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부- (22/40)

-22부-

“그래, 지수씨는...... 우리 결혼식 때 보고 못 본 것 같은데...... 잘 계시죠?”

“네, 덕분에...... 누님은 잘 있습니다. 조만간 종로에 저희 회사 가구 전시장이 하나 들어 설 건데...... 아마 저희 누님이 맡아서 운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 아...... 그래요? 나중에라도 한 번 불러 주세요. 가서 인사라도......”

“하하...... 뭐, 그러시죠. 자리를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금주 누님은......”

“아, 아...... 잠시 화장실에 간 모양인데...... 자, 우리 먼저 들어갑시다.”

“네, 네......”

정갈하게 꾸며진 룸 안에는 기다란 식탁과 그 둘레에 다양한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상석에는 고영준 의원이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에 팔을 걸친 채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따위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지만, 실제로 보는 그는 안광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마주치는 시선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기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들은 바는 있지만,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 예사롭지 않은 그의 눈빛을 받으며 안내를 받아 다가선다.

“으음...... 누구시지?”

아들에게 안내받아 온 청년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여유로운 몸짓은 그가 이 방의 주인이라는 것을 강변해 주는 듯 그에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이었다.

“네, 어제 말씀 드렸던...... 애들 엄마 친구 동생이에요. 가구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아!...... 이런...... 내가 실례를 했구먼......”

과장스런 몸짓까지 동원해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고의원의 손을 마주 잡아간다. 두툼한 살집이 주는 느낌이 개운치 않아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을 전할 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기찬입니다.”

잠시 후 말석으로 물러나 마련돼 있는 술만 홀짝 거릴 뿐 좌중의 대화는 기찬의 호기심을 채워 줄 수 없는 구태의연한 내용들뿐이었다. 참석한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고영준의원의 눈도장을 받기 위한 목적을 드러내듯 쓸 데 없는 이야기에도 환호가 터지고 박수를 치기도 한다.

“어이, 고위원장......”

“네, 부르셨습니까?”

금주의 남편이 당에서 청년분과를 맡고 있다더니 고의원은 자신의 아들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호명하고 있었다.

“저쪽에 강사장 말이야.”

잠시 말을 중단한 채 기찬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의도적인지 곤혹스런 눈빛을 담아 미소를 짓는다.

“내가 말을 놓아도 되겠지? 우리 며늘애 친구 동생이라니 내가 한 식구 같아서 말이야.”

“아! 네...... 물론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그래, 우리...... 인사는 나눴으니 위원장이 좀 접대를 하도록 해. 우리 같은 노인네들하고 한자리에서 무슨 재미가 있겠나? 응?...... 하하하......”

“아, 아....... 네, 알았습니다.”

기찬을 배려하는 듯 자리를 파하게 해 주니 기찬은 그 점이 고마울 뿐이었다.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분위기를 읽어내는 점에 있어 역시 노회한 인사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되고, 기찬은 금주의 남편을 따라 자리를 벗어난다.

“아유, 이거...... 제가 괜한 자리에 와서 실례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적절하게 대접을 못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자리가 불편하실 텐데...... 아니, 이 사람은 또 어디를 갔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면 역시 이런 자리에서 인맥을 형성해야 할 터, 소중한 시간에 기찬에게 매어있을 입장이 아니었으니 금주에게 기찬을 인계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모양이었다. 금주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에 기찬은 주머니 안의 손가락을 비벼 금주의 부드러운 팬티를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지금 바쁘실 텐데...... 제게 위원장님 명함이나 한 장 주십시오. 나중에 제가 따로 인사 한 번 드리겠습니다. 금주 누님은 어디 화장실이라도 가신 모양인데 제가 기다렸다가 뵙고 가겠습니다.”

“아! 이거...... 그래도 되겠습니까?”

결국 명함을 내밀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기찬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식...... 금주는 지금쯤 아마 뒷물하고서 팬티를 사러 갔을 거다. 쿡쿡......”

“어머! 얘...... 왜 또 나와 있어?”

마침 돌아오는 금주가 기찬을 발견하고는 다가와 손을 잡고 너스레를 떨어 댄다. 보는 눈이 있을지 몰라 반말을 하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나이답지 않게 귀여울 뿐이었다. 불과 몇 분 전 이미 만리장성을 쌓은 사이이니 그 다정스러움이란 말로 할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다.

