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부- (29/40)

-29부-

“저...... 기찬 씨......”

“응? 왜......”

“나, 내일 퇴근하고 몇 시간만 외출하면 안 될까?”

나애경, 기찬이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부동산의 사장 부인이었던 애경이 이젠 기찬의 그늘에서 생활하면서 그 곁에 들어붙어 교태를 흘리고 있었다. 잠자코 집에만 있으면 아파트를 사주겠다는 기찬과의 약속으로 외출을 금지당하고 있었으니 타고 난 끼를 발산하지 못해 요즘은 몹시 괴롭기도 할 터였다.

“후훗, 그럼 이제 아파트는 포기하는 거야?”

“아이 차암...... 조 사장은 자기가 소개해 줘 놓고 못 만나게 하면 어쩌자는 건데...... 그러지 말고 나 외출 좀 하게 해 줘요. 요즘 사무실 손님 받는다고 고생도 많은데......”

“그게 다 애경이, 너...... 아파트라도 사 주려고 그러는 거니까, 까불지 말고 집에 있어.”

“피...... 그거하고 아파트하고 무슨 상관인데......”

“조금만 기다리면 영감이 몸이 달아서 내게로 연락이 오게 돼 있으니까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기다려. 그러면 영감을 설득해서 네 명의로 아파트라도 한 채 장만하라고 할 테니까......”

“어머! 그러면 그게 조 사장이 사 주는 거지, 자기가 사 주는 건가?”

“허헛, 참...... 그러면 애경이 네가 조 사장한테 아파트라도 한 채 얻어낼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좋아, 그럼 나하고 했던 약속은 없었던 걸로 하고, 네가 직접 추진해 봐.”

“어머머!”

“이 바보야. 네가 어찌 어찌해서 조 사장에게 아파트라도 한 채 얻어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 때부터 너는 그 영감 시녀처럼 살아야 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아니면 꼼짝없이 들어붙어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내 말대로 하면 똑같이 집이 한 채 생기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난다든지, 얼마든지 네가 영감을 좌지우지하면서 네 생활을 할 수가 있단 말이야. 그런데도 그게 그저 똑같은 아파트라고 여겨지니?”

“......”

“누가 뭐래도, 그리고 네가 어느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있어도 애경이가 내 여자라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내가 다 너 챙겨주려고 그러는 거야. 너 손해 보는 일은 없게 할 테니까 잠자코 내 말대로만 해. 이제 애경이...... 내 여자 하기 싫은 거야?”

“피...... 또 협박이다. 알았어. 그럼 자기가 끝까지 책임지고, 만약에 조 사장이 안 사주면 그 때는 자기가 사 줘야 돼. 알았죠?”

“그래,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봐.”

거실 소파에 앉아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던 애경은 그렇게 제풀에 기찬에게서 떨어지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영은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연경이는 자나?”

“피, 직접 가서 보시지, 왜 물어 보세요? 제가 가서 그 방에 잠자리라도 꾸며 드릴까요? 서방니임......” 

“후훗, 쓸 데 없는 소리. 이삿짐 정리한다고 피곤할 텐데......”

“참! 그러면 연경이가 살던 그 집은 이제 완전히 넘어온 거예요?”

“응? 하하, 지은 죄는 있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으니 자기가 어떻게 하겠어? 정식으로 고소, 고발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여 버린다고 위협을 하는데...... 내일 업자한테 연결하라고 벌써 애경이한테 서류 넘겨줬어.”

이제 당면한 일은 하숙집처럼 오고 갔던 윤정의 아파트에서 철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집에서 형수 보라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고, 원조교제를 하던 수혜도 그곳에서 안을 수 있었다. 금주의 남편에게 정, 재계의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청탁을 하기 위해서는 아파트 전세 값 정도를 아까워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지만, 윤정과의 관계, 그리고 그곳에 있음으로 해서 처음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던 지영과의 관계를 떠올려 봐도 아까울 것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여보세요?“

“아! 형수......”

아침 일찍 보라의 전화가 걸려온다. 워낙 늦잠을 자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기찬으로선 부담스런 시간이었으나, 시계를 바라보니 가구점으로 출근을 하자마자 걸어온 것으로 짐작되는 전화였다.

“네, 어제 소라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바로 전화할까 하다가 소라 눈치가 보여서 그냥 바로 집으로 가는 바람에 전화를 못했어요.”

