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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32화 (32/221)

< 『국내편 - 032』 >

『국내편 - 032』

2026년. 20살.

본격적인 프로 선수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하얗고 딱딱한 야구공, 그것도 경식구를 내던지고 노는 것이었다.

글러브와 배트는 항상 머리맡에 있었고, 온통 야구 관련 서적과 잡지, TV와 영화, 심지어 입고 다닌 옷까지 모든 것이 야구로 도배가 되어 있는 성장기였다.

놀이를 빙자한 훈련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아버지는 어르고 달래며 날 운동시켰고, 어느 순간부터는 습관으로 굳어져 당연하다는 듯 살았다.

그렇게 나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되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대학생활, 재수생활, 혹은 갓 사회생활이나, 군입대를 준비할 시기에 나는 연봉 1억을 받으며 습관처럼 해오던 운동과 훈련을 하며 여전히 야구할 준비를 했다.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아버지가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힘들면 야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버지의 욕심으로 인해 야구를 시작하게 만들었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그만둬도 괜찮다고.

그때 든 생각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그렇게 말해줬다면 그대로 아버지의 말을 따랐을 텐데 였다.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버린 운동을 하루아침에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더 해보겠다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열심히 하라며 날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중학 선수로 이름을 날리지 못하면 그만 두는 게 낫다.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그만 둬라.”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야구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라고.

정말 죽을 각오로 운동을 하지 않을 거라면 지금이 포기할 기회라고.

여기서 더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니 확실하게 각오를 하라고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이 날 부담스럽게 했다.

명성 중학교에 입학을 하는 바람에 서울에서 전주로 이사를 왔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만둔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때부터 정말 죽을 각오로 운동을 했던 것 같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는 거냐?”

국내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 등록을 하기 전날,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다.

아무리 역대급 고교 투수라는 찬사를 받고 있어도 프로 무대는 다르다, 웬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메이저리그로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에 난 절대 후회하는 선택이 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해주었다.

“네가 내 아들이라 너무 자랑스럽다. 그리고 지금까지 불만 한 번 없이 잘 따라줘서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하다. 그리고 너무 많이 널 사랑한다, 지혁아.”

전지훈련을 떠나려고 짐을 들고 문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는 날 끌어안고 그렇게 말하며 울먹이셨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야구 선수로 키웠을 아버지의 무거운 마음의 짐이 어땠을지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가장 불안하고, 초조했을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들의 인생을 망치면 어쩌나? 이런 걱정을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 계셨을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아침마다 함께 운동을 하셨던 것 같다.

“더욱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저도 사랑합니다, 아버지.”

처음 해본 사랑한다는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고, 얼굴이 뜨거워져서 서둘러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현관문을 나와 미리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선수단 모임 장소로 향했다.

대전 호크스의 2026년 전지훈련 캠프는 아시아의 하와이라 불리는 일본 오키나와였다.

1월 15일에 오키나와로 이동했다.

한국이라면 한창 추운 겨울이었지만, 오키나와의 날씨는 상대적으로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다 느껴봐야 영상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고, 한 낮에는 영상 25도 이상도 올라갔기에 훈련을 하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체인지업?”

“예.”

1월 15일부터 3월 6일까지 예정되어 있는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 나는 어떻게든 두 가지의 구종을 마스터할 작정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체인지업으로 송진욱 코치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굉장히 잘 던졌던 투수로 유명하다.

송진욱 코치를 떠올리면 1999년 완벽하게 제구가 되는 슬라이더만으로 리그를 제패했던 경력이 있는 만큼 슬라이더에 비중을 더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슬라이더가 아닌 체인지업을 먼저 선택한 이유는 슬라이더보다 부상의 위험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슬라이더의 경우 많이 던질수록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구종이었기에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최상호 코치의 조언대로 체인지업으로 변경을 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마스터하고자 하는 구종은 투심 패스트볼이다.

우타자를 상대로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거나, 좌타자를 상대로 몸 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구종이 없는 나에게 투심 패스트볼은 가장 효과적인 구종이다.

무엇보다 패스트볼 계열인 투심 패스트볼은 제구력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엄청난 위력을 떨칠 수가 있었다.

투심 패스트볼을 가르쳐줄 사람은 장철민 투수코치였다.

올해 64살인 장철민 투수코치는 현역 시절 엄청난 무브먼트를 자랑하는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로 유명했다.