“으응, 누님이 없으니까 재미도 없고 해서 일찍 나왔어...... 어르신은 벌써 만나봤고, 누님 남편, 위원장이라는 양반도 지금 기업인들 눈도장에 바쁜 모양인지...... 나를 누님한테 은근슬쩍 떠넘기고 가 버리던데......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공식적으로 누님이 돌봐줘야 되는 어린 양이 된 셈인데...... 후후......”

기찬은 은근슬쩍 금주의 엉덩이를 쓰다듬어 팬티라인을 확인하고, 금주는 주변에 보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은근한 눈빛으로 다시 존댓말을 사용해 속삭여 온다.

“그럼 잠깐만 있어요. 안에 기별을 해 놓고, 다시 나올게요.”

“으응, 그래...... 나는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비록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지만, 노천의 호텔 구석에서, 그것도 지척에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곳에서 호흡을 죽여 가며 살을 부딪친 경험은 기찬으로서도 새로운 것이었다. 하물며 그저 어둠이 주는 분위기에 이끌려 엉덩이를 드러낸 채 그 행위를 감당해 낸 금주야말로 지금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벅찬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가요. 큰 모임은 마쳤으니까 먼저 간다고 얘기하고 나왔어요.”

“그래도 먼저 가도 돼?”

“칫...... 남자들 다음 코스는 안 물어봐도 알잖아요. 이 무렵에는 알아서 빠져줘야지. 호호......”

“하긴...... 어딜 가나 뒤풀이라는 게 있으니...... 자, 그럼 우리도 뒤풀이를 하러 가야지?”

“어머! 또?...... 나 죽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요?”

“하하하...... 아니...... 내가 누님한테 선물을 하나 하고 싶어서...... 이제 내가 도장을 찍어뒀으니까 내 여자라는 표시를 해 둬야지.”

“어머머! 정말 웃기셔...... 내가 무슨 자기 여자라고...... 그거 한 번 했다고 다 자기 여잔가?...... 피......”

“뭐, 싫으면 말고...... 나야 돈 굳고 좋지.”

“어머! 내가 그랬다고 설마 치사하게...... 남자가 말을 꺼냈으면 실천을 해야지...... 호호...... 뭐 사줄 건데요?...... 봐서 괜찮은 거면 비밀 지켜주고, 아니면 지수한테 다 불어 버릴 거니까......”

“얼씨구...... 이젠 오히려 나한테 협박이네? 하하하......”

운전하는 내내 금주는 기찬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가까이 앉아 교태를 흘리고 있었다. 빼어난 몸매와 용모는 그녀가 사십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라는 점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으니 기찬도 지수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금주가 싫을 리 없었다.

“역시 여자는 한참 물이 올라 있어야 제 맛이라니까......”

“으응? 뭐라고 했어요?”

“아니, 그저 혼자 한 소리야. 참! 그리고...... 남자들 뒤풀이 한다는 거 말이야.”

“으응, 그게 뭐요?”

“내가 놀이 삼아 관리하고 있는 괜찮은 룸싸롱이 하나 있는데, 그런 데를 소개해 주면 안 되나 싶어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머? 기찬씨가 그런 데도 알아요?”

“뭐, 사업이야 다 전문 경영인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나야 뭐, 소일거리 삼아서......”

“에이...... 하지만, 어디 그런 곳을 갈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이라서......”

“뭐야?...... 그럼 어디서 마신다는 거야?......”

“비밀 요정 같은 곳도 있잖아요. 그런 데가 아니면 얼굴이 팔려서 잘 못 가지요.”

“으흠...... 그도 그렇겠군......” 

그 사이 기찬은 장삿속으로 머리를 굴렸던 모양이었다. 정재계의 내놓으라하는 사람들을 단골로 잡을 수만 있다면 카이로의 마담 홍세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던져 본 말이었는데 본전도 건지지 못한 셈이었다.

역시 그 바닥도 다 노는 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니 절로 기찬의 머리가 끄떡여지는 순간이었다.

“자, 누님...... 골라 봐요. 어느 게 마음에 들어?”

“어머! 정말 내 맘대로 골라도 돼요? 이런 거 굉장히 비싼 건데...... 이거 이미테이션 아니잖아요?”

