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35』 >
『국내편 - 035』
마운드 위에 서자 의외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살짝 긴장되었던 몸도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고,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황대훈 선배도 생각 외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마운드 위에 섰을 때도 그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운드 위에만 서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면서 편안하게 내 공을 던질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아버지는 타고난 투수 체질이라고 했고, 최상호 코치도 일부 특정 선수들에게만 내려진 축복이라고 했다.
체질이든, 축복이든 분명한 한 가지는 마운드 위에 서서 공을 던질 때만큼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공을 던질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볍게 연습투구를 마치고 주심의 외침에 주니치 드래건즈의 1번 타자가 타석으로 들어섰다.
주니치 드래건즈의 2루수 키타카와 토나메는 작년 시즌 부동의 1번 타자로 활약했을 정도로 출루율이 높았다.
타율 역시 3할을 넘겼고, 1번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홈런도 13개나 터트릴 정도로 파워도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발도 빨라 루상에 나가면 도루를 항상 신경 써야 하는 선수였다.
타석에 자리를 잡고 선 키타카와 토나메는 전형적인 교타자로 배트를 짧게 잡고 오픈 스탠스를 밟고 서 있었다.
황대훈 선배는 초구로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해왔다.
다른 때라면 그대로 따랐을 리드였지만, 1회 정현우 선배를 상대로 마츠 타카야가 1, 2구를 모두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집어넣었던 모습이 떠올라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힘껏 초구를 뿌렸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쇄애애애액!
퍼- 엉!
포수 미트가 찢어질 것 같은 파열음과 함께 주심의 스트라이크 선언이 이어졌다.
키타카와 토나메는 한 가운데로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에 눈을 찌푸리며 날 바라봤고, 공을 받은 황대훈 선배 역시도 내게 공을 돌려주기 전에 날 빤히 바라봤다.
자신의 사인대로 공이 날아오지 않았단 사실에 의문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두 번째 공 역시 황대훈 선배는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지만, 내 선택은 한 가운데 직구였다.
퍼- 엉!
“스트라이크!”
주심의 스트라이크 선언에 황대훈 선배가 타임을 요청하곤 마운드로 올라왔다.
“제구가 안 되는 거냐?”
연습 투구 때만 하더라도 사인대로 던졌던 나였으니 황대훈 선배의 걱정스런 물음은 당연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모두 한 가운데로 공이 몰렸으니 포수 입장에선 당연히 제구력이 흔들리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아주 잘 됩니다.”
“그런데 왜 자꾸 공이 가운데로 몰리는… 너 설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대훈 선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투수의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모르진 않겠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투구를 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치기어린 생각으로 공을 던지지 마라. 투수는 절대 개인적인 감정으로 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팀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섣부르게 투구하지 마라. 똑똑한 놈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네.”
길게 답하지 않았고, 황대훈 선배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포수 자리로 돌아갔다.
황대훈 선배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치기어린 마음으로 마운드에 서서도 안 되고, 개인적인 욕심만으로 공을 던져서도 안 된다.
가슴은 그 누구보다 뜨거워도 머리는 냉정해야 한다는 말은 학창 시절 누누이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황대훈 선배가 세 번째로 요구한 공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이었다.
유인구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빠지는 자리라 선구안이 좋은 타자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을 공이었다.
그럼에도 황대훈 선배가 이런 공을 요구한 건 자신의 사인대로 내가 따라줄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내가 황대훈 선배였다면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낮은 파워 커브를 요구했을 거다.
아쉽지만 요구하는 대로 공을 던져줬고, 예상대로 키타카와 토나메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빠지는 볼을 지켜보기만 했다.
“좋아! 좋아!”
황대훈 선배는 일어나서 나를 향해 연신 좋다고 외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네 번째로 요구한 공은 의외로 빠른 포심 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 존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몸 쪽 높은 코스였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한 상태라 판정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원하는 대로 공을 던졌다.
퍼엉!
황대훈 선배는 공을 잡은 자세 그래도 멈춰서 주심의 판정을 기다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약간 타이밍이 늦었지만, 주심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다.
키타카와 토나메는 타석에 서서 가만히 주심을 바라보다 이내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판정에 살짝 불만이 있다는 제스처라는 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 인해 심판이 어떤 식으로 판정을 내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투수인 내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는 않았다.
2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와타베 시마로 주니치 드래건즈의 3루수였다.
수비 실력보다는 타격 능력이 뛰어나서 프로 12년 생활 동안 8년 연속으로 3할을 친 기록을 갖고 있었다.
약간은 통통한 체격으로 파워도 갖춰 최고 32개까지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었다.
통통한 체력과 다르게 날카로운 인상의 와타베 시마는 날 잡아 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몸 쪽 낮은 코스.’
황대훈 선배의 미트가 와타베 시마의 몸 쪽 낮은 쪽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 있었다.
몸 쪽 높은 공을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낮은 쪽을 먼저 확인하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나 역시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해야 했기에 곧바로 공을 던졌다.
쇄애애액!
퍼- 엉!
“볼.”
약간 아쉬운 느낌이 들었지만, 심판의 성향에 따라 판정이 달라질 수 있는 코스였기에 황대훈 선배와 나는 깨끗하게 받아들였다.
다음으로는 바깥쪽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했고, 그 다음은 높은 코스를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2스트라이크 1볼로 주심의 성향이 몸은 짜고, 바깥쪽은 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확인이 끝나자 황대훈 선배는 곧바로 와타베 시마의 몸 쪽 높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해왔다.
