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19』 >
『국내편 - 019』
“삼진 아웃!”
심판의 우렁찬 외침에 타자는 들고 있던 방망이로 홈플레이트를 내려쳤다.
마운드에 선 나한테까지 들릴 정도로 욕설도 했기에 심판이 경고를 줬다.
타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고교 선수라는 점을 떠올리면 마땅히 경고를 받을만한 행동이었다.
심판에게 경고를 받고 축 늘어진 어깨로 터덜터덜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진영 고교 타자의 모습을 바라보다 등 뒤로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6회 초 진영 고교의 공격이 진행 중이었다.
방금 선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면서 아웃 카운트에 붉은 빛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오늘 타자 박스에 선 모든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연속 16K.
아무리 고교 리그라지만 말이 되지 않을 대기록이다.
“앞으로 두 명인가?”
스코어는 9:0.
점수 차에 따른 콜드 게임 규정에 의해 5회, 6회에 10점 차이가 나면 콜드승으로 게임이 종료된다.
아직 1점이 부족했지만, 6회 말 일석 고교 타선이 1번 타자부터 시작되니 1점 정도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6회가 내가 던지는 마지막 이닝이 될 확률이 컸다.
80구. 5 1/3이닝 동안 던진 총 투구수였다.
기록적인 삼진쇼를 선보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투구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고교 리그에서 한 투수가 한 경기에서 던질 수 있는 최대 투구수는 100구다.
한창 성장 중인 고교 투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기에 만약 6회 말에서 타자들이 1점을 뽑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7회 초 마운드에 올라야 하는 내겐 투구수가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연속 타자 삼진 기록은 충분했다.
중요한 건 퍼펙트다.
6회 말 타선이 1점을 뽑지 못한다는 걸 가정했을 때, 20구만으로 5명의 타자를 아웃시켜야 한다.
분할하면 한 명의 타자를 상대로 4구 이상을 던져선 안 된다.
한계 투구수가 100구라 하더라도 단 1개의 공이라도 여유가 남아 있을 경우 타자 한 명까지는 승부가 가능했다.
19개의 공으로 4명만 잡아내도 5번째 타자까지는 상대가 가능했지만, 투구수의 여유가 늘어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해왔던 투구 스타일을 바꿀 순 없다.
16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대기록과 퍼펙트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지금의 투구 스타일에 있었다.
전국 최강의 야수들이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고 있었지만, 그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림으로써 더욱 집중해서 타자와 승부를 할 수 있었다.
이제와 야수들의 도움을 바란다?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반드시 지향해야 할 점이지만, 퍼펙트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는 투수의 뒤에 선 야수들의 심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팽배한 상황이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묻질 않아도 야수들이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지금처럼 삼진으로 타자를 잡아줘!
절대 내 쪽으로 타구가 날아오지 않기를!
제 아무리 수비 능력이 뛰어난 프로 리그 최고의 선수라 하더라도 퍼펙트를 향해 달려가는 투수의 뒤에 서게 되면 극도로 긴장을 하게 된다.
평범한 타구에도 몸이 굳거나, 긴장해서 안하던 실수를 저지를 경우가 생겨난다.
다른 때보다 에러가 나올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빠르게 승부를 가져가는 방법 밖에 없어.’
야수를 못 믿어서도 아니고, 혼자 야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안타를 맞는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내 탓이고, 야수가 수비실책을 범한다 하더라도 그 역시 내 탓이라 여겨야 한다.
투수는 그런 포지션이다.
모든 걸 홀로 책임져야 하고 당연히 그럴 줄 알아야 한다.
타석에 들어서는 진영 고교 17번째 타자는 앞선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던 선발 출전한 8번 타자가 아니었다.
대타인지, 교체인지 상당히 날렵하게 생긴 타자가 아주 짧게 배트를 쥐고 타자 박스에 들어섰다.
눈에 뻔히 보이는 의도였다.
-진영 고교 양문수 감독이 타자를 교체했습니다. 교체된 선수는… 박광현 선수로 의외로 1학년 선수입니다. 현재 열여섯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있는 차지혁 선수의 상대로는 많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종도 해설위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확실히 차지혁 선수를 상대로 양문수 감독이 내놓은 대타 박광현 선수는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어 보입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1학년 선수를 대타로 내세웠는지 의문스럽네요.
-자료를 살펴보니 재밌는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진영 고교의 대타로 나온 박광현 선수는 백화 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습니다만, 6학년 때 단거리 육상 선수로 전향해서 중학교 2학년 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100미터를 11.25로 뛰어 대회 결승에서 4위까지 했던 이력이 있습니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선수군요. 주력이 굉장히 뛰어난 선수라는 건데 그렇다면 양문수 감독의 노림수는 두 가지로 압축을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박광현 선수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영 고교에서 딱 한 번의 번트 시도를 했습니다만, 차지혁 선수가 위력적으로 공을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바람에 제대로 된 번트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대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는 차지혁 선수를 상대로 번트를 대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없기에 의도적으로 피해왔었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차지혁 선수를 가로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승부수는 번트인데, 양문수 감독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결정을 내린 듯 보입니다. 사실, 오늘과 같은 경기에서 번트로 차지혁 선수의 기록을 깨버리면 그 비난 여론이 상당할 수밖에 없기에 양문수 감독으로서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겁니다.
-말씀드리는 사이 차지혁 선수 초구를 던졌습니다!
“윽!”
타자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황찬 선배가 던져주는 공을 받았다.