일전에 카이로의 마담 세미와 커플링을 구입했던 보석상에 다시 와서 진열장 앞을 어슬렁거리니 주인은 이미 기찬을 알아보고 금주 몰래 눈짓으로 인사를 해 온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번번이 데리고 나타나는 여자들마다 연상의 상대를 거느리고, 하나같은 미인에 팔등신이니 기가 막힐 뿐이지만, 기찬을 바람둥이 부잣집 아들 정도로 생각했는지 주인은 단골을 잡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시는 손님 같은데...... 천천히 살펴보세요. 가격은 잘 해 드릴 테니......”

“네, 아저씨...... 저기, 저런 다이아는 얼마나 합니까?”

기찬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다이아 목걸이와 반지 세트였고, 주인의 대답을 들은 금주는 그 액수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액수보다는 이미 기찬이 지갑을 열어 현금카드를 제시하고, 주인은 리더기에 카드를 긁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시아버지, 고의원에게 정치헌금으로 송금해 준 금액의 세 배를 육박하는 금액이었으니, 그 가격은 삼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었다.

“어머머! 자기 왜 이래요?”

금주는 몹시 당황스러웠는지 기찬의 팔을 이끌고 한 곁으로 물러나 그 속사정을 물어오고, 기찬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대답해 버린다.

“뭐가?...... 내 여자한테 이런 선물도 못해?” 

“미쳤어. 정말......”

기찬이 싫을 리 없었고, 하물며 이런 거액의 보석이 싫을 리는 더더욱 없는 일이지만, 혹여 보석에 눈이 멀어 팔려간다는 인상을 심어줄까 두려웠을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투정으로 이어진다.

“피......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알아요?”

이미 풀숲에서 엉덩이를 까발리고 헉헉거린 것은 무엇인지, 토라진 듯 몸을 돌려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금주가 나이답지 않게 귀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기찬도 그 놀음에 동참해 주려는지 은근히 금주의 어깨를 쥐어가며 고개를 어깨 너머로 내밀어 금주의 귓가에 속삭인다.

“누님은 내가 싫은가 봐? 나는 좋아 죽겠는데...... 내 여자 하기 싫은 거야?”

“누가 싫댔어요? 내가 지수 다음일 테니까 그게 싫어서 그렇지.”

금주는 어깨를 흔들어 뿌리칠 듯 교태를 부려 오고, 기찬은 더욱 팔에 힘을 실어 그런 금주를 붙잡아 준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지수 누님은 그런 매력이 있어서 좋고, 금주 누님은 또 저런 매력이 있어서 좋은 건데......”

“그럼...... 절대 지수하고 비교하거나, 차별하기 없기?”

“그야 물론이지. 자...... 약속...... 아직 지수 누님은 저런 거 선물해본 적도 없는데......”

장난스럽게 새끼손가락을 걸고서야 금주의 체면치레 행사가 끝을 보게 된다. 이미 벌린 사타구니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진 셈이고, 뒤늦은 그 서열에 있어서도 기찬으로부터 우선권을 획득한 셈이니 그로써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긴 머리를 옆으로 걷어 넘기고 하얀 목덜미를 기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자, 이제 내가 누구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기찬씨가 누구라니?......”

“에이, 참...... 여보라고 해 봐.”

어느새 기찬은 금주를 데리고 비상구 계단으로 빠져 나와 허리를 끌어안고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엔 반짝이는 다이아 목걸이가 빛을 발하고, 기찬을 마주 안은 손가락엔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머! 정말 미쳤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런 데 카메라도 있단 말이에요.”

“보면 대순가? 어서 말해 봐.”

“아이 참...... 다 알면서...... 여...... 보...... 아유, 난 몰라......”

힘들게 발음해 놓고 부끄러운 듯 기찬의 품에 안겨온다. 기찬은 그녀의 머리칼에서 향기를 다시 들이키며 얼굴을 바로잡아 입술을 덮어간다.

“흐으읍...... 쭈우웁......”

“하악...... 여보...... 사랑해요. 그리고 선물 고마워요.”

“그래, 나도 누님 사랑해. 그리고 그건 그냥 선물이 아니라 우리 사이를 증명해 주는 예물인데......”

“어머! 푸훗...... 그럼 나는 우리 낭군한테 예물을 못 전해 줘서 어떻게 해요?”

“예물?...... 난 벌써 챙겼는데...... 이게 바로 예물이지.”

