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38』 >
『국내편 - 038』
20살이 되어 프로 선수 자격으로 등판했던 주니치 드래건즈와의 첫 경기.
비공식 경기였다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마운드 위에서는 긴장되지 않았었는데, 아이싱을 시작하자 하체가 파르르 떨리며 뒤늦게 온 몸의 힘이 탁 풀려버렸다.
난생 처음 겪는 이상 현상에 몸에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차츰 몸이 안정됐고, 그제야 뒤늦은 긴장감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무리 운동을 하고, 스트레칭과 구단에서 붙여 준 전문 마사지사에게 온 몸 마사지를 받고 난 후에야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버지! 첫 선발 경기 끝냈습니다!”
-고생 많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예! 비공식이었지만, 상대가 어디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다. 어느 팀과 경기를 한 거냐? 국내 팀은 아니었을 테고, 일본 프로 팀이었겠지?
“주니치 드래건즈였어요! 원래 라인업은 1.5군이었는데, 경기 당일 1군 베스트 선발 라인업인거 있죠? 솔직히 약간은 긴장했는데, 막상 마운드에 올라서니까 아버지 말처럼 체질인지 크게 긴장이 되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녀석, 고생 많았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만족스럽게 투구를 한 모양이구나.
“예! 6이닝 1피안타 15탈삼진이요!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저 오늘 161Km의 공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비공식이라 기록에 남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아들 대단하죠?”
-멋지구나. 정말 잘 했다. 지금처럼 자신 있게 네 공을 던지는 건 좋지만, 자만하진 말아라. 어떤 운동선수도 자만하고 실력을 유지할 순 없다. 무엇보다 네 목표가 무엇인지를 항상 되새기며 부상에 유의하도록 해라. 그리고 구속에 대해서는 너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꾸준히 훈련을 해왔기에 가능했겠지만, 아무리 오키나와 날씨가 따뜻하다고 해도 벌써부터 무리해선 절대 안 된다. 알겠지? 혹시라도 구단에서 널 혹사하려고 든다면 그 즉시 나나, 에이전시에 연락을 하도록 해라. 바로 해결을 해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구단에서도 신경써주고 있습니다. 어머니는요?”
-옆에 있다. 바꿔주마.
아버지, 어머니, 지아와 통화를 마치고 나자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상쾌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자부심과 성취감이 들기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선발 등판을 했을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기록에는 포함되지도 않는 비공식 친선경기 따위에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들뜬 기분을 다른 선배들에게는 보여줄 수가 없었다.
6이닝까지 완벽하게 주니치 드래건즈의 타선을 막은 나와는 다르게 다른 투수들이 난타를 당하며 결국 7:1이라는 큰 점수 차이로 패배를 했기 때문이다.
마츠 타카야가 내려간 주니치 드래건즈의 불펜은 여전히 강했지만, 내가 내려온 대전 호크스의 불펜은 주니치 드래건즈의 타선을 막아낼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더그아웃에서 난타를 당하는 불펜진을 보며 느낀 감정은 단 하나였다.
완투.
야구는 절대 혼자 할 수 없지만, 마운드는 혼자 지킬 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정규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대전 호크스의 불펜진이 오늘과 같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매 선발 경기마다 완투를 목표로 공을 던져야 할지도 몰랐다.
“체력이 관건이야.”
완투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력이 핵심이다.
오랜 시간 마운드에 서서 많은 공을 던지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더불어 이닝당 투구수도 줄여야만 한다.
주니치 드래건즈를 상대로 6이닝 동안 71개의 공을 던졌다.
이닝당 평균 12개의 공을 던진 셈이다.
남은 7, 8, 9이닝을 던졌다 가정하면 36개가 늘어나니 9이닝 동안 107개가 된다.
많은 공은 아니다. 그러나 투수의 투구수만큼 예상이 힘든 것도 없다.
1이닝 동안 5개를 던질 수도 있고, 20개가 넘는 공을 던질 수도 있는 게 야구다.
그렇다면 투구수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사람들은 말한다.
삼진을 잡는 투수보다 맞춰 잡는 투수의 투구수가 훨씬 더 적다고.
과연 그럴까? 말 그대로만 따진다면 틀린 소리는 아니다.
