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마일-43화 (43/221)

< 『국내편 - 043』 >

『국내편 - 043』

“우와~ 차지혁이다!”

“슈퍼 루키 차지혁이다!”

“꺄악~ 차지혁 선수!”

경기와는 상관없는 커다란 함성이었다.

대전 호크스 홈구장도 아니고 부산 샤크스 팬들 사이에서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얼떨떨했다.

“인기 좋네!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줘. 그게 다 팬 서비스다.”

박인수 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다 재빨리 멈췄다.

홈구장도 아니고 원정와서 상대팀 팬들에게 손 인사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박인수 선배를 쳐다보자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멀뚱히 바라보니 날 골탕 먹이려는 수작은 아닌 듯 보였다.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슈퍼 스타라면 모를까, 신인 선수가 상대팀 팬에게 인사를 하는 건 확실히 건방지게 보일 수 있는 문제였기에 주변 시선과 환호성을 외면하곤 박인수 선배와 함께 불펜 피칭을 시작했다.

-차지혁 선수가 불펜 피칭을 시작했습니다. 사직 구장을 찾은 많은 팬들이 차지혁 선수를 향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습니다.

-대단하군요. 그 어떤 고졸 신인 선수가 이토록 큰 함성을 받았습니까?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더군다나 차지혁 선수는 부산 샤크스 선수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전 호크스 선수가 부산 샤크스 팬들에게 이토록 인기가 많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경력이 화려하질 않습니까? 고교 리그에서 퍼펙트와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서도 1라운드 지명 후보로까지 거론된 선수인만큼 국내 팬들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구단 선수에게 이런 호응을 보인다는 게…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솔직히 제가 다 얼떨떨할 정도네요.

-지금이야 다른 구단 선수지만, 결과적으로 몇 년 후에는 당당하게 한국인으로써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위에 설 선수이질 않겠습니까? 아마도 차지혁 선수를 응원하는 모든 팬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상대팀 선수라 하더라도 이처럼 응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군요. 어쨌든 차지혁 선수 참 대단한 선수인 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차지혁 선수가 불펜 피칭을 시작했다는 건 2회를 마지막으로 오주영 선수를 내리겠다는 백유홍 감독의 결정입니다. 사실, 오늘 오주영 선수의 피칭이 작년 대전 호크스의 에이스에 걸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꼭 후반기 체력이 떨어졌을 때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겨울 내내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오주영 선수에게 체력 저하의 이유를 댈 순 없고, 아마도 단순 컨디션 난조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견수 김추곤 펜스 앞에서 타구를 잡았습니다! 빠른 판단력으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완성했습니다. 오주영 선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마운드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직 시즌 개막까지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으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 컨디션 난조라면 얼마든지 정상 컨디션으로 끌어올릴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잘 조절해서 작년 전반기처럼 멋진 활약을 기대해보겠습니다. 박인만 해설위원께서는 지금처럼 점수 차이가 꽤 벌어진 상황에서 차지혁 선수를 마운드에 올린 백유홍 감독의 의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간단합니다. 승부에 연연하지 말고 편안하게 프로 무대를 경험해보라는 배려일 겁니다. 시범 경기라 하더라도 신인 투수가 갖는 중압감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차지혁 선수가 올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중압감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백유홍 감독은 시범 경기를 통해 최대한 차지혁 선수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며 프로 무대에 익숙하게끔 하려고 할 것입니다.

-박인만 해설위원께서 말씀을 하시는 사이 대전 호크스 3번 타자 메이슨 발레타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터트렸습니다! 1루에 있던 박상천 무리하지 않고 3루 베이스에서 멈췄습니다. 2사 2, 3루의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는 대전 호크스의 4번 타자 장태훈입니다. 앞선 타석에는 좋은 선구안으로 볼넷으로 걸어 나갔었습니다.

-대전 호크스가 올 시즌 상위권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팀의 중심 타자인 장태훈 선수가 살아나야만 합니다. 작년 시즌처럼 실망스러운 성적이라면 팀의 중심 타자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올해부터 국내 톱3에 해당하는 거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인만큼…….

2사 2, 3루 상황에서 타석에 선 장태훈 선배는 배트를 가볍게 쥐고 홈플레이트로 반 보 정도 다가섰다.