기찬은 짓궂게 금주의 엉덩이를 쥐었다 풀어주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금주의 팬티를 꺼내 보여준다.

“엄마야, 미쳤나 봐...... 빨리 이리 안 가져와요? 그건 언제 챙겼대?......”

“하하...... 풀숲에 버려 둘 수는 없잖아? 이 귀한 걸......”

“내가 못살아, 정말...... 아유, 예뻐 죽겠어. 호호호......”

기찬이 금주에게 거액의 선물을 하는 것에는 이미 나름의 계산이 서 있었다. 그로써 그녀를 더욱 확실히 자신의 품에 가둬 둘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겠지만, 차에서의 대화 이후로 기찬은 그녀의 남편을 끌어들여서 돈벌이에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자금이라는 것은 눈도 없거니와 더욱이 쓰임새에 의리 따위는 없는 것일 테니 부자간의 주머니도 각각 달리할 것이고, 고영준의원의 그늘에 가려 있는 금주의 남편으로서는 그 부족함에 항상 목말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 기찬의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한 모양이었다.

당에서의 직함이 청년분과 위원장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은 허울뿐인 명패일수도 있으니, 자신도 정치일선에서 버티어 가려면 자신만의 돈줄이 필요할 것이고, 그 부족한 부분을 기찬이 조금이나마 채워 준다면 굳이 기찬의 제의를 멀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카이로라는 곳은 박상사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기찬은 넘치도록 많은 자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자신만의 이익을 창출할 수 없었던 아쉬움을 늘 갖고 있던 터였다. 어차피 화류계 아가씨들이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니 한 곳에 매인 몸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찬이 박상사와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다른 술집을 차린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지수 가족을 독산동 회사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보내고 나면, 방배동의 주택을 개수해 이른 바 요정으로의 비밀 영업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고, 그 기술지도라면 마담 세미가 얼마든지 도와줄 것이라는 짐작이 있었던 터였다. 파출부 삼아 쓰려던 미라의 올케 강희를 마담으로 상주시키고, 소공동 사채 사무실에 있는 한기주의 아내 은진에게 주방을 맡기면 무리 없이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일이 없어서 테이블에도 못 들어가는 계집애들이 차고 넘치는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혼자 중얼 거려요?”

“으응?...... 하하...... 아무 것도 아니야. 이렇게 예쁜 누님이 품 안에 있으니까 좋아서 그러지.”

“피...... 또 비행기 태우신다. 어지럽게...... 흐응......”

하얀 박을 엎어 둔 것처럼 탱탱한 금주의 가슴을 물어간다. 기찬은 금주를 차에 태우고 삼각지로 와 이미 한차례 격정을 치르고 난 터였다. 호텔 노천 숲에서의 조마조마했던 첫 정사 이후 뭔가 부족했던 아쉬움을 이곳 여관에서 마음껏 목청 높여 신음과 비명을 질러대며 만족할 만큼 금주의 오르가즘을 끌어 올려 주었다.

이제 금주는 몽롱한 시선으로 기찬에게 젖가슴을 물리고, 그 얼굴을 쓰다듬어 가며 애정을 표시한다. 

“기찬씨...... 나, 은근히 살 많이 쪘지요?”

“으응?...... 무슨 소리? 살이 찌다니...... 허벅지가 겨우 내 팔뚝만 하구먼......”

“피...... 거짓말......”

“아니, 정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풍만하고 커다란 엉덩이에서 이런 가는 다리로 이어지냔 말이야? 응?...... 이렇게 날씬한 다리로 이런 엉덩이를 지고 다니려면 다리가 얼마나 고생을 하겠어.......”

“어머머! 정말 말도 안 돼...... 아유, 그만 만져요....... 정말 변태 같아...... 호호호......”

“아, 참! 누님, 내가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어머! 갑자기 무슨 사업?...... 뜬금없이......”

벌거벗은 채 엎치락뒤치락 침대 위에서 장난을 치다가 기찬이 느닷없이 정색을 하자 금주는 눈을 크게 뜨고 기찬을 바라본다. 마주친 금주의 얼굴에서 단내가 쏟아지고 기찬은 그녀의 입술을 다시 덮어 버린다.

“흐읍...... 우우움...... 쭈우웁...... 아유, 정말 못살아...... 시도 때도 없이......”

금주는 자신을 아끼는 기찬의 정에 숨이 넘어갈 만큼의 행복을 느끼며 기찬의 가슴을 마구 때려 앙탈을 부려 댄다.

