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15』 >
『국내편 - 015』
“커, 커브!”
“맙소사! 저 괴물이 언제 저런 엄청난 커브를 배운 거야!”
“저거 파워 커브아냐?”
“속도도 엄청나고 마지막에 떨어지는 각도 예술이다!”
“미친! 저건 보고도 못 치는 커브야!”
처음 선보인 파워 커브에 광한 고등학교 야구부보다 우리 일석 고교 야구부 더그아웃이 더욱 난리가 났다.
변화구를 배워야 하지 않겠냐는 감독과 코치의 조언에 현재 파워 커브를 배우고 있다고 했지만, 막상 실전에서 내가 던진 파워 커브를 확인하고는 움찔 거릴 정도로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위력적인 파워 커브였다.
직구에 파워 커브를 섞어서 공을 던졌다.
농락.
광한 고등학교는 완전하게 내 공에 농락을 당하며 삼진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날 친선 경기에서 내 성적은 4이닝 12삼진.
단 하나의 안타나 볼넷을 내주지 않으며 퍼펙트로 광한 고등학교를 압사시켜버렸다.
“모두 봤겠지만, 특히 2학년 투수들! 올 겨울 죽을 각오로 연습하지 않으면 내년엔 20년 만에 2학년이 팀 에이스로 대회에 선발 출전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거다. 바짝 긴장해!”
친선 경기가 끝나고 감독이 한 유일한 말이었다.
2학년 투수 선배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축 늘어진 어깨로 귀가를 했야만 했다.
“20년 만에 일석 고교 야구부에서 2학년 에이스라니! 역시 넌 괴물이야! 흐흐!”
장형수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러는 너도 만만찮아.”
나만큼이나 골칫거리가 바로 장형수다.
포수 능력도 뛰어나고, 엄청난 타격 능력에 파워까지 갖춘 장형수는 현재 2학년 포수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잘 부탁한다!”
“뭘?”
“네가 에이스로 마운드에 오르면 아무래도 네 마누라인 내가 주전 포수로 기용하지 않겠어? 흐흐!”
맞는 말이다.
장형수의 실력이 현재 2학년 포수들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당장 시합에 그를 기용하지 못하는 건 내년 대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지금의 2학년 투수들과의 호흡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학년인 나와는 꾸준하게 호흡을 맞춰왔기에 내가 만약 내년에 선발로 올라가게 되면 3학년 포수가 아닌 2학년인 장형수가 선발로 포수 마스크를 쓸 확률이 100퍼센트였다.
“그래서 뭘 해줄 수 있는데?”
내 물음에 장형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 듯 날 바라봤다.
“선배들 꿈을 짓밟은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보상 받을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어?”
“뭘 바라는데?”
진지하게 물어오는 장형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일석 고교 야구부는 지난 20년 동안 3학년이 에이스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그런 20년의 역사를 깨부숴버릴 수 있다 생각하니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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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눈이다!”
지아의 외침대로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떨어져 내렸다.
어느덧 겨울이다.
엊그제 일석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것 같았는데, 벌써 11월의 막바지에 와 있었다.
“아빠! 이번 겨울 방학 때, 엔조이파크에 가자! 이번에 새로 개장했는데 정말 좋대!”
눈이 오니 신이 난 지아가 작은 새처럼 지저귀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주었다.
양팔을 활짝 벌리고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눈을 맞는 지아의 모습에 나 역시 웃음이 나왔다.
“동계 훈련은 언제냐?”
아버지가 물었다.
고교 야구 선수에게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은 훈련으로 가득 찬 시간뿐이다.
여름에는 기술 훈련을 위주로 하계 훈련을 받고, 겨울에는 체력 훈련을 위주로 동계 훈련을 받는다.
아무래도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여름에는 기술 훈련을 하기에 제격이고, 차디찬 겨울에는 부상 방지를 위해서라도 체력 훈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야구 선수는 겨울을 제외하면 온통 시합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 관리가 필수였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평가를 받는 선수라 하더라도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제대로 된 성적을 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야구 선수는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도 내년을 위해 체력 훈련을 꾸준히 해놔야만 했다.
“방학하고 일주일 쉬고 제주도로 한 달 동안 간다고 하더라고요.”
“제주도?”
어머니가 관심 있는 눈으로 바라봤다.
여행을 좋아하는 어머니였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길면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가족 여행을 다녔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는 여행을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는 어차피 훈련 받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아버지랑, 어머니, 지아는 제주도에서 겨울 휴가를 보내시는 게 어떠세요? 에이전시에 말하면 숙박 정도는 충분히 해결이 될 것 같아요.”
내 제안에 어머니가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도 딱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아만은 달랐다.
“싫어! 제주도에는 스키장이 없잖아! 난 스키 타고 싶단 말이야!”
지아의 반대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나 역시 스키장을 가겠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지아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지아를 설득하는 건 결국 부모님의 몫이었으니까.
겨울 방학 일주일 전, 최상호 코치의 입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내년에 새로 배우고 싶은 구종이 있으면 지금 말해봐라.”
기다렸던 말인지라 곧바로 대답했다.
“컷 패스트볼이요.”
최상호 코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컷 패스트볼, 변형 패스트볼인 이 구종은 타자들의 배트를 워낙 잘 부러트려서 커터라고 부르기도 했다.
슬라이더보다는 움직임이 적지만, 패스트볼에 육박하는 스피드를 지닌 공으로써 타자의 입장에서는 패스트볼로 여겼다가 헛스윙을 하거나, 타격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좋은 타구를 만들기 쉽지 않은 위력적인 공이다.
