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부- (37/40)

-37부-

“자, 누님도 따라 나서.”

“어, 어딜......”

“어딘 어디야? 고 의원 만나러 가는 거지.”

“어머! 거길 나도 가야 돼?”

“후훗...... 왜, 고 의원을 보려니 낯이 서질 않을까 봐 그러는 거야?”

“아, 아무래도 그렇지...... 시아버지였는데...... 자기 때문에 몸까지 섞어 버렸고......”

“어차피 누님도 이혼을 하기로 했으니, 속히 결정을 내려야 할 것 아냐? 고 의원이 나를 왜 만나자고 하겠어? 당신 아들이 구속되어 있으니까 그걸 풀어달라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이쯤에서 거래를 해야 할 것이고, 누님이 무리 없이 이혼하는 것도 그 조건에 포함을 시켜야 되지 않겠어?”

“그래도 나는 안 만나고 싶은데...... 이미 내가 바람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위자료를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에......”

“어허! 누님, 벌써부터 서방님 말씀을 안 들을 거야?”

“피...... 서방은 무슨...... 나만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장난처럼 말을 하면서도 기찬이 금주를 앞세워 채근하는 것은 이제 확실한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한 포석일 것이다. 더 이상 그녀를 돌봐 줄 남편이나 시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니 그녀가 오로지 의지하고 신변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시위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하하, 자, 어서 나갑시다. 이 기회에 아주 누님 짐도 찾아서 이사를 해야 할 것 아냐? 이제 애경이가 아파트를 얻어서 나갔으니까 누님이 그 자리로 이사를 들어가서 지영 누님과 함께 지내면 될 것 같은데......”

“지영 씨? 레스토랑 하는 지영 씨...... 말이야? 거긴 어딘데......”

“사당동...... 방배동하고도 가까우니까 여기서 지수 누님 눈치 보며 있는 것보다는 방배동을 오가는 것도 거기가 오히려 편할 거야. 말 잘 듣는 연경이도 있고......”

“알았어요. 그럼...... 이삿짐도 자기가 챙겨 줘야 돼요. 나 혼자서는 눈치 보여서......”

“그래, 걱정하지 마. 방배동에 있는 윤호를 시켜서 이사 시켜줄 테니까......”

실상 기찬이 고 의원을 만나러 가면서 금주를 대동하려는 것은 고 의원에게도 공식적인 입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더 이상은 한금주가 당신의 며느리가 아니며, 추후로는 추억을 빌미삼아 넘볼 수 있는 여자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으니, 속 모르는 금주는 날아갈 듯 가벼운 옷차림을 트렌치코트로 감싸고 기찬의 옆 좌석으로 몸을 싣는다. 

고 의원은 이미 끝나 버린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기찬을 맞아들인다. 기찬의 당부가 있었을 테니 이미 잘 차려진 술상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길게 펼쳐져 있었고, 이젠 당연한 일이겠지만 금주는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고 의원의 눈치를 살피며 기찬의 곁에 내려 앉는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별고...... 없으시지요?”

“오, 오냐...... 어미도...... 잘 지냈느냐?”

그러나 아직도 그 관계라는 것이 민망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니, 침묵처럼 무거운 인사가 오고 간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겐 나도 면목이 서질 않는 일이니......”

기찬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두고 볼 리 없는 일이니, 이내 정색을 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자, 자...... 어르신. 한 잔 하시지요.”

이제 고 의원의 입장에서는 고압적인 관계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어느새 바뀌어 버린 자신에 대한 호칭조차도 문제 삼지 않는 듯 그저 마주 술잔만 내밀 뿐이었다.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는지......”

“아! 강 사장...... 내 자식 문제 말일세. 여러 가지로 자네에겐 염치없는 일이 되겠지만, 내 모른 척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어떻게 하겠나? 자네가 좀 선처해 주게나. 어차피 이리 되고 말았으니 그 아이가 더 이상 자네를 곤란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나?”