“아! 그래, 소라는 뭐라고 하던데......”

“처음에는 펄쩍 뛰었지만,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모두 솔직하게 말해 주고 나니까, 자기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죠. 뭐, 어떻게 하겠어요? 그럼 이 언니가 혀 깨물고 죽기라도 했으면 좋겠냐고 막 따지고 들었죠.”

“풋, 그럼 그 박 사장인가 하는 인간 이야기까지 다 한 거야?”

“할 수 없잖아요. 그게 사실인데..... 계집애, 그래도 형부를 생각해서 기찬 씨하고는 그만 관계를 끊으라는데,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나마 그 때, 자기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몸 버리고 지금까지도 그 끔찍한 인간이 시키는 대로 시달리고 있을 게 당연한 일 아니냐고 했더니 소라도 더 이상 말은 못하더라고요.”

“으음......”

“어쨌든 이제 앞으로 기찬 씨한테 그 문제로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자기, 맘 변하면 안 돼요? 알았죠? 마지막엔 소라도 할 수 없었는지 기찬 씨를 만나더라도 형부나 다른 사람 모르게 조심하라고만 하더라고요.”

“아! 그랬어? 그럼 다행이고...... 하하하, 그럼 소라 시집갈 때 내가 뭐, 괜찮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 줘야 되겠는데......”

“피! 자기가 술집에서 얼마나 번다고...... 괜찮아요. 어제 그 신랑감 가족들하고도 이야기가 잘 돼서 서로 검소하게 치르기로 했어요. 아유, 우리 제부자리 마음에 들더라. 나중에 집에 한 번 초대해서 형하고도 소개시켜주기로 했으니까, 그 때 자기도 와서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해요. 그렇게 한 번 자리를 같이 하고 나면, 소라도 별 무리 없이 잘들 지낸다는 것을 보고 안심할 거 아니겠어요?”

“그럴까? 그래, 그럼 보라가 나한테 미리 전화를 해 줘.”

“그래요. 그럼 나중에 봐요.”

기찬의 붉은 색 지프가 노량진 골목 비탈을 따라 빠져나오고 있었다.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연결해 둔 채, 윤호와 통화를 하고 있었으니 혹시라도 모를 일, 소라의 주변을 감시케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인마...... 네가 원래 계집애들 뒤로 부려먹으면서 감시를 하고 미행을 하는 게 전공 아니었냐? 지금 불러 준 주소로 찾아가면 거기가 우리 사돈댁이니까 내가 말한 대로 잘 따라붙으란 말이야. 그 상대 남자란 놈이 사기꾼이라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즉시 내게 연락을 해야 하고...... 알아들었어?”

윤호와 통화를 마친 기찬은 이내 윤정에게 전화를 넣고 신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윤정 씨, 나야......”

“어머! 네...... 안녕하셨어요? 지금 오시는 거예요?”

동생이 급하게 돈이 필요했을 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돈을 전해 준 기찬에게 마음이 열린 것인지, 남편이 거실에 버젓이 있음에도 극한을 치달리는 오르가즘을 맛보게 해준 것에 마음이 흔들린 것인지 의외로 윤정은 살가운 목소리로 기찬의 방문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 그건 아니고...... 왜? 나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어머! 누가 그렇대요? 피......”

“하하하, 사실은 내가 방을 빼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어머! 왜요? 아직 저희들 돈도 마련되지 않았는데...... 어머! 그럼 혹시 도망간 사람을 잡은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기찬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사회구조라는 것이 그렇게 물리고 물려서 서로간의 인맥을 동원하다 보면 사해가 동도요, 가족, 친지가 아닌 사람이 없으니 돈만 돌려받고 그만 소를 취하해서 형사사건 자체를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준다.

“......”

“윤정 씨,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 자기하고 나 말이에요.”

“후훗, 왜?...... 이제 내가 사라져 주면 윤정 씨도 속이 다 시원할 텐데...... 안 그래?”

“아이, 장난치지 말고요. 으응?”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

“어떻게요?”

“나중에 내가 집으로 찾아 갈 테니까......”

기찬은 주절주절 나름의 계획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신도 윤정과의 관계에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을 생각은 없었으니 자칫 헤어짐을 예감하고 서운함을 표하는 윤정에게 취직을 제안한다. 이제 소라가 결혼준비로 가구점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 자리에 윤정을 앉혀두면 보라를 만나기도 수월할 뿐 아니라, 윤정도 몸을 빼기가 한결 수월한 일이니 번듯한 직장에 그녀의 남편이 보기에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알았지.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어? 가구점에는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바로 채용될 거야. 전화해 둘 테니까......”

