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부- (39/40)

-39부-

각자의 차들이 있으니 결국 식당을 빠져나와 윤정을 데려다주는 일은 기찬의 몫으로 떨어지고, 모처럼 만날 기회를 얻은 두 사람이 그냥 헤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어쩐 일이야? 평소에는 여섯 시면 퇴근했었잖아.”

“후훗, 소라 씨가 모처럼 가게에 나왔으니 가격을 다 몰라서 할 수없이 사장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지요. 그러니까 그게 미안했는지 사장님이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하신 거예요.”

“아! 그랬겠구나. 그럼 오늘은 늦는다고 연락해 뒀어?”

“네, 아까 미리 전화해 줬어요.”

“그 인간, 요즘은 어때? 구박 안 해?”

“피...... 요즘은 저도 막 대들어요. 내가 이렇게 일을 하는 덕에 집을 건진 걸로 알고 있는데, 자기가 나를 못살게 굴면 가만히 있을까 봐......”

자연스레 삼각지로 들어선 차는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이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어 객실로 올라간다.

“그러면 제 동생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으응? 어떻게 하다니, 뭘......”

“피...... 몰라서 물어봐요?”

윤정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기찬을 흘겨본다.

“일본에 데리고 가실 거라면서요?”

“아! 그 일......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닌데 뭐...... 아까는 소라가 따지고 들어서 그냥 둘러 댄 소리였어. 그건 갑자기 왜?...... 뭐야? 벌써 얘기를 한 거야?”

“푸훗, 아뇨. 이따가 말해 줄게요.”

윤정은 그렇게 욕실로 들어가 버린다.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기찬도 천천히 옷을 벗어 내리고,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워 문다.

방안으로 퍼지는 연기 사이로 낮의 일을 떠올려 본다. 만나는 사람마다 곡절이 쌓이고 사연이 무르익게 되지만,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큰 탈 없이 지내올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곁에 포진하고 있는 수많은 여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만 해도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니, 한때나마 치기어린 생각으로 자신만의 아방궁을 꿈꿨던 것이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형마저 납치를 당해 있는 입장이니, 비록 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위안을 하면서도 내심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덧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앉아 떨어지는 순간이 목숨을 잃는 때가 될 것이라는 예감에 멈출 수도 없는 경지에 다다랐음을 체감하는 즈음이기도 했다.

“담뱃재 떨어져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윤정이 다가와 손에서 담배를 빼 간다. 서늘한 손길이 기찬의 허리 밑을 쓰다듬고 뒤이어 촉촉한 입술로 가슴을 물어간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가슴 위를 어지러이 스칠 때마다 불끈거리며 일어서는 기운은 윤정의 손 안에서 열기를 토하고 있었다.

“자기, 형수님하고 금방 했을 텐데...... 괜찮겠어요?”

“흐윽...... 그, 그럼...... 괜찮아.”

윤정은 슬쩍 기찬을 바라보고는 오물거리는 입술을 벌려 기찬의 심벌을 물어간다.

“쭈우웁......”

“흐윽......”

후끈거리는 느낌에 기찬의 상념은 산산이 부서진다. 틈틈이 쥐어짜듯 힘을 주어 밀어붙이는 그 손길 사이로 윤정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저...... 우리 사이, 동생에게 말해 줬어요.”

“으응?...... 그래서...... 동생이 뭐라고 해?”

“놀라지도 않던데요. 짐작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말만 꺼내지 못했을 뿐이지......”

“흐윽......”

윤정은 천천히 기찬의 배 위로 올라앉아 벌어진 사타구니로 손을 보내 비경의 입구를 맞추고는 서서히 엉덩이를 내리누른다.

“흐으응......”

천천히 허리를 놀리며 콧소리를 흘리는 윤정은 어느새 많이 성숙해진 듯 대담해진 모습이었다. 동생에게 자신의 치부일 수도 있는 사생활을 공개하기까지는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었다.

“후훗, 집을 건져주고, 학비며 생활비를 보내줄 때에는 말 다한 것 아닌가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죠. 아흑......”

“후욱......”

“그래서 다 사실 대로 말해 줘 버렸어요. 아학......”

기찬과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행위에 더욱 자극을 받는 것인지, 윤정은 아예 기찬의 몸을 걸터앉고 위아래로 방아를 찧듯 허리를 놀린다. 그 빠른 행위에 순간순간 빠져나가는 동혈은 아가리를 벌린 채 기찬의 시야를 채우고, 이내 또 다시 그 심벌로 채워지며 벌어지고 있었다.