고 의원은 자식을 위한다기 보다는 금주의 남편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점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추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을 테니 그것은 자신의 정치생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가뜩이나 자신의 치부를 거머쥐고 있는 기찬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한 화해를 이끌어 내야 할 일이니, 그것만이 오늘의 주요관심사였다.

“하하하, 아! 그거야 물론 그렇게 해 드릴 생각입니다. 기실, 오늘의 방배동 사업장이 어르신과 고 위원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그 주객의 위치가 바뀌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드님께서 그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서...... 제가 동의를 해 드릴 테니 어르신께서 꺼내 주십시오.”

“아!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자, 이걸 보시겠습니까?”

기찬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그 안의 디스켓을 DVD플레이어에 삽입시킨다.

“이, 이건......”

“네, 지난번에 녹화해 두었던 내용입니다. 제가 어르신에게 드리는 말씀이 전혀 허언이 아니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디스켓에 들어있는 내용은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 모처에 이미 올라가 있고, 제가 수시로 조작하지 않는다면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엔 인터넷으로 배포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감상해 보시죠.”

“아, 아니...... 이 사람아. 그럴 필요 없네. 이젠 내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나? 자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그러나 이미 화면에서는 낯 뜨거운 동영상이 돌아가며 끈적이는 신음소리들이 모두의 귓전을 자극한다. 고 의원은 물론 금주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기찬의 처분만 바라는 꼴이었다.

“네, 그 일은 저도 약속할 테니 걱정은 마십시오. 제 신상에 별 일이 있지 않는 한, 세상에 공개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천만 원입니다.”

“이건...... 무슨 돈인가?”

“언젠가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처음에 약속을 맺은 그대로 어르신을 후원하는 정도의 금액은 앞으로도 계속 지원해 드릴 겁니다. 지금 옆에 있는 누님도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저는 어르신께 청탁하고자 하는 바도 없이 선의로 다가섰을 뿐인데, 오늘의 결과를 이끌어내신 건 어르신과 아드님 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면, 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 고맙네. 강 사장......”

“이제 아드님이 석방된다면, 다시 정치 일선에서 뛸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어르신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니, 본인이 싫다고만 하지 않는다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제가 적절한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것도 모두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그 덕에 제가 사업파트너로서 금주 씨를 만나게 된 셈이니 보답이라면 그리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제 금주 씨는 어르신 댁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입장이니, 그 전에 어르신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으음, 그, 그렇겠지...... 그렇게 해야 되겠지. 그래, 내가 해 줘야 할 일이 무슨 일인가?” 

“아드님을 만나서 금주 씨와의 합의이혼을 이끌어 주십시오. 구차한 말씀은 올리지 않아도 어르신께서 이유를 더 잘 알고 있는 일이니 적절한 이유를 찾아서 어렵지 않게 처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렇게 함세. 그 일은 조금만 말미를 주면 내가 바로 처리를 해 주겠네.”

“네, 그러면 금주 씨의 짐은 이 자리를 파하는 대로 바로 꺼내서 이사를 시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추후로는 어르신께서도 금주 씨를 제 여자로, 제 사업 파트너로서 인정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으음, 무,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 어쨌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잘 부탁하겠네.”

“그렇습니다. 까짓 이혼이야 우리만 조심한다면 외부로는 드러날 일이 아니니, 남들은 여전히 아드님과 금주 씨가 부부라는 것을 의심할 리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어르신께서 정치일선에서 활동하시는 데에도 유리할 것이고, 여전히 금주 씨와 함께 하는 제 사업을 변함없이 후원해 주셔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 알겠네. 그, 그렇다면 손주 아이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흐음...... 지금 중학생이라고 했던가?”

기찬은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인지 문득 금주를 돌아보고, 금주는 자신의 처지에 어찌 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기찬의 처분만 바라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치맛단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십시다. 어르신....... 중학생 정도 되면 이미 다 커 버린 아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부모가 이혼한 것을 사실 대로 말 해주되 어르신이 맡아 주시고, 필요할 때는 서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이 어미가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네, 저도...... 그렇게......”