“말해 봐요. 어서...... 무슨 사업인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예요? 아니면 아까 우리 시아버님 만났을 때 말해 보지 그랬어요?”

“아! 아니,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누님 남편을 도와주겠다는 말이지.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맡아서 살고 있는데...... 까짓 거 내가 관리인을 좀 도와주려고 그러지. 히히히......”

“어머! 뭐라고요? 참 나...... 기가 막혀서...... 내가 무슨 물건이에요? 네?......”

“아야, 아야...... 하하...... 그만, 그만......”

기찬의 가슴을 꼬집으며 앙탈을 부리는 금주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그녀의 등이며 고운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물러 준다. 금주도 기찬과의 인연으로 무언가 새로운 기대에 빠지게 되고, 당찬 사업가이기도 한 젊은 애인 기찬의 입으로부터 나올 사업 이야기에 관심이 기울어진다. 

“어머! 기찬씨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하는 일이 그렇게 많아요?”

“으응?...... 하하...... 정체라니?...... 내가 마치 간첩이라도 된 것 같네.”

기찬의 사업 구상을 모두 들은 금주는 기찬의 말을 믿기 어렵다는 눈치였고, 기찬은 다시 금주를 품에 안아간다.

“일단은 그 정도만 알고 있어요. 나도 오늘 누님 얘기를 들어보고 갑자기생각해 낸 거니까...... 아직은 남편한테 미리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차차 모습이 갖춰지면 그 때 내가 한 번 만나볼 테니까......”

“으응, 그렇게만 되면 정말 좋겠다. 사실 우리 남편도 매번 돈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던데...... 아유, 우리 아버님도 그럴 때는 모른 척 해 버리고, 도와주지도 않는 거 있지...... 그럴 때는 남보다도 못해요. 내가 당신 일을 도와주는 게 얼만데......”

“하하...... 부자간에도 주머니 관리는 따로 하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이제 누님 인생은 나한테 맡기라니까......”

“후훗...... 알았어요. 기찬씨......”

“자, 다리 좀 다시 벌려 봐.”

“하악...... 미쳤나 봐? 왜 그래요? 벌써 세 번째야...... 여보...... 으흐으응......”

기찬의 체중에 다시 힘겨운 콧소리가 금주로부터 흘러나오고 다리를 접어 올려 사타구니를 맞춰 준다.

“후욱...... 후욱......”

“아학...... 여보...... 사랑해요...... 이제 나 버리면...... 싫어......”

금주의 오금을 어깨에 걸치자 금주의 사타구니는 하늘을 향하게 되고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기찬에게 공략을 당하게 된다.

“쑤우욱...... 후욱......”

“하악...... 아파...... 아파......”

“싫어, 누님 처음 들어가는 곳까지 내가 들어갈 거야. 이제 누님은 내 거니까.......”

“쑤우욱...... 후욱......”

“하으윽...... 미쳤어...... 아야......”

“후욱...... 큰 애가 중학생이라면서...... 애까지 낳은 여자가 뭐 아프다고 그래?”

“그거랑 이거랑 같은 줄 알아요?...... 하악...... 못살아......”

가슴을 때리는 금주를 할 수 없이 풀어주고, 다시 어깨 밑으로 팔을 걸어 끌어안고는 마주쳐 허리를 올려 대기 시작한다. 이윽고 금주의 눈이 다시 넘어가고, 그 붉은 입술은 벌린 채 바쁜 호흡을 이어갈 뿐 아무 소리도 흘리질 못하고, 기찬의 몸놀림에 흔들릴 뿐이었다.

“하악...... 하악...... 흐응...... 여보......”

“후욱, 후욱, 후욱......”

“자, 누님 이번에는 개처럼 엎드려 봐. 후훗......”

“아이, 그런 말 싫어..... 하악...... 개가 뭐야? 부끄럽게......”

처음처럼 다시 박 같은 엉덩이를 내밀고, 그 사이를 쪼개어 기찬의 장대한 물건이 모습을 감춘다.

“후욱...... 후욱......”

“아흑...... 아항......하윽......”

빠른 몸놀림과 함께 어느덧 폭발의 순간을 맞고, 금주의 푸짐한 엉덩이 살을 치골로 느끼며 침대로 엎어져 버린다.