통상적으로 몸 쪽에 약한 모습을 보였던 장태훈 선배였기에 이번 전지훈련 기간 동안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었고, 그 결과는 꽤 만족스럽다는 코치들의 통일된 의견이 있었다.

‘확실히 달라졌어.’

나를 상대로 치욕적인 삼진쇼를 보여줬던 때와는 다르다.

지금의 장태훈 선배라면 나 역시 저번처럼 쉽게 승부를 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안타를 맞거나, 홈런을 맞을 정도도 아니다.

승부하기 까다롭다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마운드를 3이닝 째 지키고 있는 부산 샤크스의 모태석 투수는 팀 에이스는 아니다.

작년 2선발로 확실하게 자리를 굳혔을 정도로 구위가 좋은 투수다.

오늘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었는데, 140Km 중후반의 포심 패스트볼과 뚝 떨어지는 포크볼로 대전 호크스의 타선을 노련하게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다.

전 타석에서도 장태훈 선배는 모태석 투수의 포크볼을 모두 골라내며 볼넷으로 걸어 나갔었다.

오늘 선구안이 좋다는 뜻이다.

최소한 모태석 투수의 결정구라 할 수 있는 포크볼을 골라낼 수 있다는 건 장태훈 선배에게 승기가 치우쳐져 있다 할 수 있었다.

모태석 투수가 3루 주자를 바라보고는 와이드업을 한 후, 힘차게 공을 던졌다.

따- 악!

초구부터 장태훈 선배의 배트가 과감하게 나왔다.

실투였다.

전 타석에서 볼넷을 줬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으로 인해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고 가겠다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한 가운데로 공이 몰리고 말았다.

‘넘어갔다.’

소리가 경쾌했다.

배트를 꽉 쥐고 힘껏 돌리지 않아도 기본적인 파워가 있는 장태훈 선배였기에 한 가운데로 몰린 공은 여지없이 우중간 펜스를 그대로 넘겨버렸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또다시 의식적으로 밀어쳐서 홈런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밀어쳐서 홈런을 만들 줄 안다는 건 타격 감각이 굉장히 좋다는 뜻이었으니 이대로만 꾸준히 컨디션을 유지해도 장태훈 선배는 팀 4번 타자로서 확실하게 제 몫을 해줄 것 같았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모태석 투수의 표정이 썩 밝지가 않았다.

잘 던지다가 실투로 인해 3점 홈런을 맞았으니 투수라면 어느 누구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스코어는 3:5.

5점 차이가 순식간에 2점 차이로 좁혀졌다.

충분히 추격이 가능한 점수차이였기에 내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달아나려는 부산 샤크스를 확실하게 잡아두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오늘 시범 경기의 승패가 좌우될 가능성이 컸다.

“차지혁.”

송진욱 투수 코치의 부름에 그와 함께 마운드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포수인 황대훈 선배의 미트를 향해 연습 투구를 시작했다.

“시범 경기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라. 컨디션만 조절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던져라.”

이겨봐야 아무런 득도 없는 게임.

송진욱 코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진욱 코치가 마운드를 내려가자 주심이 경기를 진행시켰다.

타석엔 8번 타자 이상재 좌타자가 들어섰다.

부산 샤크스의 주전 2루수지만, 타격과 수비 모두 평균보다는 조금 아래라 평가를 받고 있었다.

유일하게 오주영 선배에게 삼진을 헌납한 타자이기도 했다.

좌타자에게 좌투수는 껄끄러운 존재다.

거기에 몸 쪽에 상당히 약한 이상재였기에 포수 미트는 몸 쪽 꽉 찬 스트라이크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민할 것 없이 곧바로 포수 미트가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을 향해 공을 던졌다.

쇄애액.

펑!

“스트라이크!”

꼼짝도 못하고 스트라이크를 먹은 이상재가 눈을 찌푸리며 타석에서 물러나더니 맹렬하게 배트를 휘둘러댔다.

몸 쪽을 의식한 듯 왼팔이 겨드랑이에 바짝 붙은 상태로 배트가 나오고 있었다.

두 번째 공은 무릎 높이를 관통하는 포심 패스트볼로 역시나 몸 쪽이었다.