“네, 알았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가 볼 테니까 전화 꼭 해 두세요.”

“그래...... 남편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전화해 주고......”

“네......”

비록 강간처럼 맺어진 관계였지만, 자신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구는 기찬에게 매료되었던 듯, 여고생, 그것도 자신의 친조카라고 알고 있는 아이까지 잠자리로 끌어들이는 패륜이라는 것이 살아오면서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을 그녀에겐 거침없는 쾌감으로 각인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잊지 않고 보라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채용을 당부한다. 윤정과의 관계는 뒤로 감추고, 보라를 편하게 만나기 위해 부랴부랴 구한 사람이라고 설명하니 보라가 거절할 리 없는 일, 기찬에게는 유유자적 휘파람만 나오는 일이었다.

“왁! 누님, 오래 기다렸어?”

“어, 어머! 기찬 씨...... 칫! 아유, 뭐예요? 애들도 아니고...... 어제는 눈길도 한 번 안 보내고 그렇게 그냥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한금주였다. 그녀의 남편에게는 미국에서 올 아파트 값을 건네주기로 하고, 그 대신 자신의 사업에 투입시키기로 했으니 이제 그 아내 금주를 방배동으로 불러내 일감을 맡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자기, 차는?......”

“으응, 저기 골목 안에 주차해 뒀어. 누님이 차 안에 있는 것 같아서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하하하...... 자, 들어갈까?”

“으응, 그런데 나한테 무슨 일을 맡길 거라면서......”

금주는 고개를 숙여 차에서 빠져 나오고, 기찬의 뒤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후훗, 누님하고 나하고 할 일이라는 게 뭐 따로 있나? 그 일이지......”

마당에 들어서자 기찬은 슬그머니 금주의 엉덩이를 거머쥐고, 금주는 눈을 흘기며 팔짱을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 장난치지 말고...... 무슨 일인데......”

“이 집...... 말이야. 이제 시설 개수를 해서 슬슬 영업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냐? 뭐, 설계나 건축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니까 누님이 나 대신 움직여서 좀 일을 꾸며보라고...... 그간 그런 계통의 사람들도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 아냐?”

“그럼 전적으로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야?”

“그래, 나야 돌아볼 시간도 없을 테니까 카이로 마담하고 상의하면 답이 나오지 않겠어?”

“음...... 호호호, 그래요. 알았어요. 저한테 맡겨 두세요.”

“이제 사람들도 대강 준비되어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공사를 마무리 지어야 돼. 시간이 곧 돈이라고......”

“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 오랜만인데 어서 가요.”

“가긴 어딜......”

“아이 차암, 삼각지......”

“후훗, 나 급한데 여기서 그냥 하면 안 될까?”

“어머! 이 먼지 구덩이에서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까짓 거 선 채로 하면 되지. 안 될 게 뭐 있어.”

“어머! 안 돼요. 지난번 호텔 숲속에서 그러고 난 뒤 다리 아파 혼났단 말이에요. 어서 가요. 빨리...... 자기 아니면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뭐예요? 지금......”

“후훗, 왜? 위원장도 덩치가 그만하면 제법 힘 좀 쓸 텐데......”

“아유, 말도 말아요. 덩치만 산만 하지. 아무 데도 쓸 곳이 없다니까......”

“참 나...... 그러면 차를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니까, 각자 차를 타고 가야겠는데...... 먼저 도착하게 되면 주차장에서 기다려. 나도 지금 출발할 테니까......”

“호호, 네. 낭군님..... 빨리 오셔야 돼요. 쪼옥......”

운전하는 손끝에는 아직도 매끈거리는 치마의 감촉이 묻어나는 듯, 바쁜 와중에도 몸만은 금주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한껏 치장을 하고 나온 금주를 보니 대학시절, 여행을 떠날 때 만남의 광장을 경유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만남의 광장이라...... 후후후, 삼각지가 나에겐 만남의 광장이지.”