“으으으윽...... 울컥......”

“하악...... 뜨거워...... 여보......”

금주와의 뜨거운 인연은 이렇게 사연을 더해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몰아대던 금주를 태워 집으로 돌려보낸 뒤 기찬의 차는 카이로를 향하고 있었다. 쇠뿔도 단 김에 뺀다고 마담 세미에게 그 문제를 상의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머머! 잘 났어요. 정말...... 며칠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난 몰라요. 혼자 알아서 하세요.”

모니터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세미는 다른 계집애들 때문에 오랜만에 나타난 기찬에게 반가운 표시도 못하고 있다가 방으로 따라 들어와서야 사업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찬도 세미로부터 쏟아지는 핀잔이야 이미 각오를 하고 있던 바라서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유, 웃지 말아요. 신경질 나게......”

“하하...... 알았어. 오늘은 과천으로 같이 가자니까...... 내일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음...... 그러지 말고 내일 낮에 우리 둘이 놀이동산이라도 갈까?”

“어머! 정말이지요? 기찬씨, 말 바꾸기 없어요.”

“그럼 물론이지. 이제 화 풀었어?”

“피.......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쉬 풀어지는 것은 그만큼의 정에 굶주려 있다는 것의 반증일 터, 돌아서 복도로 나서는 세미의 등이 더욱 왜소해 보여 공연히 미안한 마음에 빠지게 하고, 문득 어디서 보았던지 어려운 살림, 머리칼을 팔아 밥상을 장만해 올렸다는 빈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젠장...... 갑자기 왜 그런 궁상맞은 생각이......”

비록 계집애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으름장을 놓아 대는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기찬을 남자로 보는 시선 끝에는 역시 할 수 없이 젊고 꽃다운 계집애들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터, 조금이라도 기찬의 마음이 떠날세라 상한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돌아서 나가는 마담 세미의 등이 그래서 더욱 왜소해 보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이심전심으로 기찬의 마음을 읽고, 또 저렇게 세미의 마음을 읽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사실 이런 일에 종사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었다. 계집애들이야 현장에서 외박이라도 나가니 몸을 풀 수 있다지만, 마담 정도의 위치가 되면 그 소문이 영업에 커다란 타격이 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몸을 풀 상대라곤 비밀리에 만날 수 있는 박상사가 아니면, 기찬 뿐인 셈이었다. 자신은 싫도록 여자를 바꿔가며 즐기고 오니 공연히 자신에게 정을 준 마담 얼굴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 여진아......”

“으응, 왜?......”

“너, 시간 있으면 나 좀 보자. 잠깐만 나올 수 있지?”

마침 미라는 룸에 들어 가 있는지 대기실에 없었고, 어차피 낮으로는 학교에 가야 하는 터라 뭔가 일을 맡기기엔 여진이가 적절했는지 여진이를 방으로 불러들이고, 카드를 한 장 테이블에 올려둔다.

“신용카드는 왜?...... 뭐 사 오라고?......”

“아, 아니...... 하하...... 내가 조강지처한테 사소한 심부름이나 시키겠니?”

“그럼 뭔데?......”

기찬의 조강지처란 말이 그렇게 기분을 흐뭇하게 해 주는지 여진은 한 쪽으로 눈을 흘기며 다정히 옆으로 내려앉는다.

기찬은 수혜의 일을 설명해 주고 낮 시간에 수혜를 만나 그 어머니의 병원 입원 문제를 상의하라는 부탁을 전해 준다. 의외로 여진은 비슷한 경험치를 갖고 있어서인지 여고생의 원조교제에 대해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는 잔뜩 힘을 실은 주먹으로 기찬의 옆구리를 찔러온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다정스럽게도 불러내더라.”

“우욱...... 아이고, 아야...... 이 마누라가 서방을 잡네. 잡아......”

“그 대신 심부름 값도 줘야 돼.”

“하하...... 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참, 아예 시내에 데리고 나가서 옷이라도 몇 벌 사 주든지...... 동생들도 있다고 하던데......”

“음...... 그러면 나도 한 벌 사 입는다.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그 일 아니라도 여진이라면 얼마든지 사 주지. 암, 그렇고 말고......”

“피...... 하여튼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알았어. 그럼 내가 내일 만나볼게.”