부웅!

배트를 휘둘렀지만, 전광판에 찍힌 148Km의 공을 쫓아오기엔 역부족이었다.

144Km를 넘지 못했던 오주영 선배의 포심 패스트볼보다 무려 4Km나 빨랐으니 처음부터 타이밍을 잡기엔 이상재의 타격 실력이 부족했다.

황대훈 선배의 포수 미트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이 아닌 컷 패스트볼로 2스트라이크 노볼에 몰린 이상재로서는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날아오는 공이라면 무조건 배트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쇄애액.

부- 웅!

펑!

“스윙! 타자 아웃!”

예상대로 배트가 헛돌며 이상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포수 미트를 바라봤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날아오던 공이 급격하게 꺾이며 존을 빠져나가버렸으니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날 힐끔 바라보고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타자를 깔끔하게 3구삼진으로 잡아버리자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처음 날 향해 환호하고 박수를 쳐주던 모습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슈퍼 신인이라 불려도 결국 부산 샤크스 선수가 아닌 이상에야 자기네 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날 위해 환호해줄 리가 없었다.

두 번째로 타석에 선 타자는 포수 홍준현이었다.

주전 포수인 전영무가 가벼운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졌기에 백업 포수인 홍준현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27살의 홍준현은 수비 능력은 평균 이상으로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지만, 타격 능력이 워낙 떨어져서 부산 샤크스의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펑!

1구는 포심 패스트볼로 가볍게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포수였기에 상대 투수의 공을 지켜보는 성격이 강했기에 그걸 역으로 한 가운데로 꽂아 버렸다.

2구는 바깥쪽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높은 볼이었는데, 어깨만 움찔 거릴 뿐 배트가 나오지 않았다.

3구는 무릎 높이를 스쳐 지나가는 낮은 스트라이크로 역시나 홍준현의 배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빠른 시간 투구 페이스로 인해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 1볼이 되자 홍준현이 타임을 부르고는 타석에서 벗어났다.

허공에 배트를 휘둘러대는 홍준현의 얼굴이 썩 좋지 않았다.

고졸 신인 투수에게 몰려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한 거였다.

주심이 빠르게 경기를 진행하라는 듯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는 제스처를 반복하자 홍준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타석에 섰다.

4구는… 한복판으로 날아오다 아래로 꺾여 떨어지는 파워 커브였다.

부웅!

“스윙! 타자 아웃!”

허무하게 배트가 헛돌며 홍준현도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두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산뜻한 출발에 대전 호크스의 더그아웃 분위기는 밝았지만, 부산 샤크스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슈퍼 루키니, 메이저리그 1라운드 지명 후보니 하는 말들이 있어도 어쨌든 고졸 신인에 불과했으니 경험으로만 대처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여겼겠지.

그런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구속, 구위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겠지.

최소한 방금 전 쉽게 안타를 뽑아냈던 오주영 선배와는 확실하게 달랐다.

그렇다고 약하기로 유명한 부산 샤크스의 하위 타선을 상대로 연속타자 삼진을 뽑아냈다고 벌써부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천천히 타석을 향해 걸어오는 1번 타자 우익수 장필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2타수 2안타.

오늘 오주영 선배를 상대로 훌륭히 선봉장의 역할을 한 부산 샤크스의 리드오프인 장필성은 결코 만만하게 볼 타자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부산 샤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부산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 중 한 명이고, 그에 걸맞는 뛰어난 성적도 꾸준히 내고 있었다.

국내 최고 수준의 리드오프 중 한 명으로 선구안과 컨택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초구는 몸 쪽 포심 패스트볼.

리드오프로서 초구를 지켜보는 성격에다가 오늘도 오주영 선배의 공을 2구까지는 지켜보기만 했던 장필성이었기에 황대훈 선배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요구했다.

나 역시 초구를 지켜보는 타자에게 굳이 볼을 던질 필요가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공을 던졌다.

쇄애액.

장필성의 무릎이 살짝 굽혀지며 오른 손과 왼 손의 간격이 태평양 바다처럼 넓어진 배트가 순식간에 포수 미트 앞을 가로 막았다.

딱-!

< 『국내편 - 043』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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