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36』 >
『국내편 - 036』
161Km. 100mph.
흔히들 말하는 100마일은 상징적인 숫자다.
세상의 모든 투수들이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싶은 강속구의 지표라 불러도 좋았다.
물론, 100마일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지는 괴물과도 같은 투수들도 있지만, 100마일을 던질 줄 아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파이어볼러, 강속구 투수라 부르는 것이다.
“뭐? 161Km라고?”
좌익수를 보고 있는 장근범 선배가 나를 괴물처럼 쳐다봤다.
“야! 국내 선수 중에 160Km 찍은 투수 있냐?”
“당연하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있잖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호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야구 선수다.
94년 LA 다저스에 입단을 하면서 한국인 최초, 동양인으로는 2번째로 메이저리거가 됐다.
통산 124승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사람들 뇌리에 기억되는 박호찬은 불 같은 강속구 투수라는 점이다.
공식적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161Km를 던졌다.
진정한 100마일의 투수인 셈이다.
“호찬 선배님은 논외 대상이고! 국내 활동하는 선수 중 160Km라도 찍은 투수 있냐고!”
대답은 없었다.
선수들끼리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없습니다. 국내 최고 기록은 159Km입니다. 물론, 비공식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의 말에 그제야 모든 선수들이 나를 바라봤다.
“우리 호크스에 국내 최초의 토종 100마일 강속구 투수가 입단을 한 거야?”
“거기다가 좌완이지.”
“나이도 이제 갓 20살이니 2~3년 더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저건 괴물이군!”
“차지혁! 너 똑바로 대답해라! 100마일 언제부터 던졌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다 알고 있는 거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1라운드 지명 후보로 불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하긴! 해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 후보들 스팩만 봐도 저것들이 인간이 맞나 싶었으니, 지혁이 저놈도 결국은 괴물이라는 뜻이겠지.”
“이거 벌써부터 올 시즌 대한민국이 떠들썩 하겠는걸?”
“대훈 선배, 방금 100마일 공 받을 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알고도 못 친다? 아니, 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뭐 그런 느낌이더군.”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알고도 못 친다니… 이건 사기 아냐?”
“메이저리그에서는 100마일 넘는 공도 홈런으로 치던데요?”
“그거야 같은 괴물들이니까 그렇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밥 먹고 야구만 하는 놈이 알고도 못 치는 공이 어딨어? 아무리 빠른 공도 눈에 익으면 마음 놓고 칠 수 있어야 프로 자격이 있지!”
“상천 선배도 참!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더그아웃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그 원인 제공자가 당연히 나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너무 오버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럴 이유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퍼엉!
“스윙! 아웃!”
높은 포심 패스트볼에 헛방망이질을 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타자.
“마츠 타카야 저 새끼 자극 좀 받았나 보다. 156Km 찍었다.”
마운드 위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공을 던지는 마츠 타카야를 상대로 대전 호크스 타자들은 제대로 된 타격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기 감각이 완전히 상실한 타자들에게 마츠 타카야의 빠른 포심 패스트볼과 고속 슬라이더는 지옥 그 자체였다.
타석이 한 바퀴 돈다 하더라도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스러웠다.
말 그대로 대전 호크스 타자들은 마츠 타카야에게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경기 감각이 없다 하더라도 이건 자존심에 막대한 타격을 받는 일이고, 창피한 일이다.
더욱이 한일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얼굴 들고 다니기도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한 줄기 빛과 희망이 생겨난 거다.
“156Km이 뭐 대단하냐? 우리 막내는 161Km도 찍어줬는데! 막내야, 다음에는 적당하게 160Km짜리로 깔끔하게 세 타자 연속 삼진 가자. 알겠지?”
던지는 거야 어렵지 않다. 다만, 제구가 문제다.
선배의 말처럼 프로 자격을 갖춘 타자라면 제 아무리 빠른 공도 눈에 익으면 홈런으로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
지금처럼 원하는 코스로 예리하게 찔러 넣을 수 없는 160Km의 공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따악!
빨랫줄 같은 타구가 1루 선상을 살짝 벗어났다.
