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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40화 (40/221)

< 『국내편 - 040』 >

『국내편 - 040』

“헤이~ 차!”

구장 훈련장으로 향하던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드는 거구의 흑인.

메이슨 발레타.

며칠 전에야 팀에 합류한 외국인 용병으로 포지션은 3루수고, 나이는 한국식으로 29살에 출신 국가는 미국이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 중인 노퍽 타이즈(Norfolk Tides)라는 트리플A 팀에서 3시즌 동안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메이저리그로 오르질 못해 한국행을 선택했다고 했다.

매주 꼬박꼬박 영어 과외를 받은 지도 어느 덧 3년이 지났기에 어느 정도 간단한 대화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없다 하더라도 목표가 메이저리그인 이상 영어에 숙달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외국인 용병들과는 제법 가깝게 지내려고 하는 편이었다.

“발레타, 지금 오는 거야?”

영어의 가장 좋은 점은 대화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 많고, 선배라 하더라도 한국어처럼 격식을 높일 필요가 없기에 대화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 물론, 영어에도 높임말이 있지만 대다수의 운동선수들은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며칠 뒤면 시범경기니까 열심히 훈련을 해서 한국에 내가 어떤 선수인지 확실하게 알려야지!”

의욕이 넘쳤다.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은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거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한국이나, 일본 등 외국 프로 리그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메이저리그에 대한 희망을 접은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둬 메이저리그로 입성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았기에 마이너리그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내면서도 좀처럼 메이저리그로 오르지 못하는 선수들은 일부러 한국이나, 일본 프로 무대를 찾기도 했다.

메이슨 발레타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날렵한 체격이 아니라 스피드는 없었지만, 파워가 좋았고 3루 수비 능력도 상당히 훌륭했다.

딱 한 번 수비 연습하는 걸 봤는데, 거구임에도 아주 유연하게 수비를 하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커렌은?”

발레타와 함께 대전 호크스의 용병 타자로 계약을 한 그랜트 커렌은 항상 붙어 다녔다.

같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도 비슷해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단짝처럼 지내고 있었다.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쉰다고 했어.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는지 어제는 하루 종일 설사를 하더라고.”

걱정스럽게 말을 하는 발레타였다.

겉으로 보기엔 거구의 흑인이라 동양인들에게는 꽤 위압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대화를 해보면 발레타는 속이 꽤 여린 남자였다.

흑인 특유의 흥이 있어서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과장된 제스처로 주변을 웃게 만드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먼 곳까지 와서 고생이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어떻게 성공을 하겠어?”

“하긴.”

고통 없는 영광은 없다.

아버지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시차, 문화, 음식, 언어, 생활 습관 등 모든 것이 다른 한국까지 와서 야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엔 보통 각오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지금은 발레타의 이야기겠지만, 몇 년 후에는 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국내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힘겨운 삶이 시작된다.

박호찬 선배도 그랬고, 최상호 코치도 그랬다.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어보지 못하면 미국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야구 선수들 중에서도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려 볼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이들이 있지만, 실제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낯설음과 두려움에 대한 공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국내에 남아 있으면 충분히 남부럽지 않게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으니 괜한 도전 정신으로 힘겨운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여기는 거다

그런 결정을 타인들이 옳다, 틀리다 판단 내릴 자격은 없다.

조언은 해줄 수 있어도, 결코 비난해선 안 된다.

실패했을 때의 책임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니 결정 역시도 당사자가 내려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팬의 입장에서 아쉬운 감정을 드러낼 순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야구 선수가 그렇듯 메이저리그라는 꿈을 꿨을 걸 생각하면 필사의 각오로 도전을 해보는 정신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어느 누군가 그랬다.

현실에 안주한 운동선수에게 더 이상의 기량 발전은 없다.

절대 틀린 소리가 아니다.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노력해야 하는 거다.

훈련장 입구에 들어서기 직전, 프론트 직원이자 장태훈의 사촌 여동생인 강하영이 살짝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와우~! 예쁜데? 여자 친구?”

발레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구단 프론트 직원.”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강하영을 바라봤다.

여자를 사겨본 적이 없지만, 일전에 그녀가 나에게 대시를 해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난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었고, 이후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차지혁 선수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인터뷰요?”

귀찮은 일이다.

기자들과 앙숙처럼 지낼 필요는 없지만, 가깝게 지낼 이유도 없었다.

호의적인 기사를 써준다면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기자들과 가깝게 지내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최상호 코치와 박호찬 선배 역시도 기자라면 대번에 고개부터 절래절래 저었다.

특히 박호찬 선배의 말이 압권이었다.

“초원에 하이에나가 있다면 사회엔 기자가 있다.”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로 최상호 코치는 박호찬 선배의 말에 박수까지 치며 명답이라고 감탄을 했었다.

선수 시절과 이후 야구 개혁에 있어서 많은 기자들에게 시달렸던 최상호 코치였기에 기자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게 전부 신인왕 후보 0순위인 차지혁 선수에 대한 관심이죠. 구단 입장에서도 시범경기 전에 차지혁 선수가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한 번 정도는 해줬으면 하고요. 백유홍 감독님께도 이미 허락을 받았어요. 차지혁 선수 본인만 승낙하면 오후에 인터뷰가 잡힐 거예요.”