제대로 긁히는 날에는 마구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타자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투심 패스트볼을 뿌려댔던 장철민 투수였기에 그에게 배울 수 있다는 건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훈련이 이뤄진다면 올해 내가 프로 무대에서 던질 수 있는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 파워 커브, 컷 패스트볼에 체인지업과 투심 패스트볼까지 더해져 총 5가지가 된다.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을 중심으로 투심 패스트볼과 컷 패스트볼로 좌우를 유린하고, 파워 커브와 체인지업으로 타자의 타이밍까지 빼앗는다면 프로 리그에서도 충분히 원하는 성적을 일궈낼 수 있을 것 같았다.

2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두 가지의 구종을 마스터하고, 기존의 구종들을 더욱 갈고 닦기란 빠듯하겠지만, 많은 돈을 받는 프로 선수가 된 만큼 노력을 게을리 할 순 없다 여겼기에 오키나와 전지훈련 동안 난 조금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 처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팀 선배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훈련이 끝나면 친목도모라는 그럴싸한 변명을 앞세워 휴식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몸에 피로가 쌓여갔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해 신경만 날카로워졌다.

“막내야, 거기 빨리 좀 해놓고 방 정리 좀 부탁한다. 그리고 1시간 후에 현우 방에서 모이는 거 잊지 말고. 미리미리 가서 준비 좀 해놔라. 그럼 수고해라!”

룸메이트 장근범 선배가 나간 방에 홀로 남은 나는 오늘 훈련을 하고 나온 빨래들과 정리와는 담을 쌓고 사는 듯 온통 들쑤셔 놓은 방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선배님.”

“지혁이 왔구나! 거기 앉아 있어.”

정현우.

170cm의 작은 키에 65kg으로 호리호리한 체형의 대전 호크스 주전 2루수인 그는 벌써 프로생활 13년차였고, 오직 대전 호크스에서만 프로 생활을 해온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전형적인 교타자로 내야 안타를 자주 만들어 낼 정도로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고, 2루 수비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 수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프로 13년 동안 통산 타율 0.287, 출루율 0.372로 항상 팀의 1번이나 2번을 맡고 있었다.

매년 30개를 왔다갔다하는 도루 역시 준수한 편이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아 언제나 팀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는 선수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hustle play)를 자주 하는 바람에 매 시즌마다 잔부상을 달고 다녔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몇 명의 선수들이 모여 가볍게 맥주 한 캔 정도를 먹기로 약속한 자리였기에 미리 준비를 해둬야 했다.

편히 앉아 있으라는 현우 선배의 말을 뒤로 흘리며 부지런하게 야식과 차가운 맥주를 보기 좋게 자리에 테이블 위에 깔아놨다.

“전지훈련은 할 만해?”

10분 정도 시간이 남았기에 현우 선배와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올 시즌부터 주장이 된 현우 선배는 자상한 성격에 친화력이 좋아 대부분의 선수들과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경기에 있어서만큼은 국내 제일의 악바리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파이팅이 넘쳤기에 아무리 친하더라도 경기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설렁설렁 움직이는 선수가 보이면 경기가 끝나고 무섭게 야단을 치는 면도 있었다.

“예! 재밌습니다!”

“나도 처음 프로 입단을 계약하고 첫 전지훈련 때는 정말 재밌었지. 물론, 선배들 눈치보고, 잡일까지 같이 한다고 꽤 고생 하기는 했지만.”

옛 기억을 떠올리며 웃는 현우 선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13년 전에도 현우 선배처럼 체격이 작은 선수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운동 선수에게 체격은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었으니 작은 체격의 현우 선배가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이번 전지훈련에서도 현우 선배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조차도 고개가 저어질 정도였다.

수비, 주루, 타격 모든 훈련을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이 현우 선배였다.

“올 시즌 팀 에이스로 활약할 준비는 됐지?”

“예? 제, 제가 무슨 에이스까지… 전 그냥 선발의 한 축만 맡아도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내 앞에서 겸손 떨거 없어.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우리 팀에서 지혁이 너 정도 구위 가진 투수가 몇이나 될 것 같아?”

“작년 시즌도 훌륭하게 팀 에이스로 활약하신 오주영 선배님도 계시고, 김현기 선배님도 그렇고, 민혁준 선배님, 박성진 선배님…….”

내 말을 현우 선배가 단박에 잘라버렸다.

“우리 팀 투수들 이름 줄줄이 다 나오네! 얌마, 주영 선배는 이제 한 물 갔지! 나이가 벌써 몇이냐? 패스트볼 구속도 겨우 140Km 중후반에다 시즌 후반기로 들어서니까 헉헉 대면서 마운드 위에서 공 던지는데 정말 안쓰럽더라!”