“태훈이 진짜 예전의 괴물 모드로 들어가려나 본데? 경기 감각도 없는 놈이 벌써 몇 4개나 마츠 타카야 공을 쉬지 않고 걷어내네.”
“태훈이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만 돌아간다면야 마츠 타카야가 상대라 하더라도 꿀릴 거 없지.”
정현우 선배의 말에 주변 선수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천부적인 타격 재능과 힘을 갖고 있는 장태훈은 기를 살려줘야 제 능력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고교 시스템과는 맞지 않아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다가 프로 데뷔와 동시에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에 빠지면서 1군 무대를 밟았는데, 감독이나 코치들도 딱히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의외로 신인 치고는 타격이 괜찮아 감독과 코치들이 잘 한다고 칭찬을 해주기 시작하자 더욱더 방망이가 불을 뿜어대며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시작한 거였다.
못한다고 다그쳐야 단점을 극복하고 잘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무조건 잘한다고 칭찬을 해줘야 더욱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장태훈은 후자였다.
감독, 코치, 구단과 팬까지 잘한다고 하니 장태훈이 국내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거다.
따악!
몸 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공을 장태훈은 힘으로 밀어내 기어이 안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후속 타자들이 선풍기질로 무기력하게 물러나면서 이닝이 종료되었다.
2회 말, 주니치 드래건즈의 타선은 4번 야마구치 타카시, 5번 카자마 유야, 6번 사와타리 준타로 이어지는 주니치 드래건즈의 핵타선이었다.
3번이나 홈런왕에 올랐던 신카이 진을 3번으로 올려 보낸 4번 야마구치 타카시는 현 일본 프로야구 홈런왕으로 올 시즌도 홈런왕 후보 0순위라 불리고 있었다.
187cm 89kg의 탄탄한 체격으로 작년 시즌 46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3년 연속 40홈런의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쇄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무릎을 걸치고 지나가는 몸 쪽 포심 패스트볼에 야마구치 타카시가 타석에서 벗어나며 허공에 방망이질을 했다.
2스트라이크 2볼의 카운트가 될 때까지 야마구치 타카시는 단 한 번도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몸 쪽 높낮이를 공략하는 스트라이크에 배트가 나와봐야 범타 처리가 될 것이기에 참았고, 바깥쪽 빠지는 유인구에는 한 차례만 움찔 거릴 정도로 선구안이 뛰어났다.
아직 볼 하나의 여유가 있지만, 절대 허투루 공을 던질 수가 없다.
여기서 어정쩡하게 유인구를 던졌다가 볼이 선언되면 풀 카운트 승부에 들어가는데, 투수 입장에서 선구안이 뛰어난 타자를 상대로 풀 카운트 승부를 한다는 건 상당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타석에 들어선 야마구치 타카시는 배트를 조금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풀 스윙이 아닌 맞춰서 타격을 하겠다는 의미다.
팀의 4번 타자, 거기에 작년 홈런왕에 3년 연속 40개의 홈런을 터트린 거포형 타자의 선택이라고 보기엔 다소 의외였다.
흔한 말로 홈런 타자는 삼진을 당하더라도 풀 스윙을 한다는 말이 있다.
자존심 문제다.
그런데 야마구치 타카시는 자존심대신 실리를 택했다.
팀을 위한 타자, 감독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타자는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 홈런 타자의 무서운 점은 컨택에 집중해서 타격을 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파워가 좋기 때문에 장타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포수 미트가 타자 몸 쪽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몸 쪽으로 파고들어 떨어지는 파워 커브를 요구한 황대훈 선배였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구만 제대로 잡혀 있는 투수라면 타자의 배트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2스트라이크라는 카운터는 타자의 입장에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니 포심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 떨어지는 파워 커브는 아주 훌륭한 미끼다.
쐐애애액!
몸 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빠른 속구에 야마구치 타카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다수의 타자들이 그렇듯 그 역시 몸 쪽 공에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결정구가 몸 쪽으로 들어오니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는 거다.
딱!
가만히 서서 루킹 삼진을 당할 수 없다는 듯 야마구치 타카시가 배트가 나왔다.