그렇게 여진이에게 수혜의 일도 맡겨 버린다. 오늘 밤을 마담과 함께 보낸다면 내일의 일정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터에 수혜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대리인을 찾은 셈이었다.

한금주를 통해 정가의 인물들과 그들을 통해 특혜를 얻으려는 재계의 인물들의 면을 알게 될 수만 있다면 방배동에 마련할 비밀요정에 수혜와 그 친구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기찬의 굉장한 비밀병기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저 어린 여자라면 허파를 뒤집어 보이기도 한다는 늙다리들이 기찬에게는 큰 고객이 되어 주고, 돈줄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애들도 여기에 데려다가 쓰게?...... 걸리면 어쩌려고......”

“아니, 큰일 날 소리하고 있어. 넌 사학연계라는 말도 안 들어 봤냐? 하하하......”

“얼씨구...... 갖다 붙일 소리가 없어서 사학연계?...... 호호호...... 그럼 졸업하는 대로 데려다 쓴다 이 말이지? 어쨌든 영계는 대거 확보해 둔 셈이네. 애들이 얼굴은 예뻐?”

“으응, 그 수혜라는 애는 만나봤는데, 다른 애들은 아직 못 봤어. 수혜는 늘씬하고 예쁘더라. 보통 고등학생이면 한창 살이 오를 때라 오동통한데, 그 애는 그렇지도 않더라고......”

“하기야 원조교제를 해야 될 입장이었으면 최소한 자기 몸매관리 정도야 했겠지. 에고, 나도 그렇지만, 어린년들이 마음을 짠하게 하네...... 그럼 쉬어. 난 또 손님이나 받아야지.”

“그래, 내일 수고 좀 해라.”

“으응......”

방을 나가는 여진의 뒤로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본다. 결국 매일의 영업을 고등학교에 다니는 수혜로부터 풀어갈 수야 없는 일이니 카이로에 나오는 계집애들 중 최고의 계집애들을 선별해 조 편성을 해 둘 궁리를 하게 된다.

미라와 여진, 남편에게 야간 경비 일을 맡긴 세희는 언제든 부릴 수 있는 자신의 여자인 셈이니, 이 세 사람에게 조장의 책임을 맡겨 각각 하루를 감당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래, 수혜는 말 그대로 비밀병기인 셈이지...... 후우...... 카이로에 있는 계집애들 중에도 예쁘고 가냘픈 계집애들은 여고생 교복을 입혀 놓아도 제법 그럴싸할 걸...... 후훗......”

과천으로 향하는 차 안, 기찬은 차창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세미는 기찬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아유...... 바보, 바보......”

“에이 참, 이젠 좀 그만 하라니까......”

“호호호...... 그렇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무슨 방법?......”

“간단해요. 우선 저도 담배 하나 주세요.”

기찬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서 세미의 입에 물려주고, 세미는 크게 한 입 빨아들인 뒤, 말을 이어간다.

“거기에 데려다 쓸 애들만 선별해서 생머리를 하고 다니라면 되는 거지. 뭐, 별 거 있나요? 아유, 참...... 어떻게 머리 염색하고 지지고 볶은 얘들을 여고생이라고 속여서 술장사를 할 생각을 다 했을까? 호호호......”

“에이 참, 또 그런다......”

“호호호......”

“그런데 애들한테 그런 부탁을 해도 될까? 애들이 멋 부리는데 방해 된다고 싫어하지 않을까?”

“에헴...... 그러니까 저한테만 잘 보이시라니까요. 정말 예쁘고 어려보이면서도 또 늘씬한 애들만 그 팀에 추려줄 테니까......”

“아! 하하...... 물론이지. 딸랑 딸랑......”

“그게 뭐예요?”

“뭐긴?...... 종소리지. 나는 세미의 종입니다. 하하하......”

“웃기지 말고, 반지나 보여줘요. 어디 봐요. 끼고 있나 손 좀 내밀어 봐요.”

“아! 반지...... 그렇지 반지가 있었지. 자, 봐...... 여기 있잖아. 한 번도 안 뺐어.”

“피...... 알았어요. 그 일은 그럼 제가 미라하고 여진이, 세희 데리고 상의해 볼게요. 그럼 됐지요?”

“후훗...... 고마워. 역시 최고야. 최고......”

새벽 시간 한적한 도로를 달려 세미의 차는 금방 과천에 도착하고, 편의점 입구를 지날 즈음 차를 멈춘다.

