과감하게 포심 패스트볼로 몸 쪽을 찔렀다.

송곳처럼 파고 들어오는 몸 쪽 빠른 볼에 배상현이 움찔하며 상체를 움츠렸다.

겁이 없어서 홈플레이트에 가까이 붙는 타자는 없다.

투수와의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붙을 뿐이다.

보통 그렇게 홈플레이트에 가까이 붙는 타자들은 몸 쪽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고,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라면 오히려 좋은 먹잇감밖에 되질 않았다.

세트 포지션(set position)으로 빠르게 피칭을 시도하는 사이 장필성이 사이드스텝으로 깡총, 깡총 뛰며 도루를 할 것처럼 투구를 방해를 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공은 빠르고 깔끔하게 포수 미트로 들어갔고, 타자는 스트라이크를 먹었고, 주자인 장필성은 재빨리 1루 베이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견제?’

2구를 준비하는 내게 포수는 1루 견제 사인을 냈다.

여전히 장필성은 도루를 할 것처럼 리드(lead)폭이 상당히 넓었다.

좌완 투수를 상대로 도발적이라 부를 정도의 과감한 리드폭이었지만, 그것이 도루를 하기보단 날 흔들 목적이라는 걸 알기에 딱히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인이 나온 이상 견제구를 던져야 했기에 관심 없는 척 무심하게 바라보다 투구를 할 것처럼 세트 포지션 상태에서 재빠르게 1루로 공을 던졌다.

촤아아악.

예상대로 장필성은 배를 깔며 1루 베이스를 손으로 찍었다.

아슬아슬한 것 같지만 실제로 장필성은 내 빠른 견제 동작에도 불구하고 한 템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조금만 더 빨리 견제구를 던지면 잡을 것 같게 보일지 모르지만, 투수인 내가 확실하게 느끼기론 쉽지 않았다.

고졸 신인 투수라고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베테랑인 장필성의 생각을 모조리 꿰뚫고 있다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투수에게 견제 동작은 굉장히 중요하다.

최상호 코치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견제와 세트 포지션 상태로도 구속과 제구력을 잃지 않는 훈련을 꾸준히 해왔었기에 결코 낯설지 않았다.

더불어 수많은 영상 자료들을 분석하며 주자의 리드폭, 도루 방법, 징조 등을 연구했기에 100%라고 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는 주자가 도루를 할 거다, 그렇지 않다의 분간이 됐다.

장필성의 생각은 눈에 뻔히 보였다.

날 흔들어서 투구 밸런스를 무너트리고, 그걸 기회로 배상현에게 타격을 노리도록 만드는 것.

장필성의 작전이라기 보단 부산 샤크스의 벤치 작전이라고 보면 된다.

‘웬만한 고졸 신인 투수라면 그대로 작전이 먹히겠지만…….’

또 한 번 견제구를 던졌다.

이번에는 대놓고 아쉽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물론, 재빨리 아닌 척 표정을 바꿨지만, 한 순간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놓지 않는 장필성이 못 봤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장필성의 움직임이 더욱더 요란해졌다.

굉장히 거슬렸다.

포수와 장필성을 연신 번갈아보다가 재빨리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몸 쪽 포심 패스트볼이었지만, 그 위치가 살짝 가운데로 몰리면서 배상현의 배트에 맞고 말았다.

딱!

타구는 3루 선상을 벗어나는 파울이 되었고, 배상현은 아쉽다는 듯 혀를 빼꼼 내밀고는 배트를 두어 차례 휘두르고 나서야 타석에 섰다.

주심에게 공을 건네 받은 포수가 공을 던져줬고, 그걸 받아들고 로진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1루 주자를 바라봤다.

장필성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픽 웃었다.

보일 듯 말 듯 눈을 살짝 찌푸리며 포수 사인을 기다렸다.

사인을 전달 받고 여전히 넓게 리드폭을 잡고 있는 1루 주자 장필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누가 봐도 급할 정도로 공을 던졌다.

공은 한 가운데로 날아갔고, 타자 배상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휘익!

부- 웅!

“스윙! 타자 아웃!”

파워 커브.

홈플레이트 앞에서 원만하게 꺾이며 바닥에 닿을 정도로 포수 미트에 박혀버린 공을 배상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1루 주자 장필성도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1루 주자로 인해 신경에 쓰인 투수가 페이스를 잃고 급하게 공을 던지다가 한 가운데로 몰리는 실투를 했다고 여겼을 거다.

하지만, 결과는 삼진.

“아주 멋진 공이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날 기다리고 있던 포수 황대훈 선배가 칭찬을 해왔고, 우린 하이파이브를 했다.

뒤통수가 꽤 따끔거리는 걸로 봐선 장필성이나 배상현이 날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를 흔들려다가 역으로 당했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이 나쁘겠지.

고졸 신인 투수라고 만만하게 여겼다가는 모두 잡아먹힌다.

나는 아주 노련하고 실력 좋았던 최상호 코치 밑에서 그의 사냥법을 전수 받았다.

