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39』 >
『국내편 - 039』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프로 야구 시범 경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21일을 시작으로 29일까지 10개의 프로 구단이 동시에 시범 경기를 갖는다.
대전 호크스는 21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부산 샤크스를 시작으로 창원 타이탄스, 강북 바이킹스, 서울 버팔로스, 수원 드래곤즈, 광주 피닉스, 대구 블루윙즈, 인천 돌핀스, 강남 맨티스까지 일정이 차례대로 잡혀 있었다.
2026년 4월 11일 토요일.
대망의 2026년 프로 야구 시즌이 개막한다.
10개의 프로 구단이 총 135경기를 치르는 페넌트 레이스(pennant race)는 프로 선수들에게 있어 피를 말리는 죽음의 경쟁이다.
2017년 세계 야구 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프로 야구는 일주일 중 하루, 월요일을 휴식하고 나머지 6일은 경기를 하는 패턴으로 페넌트 레이스를 벌였다.
2018년 7월 국제야구연맹에서 주관하는 IBAF 챔피언스 리그(IBAF Champions League)가 생겨나면서 한국, 미국, 일본 등 프로 리그가 있는 모든 나라는 페넌트 레이스 일정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7월 한 달은 각 국의 프로 리그 구단 중 상위의 팀들이 미국에서 한 달 동안 최고의 프로 팀을 가리는 경기를 벌인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 중 상위 10개 구단, 일본 6개 구단, 한국, 쿠바, 대만에서 4개의 구단, 그 외 멕시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유럽 등 아마추어 야구 구단 중 4개의 구단이 각각 조를 이뤄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매년 7월은 전 세계 야구 축제의 기간이라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단 한 번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놓친 적이 없었지만, 강력한 경쟁자 혹은 깜짝 활약으로 4강이나 결승까지 올라가는 구단들이 심심찮게 생겨나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우승을 하게 될지 예측을 불허였다.
“7월까지 일정이 빡빡하니 체력 관리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최상호 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4월 11일을 시작으로 9일 동안 쉬지 않고 경기가 벌어지고, 하루를 쉬는 패턴으로 페넌트 레이스가 진행된다.
6월 28일 정확하게 모든 구단은 72게임을 치르고, 7월 휴식월을 맞이한다.
작년 페넌트 레이스 상위 4개의 팀은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챔피언스 리그를 치러야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각 국의 상위 프로팀과 경기를 한다는 건 굉장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선수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의 장이였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과 일본 프로 구단을 상대로 활약을 벌이면 자신의 몸값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위 4개팀을 제외한 6개의 팀은 7월 한 달 동안 아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
23일 챔피언스 리그 시상식과 함께 대회가 폐막하면 한국은 26일부터 30일까지 올스타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다시 8월 1일부터 페넌트 레이스가 이어지고 10월 8일 총 135게임의 길었던 페넌트 레이스가 종료된다.
이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를 마지막으로 2026년의 야구가 끝이 난다.
“시범 경기는 결정한 거냐?”
“예. 2일 간격으로 총 5차례 1~2이닝 불펜으로 등판하기로 백유홍 감독님과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그게 더 좋을 수도 있겠지.”
주니치 드래건즈의 갑작스런 이적 협상으로 인해 대전 호크스에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주니치로 이적을 해버리겠다고 선언해버리면 대전 호크스는 아무리 많은 이적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소중한 선발 자원 한 명을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유정학 단장, 김태열 팀장, 백유홍 감독까지 집으로 찾아왔을 정도였다.
이적 생각이 전혀 없다는 내 말에 세 사람은 크게 안심해서 돌아갔고, 며칠 뒤 황병익 대표가 집으로 찾아와 이번 사태로 인해 대전 호크스에서 나에 대한 편의를 상당부분 봐주기로 했다는 말을 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실제로도 시범 경기 등판에 있어 백유홍 감독은 두 가지 제안을 나에게 직접 해왔다.
21일 부산 샤크스와 26일 광주 피닉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 각각 3이닝씩 투구를 한 것이냐, 21일부터 격일로 불펜으로 마운드에 올라 최소 1이닝에서 최대 2이닝을 투구할 것이냐를 물었던 거다.
선수기용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고졸 신인 선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고민 끝에 선발로 두 경기 나서는 것보다는 불펜으로 등판하는 것이 시즌 준비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시범경기가 시작되면… 잠시만.”
말을 하던 최상호 코치는 핸드폰이 울리자 미안하다며 재빨리 핸드폰을 받았다.
“앞이라고요? 곧 나가죠.”
최상호 코치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집 뒷마당에 마련되어 있는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 최상호 코치가 돌아왔는데, 그의 곁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박호찬 선배님?”
최상호 코치와 함께 훈련장에 들어선 사람은 놀랍게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호찬이었다.
박호찬에 대해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최상호 코치와 더불어 박호찬이 한국 프로 야구에 기여한 기여도는 어마어마했다.
지금은 순전히 개인 사비를 들여 ‘박호찬 유소년 야구 학교’를 설립 중에 있을 정도로 한국 프로 야구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박호찬이 먼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차지혁 선수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상호 이 친구가 웬만해선 칭찬을 잘 하지 않는데 차지혁 선수에 대해서만큼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니 올 시즌 기대가 커요.”