삼진을 잡기 위해서는 3개의 공을 던져야 하지만, 맞춰 잡는 투수는 1구만으로도 타자를 범타 처리시켜 아웃 카운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맞춰 잡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투수가 정교한 컨트롤과 타자와의 수싸움을 통해 의도적으로 땅볼이나, 뜬공을 유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땅볼이나 뜬공이 범타 처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는게 투수이기도 했다.
이걸 두고 ‘BABIP’이라고 하는데, 이는 간략하게 말해서 A급 투수든, B급 투수든 타자가 인플레이시킨 타구에 대해서는 안타나 범타로 통제하는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소리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나는 100% 동의를 하지는 않는다.
인플레이 된 타구라고 모두 같은 타구는 아니니까.
예를 들어 구위가 묵직한 투수의 땅볼과 그렇지 못한 투수의 땅볼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인플레이가 된 타구가 안타가 되느냐, 범타가 되는냐는 투수의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비, 구장, 운, 타자의 능력까지 복합적인 문제가 끼어들게 된다.
에러를 거의 범하지 않는 내야수라면 대부분의 땅볼을 아웃처리 할 거다.
구장의 상태가 수비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면 땅볼이든, 뜬공이든 수비수는 수비에만 전념하게 되니 그 역시 아웃 카운트를 늘리는데 무리가 없게 된다.
운 또한 마찬가지고, 같은 땅볼이라 하더라도 발이 느린 타자라면 무난하게 아웃 카운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모든 경우가 반대라면?
리그 최하위의 수비 실력으로 에러를 밥 먹듯이 하는 수비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수비수들이 항상 불안해하는 구장, 치는 족족 빗맞은 타구, 평범한 땅볼도 내야 안타로 만들어 내는 빠른 발의 타자 등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보니 단순하게 맞춰 잡는 투구만으로 투구수를 줄인다는 말은 결코 맞지 않는 소리다.
투구수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최소한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것뿐이다. 오히려, 확실하게 타자를 아웃시킬 수 있는 삼진이 어설프게 맞춰 잡는 투구보다는 투구수를 줄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어떤 투수도 삼진만으로 타자를 잡을 순 없다.
결과적으로 투수는 적당한 삼진과 맞춰 잡는 피칭 스타일로 투구수를 줄여야 하는데, 그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
스트라이크 존을 자유자재로 공략할 수 있는 공격적인 피칭 능력.
이거면 된다.
흔한 말로 ‘볼질’을 하지 않으면 된다.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가장 공격적인 포지션은 타자가 아닌 투수다.
타자는 안타를 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1루로 걸어 나갈 수 있다.
소극적으로 볼넷을 기다린다 해서 타자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소극적으로 볼을 남발하여 볼넷을 주는 투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는다.
같은 팀의 야수들조차 인상을 찌푸린다. 그렇기에 투수는 공격적으로 투구를 해야 하고, 단순히 스트라이크 존에 억지로 공을 쑤셔 넣는 것이 아닌 지능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투수에게 있어 커맨드와 제구력이 중요한 거다.
1cm의 간격조차 자유자재로 공략할 수 있는 제구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원하는 곳에 과감하게 공을 던질 수 있는 커맨드는 투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이 점을 강조했었다.
볼넷을 줄 바에야 차라리 안타를 맞아라.
맞는 말이다.
볼넷은 100% 타자를 출루시키지만, 안타의 확률은 그보다 훨씬 적다.
잘 맞은 타구가 수비수에게 잡힐 수도 있으니까.
제구력과 커맨드만큼은 부족하지 않다 여기지만,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아니, 실전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완성시켜야 했다.
삼진을 잡는 것도 좋지만, 우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만 했다. 더불어 조금 더 과감하게 공격적으로 공을 던질 필요도 있었다.
주니치 드래건즈와의 친선경기로 얻은 것이 의외로 많았다.
내 공이 프로에서도 확실하게 통한다는 사실, 내가 전력으로 던지는 공이 100마일을 찍었다는 점, 앞으로 내가 어떤 능력을 더 집중적으로 갈고 닦아야 할지 등등 의외의 수확들이 많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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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전지훈련 속에서도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체인지업과 투심 패스트볼의 제구력이 조금씩이지만 손에 익는 느낌이었고, 기존의 구종들도 더욱더 정교하게 컨트롤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체력 부분에 있어서도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강도를 높여갔고, 프론트에 부탁해서 매일 같이 국내 타자들의 자료를 분석하며 데이터 야구에도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물론, 데이터 야구를 무조건 신뢰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이해하며 적용을 할 뿐이었다.
