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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편 - 008』 >

『국내편 - 008』

“투수에게 있어서 변화구가 뭐라고 생각하지?”

변화구의 정의라도 묻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대답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투수에게 있어 변화구란 타자라는 맹수에게서 타격 타이밍을 빼앗는 강력한 무기다.

투수와 타자의 수싸움에 있어 변화구라는 건 절대적인 존재니까.

“변화구를 단순한 타이밍을 빼앗는 구질이라고만 여긴다면 틀렸다.”

틀렸다는 말에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제법 큰 키에 체격이 좋은 남자였다.

49살이라고 했던가?

얼굴은 나이보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였다.

남자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투수에게 변화구는 투구를 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같은 의미 같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다르다. 많은 이들이 변화구의 목적을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빼앗는 구질이라고만 여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투수가 진짜 변화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투구의 여유를 주거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결정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병살타를 만들기 위해선 어떤 구질이 가장 효율적이지? 뜬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변화구는 뭐지? 그라운드 위에서 아웃 카운트를 만들어 내는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투수 한 사람뿐이다. 야수들은 그런 투수를 보조해주는 역할을 할 뿐. 모든 아웃 카운트를 창조해내는 역할은 오직 투수만이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투수는 보다 효율적으로 아웃 카운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변화구를 익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투수의 투구를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거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변화구에 대한 정의를 뿌리 채 흔들어 놓는 말이었다.

변화구는 오직 타격 타이밍을 빼앗아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늘리는 결정적인 역할의 구질이라고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멋진 변화구의 명장면들은 타자가 허무하게 배트를 휘두르며 삼진을 당하거나, 꼼짝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루킹 삼진을 당하는 그런 장면들뿐이니까.

“투수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변화구가 뭐라고 생각하지?”

투수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변화구라.

세계 3대 마구라 불리는 자이로볼, 스크류볼, 너클볼 정도 일려나?

하지만, 그런 뻔한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가만히 생각하다 한 가지 구질을 떠올렸다.

“커브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커브라 생각하지?”

“가장 최초로 생긴 변화구니까요.”

“단지 그것 때문에 커브를 가장 완벽한 변화구라 생각하는 거냐?”

“모든 투수들이 던질 줄 아는 변화구이기도 하죠. 하지만, 정말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는 것도 제가 커브를 꼽은 이유죠.”

남자가 슬쩍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야구공을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쳤다.

“맞다. 커브야 말로 투수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변화구다. 네 말대로 세상 그 어떤 투수라도 커브 한 종류 정도는 던질 줄 안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된 커브를 던질 줄 아는 투수는 결코 많지가 않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걸 알면서도 못 친다고 부르는 공이 바로 커브다. 커브에도 종류가 여럿이 있다. 무엇을 배우든 제대로만 구사하면 그 어떤 변화구도 부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단한 커브를 배워도 위력적인 직구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기에 난 네가 정말 위력적인 직구를 던질 수 있다 판단이 들 때 비로소 커브를 가르칠 거다. 여기에 불만 있나?”

반박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제대로 된 직구도 못 던지는 투수가 변화구를 배우겠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나 역시 누구나 인정하는 직구를 던지지 못하면서 변화구를 배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변화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위력적인 직구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한다.

돌려 말하면 위력적인 직구가 있기에 변화구마저 위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직구는 변화구를 돋보이게 해주지만, 변화구는 결코 직구를 돋보이게 해주지 못한다.

그게 직구와 변화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전담 코치가 생겼다.

이름은 최상호.

한국 프로야구 에이스로 간판 투수였고, 지금처럼 자유로운 이적 시스템이 생겨나기 이전 노예처럼 국내 프로야구에서 공을 던지다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메이저리그로 건너간 투수.

괴물들만의 리그라 불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상호는 실력 하나만으로 당당히 선발 자리 하나를 꿰차며 6년 동안 통산 70승을 쌓고 멋지게 은퇴를 했다.

메이저리그라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최대 프로 리그에서 최상호는 매년 10승 이상을 달성하며 팀내 간판 투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런 그가 돌연 6년 만에 그것도 모든 야구 선수가 손꼽아 기다리는 FA가 시작됨과 동시에 은퇴를 선언해서 미국은 물론, 한국의 야구팬들까지도 충격에 빠트렸다.

당시 최상호는 꽤 많은 팀에서 군침을 흘리는 투수였고, 실제로도 4년 8천만 달러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초대박 계약을 제안 받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최상호는 제안을 거절하고 은퇴를 해버렸다.

“변화구는 투수에게 있어 투구를 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지만, 대신 투수의 시간을 빠르게 갈아먹는 치명적인 구질이기도 하다. 투수에게 있어 어깨는 개인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한계가 정해져 있는 소모품이다. 어깨뿐만이 아니다. 팔꿈치와 손목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많은 변화구를 던질수록 투수의 팔꿈치와 손목은 빠르게 소모되고, 더불어 신체에 조금씩 피로가 누적되어 천천히 후유증이 나타나든가, 어느 날 갑자기 폭탄처럼 터져버린다. 천천히 진행되든, 한 순간 터져 버리든 그때는 이미 투수로서의 인생이 내리막 내지는 끝이 났다고 봐야 한다.”