“하아악......”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몸부림을 쳤는지 아득한 시간이 지나고, 땀에 젖은 윤정은 그렇게 기찬의 가슴 위에 엎어져 전율하고 있었다. 서로 맞닿아 있는 그곳은 아직도 울컥거리며 뜨거운 물기를 토해내고 그 떨림에도 윤정은 그렇게 자지러지고 있었다.

“제 동생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기찬은 천천히 손을 들어 윤정의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윤미요.”

“차윤미라...... 후훗, 그걸 왜 내게 물어?”

“피...... 여자 등쳐먹는 제비족은 아닌 줄 알고 있으니까 이런 말이라도 하는 거예요. 난 은근히 사장님 자매들이 부럽기도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는 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 주면서 그렇게 잘 지낼 수 있다는 게...... 모르겠어요.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제 동생하고 인연이 닿게 되면 잘 해 주세요. 상처 받지 않게......” 

기찬은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야위어 가녀리기만 한 그녀의 등을 쓸어줄 뿐, 내연의 연인에게 자신의 동생을 당부하는 그녀의 심경을 짐작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은 따스한 손길뿐이었다.

“자, 그럼 혹시라도 내가 일본에 가게 되면 연락해 줄 테니까 동생에게는 그렇게 미리 운을 떼어 둬. 나중이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그래요. 그럴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윤정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워준 기찬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뒤를 지키고는 다시 시동을 건다.

기관의 중년사내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이미 납치사건은 수일 전에 일어났고, 고 의원의 아들놈은 벌써 귀국해 있다는데, 자신에게 어떤 연락도 해 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불안한 노릇이었다.

“아니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야. 납치 과정에 형이 중대한 부상을 입어서 이틀 만에 의식을 회복했을 정도라면, 나중 일이 두려워서 연락을 안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무작정 기다려서만은 될 일이 아닌 것 같고......”

국내에 있다면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기찬은 즉시 방향을 틀어 이동통신사를 찾아간다.

그 일에 대해 고 의원조차 연락이 없다는 것은 전혀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아니, 자신이 지시한 일이더라도 기찬의 형이 그 지경으로 위중한 처지라면 나중 일을 고려해서라도 발뺌을 하기 위해 연락을 단절한 채 상황을 지켜보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시간 기찬은 놀랍도록 냉정을 유지한 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수사하듯 차분한 얼굴이었다. 전화기록에서 시간과 번호들을 읽어 내려가던 기찬의 눈빛이 순간 빛을 발하고 몇 몇 번호들을 짚어 위치추적을 당부한다.

“흐음...... 부자간에 최근 전화 통화를 이리 많이 했다는 건 분명히 서로 알고 있다는 말인데...... 제깟 놈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하게 지냈다고......”

빼곡한 전화번호 중에는 서로의 휴대폰 번호가 거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직원이 건네주는 기록지에는 유선전화의 주소지와 휴대전화의 최종발신지가 메모되어있었다.

“뭐야? 서울이잖아? 이런 씨바...... 턱밑에 있는 걸 몰랐으니......”

무선전화의 최종발신지도 이태원, 기록에 있는 유선전화의 주소지도 이태원의 모텔이었으니 고 의원의 아들은 이곳에 은신해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본 모양이었다.

순간 기찬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섣불리 쳐들어가서 고 위원장을 잡는다고 해도 그 뒷일이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외통수에 몰린 자신도 살아남아야 뒷일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 기관 사내들의 요구도 충족을 시켜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여보세요...... 어르신, 접니다.”

기찬은 느닷없이 고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은밀히 만나자는 요청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기찬이 안심하고 외부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방배동뿐이었으니 그곳으로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무, 무슨 일인가?”

내심 긴장한 모습을 감추려는 듯 고 의원은 태연을 가장하고 기찬의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기찬은 순간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에 옷가지들을 벗어 내리기 시작한다. 

눈치를 차린 고 의원도 곧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변해 욕실로 향하는 기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르신을 음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으응? 뭐, 뭐라고......”

기찬은 잔뜩 신경을 쓰는 듯 샤워기를 틀어 물줄기를 흘리며 혹시 모를 도청을 염려하는 듯 잡음마저 일으키고 있었다.

“기관원이라면서 제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상당히 오랫동안 의원님을 내사한 모양이었습니다. 의원님이 대선을 겨냥하고 있다고 하던데, 아마 그것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 같았습니다. 제게 의원님의 비리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 자료들을 달라고 하던데......”