타자라는 맹수에게 어떤 함정을 어떻게 속여야 하는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빠르게 습득한 상태였다.

“막내야, 아웃 카운트를 모두 삼진으로 잡으면 야수는 뭘 하라고? 쉬엄쉬엄 던져.”

정현우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히죽 웃고는 손벽을 짝짝 치며 더그아웃에 모인 모든 선수들에게 외쳤다.

“고작 2점 차이니까 단숨에 쫓아가자고! 우리 막내, 지혁이가 이렇게 잘 던져주고 있는데 타자들도 실력 좀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시범 경기라고 설렁설렁 뛸 생각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자!”

주장답게 앞장서서 팀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꽤 멋있게 보였다.

팀의 주장이라는 자리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 싶었다.

정현우 선배의 격려 때문인지 대전 호크스는 바뀐 부산 샤크스 투수를 상대로 정확하게 2점을 뽑아내며 공격을 마쳤다.

이제 스코어는 5:5.

동점 상황까지 왔다.

내가 이번 이닝에서 상대해야 할 타자는 3번, 4번, 5번으로 이어지는 부산 샤크스의 클린업 트리오로 결코 만만하지 않은 타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장필성이나, 배상현에게 어떤 말이라도 들었다면 더욱 신중하게 나올 것이니 공 하나, 하나 신경써서 던져야만 했다.

3번 타자 박승택에게는 단타를 맞고 말았다.

볼 카운트 2스트라이크 2볼에서 유인구로 던진 파워 커브가 박승택의 배트에 걸렸고, 운 좋게도 2루 수비인 정현우 선배 앞에서 크게 바운드 되어 키를 넘기는 행운의 안타가 되어버렸다.

4번 타자 문용석, 부산 샤크스의 홈런 타자를 상대로는 초구부터 5구까지 줄곧 몸 쪽으로 파고 드는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결과는 유격수 앞 땅볼로 깔끔하게 더블 플레이로 1루 주자까지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문용석의 배트가 부러지면서 생애 처음으로 타자의 배트를 부러트리는 진정한 컷 패스트볼을 던졌다.

2아웃에서 타석에 들어선 5번 타자 이안 모텐슨.

작년 시즌에도 부산 샤크스의 유니폼을 입고 지명 타자로 타격과 홈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던 그는 국내 프로에서 활동하는 모든 선수 중 1, 2위를 다툴 정도로 비대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심한 과체중으로 인해 수비 능력은 최하위였기에 붙박이 지명 타자로 활약했고, 강력한 파워에 적당한 유연성이 적당한 타율과 적지 않은 홈런을 터트리며 확실하게 부산 샤크스의 클린업 트리오의 한 자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부- 웅!

“스윙! 아웃!”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타율이 꽤 심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집중력의 차이라 보면 된다.

주자가 있을 때는 제법 끈질기게 투수를 물고 늘어졌지만, 주자가 없을 때는 시원시원하게 배트를 돌려대며 많은 삼진을 당했다.

두 번째 이닝을 삼자범퇴로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백유홍 감독이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날 맞이했다.

“좋군. 다음 이닝이 마지막이네.”

“알겠습니다.”

선배들도 일일이 나에게 잘했다면서 칭찬을 해주었다.

아쉽게도 이번 공격에서는 대전 호크스도 3명의 타자가 빠른 속도로 아웃을 당하면서 공수가 교대되고 말았다.

6번 타자 황준환은 3루수 땅볼, 7번 타자 김문선은 1루수 파울 플라이, 8번 타자 이상재는 연타석 삼진으로 이닝이 끝났고, 내 첫 번째 시범 경기 등판도 그렇게 끝이 났다.

5:5로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는 9회에 발레타가 홈런을 터트리며 최종 스코어 6:5로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이날의 MVP는 2타수 2안타, 1홈런, 3타점의 주인공인 장태훈 선배였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오늘 경기를 중계한 방송국의 리포터에게 간단한 소감만 전하고 사직 구장을 빠져나오자, 벌떼처럼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시범 경기에서 첫 등판한 기분이 어떻습니까?”

“3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훌륭하게 마운드를 지켜냈습니다만, 오늘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타자는 누구였습니까?”

“시범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구속 148Km가 나왔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빠른 구속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합니까?”

“5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편안하게 마운드에 오를 예정이었는데, 결국 장태훈 선수의 쓰리런으로 2점차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떨리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불펜 피칭으로 인해 올 시즌 보직에 관해서 많은 팬들이 궁금할 것 같은데, 차지혁 선수의 정확한 보직은 선발입니까, 불펜입니까?”

방송국 리포터에게 했던 것처럼 소감만 대충 말하고는 선수단 전용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혁아, 인터뷰 좀 재밌게 해라. 신인이 무슨 인터뷰를 그렇게 딱딱하게 하냐. 재밌는 인터뷰도 팬 서비스다.”

정현우 선배의 말에 그러겠다 대답만 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수단 전용 버스는 내일 있을 창원 타이탄스와의 경기를 위해 창원시로 향했다.

< 『국내편 - 044』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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