번트 작전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번트 작전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일반적으로 번트를 시도하면 쉽게 성공할 거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번트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오죽하면 3할을 치는 타자도 번트만으로 3할의 타율을 칠 수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웅크린 상태에서 배트를 갖다 대는 것 자체가 상당한 용기였고, 그런 공을 정확하게 맞춰서 살아난다는 것 또한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타자가 번트를 대려고 하면 투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번트를 댈 수 있는 공을 던져 타구를 유도해 손쉽게 아웃 카운트를 얻던가, 어렵게 공을 던져 쉽사리 번트를 댈 수 없도록 만들던가. 다만, 후자를 선택할 경우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시킬 확률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퍼펙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초구부터 쉽게 번트를 줄 순 없었기에 초구를 몸 쪽으로 바짝 붙여봤다.
간이 큰 타자였다면 물러나지 않고 몸을 비틀며 데드볼이라도 노렸겠지만, 현재 타석에 선 타자는 그럴 마음이 없는지 황급히 뒤로 물러났고 그 결과 상대팀 더그아웃에서 코치가 상당히 화난 얼굴로 물러서지 말라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울상으로 다시 타석에 선 타자는 여전히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번째 공을 파워 커브로 선택하곤 곧장 던졌다.
번트를 제대로 대지 않으면 결코 인플레이가 될 수 없는 공이었고, 볼이라 여기며 피한다 하더라도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는 공이니 타자 입장에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공이었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공을 타자는 볼이라 여기곤 배트를 뒤로 뺐다.
펑!
“스트라이크!”
1S 1B.
한 타자 당 4개의 공밖에 여유가 없었으니 남은 2개의 공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연속 삼진 기록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상대가 번트 작전으로 나오는 이상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높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빠른 직구를 던져버렸다.
번트를 댄다 하더라도 허공을 뜰 가능성이 컸기에 쉽게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었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포수와 심판의 머리 뒤로 날아가며 파울이 되고 말았다.
타자는 2스트라이크가 되자 울상이 되어 더그아웃을 바라봤고, 상대팀 감독과 코치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코치의 사인을 받은 타자가 여전히 번트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쓰리번트 아웃까지 염두 한 작전이었다.
황찬 선배는 고민 끝에 두 번째 공과 똑같은 코스로 파워 커브를 요구해왔다.
번트를 잘 못 댄다면 파울로 자동 아웃이고, 잘 댄다 하더라도 포수 앞에서 공이 놀게 되니 황찬 선배가 직접 타자를 처리하겠다는 의미였다.
-여전히 번트 자세로 서 있는 박광현 선수입니다. 카운트가 불리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쓰리번트 아웃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웃을 당한다 하더라도 연속 타자 삼진 기록을 깨버림으로써 차지혁 선수를 흔들어 놓겠다는 진영 고교의 의지인 듯 싶습니다. 정신적으로 투수만큼 힘든 포지션이 없기 때문에 차지혁 선수에게서 연속 탈삼진 기록을 깨버리면 자연스럽게 퍼펙트마저도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차지혁 선수 와인드업 합니다. 제 4구 던졌습니다. 앗! 이게 뭡니까! 박광현 선수가 번트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공이 뒤로 빠지면서 낫아웃 상황이 되었습니다! 포수 황찬 선수가 뒤로 빠진 공을 따라 황급히 움직이는 사이 박광현 선수 1루를 향해서 전력으로 달립니다! 박광현 선수 굉장히 빠릅니다! 황찬 선수 공을 잡아 그대로 1루로 던집니다! 동시에 박광현 선수도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갑니다!
모두의 시선이 1루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파워 커브의 제구가 살짝 흔들리면서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타자는 앞서 파워 커브에 스트라이크를 당한 기억 때문인지, 번트에 대한 압박감 때문인지 무리하게 배트를 내밀다가 삼진을 당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제구가 되지 않은 파워 커브가 황찬 선배의 미트 밑으로 빠져버린 거다.
타자는 상대팀 벤치에서 뛰라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1루로 향했고, 포구에 실패한 황찬 선배도 허겁지겁 빠트린 공을 집어 1루로 던졌다.
공이 빨랐는지, 타자가 빨랐는지는 솔직히 분간이 되질 않았다.
프로 리그에서는 비디오 판독이 일상이 되어 있었지만, 고교 리그에서 비디오 판독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에 오로지 1루심의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1루심은 몇 초간 굳은 듯 서 있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오른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웃!”
황찬 선배가 털썩 주저앉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뛴 타자는 억울하다는 듯 1루심을 바라봤다.
진영 고교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와 1루심에게 항의를 해댔다.
솔직히 세이프를 선언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타자가 빨랐기에 판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소란스럽게 항의를 하던 진영 고교 감독은 판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1루심과 심판진 전체의 의견에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5이닝을 장식할 마지막 타자와의 승부에서는 아쉽게도 번트를 허용했지만, 차분하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냄으로써 여전히 퍼펙트인 상태로 이닝을 마칠 수 있었다.
따악!
“와아아아아!”
경쾌한 소리와 함께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에 타구가 떨어졌고, 2루에 있던 주자가 열심히 내달려 홈베이스를 밟았다.
10:0.
6회 콜드로 일석 고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어느 누구도 일석 고교의 우승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6이닝 동안 17명의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고교 전국대회 두 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나에게만 모든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가 날 찍었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무엇보다 고작 1경기에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MVP에 선정되며 날 당황시켰고, 당연히 내 수상에 대한 논란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 『국내편 - 019』 > 끝
ⓒ 독고진
작가의 말
실제로 황금사자기 전국 대회에서 한 경기 한계 투구수는 130구랍니다.
고교 리그에서는 2008년 구리 인창고의 김태훈 선수가 전국규모의 대회에서는 최초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네요.
작중 차지혁보다 더한 사람이 있네요.
미국에서 13세 소녀가 무려 70마일의 공을 던진다네요!
소년도 아니고 소녀가 그것도 13살인데 112Km의 공을 던진다니....
현실이 더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