“영광입니다! 박호찬 선배님처럼 훌륭하신 분과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었습니다.”
마주 손을 잡고 꾸벅 인사를 하자 박호찬이 그렇게 격식 따질 필요 없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인사치레는 나중에 하시고, 우선 녀석 상태부터 좀 봐주시죠.”
“인사치레라니? 난 진심이라고.”
최상호 코치의 말에 박호찬이 그렇게 말하며 날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꽤 유쾌한 남자인 것 같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호찬 선배님처럼 훌륭한 분이 있으셨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메이저리그에서도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하!”
박호찬이 기분 좋게 웃었고, 나 역시 마주 웃었다.
최상호 코치는 더 이상 잡담하지 말고 얼른 훈련이나 하라면서 나와 박호찬을 닦달했다.
“체인지업은 모든 투수들이 다 던질 수 있는 구종이지만, 제대로 구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구종이기도 하지. 나 같은 경우 은퇴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체인지업을 갈고 닦아야만 했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박호찬이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최상호 코치가 특별히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박호찬의 이름을 떠올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명품 체인지업을 먼저 생각한다.
그만큼 박호찬의 체인지업은 굉장한 수준이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확실하게 통했던 구종으로 평가를 받는다.
최상호 코치는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박호찬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들어보니 벌써 꽤 많은 구종을 확실하게 던질 줄 안다고 하던데, 맞나?”
편안하게 말을 하는 박호찬을 향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심 패스트볼, 파워 커브, 컷 패스트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몸이 좋지 않다거나, 컨디션에 이상이 없는 이상 열에 여덟, 아홉은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원하는 코스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 오차 간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사람인 이상 실투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이거 참.”
내 대답에 박호찬이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최상호 코치를 바라봤다.
“저놈이 그렇게 타고난 거지 내가 작정하고 그렇게 만든 것 아니니까 그렇게 볼 것 없습니다.”
최상호 코치의 말에 그제야 박호찬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질감, 동류다.
한국인 최고의 강속구를 자랑했던 박호찬이다.
파워 커브 역시 뛰어났고, 컷 패스트볼 또한 던졌다. 거기에 체인지업과 투심 패스트볼까지.
생각해보니 내가 던지는 구종들이 박호찬이 던졌던 구종들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물론,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의 종류를 따져보면 같은 구종을 던지는 선수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들이 선택하는 변화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박호찬을 따라 구종을 배웠다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박호찬 입장에서는 다르다.
자신과 비슷한 동류의 어린 투수가 이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결코 싫은 느낌일 수가 없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좋아! 이왕이면 다른 것들도 한 번 싹 봐볼까?”
박호찬이 걸치고 있던 자켓을 벗어 한쪽에 내려두며 소매를 걷었다.
대충 체인지업만 보고 가려고 했던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진심이다.
박호찬과 같은 대단한 선수 시절을 지낸 사람이 코칭을 해준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다.
무엇 하나라도 얻을 수 있는 기회고, 그런 기회를 가볍게 넘길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았다.
박호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오늘 그를 꽤 괴롭혀줄 마음이 들었다.
“그만, 그만! 더 이상은 지쳐서 못하겠다.”
오후 3시에 시작된 박호찬과의 일대일 레슨이 어느덧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중간에 저녁을 먹은 걸 제외하면 쉬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박호찬은 내가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부터 시작해서 모든 구종의 장점과 단점을 자신의 생각대로 풀어내며 설명해주었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점들을 알게 됐다.
이를 테면,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을 임의적으로 조절하는 능력, 파워 커브의 각도를 조절해 타자를 속이는 방법, 모든 구종의 무브먼트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줄 수 있는 방법 등 박호찬만의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었다.
덕분에 쉬지 않고 이어지는 질문 세례에 박호찬은 오후 10시가 넘어가자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외치고 말았다.
“상호야, 너 정말 엄청난 놈을 가르치고 있었구나.”
최상호 코치는 박호찬과의 레슨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뒤에서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대투수들로 활약했던 만큼 각기 다른 노하우와 피칭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박호찬의 가르침에 최상호 코치가 끼어들 이유가 없었고, 박호찬 역시 내 몸에 배인 최상호 코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일절 터치하지 않았다.
“고생 했습니다, 선배.”
최상호 코치의 인사에 박호찬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런 멋진 녀석을 가르칠 수 있었던 내가 영광이지. 이제 어디가서 차지혁에게 공 던지는 법 좀 가르쳤다고 말 할 건덕지가 생긴 거잖아?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박호찬을 향해 최상호 코치가 피식 웃었다.
“부탁도 들어줬으니 오늘은 제가 한 잔 사죠.”
“지혁아, 너도 같이 갈래?”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술자리에는 얼마든지 낄 자격이 생겼다.
전지훈련 때 맥주 먹고 기억이 삭제된 경험 때문에 술에 대한 거부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들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야 허락만 해주신다면…….”
“미안하지만, 오늘은 빠져라.”
내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최상호 코치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쳐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약속하며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박호찬과 최상호 코치의 뒷모습만 아쉽게 바라보다 홀로 훈련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항상 모든 훈련은 그날 습득한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 『국내편 - 03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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