자신의 처지에 아이를 맡아 기를 수도 없었으니 금주의 동의로 그렇게 회동은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노회한 정치가, 고 의원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기찬으로서도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었다. 지금은 비록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채 들어오고 있다지만, 사정만 바뀐다면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잇몸을 드러내고 들이닥칠 테니 치고 빠지는 거래를 함에 있어서도 몹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 그렇다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어르신과 합의를 이끌어 냈으니, 이젠 거나하게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원하신다면 오늘 이 사람과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어, 어머! 기찬 씨......”

“음, 으흠...... 사람도 원...... 아, 아닐세.”

금주와 고 의원은 느닷없는 기찬의 제안에 서로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는 등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기찬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로써 자신이 이미 두 사람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 기득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뭐, 인륜이니 도덕 따위는 다 걷어치웁시다. 기분 좋은 술좌석에 사내와 계집만이 있을 뿐이니 그런 허울쯤은 훨훨 벗어 던지고, 이젠 동업자로, 그리고 어르신의 정치적 후원자로 자리매김을 하는 자리에서 뜻 깊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자, 저는 나가있을 테니 어르신은 지난번 못 다한 회포를 푸십시오.”

“음, 흠......”

“뭐, 아직은 아드님과 이혼을 하기 전이니만큼 이 시간만큼은 며느리라고 생각하셔도 좋고, 제 여자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단, 금주 씨의 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이 될 테니 체면 따위 앞세우지 마시고, 후회 없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어르신이 자리를 마치는 대로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흠......”

고 의원은 헛기침만 할 뿐이었고, 기찬은 등을 돌려 방을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금주를 돌아보며 당부를 해 둔다.

“누님, 누님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확실히 마음을 정리해야 합니다.”

“......”

금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이미 고 의원과는 살을 섞어 버린 사이였으니 이제 와서 발을 뺀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두 말도 없이 기찬은 방을 빠져 나오며 소리 내어 문을 잠가준다.

“후후훗......”

미소 짓는 얼굴로 기찬은 마담 최강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고, 마담은 이내 바쁜 걸음으로 이층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이곳도 카이로와 마찬가지로 영상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재차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정사장면을 녹화해 두라고 지시해 둔 모양이었다.

“호호, 사장님...... 이미 녹화해 둔 게 있다면서 왜 또......”

강희는 이 층에서 내려오면서 기찬에게 다가와 의아한 점을 묻는 모양, 팔짱을 걸고 있었다.

“후후, 생각해 봐. 지난번에는 서로 안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사실을 감추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게 뻔히 드러나잖아? 그렇지만, 이번에는 서로 두 눈 뻔히 뜨고서 배꼽을 맞춰 나갈 테니 그건 누가 봐도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의 불륜이고, 패륜 아니겠어? 이렇게 해 둬야 비로소 확실히 못을 박는 셈이지.”

“아유, 하여튼 우리 사장님은 못 말려요. 호호호......”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기찬의 변태적인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기왕지사 인연을 맺게 된 고 의원과의 관계는 이제 스스로 접고자 한다고 해서 접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 보좌관 등 그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솎아내지 않고서야 그들에게 이미 드러나 있는 자신의 치부 역시 가릴 수 없는 취약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나와 버린 셈이었고, 고 의원을 보다 확실히 장악해야만 고 의원의 주변 인물들 역시 통제가 가능할 테니, 이제 기찬과 고 의원은 과연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누가 먼저 떨어지는가가 서로에게 관건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기찬 씨, 드디어 적당한 땅이 나왔는데......”

“아! 그래? 그러면 어서 그 친구한테 연락해서 사전 조율을 좀 해 두지. 일이 잘 되면 한 몫 단단히 챙겨 준다고 하고...... 수 일 내로 찾아 갈 테니까 서류 따위나 좀 미리 챙겨두라고 해.”

“네, 그럴게요.”

“그래, 땅 값은 얼마나 나가던가?”