고속버스가 휴게소에 잠시 정차한 사이, 화장실도 가고 군것질거리도 구입하는 것은 통과의례이기도 하니, 승객들이 제각기 번잡하게 오고 가는 사이, 기찬은 담배도 필 겸 어슬렁거리다가 멋들어진 승용차에서 미모의 여자가 내리는 것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주차할 자리도 많은데 장기주차를 하기라도 할 것처럼 구태여 건물 뒤까지 돌아와 구석진 자리에서 내리는 것이 기찬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었다.

“그 여자 미모도 제법이었지......”

나이라는 것은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얼굴에 나타나는 법, 누가 봐도 유부녀였을 그 여자는 휴게소 앞으로 한참을 걸어 나와 어딘가를 두리번거리고, 이내 들어서는 승용차에서 손짓을 하자 총총걸음으로 그 차에 오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각자의 차를 타고 와 엔조이 후에 각각 헤어지는 커플이었을 것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추적자를 감시하거나, 남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만남의 광장이라는 곳은 아주 적격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기에 이른다.

“후후, 이름도 누가 지었는지 아주 제대로 지었어. 만남의 광장......”

이런 저런 엉뚱한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남영동을 지나게 되고, 문득 시선을 던져 형수 보라의 가구점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으응? 저, 저......”

가구점에서는 이제 막 소라가 맞선을 봤다는 사내 녀석과 팔짱을 걸고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소라 역시 기찬과 동갑이니 여자 나이로 적은 나이는 아닌 것, 이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아무리 중매를 통해 만났다고 하더라도 젊은이들이니 결혼 전까지 서로를 알아가는 데이트는 필수 코스, 수줍은 듯 부끄러운 듯 함박웃음을 머금고 녀석과 함께 가고 있었다.

슬그머니 길가에 차를 붙이고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어디서 구했는지 윤호 녀석이 오토바이로 따라붙는 것이 눈에 들어와 기찬은 웃음을 흘리며 이내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흐읍, 흐으음......”

가슴 밑으로 푸르스름하게 실핏줄이 선명한 것은 그만큼 금주의 젖가슴이 투명한 때문일 것이었다.

“아학! 좋아......”

이젠 이미 성장한 자식에게도, 식상한 남편에게도 더 이상은 필요 없는 물건인지 모르지만, 기찬은 이 시간 그것을 매우 소중히 다루고 있었고, 단숨에 배에 타고 올라 중량감만 실어놓고 가는 남편과는 달랐을 테니 금주는 벽에 기댄 채 기찬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숨을 넘기고 있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커튼의 빛깔 때문이었을까. 상아빛마저 은은한 금주의 피부에는 장미향이 스며있었다.

“아이, 우리 씻고 해. 땀났을 텐데......”

“아니, 이대로가 좋아......”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가지도 못하고, 엉겨 붙은 두 사람에게 세상의 예절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신을 몽혼지경으로 몰아가 주는 기찬이었으니 누구라서 자신에게 그런 감동을 선사할 것인가.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가 없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길을 가는 아무에게나 사타구니를 벌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금주라고 해서 몸을 풀어주던 애인 한둘쯤 없었을 리는 없는 일이지만, 이미 그들이나 남편에게서는 더 이상 로맨스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금주도 새록새록 가슴에서 피어나는 연정이라는 것이 있었을 터, 이제 그 물꼬를 새로이 열어주고,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 주는 기찬에게 매달리게 되는 모양이었다.

물빛 짙은 정장치마 밑으로 기찬의 손이 미끄러져 올라간다.

“하악......”

남자는 결혼하기 위해 사랑하고, 여자는 사랑하기 위해 결혼에 이른다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부 간의 평행선을 떠올리게 하는 말인 셈이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것은 삶의 무게를 힘겨워하는 남녀일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법,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서로의 기대를 깨우칠 때쯤이면, 이미 뜻하지 않은 곳으로 멀리 와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 선뜻 발길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인 게다.

“하악...... 난 몰라...... 나 죽을 것 같아......”

어느덧 헝클어진 침대를 쥐어뜯어가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금주 역시 이미 너무 멀리 나온 듯 다시는 돌아가기 어려운 여행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네, 여보세요......”

“으응, 저예요. 보라......”

아니나 다를까. 형수 보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바로 닥칠 저녁에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고 하니 모처럼 엄마를 뵈러 가야 할 모양이다. 선이라면 소라가 형부에게 신랑감을 선보이는 것이겠지만, 그 자리에 굳이 기찬을 부르는 것은 보라 역시 자신과 기찬의 관계에 아무 문제없음을 동생 소라에게 보여주고자 함에 다름 아닐 것이었다.