“내 밑천을 다 가져가려고 작정한 놈이군.”
“바람직한 자세 아닌가요?”
내 대꾸에 최상호 코치가 한 방 먹었다는 듯 멍하니 날 바라보다 이내 크게 웃었다.
최상호 코치가 가장 잘 던졌던 변화구가 바로 컷 패스트볼이다.
메이저리그 당대 최고의 마무리라 불렸던 마리아노 리베라의 주무기가 바로 컷 패스트볼인데, 최상호 코치가 던지는 컷 패스트볼이 리베라 이후 가장 완벽하다 인정을 받았다.
실제로도 메이저리그에서 최상호 코치는 컷 패스트볼로 수많은 타자들을 선풍기로 만들거나, 배트를 부러트리며 명성을 날렸다.
“컷 패스트볼은 익히긴 쉽지만, 구사하긴 굉장히 어려운 구종이다. 반면, 제대로 된 컷 패스트볼을 던지게 된다면 네 직구를 더욱 위력적으로 만들어 줄 공이기도 하지. 컷 패스트볼과 직구는 절대 3마일 이상의 구속 차이를 내면 안 된다. 더불어 파워 커브를 익힐 적에도 말을 했지만, 넌 아직 성장 중인 학생이라 신체의 변형에 따라 수시로 구종의 위력과 제구력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성장 중인 선수들은 많은 변화구를 다양하게 익히기 보단 한 두 가지의 구종만을 계속해서 손에 익혀 완벽하게 던지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컷 패스트볼을 이후로 더 이상 네겐 변화구를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
더 이상 변화구를 가르치지 않겠다는 소리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최상호 코치에게 컷 패스트볼 다음으로 슬라이더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컷 패스트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가 던지는 슬라이더 역시 상당한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흔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끔 제대로 긁히는 날에는 거의 마구 수준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고, 그런 날에는 속수무책으로 타자들의 배트가 헛돌며 삼진수를 늘여버렸다.
무엇보다도 슬라이더는 팔꿈치에 무리가 많이 가는 구종이었기에 3학년이 되고 난 후에 배울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머리 같은 놈.”
아쉬워하는 내 머리에 딱밤을 날리는 최상호 코치였다.
방학을 하고, 남들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난 최상호 코치에게서 집중적으로 컷 패스트볼을 익혔다.
아무래도 여름 방학 때도 그랬지만, 이번 겨울 방학 동안 있을 동계 훈련에 최상호 코치가 따라 갈 수 없으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한꺼번에 몰아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으으! 미적 수준들 하고는!”
지아는 현관을 나와 마당을 지나갈 때마다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마당 인테리어였는데, 이제는 비닐하우스까지 세워져선 자신을 괴롭힌다며 항상 나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지아였다.
비닐하우스는 겨울에도 최대한 따뜻한 공간에서 투구를 하도록 에이전시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당연히 최상호 코치의 의견이었고, 언제나처럼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허락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였기에 비닐하우스가 마당에 들어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아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고작 초등학교 5학년의 꼬맹이일 뿐이고,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에이전시 소유라는 소리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절대 집으로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지아는 자신의 반항심을 드러냈지만, 우리 가족에게 그런 반항심 정도는 그저 애교에 불과했다.
“키는 이 정도면 적당하고, 이번 겨울에 몸을 좀 더 불려라.”
“가벼운 게 좋지 않을까요? 체중을 불리면 투구 밸런스를 다시 맞춰야 할 텐데요.”
186cm, 77kg. 현재 내 체격이다.
투수에게 있어 체격 조건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계속해서 자라는 키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키 크는데 도움이 되는 거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종류 불문하고 가져다 먹이고 있기 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쑥쑥 커주고 있었다.
반면, 몸무게는 너무 체중을 불리지 않고 싶었기에 유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체중이 불면 아무래도 보기에도 둔해 보이고, 투구 밸런스를 새로 맞춰야 할뿐더러, 부상의 위험도 조금 더 높아지기 때문에 딱히 체중을 늘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금보다 3~4kg만 더 늘리는 게 좋다. 투구 밸런스는 어차피 네가 평생 투수로 살아가는 동안 고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밸런스 때문에 체중을 늘리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그리고 이번 동계 훈련에서 악력과 손가락 힘을 집중적으로 키워라. 근력, 유연성 등 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러니 굳이 훈련을 더 무리할 필요 없이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하지만, 모든 구종의 구위를 높이고 싶다면 악력과 손가락 힘을 키우는 게 좋다. 특히, 컷 패스트볼은 중지 손가락의 힘이 중요하니 타자의 배트를 모조리 박살내고 싶다면 손가락 힘을 키워라.”
에이전시에서는 4개월에 한 번, 1년에 3번 내 운동 능력을 검사했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난 상품이었기에 주기적으로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근력, 순발력, 지구력, 유연성 등 모든 부분에서 난 최상위에 올라갈 정도로 높은 판정을 받고 있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흔히들 말하는 강골과는 거리가 좀 있는 체질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꾸준한 운동 효과가 현재의 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며 어린 선수가 굉장히 힘든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며 감탄을 감추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최상호 코치는 지금 수준을 유지하되,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 단기적으로 집중 강화를 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고, 이번에 손가락 힘을 기르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정지었다.
“동계 훈련 잘 다녀와라.”
일주일간 최상호 코치와의 훈련이 끝나자, 고교 1학년을 장식할 동계 훈련이 시작되는 제주도로 향했다.
< 『국내편 - 0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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