풀 스윙을 고집했다면 홈 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완만하게 꺾이는 커브에 속절없이 삼진을 당하고 말았겠지만, 힘을 빼고 컨택에만 집중했기 때문인지 아슬아슬하게 배트 아랫부분이 공 위쪽으로 스치듯 훑었다.
야마구치 타카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주심의 목소리에 고개가 벼락처럼 뒤로 돌아갔다.
“타자 아웃!”
분명 배트에 맞았다. 파울이다.
이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야마구치 타카시는 심판에게 어필을 하려고 배트를 들다가 바닥에 양쪽 무릎을 붙이고 가랑이 사이에 끼어 있는 포수 미트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야구공을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파울 팁(foul tip).
타자의 배트에 스친 공이 파울로 인정이 되지만, 그대로 포수 미트로 들어가면 스트라이크로 인정되는 볼 인 플레이로 2스트라이크였던 야마구치 타카시는 그대로 삼진 처리가 된다.
“나이스! 캐처!”
여기저기서 황대훈 선배의 멋진 포구 능력에 칭찬을 했다.
나 역시 가볍게 글러브를 두드리며 파울이 되어버렸을 공을 잡아준 황대훈 선배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4번 야마구치 타카시가 떠난 자리에 5번 카자마 유야가 들어섰다.
주니치 드래건즈의 주전 포수이면서 한 방이 있는 카자마 유야는 포수들이 그렇듯 전형적인 게스 히터(Guess Hitter)다.
미리 투수가 어떤 볼을 던질지를 예측하고 거기에 맞춰서 타격을 하는 카자마 유야는 투수 리드가 뛰어난 포수인 만큼 투수와의 수 싸움에 능했다.
“수 싸움에는 정말 귀신 같은 놈이라 솔직히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경기 전 황대훈 선배가 카자마 유야에 대해 한 말이다.
수 싸움을 하는 타자를 상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딱 하나다.
구위다.
예측해도 쉽게 칠 수 없을 정도로 구위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수 싸움을 걸었다가는 역으로 잡아먹힐 확률이 컸기에 단순무식하게 구위로 승부를 보는 게 가장 확실했다.
쇄애애액!
퍼- 엉!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몸 쪽 높은 포심 패스트볼에 카자마 유야는 움찔 거렸다.
제 아무리 투수의 공을 받는 포수라 하더라도 타석에 섰을 때, 몸 쪽으로 찔러 들어오는 빠른 포심 패스트볼에는 겁을 먹기 마련이다.
우선 1스트라이크를 잡았으니 투수는 유리해지고, 타자는 불리해진다.
투수와 타자는 초구 싸움이 이래서 중요하다.
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으면 투수는 편안하게 다음 투구를 할 수 있고, 타자는 머릿속에 복잡해진다.
게스 히터인 카자마 유야와 같은 경우엔 더욱더 그렇다.
딱!
파워 커브를 노리고 있었지만, 코스가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로 낮았기에 파울이 되며 타구가 홈플레이트를 맞고 뒤로 튕겨져 나가버렸다.
카자마 유야는 볼을 건드렸다는 사실에 인상을 팍팍 쓰며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이제는 2스트라이크 노볼 상황.
투수에게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고, 타자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초조한 상황이다.
쇄애애액!
퍼- 엉!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한 가운데를 꽂아버린 포심 패스트볼에 카자마 유야는 기가 막히다는 듯 날 노려보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한 가운데 포심 패스트볼을 우겨 넣을 투수는 그리 많지 않다.
포수인 카자마 유야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과감한 내 투구에 혀를 내두르며 돌아선 거다.
따악!
6번 타자 사와타리 준타는 초구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파워 커브를 무리하게 치려다 2루수 땅볼로 아웃처리가 됐다.
1회에 이어 2회도 삼자범퇴로 주니치 드래건즈의 공격을 깔끔하게 막아내자 더그아웃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듯 했지만, 마츠 타카야의 피칭에 완전히 눌려버린 대전 호크스의 타선은 맥없이 아웃이 되며 이닝이 종료되고 말았다.
< 『국내편 - 03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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