말을 하는 최상호 코치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 토종 에이스로 각광 받으며 프로 리그를 평정했던 그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메이저리그에 도전을 하고 싶어했지만 아쉽게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규율에 가로 막히고, 구단에서도 그를 놓아주질 않았다.

겨우 규율과 구단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미 이십대 후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는 당당히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고, 진정한 돈 방석이라 부를 수 있는 FA 직전에 자신의 어깨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곤 은퇴를 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34살이라는 다소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한 최상호 코치는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야구 팬들이 그에 대한 소식을 궁금해 했지만, 그는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야구판을 뒤흔들 소식과 함께 그의 이름 최상호가 다시금 알려졌다.

국제야구연맹인 IBAF는 세계 야구 발전과 부흥을 위해 몇 가지 놀라운 내용을 발표했는데, 가장 많은 반발을 받으면서도 가장 많은 호응을 받은 것이 바로 ‘서비스 타임제 폐지’, ‘자유 이적 허용’, ‘신인 드래프트제’, ‘페이롤제 폐지’, ‘40인 로스터제’, ‘8월 웨이버 트레이트제 변경’ 등이 있었다.

대다수 발표 내용이 미국 메이저리그를 타켓으로 잡고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프로 야구 리그 중 ‘갑’이 바로 메이저리그였으니까.

그 때문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결사 반대를 외치며 국제야구연맹과 등을 돌리겠다는 초강수까지 뒀지만, 일부 국가만의 프로 스포츠인 야구를 축구처럼 전 세계 스포츠로 발돋움 하려는 국제야구연맹의 야심찬 계획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이라 하더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

국제야구연맹의 폭탄 발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일본프로야구기구(NPB)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 한국, 일본의 사무국이 똘똘 뭉치자, 보란 듯이 선수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번 국제야구연맹의 은밀한 후원자였던 에이전시 역시도 선수들에게 힘을 주면서 전 세계 프로 야구가 동시 다발적으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세계가 들썩였다.

야구라는 프로 스포츠는 일부 국가에서만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막대한 돈이 오가는 스포츠인만큼 전 세계의 관심을 이끌었다.

거기에 더해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초대형 스타들이 앞장서서 국제야구연맹을 지지하며 전 세계인들에게 야구 발전을 호소하자 여론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각 사무국들에 대한 무수한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고, 은근히 그들을 지지하던 몇몇 프로 구단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팬들의 격렬한 항의에 스리슬쩍 발을 빼버리기 시작했다.

장장 6개월에 걸린 치열한 싸움은 끝내 국제야구연맹의 승리로 끝이 나고 말았다.

어차피 이건 싸움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사무국들이 어떠한 이유를 대며 결사 반대를 외친다 하더라도 이미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악의 무리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결국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손꼽아 기다리는 FA제도가 폐지되었고, 팀간 자유로운 이적이 허용되는 초창기 시절로 돌아갔다.

일부에선 돈 많은 인기 구단이 실력 있는 선수들을 모조리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돈이 부족한 구단의 경우 드래프트를 통해 유망주를 발굴, 좋은 선수로 키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챙길 수 있으니 마냥 한쪽만 이익을 보는 구조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신인이라 하더라도 다년 계약을 맺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고, 실력을 쌓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받고 다른 구단으로 이적이 가능하니 환영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일본의 프로 선수들은 해외 진출이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꿈에 도전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쉬워졌고, 국제야구연맹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그 동안 등한시 되어 왔던 야구가 세계 각 나라에서도 하나, 둘 프로 리그의 출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야구 세계화의 시작이었다.

이런 엄청난 야구 혁명에 최상호 코치가 불철주야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가 한 노력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국제야구연맹을 부추겼다는 사실을 야구계 관계자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최상호라는 엄청난 사람이 한 에이전시 이사로 활동하며 지금은 날 위해 전담 코치직을 수행 중이었다.

“내게서 변화구를 배운다 하더라도 네가 가진 진짜 위력적인 구질은 오직 직구 하나라고 여겨라. 21세기에 들어서 데이터 야구가 판을 치고 있지만, 난 단 한 번도 데이터 야구를 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구질에 자신이 있는 투수라면 데이터 따윈 언제든 무시하고 오직 내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던지면 된다. 그게 진짜 투수다.”

최고 154Km의 강속구에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할 줄 알았던 최상호 코치였지만, 그는 실제로 한 가운데 직구를 꽂아 넣는 일이 굉장히 많았다.

말 그대로 홈런을 치던, 안타를 치던 마음대로 해보라는 식으로 던지는 강력한 직구였는데 우습게도 작정하고 던진 한 가운데 공이 피홈런 비율과 피안타 비율이 가장 낮았다.

멋있는 투구다.

진짜 투수다운 투구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나 역시 물러서지 않는 투수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내 앞에 서 있는 최상호 코치는 내게 있어 가장 완벽한 코치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난 네게 최고의 직구만을 가르칠 거다.”

최상호 코치의 말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흥분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때가 내 인생의 방향이 확실하게 정해진 시기였다.

< 『국내편 - 008』 > 끝

ⓒ 독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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