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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마일-22화 (22/221)

< 『국내편 - 022』 >

『국내편 - 022』

“차지혁 선수!”

현관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말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금테 안경이 제법 잘 어울리는 남자로 20대 후반정도로 보였고, 제법 큰 서류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차동호라고 합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모습은 꽤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어리숙하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할 정도로 난 만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이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걸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걸 잘 알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침묵이야 말로 상대를 압박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었으니까.

“생각보다 경계심이 많으시군요. 뭐, 충분히 이해합니다. 2025년 국내 드래프트 최대어라 불리는 만큼 날파리들이 많이 꼬일 테니 전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하!”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자 남자가 주머니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 정도야 한 번 보고 버리면 그만이었기에 받아서 확인했다.

CBC 인터넷 스포츠 기자 차동호.

명함은 아주 고급스러웠고, 그 속에 적혀 있는 깔끔한 글씨체의 내용은 간략했다.

하지만, 간략한 내용과는 다르게 그 무게감은 상당했다.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케이블 채널인 CBC였으니까.

말만 케이블이지 실질적으로 공중파라는 기득권이 사라진지 오래였기에 CBC정도의 방송사는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방송사를 통틀어 5위 안에 들어가는 인지도를 갖춘 거대 방송사였다.

방송뿐만 아니라 인터넷 기사도 꽤 활발하게 업데이트 했으며, 그 내용도 공정성을 유지했기에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편이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저 사기꾼 아닙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전화로 확인을…….”

핸드폰을 꺼냈다.

명함에 찍혀있는 번호가 진짜 CBC 인터넷 스포츠 부서의 번호인지 인터넷으로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전화를 걸었다.

간단하게 확인 작업이 끝나자 차동호가 벙찐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치밀하시네요. 하하.”

“이런 식으로 기자분과는 할 이야기 없습니다. 정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에이전시를 통해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자와는 친하게 지내지 마라.

아버지가 누누이 했던 말이다.

최상호 코치 역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기자라는 족속들에 대해 많은 경고를 해주었다.

그렇다고 적이 되는 것 또한 곤란하거나, 귀찮은 일이 생기니 최대한 접촉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었다.

“하하, 물론 정식 인터뷰라면 에이전시를 통해 요청을 할 겁니다. 저는 그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웃는 얼굴 뒤에 시퍼런 칼날 같은 펜을 들고 있는 이들이 기자라고 말했던 최상호 코치였다.

최상호 코치의 충고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중학교 때부터 나에 관한 기사들 중 일부는 상당히 공격적이거나, 의혹이나 논란을 증폭시키는 식으로 기사를 작성한 것들을 종종 봐왔기에 기자들에 대한 생각이 썩 좋지 많은 않았다.

기자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다.

자신이 쓴 기사가 이슈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올라가는 것.

진실과 거짓, 옳음과 그름 따윈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사에 관심을 갖는지 만이 중요했다.

그걸 언론의 자유라고 부르고, 국민의 알권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포장한다.

무엇보다 ‘~카더라’라는 식으로 기사를 작성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확실히 가까이 해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족속들이었다.

“시간 없습니다.”

단호하지만, 나름 정중하게 거절하고는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지 말고 간단하게 대화만 나눠주세요.”

보폭을 맞추며 웃는 얼굴로 계속해서 따라왔다.

무시해버렸다.

1학년 때, 고졸 예정자 중 국내 최고 유망주였던 유한석 선배가 기자의 꼬임에 넘어가 몇 마디 대화를 했다가 크게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철저하게 보였던 유한석 선배였지만, 몇 마디의 대화를 그럴싸하게 포장해버린 기자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말았었다.

그 이후, 감독과 코치들은 절대 기자와 단독으로 인터뷰는 물론, 대화조차 쉽게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작년 차지혁 선수가 보여주었던 황금사자기와 청룡기의 피칭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대단했습니다. 그때 정말 팬 됐습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고교리그엔 차지혁 선수의 상대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아시나요? 올해 3학년이 되었기에 모든 대회를 출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작년과 같은 실력만 보인다면 전 대회 최우수선수상 후보 0순위라는 예측도 심심찮게 들려오는데 혹시 들어본 적 있으세요?”

대화가 인터뷰라니.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해버렸다.

그럼에도 차동호 기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현재 YJ에이전시 소속으로 현 이사이며, 전 선수였던 최상호 씨가 차지혁 선수를 특별 멘토링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과거 최상호 씨가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가장 자신 있게 던지고, 위력적이었던 변화구는 컷 패스트볼 아닌가요? 좀 궁금하더군요. 어째서 차지혁 선수가 최상호 씨의 컷 패스트볼이 아닌 파워 커브부터 먼저 배웠는지. 혹시, 특별한 이유나 사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개인적인 호기심이니까 한 마디만 해주세요.”

“황금사자기와 청룡기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피칭에 모두가 기대했던 대한야구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였는데 차지혁 선수는 왜 나오지 않았던 거죠? 일부에선 부상설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는데 실제로 부상을 당한 건 아니죠?”

