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17』 >
『국내편 - 017』
고교 야구부에서 가장 바쁜 이들은 2학년생이다.
3학년은 조급하다.
당장 졸업 전에 대학 진학이나, 국내외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막바지 실력 향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단추를 어떻게 끼느냐였기에 실질적으로 야구 연습을 제외하면 야구부에서 하는 활동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2학년은 내년을 위해 연습도 해야 하고, 야구부 단속과 동시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1학년 교육까지 책임져야 하니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을 하기가 힘들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점심을 먹고 교실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마주친 1학년 신입생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일석 고교 야구부만의 엄격한 규율로 인해 후배는 선배를 만나면 언제나 저렇게 인사를 했고, 일반 학생들은 그 모습을 상당히 신기해했다.
“그래.”
간단하게 대답만 해주고 옆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신입생이 곁으로 달라붙었다.
“선배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명성 중학교에서 선배님께서 혼자만의 힘으로 2년 연속 전국 대회 우승과 MVP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고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일석 고교에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절대 아니다.
야구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 아니다.
투수라는 포지션이 경기를 이끌어 나가고 승패를 좌우하는 키 플레이인 건 사실이지만, 투수가 아무리 잘 던진다 하더라도 수비의 도움, 타자들의 공격이 없다면 절대 승리를 할 수 없는 스포츠가 야구다.
“야구는 혼자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네 노력을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내가 나지막하게 지적을 하자 신입생이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순박하게 생긴 얼굴에 성격까지 싹싹하니 마음에 드는 신입생이었다.
“어디 졸업했어?”
“백석 중학교입니다!”
대답을 하는 신입생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중학 야구에서 전국 랭킹 1, 2위를 다투는 명문 출신이니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안타깝게도 명성 중학교는 내가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더 이상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명성 중학교의 실력을 빗대어 나에게 혼자만의 힘으로 명성 중학교를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고 말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쉬운 일이지만, 명성 중학교의 실력은 전국 대회 4강까지가 한계였다.
대진표 운이 좋다면 결승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승 단골이라 불리는 동학이나 백석 중학교를 이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결과 내가 졸업한 이후, 기다렸다는 듯 모든 대회에서 동학과 백석 중학교가 우승을 차지해버렸다.
백석 중학교라면 내가 명성 중 3학년 때, KBO중학야구대전 4강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내 옆에 달라붙어 있는 신입생이 나보다 한 살 어렸으니 당시 2학년이었을 테고, 나에게 모교가 박살나는 모습을 똑똑히 봤을 거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고국진입니다!”
“고국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장형수가 신입생들에 대해 내게 신나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된 이름이었으니까.
신입생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나와 같은 보직인 투수로서 전국 중학 선수 랭킹 투수 부문 1위에 오른 녀석이다.
130Km 초중반의 직구에 투심과 체인지업을 꽤 능숙하게 던질 줄 아는 투수라고 들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더 작았으니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녀석 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하지만, 바짝 마른 체형이 마운드 위에 섰을 때 타자를 압박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 내 눈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들어왔다.
“팔이 기네.”
“예. 제가 좀 팔이 깁니다.”
키는 나보다 작은데 팔은 나보다 훨씬 길었다.
언뜻 보기에는 기형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팔 길이만큼이나 손가락도 길었다.
호불호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투수에게 있어 팔과 손가락이 길다는 건 우선적으로는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이라 생각했다.
물론, 투구 밸런스와 릴리스 포인트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오히려 투구시 방해가 된다.
하지만, 제대로 밸런스와 릴르스 포인트만 잡는다면 긴 팔과 긴 손가락에서 구사되는 공의 위력은 굉장해 질 것이 분명했다.
특별히 어깨와 팔꿈치를 잘 관리하라는 말을 해주려다 말았다.
고작 한 살 더 많은 내가 조언을 하기도 그랬고, 그런 부분은 코치와 감독의 몫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신입생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대상은 송종섭이었다.
제주도 동계 훈련에서 무단이탈을 했던 송종섭은 외삼촌인 정해용 코치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해 보름 근신 처분을 받음으로써 제명이라는 칼날은 피할 수 있었다.
송종섭은 신입생의 인사를 무시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전국 랭킹 1위, 어깨는 어떻게 좀 나아졌냐?”
다분히 시비조에 조롱기가 가득한 말이었다.
송종섭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그를 무시하며 옆을 지나치려고 했다.
내 어깨를 잡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씨발,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 처먹어야 할 거 아냐? 후배 새끼가 눈깔 뜨고 쳐다보는데 쪽팔리게.”
사납게 인상을 구기며 날 노려보는 송종섭의 눈동자는 제주도에서 봤던 불량기가 가득한 눈이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 같았다.
“놔.”
송종섭과 같은 놈과는 많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단호하게 말했다.
“오 씨발, 살벌한데? 한 대 치겠다?”
“못 할 것 같아?”
“자신은 있고?”
비릿하게 웃으며 송종섭이 날 깔아봤다.
곁에 있던 신입생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고, 복도 주변의 학생들 또한 나와 송종섭이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자 멀찍이 떨어져서 쳐다보고 있었다.