“삼백 오십억이라고 하던데 잘만 하면 삼백억 원까지는 낮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애경의 전화였다. 금주의 일을 마무리 지어 둔 기찬은 노량진 자택으로 돌아와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기찬의 주변은 잘 다져진 기반으로 인해 기찬의 관리가 없어도 알아서 돌아갈 정도로 안정이 되어 있었다. 모처럼 한가한 마음으로 그동안 소원했던 소라, 보라 자매와 어울리는 시간을 보냈던 기찬에게 다시 일거리가 찾아드는 모양이었다.

애경에게 지시를 해 둔 일이라면 종전 그녀와 내연 관계였던 공무원이라는 사내에게 뭔가 부탁을 해 두라는 것일 테니, 그녀의 주특기인 부동산이나 건축물에 관한 모종의 작업을 준비하는 것일 게다. 

기찬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를 양보한다고 해도 그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던 영진의 사장을 그냥 모른 체 지나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고 의원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정립이 된 상태였으니 재차 영진과 거래를 주선하라고 압력을 행사한다면 나름의 방법은 모색할 수 있었겠지만, 갑자기 닥친 거래중단 요구로 인해 그간 겪었던 경영의 고충은 지금도 가구공장을 방문하기만 하면 떠오르는 고약한 추억이었으니 기찬은 뭔가 다른 일로 영진 사장을 골탕 먹이려는 모양이었다.

“아, 아....... 뭐, 일부러 무리해 가면서 땅 값 낮추려고 하지 마. 그것보다는 땅을 잡아 두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니까 가격을 후하게 매겨주면서...... 반드시 매입할 거라고 분위기나 잔뜩 띄워 두라고...... 괜히 다른 작자에게 넘어가면 기껏 준비해 둔 일이 허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

“호호호, 알았어요. 그럼 계약은 언제 하는 것으로 할까요? 이게 덩어리가 커서 제가 혼자 물고 늘어지기에는 어쩐지 그쪽에 믿음을 실어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흐음...... 그렇겠지. 덩어리가 삼백억짜리를 당신 혼자 덤빈다는 게 어쩌면 믿음을 줄 수 없을 테니까...... 당신 전 남편 패거리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떨까? 그 치들도 모두 부동산 업자들이니...... 지금 한 실장이 외국에 나가 있어서 누구 이름으로 해야 좋을지 딱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 수 일 내에 연락해 볼 테니까 가능하다면 그 패거리들하고 자주 만나서 친분이나 쌓아 두라고......”

“전 남편을?......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은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은데......”

“까짓 것...... 돈 되는 일이라는데 자기도 거절하지는 않을 거 아냐? 물주는 분명하니까 일단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못하도록 분위기만 띄워달라고 해. 패거리 동원해서 그렇게만 해 주면 나중에 수수료 후하게 챙겨 주겠다고 하고......” 

“그래요. 그럼...... 한 번 알아나 볼게요.” 

땅 값만 시세 삼백오십억 원을 호가하는 대단위 택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이었다. 그곳에 아파트를 짓게 된다면 엄청난 규모의 건축 사업이 될 것이지만, 애경과 주고받은 대화를 미루어보아 정상적인 절차를 밟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 애경의 전 남편을 끌어들여 일을 추진하자니 알 수 없는 감회가 어리기도 한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자신은 놀라우리만치 입지가 변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부동산 사장은 어찌 지내고 있을지를 그려보니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어쩌다 보니 공교롭게도 애경의 내연의 남자와 아울러 그녀의 전 남편까지 끌어들여 일을 꾸미게 된 것이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요즘 건설 경기가 좋다고 해서 그 쪽을 알아 봐 달라고 누구한테 부탁을 해 뒀거든......”

소라였다. 이미 기찬과 결혼하기로 양가에서 내정이 된 뒤로는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연애를 즐기는 입장이니 낮으로는 노량진 본가를 오가며 한가한 데이트를 즐기는 편이었다. 이미 자신의 언니 보라와도 나름의 묵계가 정해져 있는 듯, 가뜩이나 해외로 출장을 가고 없는 형부 때문인지 최근에는 언니와 함께 왔다가, 먼저 볼 일이 있다며 지리를 피해 주기도 하는 등 보라를 배려하기도 해 기찬을 흐뭇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건설?...... 자기, 지금도 가구 사업을 벌이고 있으면서, 그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거야? 거기다가 종로 일도 봐야 하면서......”