“이, 이런...... 안기부 말인가? 그래서 뭐라고 했나? 누구라고 하던가?”

기찬은 의외로 낮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까발리고 있었다. 고 의원은 고 의원대로 아직 기찬의 손에 정사장면이 녹화된 자료가 있으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이었다.

“아! 당연히 저는 모른다고 잡아뗐습니다만, 그 친구들이 저를 옭아매려고 하는 탓에...... 그게 걱정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신분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옭아매다니...... 뭘 말인가?”

“사실...... 최근에 있었던 금융 사고는 제 작품이었습니다. 대출 사기사건 말입니다.”

“으응?...... 그래? 그, 그것 규모가 무척이나 크던데......”

“신문 발표와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것도 사업이라면 사업인데, 경비로 들어간 돈도 많고, 뭐, 어쨌든 그 친구들이 어르신을 내사하다가 제가 연결된 모양이었습니다. 그 덕에 그 일도 탄로가 나 버렸지요. 게다가 그간 감추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현재 보안 계통 군 수사관 지위도 있는 터라...... 그게 걱정입니다. 그간 어르신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군 수사관이라고?...... 으음...... 이것 골치 아프게 됐군. 그래......”

“그래서 말씀인데......”

“음, 말해 보게.”

“저를 차라리 그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그쪽의 사람들이 모두 어르신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닐 테니, 어르신도 인맥을 동원할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신다면 그간 제가 모아 둔 재산은 모두 어르신께서 선거운동하실 때에 풀도록 하겠습니다. 영수증도 필요 없는 돈입니다.”

“음......”

“게다가 제가 그쪽으로 건너가게 되면 정보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섣불리 제게 공갈을 치지도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세상에는 자기들 조직 내부가 곪아터진 것으로 보일 텐데...... 그리고 그렇게 해 주시면 지난번 그 비디오 자료도 어르신과의 신사협정 차원에서 깨끗이 없애 버리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나? 선거운동 자금으로 모든 재산을......”

“결국 어르신께서 그 자리로 가시면 저로서는 투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배동을 유지하자니 어쩔 수 없어서 비디오로 어르신께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긴 했지만, 계속 후원금을 드린다는 약속은 저도 지키려고 하질 않았습니까? 저, 어르신께 나쁜 감정 추호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제가 벌인 사건들, 제 치부도 모두 말씀을 드리고 있으니 추후 저를 제압하시고자 한다면 그건 언제든지 가능하신 일이 아닙니까? 전 지금 제 목숨을 걸고 어르신과 한 배를 타겠다는 겁니다. 아니면 제가 아무리 버틴다고 하더라도 결국 어르신께도 피해가 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상황은 백팔십도로 변하고 있었다. 고 의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리고, 팔을 뻗어 기찬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작 고 의원의 입장에서는 정적 때문에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자료를 거저 입수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전화위복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결코 적지 않을 기찬의 재산이 고스란히 자신의 선거자금으로 쓰일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군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기다려 보게. 내 한 번 알아봄세. 이거...... 오늘은 술 한 잔 나눌 시간도 없이 바쁘게 서둘러야 되겠구먼. 나는 바로 나가봐야 되겠네.”

“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기찬은 고 의원의 뒤통수에 대고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상황은 급반전을 이루고 있었고, 고 의원이 나가고 난 뒤, 기찬은 입가에 미소를 올리고 있었으니, 전화를 들어 김성진이라는 기관의 사내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네......”

“저, 낮에 만났던 강하사입니다.”

“오! 그래......”

“이 전화 보안유지가 되는지......”

“물론일세. 안심하고 말을 해도 되네.”

기찬은 자신과 고 의원이 나눈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려준다. 그로써 중년의 사내에게는 자신이 모종의 일을 진척시키고 있음을 알려주고, 결국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셈이니 신변보장도 받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앞으로 한 기관에 몸담고 일을 할 처지이니 행여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하하하, 자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매우 교묘한 친구로군. 자네의 안전을 그렇게 해서 보장을 받겠다는 뜻인가 본데...... 물론 내 신분은 말하지 않았겠지.”

“물론이지요. 그게 제 생명줄인데 노출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좋아, 나도 자네 뜻을 받아들이겠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우리 관계는 계속 비밀일세.”

“네, 그럼 저는 지금 바로 고 의원의 아들을 잡으러 가겠습니다.”