반복되는 훈련 속에서도 친선경기는 계속해서 잡혔고, 백유홍 감독과의 면담을 통해서 선발이 아닌 중간 계투조로 마운드에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선발 투수인 내가 중간 계투로 나선 건 나와 백유홍 감독의 생각이 맞았기 때문이다.
위기관리 능력의 확인.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편안하게 투구를 하는 것과 단타만으로도 실점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투구를 할 때의 피칭 능력을 백유홍 감독은 확인하고 싶었고, 나 역시 실점이라는 부담감 속에서 얼마나 공격적으로 피칭을 할 수 있을지 나 스스로를 점검해보고 싶었다.
그 외에도 도루 능력이 뛰어난 주자를 두고 마운드에 오르거나, 타자와의 수 싸움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만들어 내는 등 친선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꽤 많은 것들을 시험하고, 확인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부족하리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전지훈련이 모두 끝나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귀국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자 황병익 대표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놀라운 소식을 전해줬다.
“예? 그게 무슨…….”
너무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솔직히 저도 꽤 당혹스럽습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고 있는 황병익 대표의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어이없어 했을지 눈에 선명히 그려졌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전지훈련 기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하고 다닌 겁니까?”
황병익 대표의 물음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이런 물음을 건네는 대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직 시즌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대전 호크스 쪽으로 이적에 관한 통보가 전해졌다.
동시에 YJ에이전시에는 이적에 대한 진지한 협상 테이블을 마련해보자는 제의가 왔다.
이적 협상을 하고 싶다는 팀은 놀랍게도 주니치 드래건즈였다.
친선경기 한 경기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적 협상 제의가 들어왔으니 대전 호크스, YJ에이전시, 그리고 나까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자그마치 350억이다.
그 큰 돈을 주니치 드래건즈는 동네 껌값 지불하듯 대전 호크스에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바이아웃 조항에 의해 대전 호크스로서는 내가 주니치 드래건즈와 협상을 하게 되어 계약이 성사되면 350억에 군소리 없이 이적 동의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랬군요.”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바라보는 황병익 대표와 아버지를 바라보며 공항에 내리기가 무섭게 백유홍 감독이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다급하게 구단으로 돌아갔던 모습을 이야기해주었다.
“우선 주니치 드래건즈 측에서는 무조건 대전 호크스에서 받는 연봉과 보너스의 3배를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최고 1억 엔까지는 협상이 가능하다는 뜻도 살짝 비췄습니다.”
1억 엔이 얼마인지 제대로 못 알아듣자 황병익 대표가 웃으며 대답했다.
“10억이 조금 안 되는 금액입니다.”
“연봉으로 10억을 제시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놀라서 묻자 황병익 대표가 뭘 그 정도로 놀라냐는 듯 대꾸했다.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을 했다면 최소 그 3배 이상은 받았을 겁니다. 고작 1억 엔 정도에 놀란다면 차지혁 선수는 자신의 가치가 시장에서 얼마나 높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뜻 밖에 되질 않습니다.”
잊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큰 돈을 포기했는지도 다시 깨달았다.
“대전 호크스 분위기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황병익 대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신이 없을 겁니다. 차지혁 선수가 동의만 한다면 시즌을 코앞에 두고 주니치 드래건즈에 빼앗기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3월 15일이 이적 마감일이니 그 전까지 대전 호크스는 차지혁 선수를 잡을 것인지, 새로운 대체자를 찾을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될 겁니다. 물론, 그 이전에 차지혁 선수에게 확실하게 의중을 물어 올 겁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빠듯하니 말입니다.”
“주니치 드래건즈의 협상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구태여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아직도 대전 호크스의 팀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했는데, 돈 때문에 주니치 드래건즈로 이적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엇보다 애초부터 국내 잔류가 목적이었으니 일본 진출 따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황병익 대표는 예상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전시로서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말을 했을 뿐이라는 태도였다.
“쓸 때 없는 이야기로 대화가 길어졌구나. 밥 먹도록 하자.”
아버지의 말에 나와 황병익 대표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국내편 - 03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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