강요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부탁이었고, 무엇보다 야구팬들에 대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인 선수인 만큼 내 고집만 부려대며 모든 인터뷰를 사절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한 번은 해야 할 인터뷰였기에 시범경기 기간 중이나, 시즌 도중 인터뷰를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점심 식사 이후… 차라리 점심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까요?”

“그럴… 죠.”

기자와의 식사 자리가 부담스러웠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터뷰를 하는 거 애꿎은 훈련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12시 30분 정도면 되겠죠?”

강하영의 물음에 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해봤다.

오늘 계획했던 오전 훈련을 소화하기에 약간 빠듯한 감이 있었다.

“1시간만 미루면 좋겠습니다.”

“1시 30분이요?”

“예.”

“알겠어요.”

강하영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아직도 그날의 대답에는 변화가 없는 건가요?”

“예. 그럼 훈련 시간이 빠듯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곤 훈련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무 매정하네.”

홀로 남은 강하영은 냉정하게 훈련장으로 들어간 차지혁을 떠올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남자들의 대시만 받아오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용기를 내서 대시를 했는데 결과는 비참할 정도로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날 이후, 차지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인터뷰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었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대했다.

그런데 얼굴을 마주하니 묘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려 자신도 모르게 이전 일을 꺼내고 말았다.

역시 결과는 단칼에 거절이었다.

성급한 실수라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도 이전만큼 창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연하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지혁보다 얼굴이 잘 생긴 남자는 주변에 수두룩했고, 돈 많은 남자도 제법 있었다.

매너 좋고, 누구나 알아주는 학벌에 대단한 집안사람의 대시도 받아봤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보다 차지혁에게 마음이 더 끌렸다.

나이도 어리고, 야구만 해서 학벌도 변변찮고, 대단한 재력가 출신도 아니고, 얼굴이 연예인처럼 잘 생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것이 야구선수이기 때문인지 몰랐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강하영에게 야구선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중 한 부류였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좋아했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사촌 오빠인 장태훈이 국내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눈이 높아졌고, 프론트 직원으로 취직을 하면서 선수들을 보는 눈이 더욱더 까다로워졌다.

그러다 소문 자자한 고교 선수 차지혁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차지혁의 피칭 내용과 마운드 위에 자신감 있게 서 있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감성을 다시 한 번 끌어 올린 것이다.

그날 바로 차지혁의 팬 카페에 가입했을 정도로 강하영은 야구팬으로서 차지혁이라는 선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차지혁이 대전 호크스와 계약을 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밤잠까지 설쳤고, 계약을 마쳤다는 사실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르며 엄마에게 미친년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야구선수 차지혁이 사촌 오빠 장태훈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모습에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팬으로서의 감정인지, 이성으로서의 감정인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차지혁이라는 남자와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강하영은 애써 밝게 웃으며 구단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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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혁 선수, 반갑습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죠?”

“…네. 안녕하세요.”

친근하게 물어오는 남자 기자의 행동에 내가 얼떨떨해하자 그가 빙긋 웃었다.

“기억 못하시나보네요?”

“네?”

상대는 안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내 기억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 기자는 양복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받아든 명함에는 ‘CBC 인터넷 스포츠 기자 차동호’라고 적혀 있었다.

“아! 혹시?”

어렴풋하게 생각이 났다.

고3 시절, 즉 작년에 집 앞에서부터 학교 정문까지 날 쫓았던 기자였다.

당시 한 마디도 하지 않아 차동호 기자 입장에서는 무시를 당했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웃으며 예의를 지켰던 기억이 났다.

“에이전시 측에 몇 번이나 인터뷰 요청을 넣었는데, 승인이 나질 않더군요. 그래서 구단 측에 인터뷰 요청을 하게 됐습니다.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하죠, 차동호라고 합니다.”

악수를 건네는 차동호 기자의 모습에 나도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대전 호크스 신인 투수 차지혁입니다.”

“저는 연안 차씨 오산공파 52대손입니다. 혹시, 차지혁 선수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문열공파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파는 달라도 그래도 같은 핏줄인 건 사실이죠. 안 그렇습니까?”

갑자기 왜 족보를 따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혈연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많다지만, 나는 딱히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같은 성씨에 같은 항렬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서로 남이다.

가족, 친척들끼리도 남처럼 지내는 시대에 한낱 같은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친분을 과시한다는 건 참 웃긴 일이었다.

“하하하.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전 그저 차지혁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팬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어 해본 말입니다. 저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람 아니니 오해를 마십시오.”

“예.”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이곳 정식이 유명하다고 해서 미리 주문을 해두었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메뉴를 고르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한식은 저도 좋아합니다.”

“다행이군요.”

차동호는 차임벨로 종업원을 호출해서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식사를 하면서 천천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이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를 하시거나, 질문 자체를 거부하셔도 됩니다. 최대한 편안하게 인터뷰를 할 예정이니 조금이라도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예.”

생각보다 굉장히 매너가 좋은 차동호 기자였다.

가끔 집 앞으로 찾아와 어깃장을 부리는 기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겉모습에 현혹되어 기자의 입맛대로 인터뷰를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 『국내편 - 040』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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