“그래, 차윤정 씨는 다녀갔고?......”

“으응, 후훗......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어요. 사람을 둘까 말까 했는데 자기 부탁이라 특별히 채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젠 얼굴 자주 보여줘야 돼요. 알았죠?”

파격의 힘이란 그런 것인지, 동생 소라에게 둘의 관계를 알리고 난 후의 보라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잔뜩 고무된 기분을 풀지 못해 이글거리는 눈빛이 전화기를 통해서도 느껴지는 것은 보라의 격앙된 목소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았어. 하여튼 나중에 집에서 봐. 공연히 멀쩡한 놈 대접한다고 음식 같은 거 많이 준비하지 마.”

“어머! 또 그런다. 나는 우리 제부자리 예쁘기만 하고 좋던데......”

“참 나...... 그게 다 보라가 힘들까 봐 하는 소리지. 그냥 중국집에서 요리나 몇 가지 시켜. 괜히 힘들게 칼질하지 말고......”

“호호, 그거 정말이지요? 그랬다가 괜히 어머니한테 꾸중 들으면 자기가 말려줘야 돼요.”

“알았어. 그야 물론이지.”

가뜩이나 소라에게 밉보이고 있는 터에,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도 전, 소라의 결혼이 사기결혼이라고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남의 결혼에 심기 불편한 놈 취급을 당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용한 한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하고 보내기까지 금주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찬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것저것 멀리 있는 찬을 끌어다 먹일 때는 마치 안방을 차고앉은 부인처럼 살갑게 구는 것이었으니 사내가 무릇 사회생활에 실패를 해 여자를 고생시킬지언정 한 가지만 잘해도 사랑받고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집에 안 갔어? 아기도 있다면서......”

“어, 어머! 마스터님......”

아직은 이른 낮 시간, 이제 막바지를 향해 순항하고 있는 소공동 사무실은 얼굴을 자주 보일 필요 없는 일, 자칫 타인에게 눈도장이라도 박혀 버리면 추후 금융사고가 터질 때 부담스런 일이니 한 실장에게 안부전화만 하고 카이로 내실로 들어선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유라가 나와 있으니 기찬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마스터는 무슨...... 이 안에서는, 아니, 앞으로는 차라리 이름을 부르든지, 강하사라고 불러.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아! 네, 강 하사님......”

“그래, 집에 안 간 거야?”

“아니요. 갔다가 일찍 나왔어요. 대기실 청소도 할 겸, 호호호...... 신입이니까 일찍 나와서 눈도장 찍는 셈이지요.”

“하하, 그래? 아! 참, 마침 잘 됐네. 내 방으로 좀 들어와 봐.”

“네......”

다소곳이 다리를 접어 앉는 것은 아직도 기찬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니, 기찬이 마스터라 할지라도 영향력 있는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난 후, 아직 다 알 수 없는 그의 진면목에 저리 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어제는 손님 좀 받았어? 처음이라고 따돌리지는 않던가?”

“아, 아니에요. 마담 언니가 지명해 줘서 외박도 두 번이나 나갔었는걸요.”

“하하, 그랬구나. 그래. 이제 나도 유라를 내 여자로 생각하니까 솔직히 말을 해 주고 싶어. 나는 현재 알다시피 여러 가지 사업을 꾸려가고 있는데, 그중에는 군 수사관 신분도 있고, 여기를 아지트로 삼아서 활동을 하는 중이거든.”

“어머! 그, 그럼 형사 같은......”

“그래, 그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굳이 몰라도 될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은 어제 유라가 나간 그 맞선자리에 나온 아가씨가 나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란 말이지.”

“어머머! 그럼...... 아, 아유 전......”

“그래, 그래...... 알아. 유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불려나간 사람이라는 정도는 알겠어.”

유라는 무의식중에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기찬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고 있었다. 기찬이 수사관 신분이라는 것이 범죄행위에 가담한 유라에게는 그만큼 놀라운 소식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일이 진척이 돼서는 곤란한 일이니까 그 뚜쟁이라는 여자의 소재를 내게 알려줘야 되겠는데......”

“아유, 네...... 그건 말씀 드릴게요. 아유, 그런데 어떻게 하나?...... 저, 사실 그 언니도 협박을 당해서 할 수없이 그렇게 된 거거든요.”

“협박?......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배후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이름부터 불러 봐.”