방금 전 1번 타자를 루킹 삼진으로 만들어 버린 코스로 주심의 판정에 변화가 생겼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배트를 꽉 조여 쥐고 서 있는 와타베 시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거침없이 공을 던졌다.
쇄애애액!
부- 웅!
“스윙! 아웃!”
와타베 시마는 방금 전 1번 타자인 키타카와 토나메가 삼진을 당한 코스라는 걸 알곤 힘차게 배트를 돌렸지만, 스윙 스피드보다 볼이 포수 미트로 파고 들어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타자 연속 삼진으로 기세가 오르자 내야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2루 수비를 맡고 있는 정현우 선배의 목소리가 제일 요란하면서도 시끄러웠다.
주니치 드래건즈의 3번 타자는 1루수 신카이 진으로 14년차 베테랑이다.
3번이나 홈런왕을 차지한 적이 있을 정도로 팀의 간판 타자인 신카이 진은 197cm의 큰 키에 두툼한 살집까지 더해져 타석이 꽉 차 보였다.
보통 홈런을 잘 치는 타자들은 어퍼스윙 궤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타자인 신카이 진의 오른쪽 팔꿈치가 어깨보다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전형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퍼 올리는 어퍼스윙 궤적을 가지고 있는 타자임이 분명했다.
황대훈 선배의 1구 리드는 타자 무릎으로 파고드는 낮은 볼 스트라이크였다.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 리드였지만, 우선은 황대훈 선배가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졌다.
따악!
초구부터 과감하게 풀스윙으로 배트를 휘두른 신카이 진은 큼지막한 타구가 3루 선상을 살짝 벗어나는 걸 확인하고는 날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해보자 이거지?”
신카이 진을 바라보며 나 역시 웃어줬다.
내 웃음에 신카이 진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날 바라봤고, 나는 여전히 실실 쪼개며 로진백을 툭툭 던지듯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다 피처플레이트 뒤에 내려놨다.
잡아먹을 듯 날 노려보는 신카이 진의 시선이 뜨거웠다.
배트를 꽉 비틀어 쥔 두 손이 작정하고 배트를 휘두를 것처럼 보였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건방진 루키 꼬맹이의 공을 펜스 밖으로 날려버리겠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던지고 싶은 공은 신카이 진의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위협구다.
타자를 흥분시키면 유리한 건 투수다.
타자를 흥분시키기 가장 좋은 공은 위협구고, 흥분한 타자만큼 요리하기 쉬운 상대가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대훈 선배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빠지는 유인구를 요구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포수와의 궁합이 썩 좋은 것 같지 않아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바깥쪽 유인구를 던졌고, 신카이 진은 꼼짝도 하지 않고 날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세 번째 공은 높은 쪽 스트라이크 존을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
대다수의 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홈런을 만들어내기도 쉽고,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기도 쉽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맞췄을 때의 이야기고 투수의 구위를 이겨냈을 때의 일이다.
보통 빠른 강속구를 구사하는 투수들이 높은 볼로 타자들의 헛스윙을 자주 만들어내기도 하니 전형적인 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작정하고 던져본다.
기세가 나보다 좋은 신카이 진이다.
거기에 주니치 드래건즈의 중심 타선을 이루고 있는 간판 타자였으니 그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강속구로 내가 절대 만만한 투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제구가 조금 벗어나더라도 모두가 놀랄 피칭이 필요했다.
해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 후보의 위력적인 피칭!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와인드업을 한 후, 처음으로 제구력보다는 구속을 위주로 공을 던졌다.
쇄애애애액-!
후- 웅!
퍼- 엉!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파열음이 그라운드 전체로 퍼져나갔다.
신카이 진은 자신의 배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포수 미트에 박혀버리는 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다 급히 타석에서 벗어나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구속이 얼마나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니치 측 더그아웃이 꽤나 소란스러웠다.
더불어 우리 팀 더그아웃에서도 코치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감독과 어떤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나왔을까?
처음으로 시합 중에 제구력을 배제한 상태로 공을 던졌다.
포수가 던져주는 공을 받아들고 신카이 진을 바라보니 내 예상과는 다르게 여전히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배트를 길게 잡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1구만으로 신카이 진과 같은 타자의 기를 죽이는 일은 어려운 듯 싶었다.
황대훈 선배가 미트 아래로 내린 오른손의 검지를 한 번 보여주곤 그대로 미트 위로 올려버렸다.
한 가운데 직구 사인.
글러브에 가려진 내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황대훈 선배도 느끼고 있는 거다.
나와 신카이 진의 기 싸움을.
이번에도 전력으로 던진다.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포심 패스트볼!
투수는 타자라는 맹수를 잡아먹는 사냥꾼이다.
사냥꾼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맹수보다 흉포하고! 맹수보다 과감하고! 맹수보다 집요하게!
피처플레이트를 힘껏 박차며 공을 뿌렸다.
온 몸의 힘이 손 끝에 모이며 그대로 실밥을 채며 공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쐐애애애애액-!
퍼- 어엉!
신카이 진이 어쩌지도 못하고 멍하니 포수 미트만 바라봤다.
“스, 스트라이크! 타자 아웃!”
주심이 힘차게 제스처를 취하며 아웃을 선언했고, 위풍당당하게 마운드에서 내려와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투수에게 환호를 해줘야 할 더그아웃 분위기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황경수 배터리 코치의 손에 들려 있는 스피드 건에 찍혀 있는 숫자 때문이었다.
161Km.
< 『국내편 - 03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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