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04』 >
『국내편 - 004』
“아들, 그새 또 키가 컸네?”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려던 날 향해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바지 밑단이 벌써 또 이렇게 짧아져버렸네. 우리 아들 정말 쑥쑥 크는구나!”
어머니의 말대로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꼭 누군가 내게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키가 자랐다.
벌써 179cm를 넘겨버린 키와 어렸을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온 운동들 때문인지 균형 잡힌 몸매와 탄탄한 체격은 어느 순간부터 주변 시선을 신경 써야 할 정도였다.
“지연아, 네가 좋아한다는 3반 야구부원이 쟤 맞지?”
“모, 몰라!”
학교에서 특히 여학생들이 날 바라보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꺄르르 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등교를 하면 사물함에 편지가 2, 3통씩 들어가 있는 날이 일주일에 2번 정도는 되었고, 무슨 날이다 싶으면 사물함은 물론, 책상 위에도 온갖 선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저, 저기…….”
수업이 끝나 야구부로 향하려던 내 앞을 작고 귀여운 여학생이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이가 싶어 가만히 그 여학생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귀까지 빨갛게 물든 여학생이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5반 홍주희라고 해. 호, 혹시 내가 준 편지 봤어?”
미안한 말이지만, 편지를 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물함에 편지가 들어 있어 무슨 편지인가 싶어 궁금함에 읽어봤고, 날 좋아한다드니, 멋있다느니 하는 말들이 기분 좋아서 며칠 동안은 꼬박꼬박 편지를 읽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지를 써주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별로 바뀌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편지를 읽지도 않고 집 한 구석에 쓰레기처럼 모아두고만 있었다.
학교에서 대놓고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집으로 가져간 후에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런 비신사적이고 야만스러운 짓을 하면 안 된다며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잡아 비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전용 상자 하나를 마련해 대충 모아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미안, 보지 않았어.”
“아… 그, 그래? 그럼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나랑 같이 영화 볼래?”
길지도 않은 말을 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야구부 집합 시간에 늦을 수도 있다 생각이 들어 빠르게 대답했다.
“미안, 토요일에 야구 연습 해야 해. 그럼 난 갈게.”
“그, 그럼 일요일은…….”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려는 여학생의 옆을 지나쳐 교실을 나왔다.
야구부 숙소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던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야! 니가 이슬이가 말한 그 새끼냐?”
나보다는 작았지만, 충분히 또래에 비해 크다고 할 만한 남학생이 날 향해 시비를 걸어왔다.
그의 주변에는 4명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 같이 날 못 마땅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남학생을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구기며 다시 말했다.
“개새끼가 씹어? 니가 야구부면 다야?”
내가 야구부라서 뭘 어쨌다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고, 무엇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대뜸 욕을 하자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운동부라서 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이나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족쇄가 되어 누군가에게 욕을 들어야 하고, 시비를 걸어와도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시비 거는 거야?”
내 물음에 남학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날 향해 걸어왔다.
내 앞에 멈춰선 그는 자신보다 내가 키가 커서 올려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씨발, 씨발’거리며 욕을 내뱉더니 사전 예고도 없이 내 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갑작스런 주먹질이었지만 딱히 신음 소리를 지르거나, 고통에 배를 움켜쥐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태연히 서서 남학생을 바라봤다.
“이, 이 새끼가…….”
자신의 주먹질에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자 그가 꽤나 당황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빨갛게 익은 얼굴이 꽤 볼만했다.
녀석의 어깨를 왼손으로 움켜잡았다.
투수에게 악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며 아버지는 항상 악력 운동을 시켰고, 그 덕분에 악력 하나만큼은 보통 성인 남성이라 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긴, 어디 악력뿐이겠는가?
달리기, 유연성, 하체 근력, 순발력 등 모든 능력이 이미 같은 운동부 고등학생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눈앞에 있는 또래의 남학생 정도는 비교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었다.
“아악!”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녀석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함부로 주먹질을 한 손목을 비틀어 꺾어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질 것 같았기에 참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욕을 하거나, 주먹질을 하면 그땐 머리를 이렇게 눌러버릴 거야. 물론, 주먹질을 한 손도 다시는 쓰지 못하게 비틀어 버릴 거고.”
남자는 어느 순간에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대로 녀석에게 그렇게 경고를 하고는 야구부를 향해 걸어갔다.
의기양양하게 날 막아섰던 녀석들은 좌우로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내가 갈 길을 비켜주었다.
“너 이 새끼! 두고 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뒤에서 녀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이미 기가 팍 꺾여버린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 나에게 하루 중 어느 때가 가장 행복하냐고 물으면 난 주저 없이 야구부 연습 시간을 말할 수 있었다.
야구가 왜 좋냐는 근호의 물음 이후 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고, 그 결론은 그냥 야구를 하면 편안하고 익숙해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감정이 좋아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생각해봤지만, 딱히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고, 결론적으로 난 야구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월이 되자 전국중학야구선수권 대회가 시작됐다.
1학년 때와는 다르게 2학년이 되자 에이스가 될 수 있었다.
3학년 형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감독님은 2학년인 날 에이스 카드로 선택했고, 경기에 당당히 나갈 수 있었다.
혹시라도 초등학교 때처럼 학부모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항의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달랐고, 3학년 형들도 에이스 자리를 2학년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억울하고 분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대놓고 날 괴롭히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망의 첫 경기가 벌어졌다.
첫 상대는 강진 중학교로 딱히 전력이 뛰어난 팀은 아니었다.
감독과 코치는 평소대로 자신 있게 공을 던지면 된다며 내 부담감을 최대한 덜어주려고 했고, 선발로 경기에 출전하는 3학년 선배들도 파이팅을 자주 외치며 내 긴장감을 줄이려고 노력해주었다.
어김없이 경기장 스탠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동생 지아를 데리고 응원을 와주었다.
“오빠! 파이팅! 삼진!”
초등학교 3학년인 지아가 양팔을 마구 흔들며 날 응원해주었고, 그 모습에 나는 빙긋 웃고는 마운드 위에서 포수인 3학년 기찬 선배의 사인을 기다렸다.
사인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직구 하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코스로는 타자 몸 쪽 공을 요구했다.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내가 노리를 코스만 뚫어져라 노려보며 힘차게 공을 던졌다.
쇄애액- 팡!
송곳처럼 파고 들어오는 몸 쪽 꽉 찬 직구에 타자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스트라이크!”
심판의 외침에 타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몇 차례 한 숨을 내쉬더니 타자 박스에 다시 섰다.
눈빛이 날 잡아 먹을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노려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투수는 그 어떤 맹수의 타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잡아먹어버려야 하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냥꾼이어야만 하니까.
바깥쪽을 요구하는 기찬 선배의 사인을 거부하고 다시 한 번 몸 쪽으로 바짝 붙여서 직구를 던졌다.
쇄애액- 파앙!
“스, 스트라이크!”
마지막 3번째 공 역시도 몸 쪽으로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첫 번째 타자를 깔끔하게 3구 삼진.
그것도 몸 쪽으로만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가는 빠른 직구로 잡아내자 감독과 코치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상대팀 벤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경기 결과는 9:0.
5회 콜드로 가볍게 승리를 따냈다.
내 경기 성적은 5이닝 무실점, 2피안타, 무사사구, 9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더불어 7번 타자로 타석에 서서 2안타를 치기도 했다.
당연히 그 날의 경기 MVP는 내가 차지했고, 내 이름이 서서히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날 기쁘게 한 건 그날 내 최고 구속이 133Km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날 이후, 날 강속구 투수라 불러주었다.
< 『국내편 - 004』 > 끝
ⓒ 독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