“송종섭 선수와는 친했나요? 같은 동기였는데, 작년에 있었던 대한야구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국내외 많은 프로 구단들이 차지혁 선수를 주목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실 테고, 정작 차지혁 선수 본인은 여러 프로 구단의 관심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올해 있을 국내와 해외 드래프트 시장 중 어느 곳으로 나갈지 살짝만 힌트 좀 주세요.”

“올해 드래프트 시장에서 가장 주목 받는 4명의 아시아 루키 선수 중 한 명으로 지목된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ESPN과 BA(베이스볼 아메리카)에서는 차지혁 선수가 해외 드래프트 시장에 나올 경우 2025년 지명 순위로 1라운드 전체 15, 16순위로 꼽았습니다. 국내 선수 중 유일하게 1라운드 지명이며 굉장히 높은 순위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현재 2025년 드래프트 순위 톱3라 불리는 미국의 마이크 테일러, 일본의 사토시 슌, 쿠바의 시몬 산체스 선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모두 역대급 재능을 갖춘 타자들로 슈퍼 스타 DNA를 갖췄다는 평가가 자자합니다. 저런 선수들과 동시대에 프로 생활을 같이 시작함에 있어 느끼는 부담감이 있나요?”

걸음을 멈추고 차동호 기자를 바라봤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마음이 생겼다고 생각하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학교 정문이었다.

“같이 등교 하실 겁니까?”

“아…….”

학교 앞까지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차동호 기자는 슬쩍 웃었다.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정식 인터뷰는 다음에 꼭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해준 것도 없는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깔끔하게 돌아서서 걸어가는 차동호 기자였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그가 했던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벌써부터 2025년 드래프트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세 명의 선수.

마이크 테일러, 사토시 슌, 시몬 산체스.

모두 타자다.

그것도 역대급 천재성을 가졌다고 평가를 받는 괴물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장형수도 국내에선 보기 드문 천재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저들 셋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마이크 테일러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까지 모두 더해서 5할이 넘는 타율에 9할에 이르는 장타력을 갖춘 말 그대로 괴물 거포였다.

성적만 놓고 보면 안타는 대부분 장타라는 소리다.

제대로 맞으면 구장을 넘겨버리고, 적당히 맞으면 담장을 넘겨버리고, 대충 맞으면 펜스를 맞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나 역시 마이크 테일러의 경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최상호 코치가 작년 말에 가져온 자료들 중 하나였는데, 엄청난 거구의 마이크 테일러는 솔직히 말해서 마음 놓고 던질 스트라이크 존이 없어 보였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가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거포이면서도 선구안이 얼마나 좋은지 삼진은 거의 당하지 않는 비상식적인 괴물이었다.

마이트 테일러에 대한 기대감은 이 말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모조리 갈아치울 최강의 홈런왕!

사토시 슌은 일본인 타자로 전형적인 교타자다.

뛰어난 선구안과 정확한 타격, 거기에 무시무시한 주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일본 고시엔에서 타율 6할을 기록했고, 인 사이드 파크 홈런, 즉 타구를 외야 깊숙이 날려 주력만으로 홈 베이스까지 들어오는 홈런은 6개나 기록할 정도로 탁월한 주력 센스와 스피드를 갖추고 있었다.

도루 능력도 좋았고, 무엇보다 유격수로서 수비 능력 또한 굉장히 뛰어나 아시아 선수 최초로 메이저리그의 모든 구단이 탐을 내는 내야수였다.

마지막으로 시몬 산체스는 쿠바 출신 선수다.

나이는 25살로 가장 많았지만, 메이저리그 못지않은 쿠바 리그를 제패한 타격 기계로 마이크 테일러와 사토시 슌을 적당히 섞어 놓은 타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격도 잘 하고, 파워도 있고, 주력과 수비 능력까지 겸비한 선수란 뜻이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줄 알기에 진정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심지어 쿠바 리그에서 간간히 투수로 마운드에까지 올랐다고 하니 가장 쓸모가 높은 선수를 꼽으라면 그건 시몬 산체스였다.

이들 세 선수는 모든 스카우트들이 꼽은 잠재력이 가장 높은 이들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성공할 확률이 굉장히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벌써부터 역대급 드래프트 계약이 줄줄이 체결될 거란 소리도 있었다.

“너도 참 운이 나쁘구나.”

최상호 코치가 영상 자료를 보여주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되는 슈퍼 루키들이 동시에 나타났으니 투수인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시련이 될 거라고 말했다.

“반대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생각한다고?”

“예.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황금사자기에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열일곱 명이나 되는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았다는 게 솔직히 우스웠습니다. 나중에 퍼펙트를 달성하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프로에서도 타자들이 내 공을 칠 수 없다면 난 과연 계속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져야 할까? 솔직히 던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물론, 프로 선수들은 다를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내년에 있을 고교 리그를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되도록 모든 대회에 출전을 할 거고 고교생으로서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를 완성할 겁니다. 이후 프로에 진출해서도 마찬가지로 누구도 쌓지 못했던 투수로의 모든 영광에 욕심을 내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약 절 상대할 수 있는 타자들이 없다면 너무 재미없질 않겠습니까? 그래서 전 저들이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괴물들이 있기에 제가 더 위대한 투수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 『국내편 - 022』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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