“현우야, 너무 그러지 마라. 너도 내 나이 되면 도루 개수부터 팍팍 줄어든다!”

“어이쿠! 우리 팀 부동의 에이스 오주영 선수 아니십니까?”

현우 선배가 호들갑스럽게 오주영 선배를 향해 인사를 했다.

작년 시즌 15승을 달성하며 대전 호크스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 오주영 선배였지만, 사실상 깜짝 활약이었다.

올해 36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가 문제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150Km 중후반의 강속구를 뿌려대던 오주영 선배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구속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작년 시즌 빈약한 타선에도 불구하고 15승을 거둔 것도 정교해진 제구력 덕분이지 구위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현우 선배의 말처럼 시즌 막판에는 체력까지 떨어지면서 유일한 무기였던 제구력이 흔들려 3경기나 4회를 넘기지 못하고 강판을 당했으니, 올 시즌 에이스로의 역할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운동 선수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나중에 현우 너도 나이 들어 성적 하락하면 내가 뒤에서 열심히 씹고 다닌다.”

“아니 어떤 시키가 우리 팀 에이스를 나이 들었다고 무시했습니까? 형 아직 팔팔하잖아요? 자다 일어나서 던져도 150Km는 그냥 찍어주죠? 캬하~ 올 시즌에도 부동의 에이스로 15승은 거뜬하겠네! 안 그렇냐, 지혁아?”

“어떤 시키? 너 이 시키다! 지혁아, 너도 조심해라. 실수하면 가장 먼저 뒷다마 까고 다닐 놈이 바로 정현우라는 인간이다. 조심해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다녀. 저런 놈이 제일 음흉한 놈이야.”

오주영 선배의 말에 현우 선배가 재빨리 맥주를 건넸다.

치익~ 탁!

“자자~ 우리끼리 먼저 한 모금 마시죠? 아~ 목타네!”

“왜? 또 누구 뒷다마 깔려니까 벌써부터 목이 마르냐?”

“에헤이~ 주영이 형!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인자해져야죠! 나이 들어서 꽁해 있으면 그것보다 보기 싫은 거 없습디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 만큼 둥글게, 둥글게 살아야죠! 하하하!”

“이 시키가 진짜!”

현우 선배는 날아오는 주먹을 슬쩍 피하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어휴! 저 얄미운 놈!”

“그래도 내가 작년에 형 타구 얼마나 많이 잡아줬어요? 알죠? 형 선발로 등판했을 때 내가 진짜 몸이 부서져라 날려대며 안타성 타구 잡아준 거? 우리 팀에서 나보다 형 많이 생각해주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 보라고 해요!”

현우 선배의 말에 오주영 선배도 이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현우 선배가 건네는 맥주를 낚아내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지혁아, 너도 한 잔 해. 너 술은 마셔봤지?”

현우 선배의 물음에 나는 손에 들린 차가운 맥주캔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이놈 시키! 운동 선수가 맥주 한 캔도 안 마셔봤단 말이야? 오늘 맥주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마!”

“운동 선수가 술 마셔서 뭐 좋다고 그걸 가르치려고 하냐?”

“맥주 한 캔 정도는 마실 줄 알아야죠! 선발 승 먹고! 맥주 한 캔 먹고! 캬아~ 이게 사람 사는 재미 아닙니까? 자자, 한 모금 쭈욱 마셔봐. 속이 시원해진다!”

현우 선배의 말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지금까지 마셨던 그 어떤 음료보다도 시원했다.

정말 속이 시원하고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때? 죽이지? 여름에 경기 끝나고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얼마나 꿀맛인지 너도 이제 느낄 때가 됐지!”

“예!”

“자자, 마셔! 마셔!”

맥주캔으로 건배를 하고 다시 한 번 시원한 느낌을 맛보기 위해 꿀꺽꿀꺽 맥주를 마셨다.

그 이후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거짓말처럼 기억이 끊겨버렸다.

얼핏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다시 기억이 돌아왔지만, 이내 꼼짝도 하지 않고 자는 척 해버렸다.

“지혁이 저 시키가 맥주 한 캔 먹고 뻗어버리네! 공만 빠르게 던질 줄 알았지, 맥주도 못 마시는 쑥맥이야! 저래서 어디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하겠어? 보나마나 연애도 제대로 해본 적 없을 거야! 어쩌면 여자 손도 못 잡아 봤을지도 모르지! 푸하하하하!”

현우 선배, 그렇게 제 뒷다마 까면 즐겁습니까!

< 『국내편 - 03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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