“후후, 괜찮아. 할 건지 안 할 건지는 아직 결정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가구공장이야 김 비서가 알아서 돌리고 있으니 나야 신경 쓸 일도 없는데, 뭐...... 그리고 자꾸 뭔가 일거리를 찾아서 해야 나중에 우리 예쁜 마누라들 먹여 살릴 거 아냐? 히힛!”

“뭐야? 마누라들?...... 하여튼 변태 같은 게 재주는 좋아요. 피......”

“으응? 얘가, 얘가...... 서방님한테 변태라니......”

“야! 그럼 네가 변태지 아니니? 솔직히 말해 봐. 며칠 전에도 내가 가고 난 뒤에 언니랑 같이 잤지?...... 그래, 안 그래?...... 말해 봐. 말해 봐.”

“으응?...... 킥킥...... 그래, 잤다. 잤어......”

기찬은 드러누운 채 소라의 허리춤을 끌어안아 얼굴을 허리 뒤로 감추고, 그런 기찬을 소라는 마구 꼬집어 대며 행복한 모습을 연출한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매간에 활로를 찾은 것이었으니 누구라서 나무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언니가 걱정이 돼서 죽겠어.”

소라는 한동안 기찬과 장난을 치다 말고,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고 기찬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형수가?...... 갑자기 왜?...... 걱정하지 마. 우리가 모두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아니, 바보야. 그게 아니고...... 변태 같은 게 매일 한다는 게 그 소리뿐이야.”

“그럼 뭔데?......”

“형부가 전화 연락이 안 된다고 한참 걱정을 하더라고......”

“참 나...... 걱정도 팔자다. 일이 있어서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겠지.”

“사무실에서도 출근을 안 했다고 하던데......”

“그래? 무슨 일이지? 술도 잘 안 마시는 사람이...... 걱정하지 마. 내가 내일 그 회사에 한 번 찾아 가서 알아 볼 테니까...... 야, 그래도 두 자매가 모두 형 걱정만 해 주는 것 같아서 은근히 질투가 나는데......”

“으이그, 이 짐승아...... 꼭 생각한다는 게 죄다 자기 같은 줄만 알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그 짓만 생각하고 사는 줄 아니?”

“하하하, 그러니 어쩌겠냐? 사람이 다 자기 생긴 대로 살아야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엄마야! 저, 저리 안 가? 야! 이 망나니야......”

기찬은 어느새 소라의 치마폭을 들추며 머리를 들이밀고, 기겁을 한 소라는 뒷걸음을 치며 방바닥을 굴러 기찬을 떼어내려 몸부림을 친다.

“오, 오늘은 안 된단 말이야. 이 밥통아...... 차라리 언니를 오라고 해.”

“으응?...... 그, 그날이야?”

“아휴, 이런 걸 앞으로 남편이라고 믿고 살아야 하니? 내가......”

“히히히......”

“자기, 오늘은 카이로에 안 나갈 거야?”

“카이로?...... 이따가 해 떨어질 때쯤 나가 봐야지. 왜?”

“왜는 뭐가 왜야? 변태 같은 애인 바람이라도 못 피우게 하려면, 얼른 언니라도 대령을 해야 하니 내가 가구점에 나가있으려고 하지.”

소라는 정말 남영동으로 갈 생각이었는지 벌써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었다. 기찬은 따라 일어서 소라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고마워. 소라야...... 네가 이렇게 잘 이해해 줄 거라곤 사실 기대도 못 했는데......”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져 버린 기찬의 목소리에 소라는 의외라는 듯 거울에 비친 기찬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주 미소를 지어준다.

“뭐, 어떻게 하겠니? 이제 와서 얘기지만, 사실은 나도 자기랑 결혼하기로 한 것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언니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기찬 씨, 너...... 본마누라가 누구인지조차 헛갈려서는 안 돼.”

“아! 아야...... 야! 알 터져......”

소라는 몸을 돌려 기찬의 심벌을 힘껏 움켜쥐어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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