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편 - 002』 >
『국내편 - 002』
“긴장 할 것 없다. 그냥 편안하게 스트라이크만 던져. 알겠지?”
감독님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경기장 스탠드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날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투수에게 제일 안 좋은 게 뭐라고?’
‘볼넷!’
‘그래! 볼넷이야. 투수는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타자를 잡는 사람이야. 그런데 볼넷은 도망가는 투수들만 하는 행동이야. 차라리 홈런을 맞더라도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넣어! 그게 훌륭한 투수야.’
‘네!’
‘투수는 뭐하는 사람이라고?’
‘타자를 잡는 사람!’
‘그래! 내일 경기에 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경기에 뛰게 되면 아빠가 했던 말만 기억하고 공을 던져! 잘 할 수 있지?’
‘네!’
경기 전날 아버지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공을 던졌고, 그 결과 꽤 많은 안타를 맞기는 했지만 볼넷은 하나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5학년 민식 선배보다 훨씬 훌륭한 투구 내용으로 인해 감독과 코치는 물론 동기와 선배들까지도 날 칭찬해주었다.
“요 녀석! 정말 배짱 한 번 좋구나!”
“그래, 투수는 그렇게 공을 던지는 거야!”
“우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3학년이 그런 공을 던질 수 있는 거야?”
“정말 우리랑 같은 3학년 맞는 거야?”
“진짜 장난 아니네! 이러다가 내년에 호영 선배 졸업하면 1선발 자리 그대로 물려받겠는데?”
“3학년 주제에 벌써부터 1선발 예약이라니… 짱 부럽다!”
“이건 말도 안 돼! 얘는 정말 천재야! 야구 천재!”
내 생에 첫 경기에서 난 ‘천재’소리를 들었고,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정말 훌륭했다면서 날 있는 힘껏 끌어안아서 잠깐이나마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그날 저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불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행복한 꿈을 꾸며 잘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후로는 경기에 뛰질 못했다.
감독과 코치들은 선배 부모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그렇게 3학년 초등학교 생활은 아버지와는 할 수 없었던 단체 훈련과 야구 규칙 등을 익히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4학년이 되면서 야구부가 왕창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감독과 코치가 학부모들로부터 뒷돈을 받았다며 학교에서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새로 부임한 감독과 코치는 실력보다는 학년 위주로 선수를 선발했고, 덕분에 4학년에 불과한 난 호영 선배가 졸업하면서 남긴 1선발 자리를 꿰찰 수 있다는 생각을 저 멀리 날려 보내야만 했다.
6학년 선배들에게 1년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야구와 중학교 야구는 그 의미가 달랐기에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야구를 배우려면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야만 했다.
그러니 6학년 선배들이 1년 내내 경기를 뛰면서 어떻게든 자신을 어필하려고 했고, 5학년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빈자리를 틈틈이 엿봤으며, 4학년은 그저 3학년을 잘 돌보거나, 5학년, 6학년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5학년이 되어 후보로 드문드문 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5학년 여름방학 때, 집으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명성 중학 야구부 코치 서대호입니다.”
놀랍게도 5학년인 날 눈여겨 본 중학교 야구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거였다.
“아드님이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아이들보다…….”
코치는 꽤 긴 시간 동안 날 칭찬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조차도 내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초천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각이 들었다.
“저희 명성 중학교로 아드님을 보내주신다면 제대로 한 번 키워보겠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명성 중학교는 항상 전국대회 4강에는 들어가는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석 고등학교와도 끈끈하게 연을 맺고 있기에 실력만 받쳐준다면 일석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일석 고등학교는 고교 넘버 원이라 불리는 고교 최강 야구부였다.
제법 유명한 프로 선수들도 많이 배출했고, 야구계 전반에 걸쳐서도 그 인맥이 상당해서 모든 중학교 선수들은 일석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에서 야구계 밥을 먹고 살려면 어떻게든 일석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고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아버지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고, 코치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다며 인사를 하고 내겐 꼭 다시 보자며 악수를 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명성 중학교 코치가 다녀간 이후부터 여기저기 바쁘게 누굴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셨고 결국 그해 겨울 날 명성 중학교로 보내기 위해 서울에서 전주까지 이사를 결정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6학년이 되어 야구부의 에이스로 활약하나 싶었던 나에게는 청천 날벼락이었다.
어머니 또한 졸업과 동시에 이사를 하면 될 것을 왜 미리부터 서두르냐며 아버지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해봤지만, 아버지는 어차피 명성 중학교로 입학하기로 결정됐으니 어깨를 소모할 필요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렇게 6학년 때는 야구부가 없는 학교에서 학교 생활을 하며 아버지와 야구를 했다.
종종 아버지가 한때 프로 생활을 했던 코치들을 데려와 2, 3일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까지 레슨을 받게 해주었는데, 확실히 비전문가인 아버지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트레이닝 방식에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몇 명의 코치들 중 나에게 특별히 잘 대해준 사람이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일이지만, 한때 한국 프로야구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왕조 시대를 열었던 대구 블루윙즈의 3선발 투수 최태식이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기에 난 그가 얼마나 대단했던 투수였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가 해주었던 진심어린 조언들은 내 가슴과 머릿속에 깊이 남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 1학년이 되기 전까지 변화구를 배우지 마라.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 그 해에는 다른 변화구는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커브만 익혀라. 커브를 마스터하면 체인지업이나, 변형 패스트볼을 익히고, 되도록 고교를 졸업하고 나면 다른 변화구를 던지도록 해라.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평균 직구 구속이 130Km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절대 변화구를 던질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직구 구속을 늘리는 것에만 신경 쓰도록 해라. 투수의 어깨와 팔꿈치는 기간과 횟수가 정해져 있는 소모품이니 항상 그 점을 명심하고 투구를 하도록 해라.”
“투수에게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무기는 직구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 역시 직구다. 변화구를 익히면 그 변화하는 모습에 흠뻑 빠져들고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헛스윙을 할 것 같지만, 한 번 간파된 변화구는 타자들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먹잇감일 뿐이다. 많은 변화구를 익혀 온갖 잔재주를 다 부려도 결국은 묵직한 직구 하나만도 못하니 네가 정말 위대한 투수가 되고 싶다면 강력한 직구, 그것도 제대로 된 제구로 무장한 직구 하나면 넌 그 어떤 타자와의 승부에서도 쉽게 지지 않을 거다.”
“투수는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 머리가 좋으면 좋겠지만, 굳이 머리가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생각을 많이 해라. 타자의 성향과 습관 등을 항상 머릿속에 기억해둬야 한다. 투수는 가슴으로 공을 던지는 게 아니라 머리로 공을 던지는 거다. 마운드 위에서 가슴은 뜨거울지라도 머리는 차가워야 하는 게 바로 투수다.”
“투수는 외로운 리더다. 상황에 따라 홀로 게임을 이끌어 나가야만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에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 의지해서도 안 되고, 누굴 의심해서도 안 된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투수가 한 발 물러서면 타자는 두 발 다가서는 존재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던지는 공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감이 결여된 투수는 절대 마운드 위에 서 있을 수가 없다. 투수라는 보직은 애초부터 타자들에 비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싸운다. 일곱 번 잘 던져도 세 번 잘 못 던지면 패배했다 불리는 게 투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억울해 할 것 없다. 타자는 세 번의 기회를 갖고 있지만, 투수는 여섯 번의 기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러설 필요가 전혀 없다.”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어찌 보면 초등부에서 에이스로 우뚝 서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운 셈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명성 중학교에 입학했다.
< 『국내편 - 00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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