기찬과 유라는 오래도록 그 사건과 뚜쟁이 역할을 했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나름대로 가까이 지냈던 언니인 듯, 유라는 언니라는 여자의 구명에 대해 기찬에게 부탁을 거듭하고 있었다.

“음...... 김 명희라는 여자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 언니가 원래 커플매니저였어요. 왜 그런 회사 있잖아요. 옛날 같으면 결혼상담소 같은......”

“으응, 그래...... 계속해 봐.”

“그러다 보니까 예쁘장한 아가씨들 명단이 많이 필요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자료로 갖고 있겠다고만 해서 사진을 몇 장 준 게 인연이었지요.”

“으음, 그렇겠지. 남성회원들에게 인기 있는 커플매니저라야 수입도 올라갈 테니까......”

“네, 그러다 보니까 지금 저희 남편도 언니가 소개해 줬던 거예요. 언니는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서 말렸다지만, 그 사람이 막무가내로 좋다고 덤비는 바람에...... 마침 집안도 좋고 하니까 더 나이 먹기 전에 일을 그만두고 시집가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사실 저도 정상적인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그러다가 결국은 술집에 나간 사실을 숨기고 결혼을 하게 됐던 거예요.”

“그럼 그 때 일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는 거야?”

“아, 아니요. 그 언니가 그렇게 된 게 제 탓인 것 같기도 해서 그저 가끔 요청해 오면 도와주는 것뿐이에요.”

“유라 때문이라니?......”

“그 언니가 저에게 살갑게 구는 게 고맙기도 해서, 그 언니 남편 몰래 술집에 단골로 드나들던 남자를 한 명 소개해 줬었거든요. 매너도 좋아 보이고 해서......”

“음, 애인을...... 그래서......”

“그런데 그 남자가 사진관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사진 찍기를 좋아했는데, 그게 일반 사진이 아니라 노출사진이었던 모양이에요.”

“저런...... 그럼 그 자식이 그것을 가지고 협박을 한다는 말인가?...... 남편에게 알린다고?......”

“아니요. 그것도 아니에요.”

“하! 참...... 그거 사연 한 번 복잡하네.”

“그 언니 애인이 인터넷에 무슨 사진 동호회 활동을 했었던 모양인데, 거기 올라온 사진을 지금 괴롭히는 패거리들이 본 모양이에요. 그걸 가지고......”

“아니?...... 그럼 거기에다가 얼굴까지 전부 노출을 시켰단 말인가?”

“아니요. 옷을 보고 알았던 모양이에요.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종종 마주칠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뭐, 슈퍼라든지...... 그리고 생면부지 남이라면 사진을 보고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웃에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라면 자주 보는 옷차림이며, 몸매나 장신구를 보고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으음......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군. 아! 그러니까 그 여자를 알아 본 어떤 녀석이 수작을 걸어보니 본 남편이 아니라 불륜상대하고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는 그런 협박을 했다는 말이로군. 그래......”

“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사실 그 치들도 그 외에 달리 괴롭히는 건 없으니까, 그저 한 달에 한 건 정도 그렇게 작업을 해 주는 모양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그 패거리들이 사기를 칠 대상하고 결혼을 시킬 사람을 구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일 텐데......”

“어머! 요즘 애들이 뭐, 이혼하는 것 대수롭게나 생각하는 줄 아세요? 게다가 배우자가 부정을 저지르게 만들고 이혼을 하는 거니까, 그런 경우는 사기결혼을 당했다고 우겨서 결혼했다는 기록을 지워 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 사람들 측근에 전문 변호사까지 있어요. 뒤집어 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어쨌든지 합의를 봐서 빠져나가야 할 테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별로 하는 일도 없는 애들이 얼굴 몇 번 비춰주고 목돈을 쥘 수 있는 일이니까 서로 하지 못해서 안달인걸요.”

“허헛! 참 나...... 기가 막혀서......”

“그러니까 그 언니는 될 수 있으면 피해 가지 않도록 좀...... 네?...... 저 정말 잘 할게요.”

“후훗, 그래도 유라가 의리는 있는 모양이네. 그래, 일단 내가 추적을 해 볼 테니까, 그 대신 답이 나올 때까지는 유라도 입 꾹 다물고 있어야 된다.”

“네, 그, 그럴게요.”

“그래, 이젠 좀 쉬어라.”

“나가서 과일이라도 좀 깎아 올까요?”

“그래, 그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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