“어디...... 감금시킬 장소는 있는가? 고의원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곳도 노출될 수 있는 일인데......”

“네, 그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알았네. 그럼 그렇게 하세. 그 친구를 확보하는 대로 연락을 주면 일본의 자네 형도 우리가 확보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시키도록 하겠네.”

기사회생, 정작 처한 입장에서 기사회생한 것은 고 의원이 아니라 기찬이었다.

“실례합니다. 군에서 나왔소.”

차를 몰아 이태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밤이 깊어 인적이 끊어진 뒤였다. 유흥가들이 밀집한 곳을 제외하고는 과연 이곳이 이태원인가 싶을 정도로 적막함이 흐를 뿐이었다. 프론트로 다가선 기찬은 신분증을 휘두르고, 종업원을 앞세워 객실로 올라간다.

허름한 공장의 내부에는 오랜 된 먼지만이 자욱이 쌓여 있고, 그것은 곳곳에 널려 있는 기계도 마찬가지여서 사용치 않는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었다.

소공동에서 사기 대출을 진행할 무렵, 찾아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김소영 부부에게서 넘겨받은 공장이었다.

기찬은 공장 명의만 필요했었고, 그로써 사기대출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땅은 아직도 기찬의 소유였으니 이 빈 건물은 그냥 그렇게 버려진 채 이제서 적절한 용도를 찾은 듯 먼지 속 지하실은 전에 없던 부산함이 느껴진다.

눈을 가린 채 의자에 사지를 결박당한 고 위원장은 낙담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당신의 앞길을 열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전달받지 못했던 거요? 당신의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요?”

“......”

“우리 형은 어디에 있소?”

“......”

“가끔 와서 식사는 챙겨주겠소. 이곳은 지하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이오. 소리를 질러봐야 외부로 들리지 않는 곳이니 알아서 하시오.”

이상하게 기찬은 의례적인 질문만을 던질 뿐, 대답을 들을 마음도, 길게 추궁을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곁으로 다가가 가린 눈을 풀어주고는 곧장 밖으로 나가 문을 걸어 잠가 버린다.

“고 의원의 아들은 확보했습니다.”

날이 밝길 기다린 기찬은 김성진이라는 기관의 사내에게 연락을 취한다. 방배동에 있는 윤호를 불러들여 고 의원의 아들을 감시하게 하고, 몹시 피곤했는지 방배동으로 향해 취한 듯 쓰러져 바로 잠이 들어 버린다. 이제 형은 그렇게 납치에서 풀려날 것이다.

웅성거리는 소란함에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바라 본 창가로는 햇빛이 들어차고 있었다. 간밤의 일은 육체적 노동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했는지 고작 하룻밤의 일에 긴장이 풀려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잤던 모양이다.

“어머! 사장님...... 이제 일어나셨어요?”

“으응? 아니, 은진이...... 언제 귀국했어? 가, 가만...... 너도 수술한 거야? 얼굴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한 실장과 함께 외국으로 나갔던 은진이 돌아왔는지 내실로 들어와 반갑게 웃으며 기찬의 발치에 앉아 이불로 하체를 덮는다.

“호호, 네...... 코 좀 세우고, 눈도 조금 키웠어요.”

“하하, 그래...... 목소리가 아니라면, 나도 언뜻 보곤 몰라보겠는데......”

“아유, 그런데 무슨 늦잠을 그렇게 주무세요? 지금 오후 두 시예요.”

“으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자, 이리 와 봐. 모처럼 은진이 살 냄새 좀 맡아 보자.”

“아이, 차암......”

은진은 기찬의 품으로 쓰러지며 체향을 풍기고, 기찬은 깊은 호흡으로 은진의 젖무덤에 코를 박는다.

“흐음...... 한 실장은 어떻게 하고 있어?”

“네, 사장님이 깨시면 전화해 달라고 하곤, 바로 종로로 나갔어요.”

“이런...... 비행기에 시달렸으면 피곤할 텐데, 좀 쉬지 않고...... 그래, 얼굴은 많이 고쳤나?”

“네, 턱선 마저 깎아서 사장님도 못 알아보실 거예요. 훨씬 미남자가 되어 버렸어요. 호호호......”

“하하, 이거 은근히 배가 아픈 걸......”

“자, 이제 일어나서 식사하셔야죠.”

“난 지금 밥보다 다른 걸 먹고 싶은데...... 후후후......”

천천히 손을 뻗어 은진의 엉덩이를 거머쥐고 힘껏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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