싸우면 내가 손해를 본다는 걸 알지만, 송종섭과 같은 놈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기에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른쪽 어깨를 잡고 있는 송종섭의 손목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내가 가진 힘을 모두 동원하자 송종섭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 씨발…….”
“다물어. 너 따위 쓰레기 때문에 야구부 전체를 욕되게 하지 말고.”
“이 개새…….”
“너희들 뭐하는 거야!”
송종섭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순간, 학생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나타났다.
선생님의 등장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송종섭은 두고 보자며 이를 갈며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고, 신입생은 선생님이 학생들 사이로 사라지고 나서도 내 곁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만 가보라고 말을 하자 그제야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교실로 서둘러 돌아갔다.
신입생이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교실로 향하며 눈을 찌푸렸다.
송종섭의 존재가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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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은 차지혁이다.”
감독의 말에도 주변에선 어떠한 소란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한쪽에 서 있는 2명의 3학년 선배들만이 애써 주변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망의 결승전이다.
이번 주에 벌어지는 78회 황금사자기 결승전에 3학년 투수가 아닌 2학년 투수인 내가 선발로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실력이 좋아서 결승전에 선발 투수가 된 것도 있지만, 사정이 있어서다.
현재 우리 야구부의 에이스는 3학년 재석 선배다.
아무리 내가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인생이 걸린 3학년 선배들을 밀어내면서까지 대회에 선발로 나갈 순 없었다.
감독이나 코치도 선배들을 자극하기 위해 그저 한 말이지, 실제로는 날 선발로 올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재석 선배가 대회 첫 경기에서 팔꿈치 통증을 호소를 했고, 경기 이후 병원 검사에서 팔꿈치 염좌라며 당분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3학년인 재석 선배에게는 청천날벼락이었다.
당장 올해 있을 국내외 신인 드래프트를 생각한다면 오랜 시간을 부상 치료에 매달릴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심한 부상이 아니니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치료를 하면 완치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재석 선배로서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너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에이스인 재석 선배가 빠지자 당연히 다른 3학년 투수인 기홍 선배와 민교 선배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재석 선배 다음으로 에이스의 자격을 갖췄다고 평가를 받는 기홍 선배는 이번에 자신의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무리를 했고, 그 결과 두 경기에서 13점이나 실점을 하고 말았다.
평소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최악의 피칭이었다.
가까스로 타선에서 점수를 내줬기에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했고, 전국 최강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감독과 코치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다.
무엇보다 멘탈이 완전히 무너졌기에 또 다시 마운드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기홍 선배를 망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선발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이런 부분은 시간이 해결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기홍 선배 다음으로 경기에 나선 민교 선배는 제법 안정적인 피칭으로 마운드를 지켜줬다.
그런데 준결승 마지막 이닝, 그것도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남겨두고 팔에 타구를 맞고 말았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뼈에 금이 가서 기브스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투구를 하는 오른손이 아니었기에 다행이라 여기는 중이었다.
3명이나 되는 3학년 투수들이 모조리 부상과 부진으로 결승전을 남겨두고 마운드에 오를 수가 없게 된 거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2학년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내가 선발로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포수는 황찬이로 간다.”
감독의 말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던 장형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나 역시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장형수가 포스 마스크를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3학년 주전 포수인 황찬 선배가 선발이 되자 살짝 걱정이 됐다.
투수는 굉장히 예민한 포지션이라 조금만 주변 상황이 바뀌어도 투구 밸런스가 깨지고 만다.
또, 멘탈적인 부분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모든 투수들은 자신과 궁합이 맞는 포수가 공을 받아주길 원한다.
감독이 자리를 떠나자, 코치가 나와 황찬 선배를 불렀다.
“황찬아, 네가 선배니까 지혁이 리드 잘 이끌어라. 지혁이도 경기 전까지 황찬이랑 호흡 잘 맞춰두고.”
“예! 걱정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믿는다며 황찬 선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코치가 자리를 떴다.
“오후 연습 때부터 천천히 호흡을 맞춰보자.”
“네, 선배님.”
황찬 선배는 오후에 보자면서 돌아섰고, 그렇게 선배가 멀어지자 뜨거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장형수가 득달스럽게 달려왔다.
“마누라가 옆에 있는데 바람을 피우다니!”
“날 탓하기 전에 감독님을 찾아가.”
내 말에 장형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날 바라보는 눈빛은 배신자를 쳐다보듯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익숙하지 않은 황천 선배와 배터리를 이뤄야 한다는 사실이 영 껄끄러운데 장형수까지 옆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자 짜증이 확 났다.
그렇다고 당장 이번 주 시합을 앞두고 컨디션을 망칠 수 없었기에 얼른 자리를 떠 교실로 향했다.
3일 동안, 황찬 선배와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자 대망의 78회 황금사자기 결승전이 벌어졌다.
“우리는 일석 고교다! 오늘 경기에서 우리가 왜 전국 최강인지 확실하게 보여줘라!”
감독의 말에 모든 선수들이 목청껏 파이팅을 외쳤다.
1회 초 상대팀 공격을 막기 위해 주전 선수들이 하나, 둘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5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고교생이 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대회 선발 투수로 나는 마운드에 올랐다.
< 『국내편 - 01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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