“왜? 뭐 살 거 있어?”

“네, 지금 집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 뒤에 핸드백 좀 집어줘요.”

“핸드백은 뭐하게...... 같이 가. 나한테 돈 있어. 차 문이나 잘 잠그고......”

“그래요. 그럼 기찬씨가 사 줘요. 호호......”

팔짱을 끼고 다정히 곁에 붙어 따라오는 세미는 정말 행복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남자와 장을 보러 다니는 것이 마치 자신의 남자를 세상에 전시하고 공개하는 것 같은, 어쩌면 이 행위가 미지의 타인들에게 기찬이 자신의 남자임을 인정해 달라는 외침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 어...... 너?......”

“으응?...... 야...... 너,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머머! 너야말로 여긴 웬 일이야?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니?”

새벽 네 시를 바라보는 시각에 편의점 앞에서 소라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록 여기가 사돈댁이 있는 동네라지만, 지금은 새벽 네 시였다. 느닷없이 마주친 소라를 보고 놀라 자격지심이었는지 세미는 팔짱을 풀고 저만치 물러나 있다가 차에 돌아가 핸드백을 메고는 눈치껏 혼자 쇼핑을 하러 들어가고, 소라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세미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야, 야......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이 시간에 그건 다 뭐야? 집에 누구 손님 왔니?”

소라는 아무 대꾸 없이 한동안 세미가 사라진 편의점과 기찬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기찬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 어두운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야, 야...... 미쓰진...... 왜 그래?...... 집에 누구 왔냐고 묻잖아?”

“너야말로 묻는 대로 대답 똑바로 해.”

소라가 정색을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터라 기찬도 지은 죄가 있어 나름대로 긴장을 하는 모습이다.

“그, 그래...... 뭐?...... 저 여자는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너...... 우리 언니하고 무슨 관계야?...... 어디까지 갔어?”

기찬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눈앞이 하얗게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는 말이 이런 느낌이라는 체험을 하게 되니 말문이 막혀 그저 멀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라가 기찬 자신과 형수 보라에 대해 이런 파격적인 질문을 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심, 또 조심한다고 했고, 자신은 워낙 평소에도 형수와 절친하게 지내왔으니 달리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철썩......”

“허억...... 야, 미쓰진......”

매섭게 날아온 소라의 손바닥에 그저 뺨을 내주고 만다. 순간 얼굴을 감싸고 있는 기찬은 그저 놀란 눈으로 소라를 바라보고,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냥 가만히 서서 뺨을 내주고 보니 말없이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해 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매섭게 기찬의 뺨을 날린 소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흐으엉...... 나쁜 새끼야...... 우리 언니 이젠 어떻게 해...... 불쌍해...... 허어엉......”

“야, 야...... 미쓰진...... 진정해라. 으응......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당황한 기찬은 소라를 일으켜 세워 한 곁으로 다시 물러나고,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세미는 발길을 돌려 차로 향하고 있었다.

“자, 이것 좀 마셔...... 어서......”

기찬은 한참이나 소라를 달랜 뒤, 음료수를 사와 소라에게 내밀고, 소라는 도끼눈을 들어 기찬을 째려보고는 뺏듯이 낚아채 벌컥 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언니, 지금...... 집에 와 있어.”

다시 한 번 기찬의 가슴이 내려앉는다. 그렇다면 보라가 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사실을 고백하기라도 했다는 것인지, 기찬의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뭐, 뭐야?...... 그럼 형수가 사돈어른한테 그 말을 했다는 거야?”

“미친 놈...... 도대체 왜 그랬어? 언니한테......”

기찬도 바닥에 퍼질러 앉아 버린다. 이젠 양가에서 다 알게 되었을 테고, 앞으로 엄마와 형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눈앞이 노래질 뿐이었다.

“......”

“나쁜 새끼......”

“그래,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내가 나쁜 놈이지.”

“그래도 나는 설마, 설마 했는데, 네 입으로 아주 술술 잘도 불어 대는구나.”

소라의 말을 듣는 순간 기찬은 의아한 마음이 한 구석에서 일기 시작한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정신을 가지고 이 새벽시간에 술을 사러 왔을 리도 없고, 자신에게 전화가 쏟아져도 수십 통은 쏟아졌어야 옳은 일이었다. 그리고 소라도 자신을 만나자마자 그것부터 따져 물었어야 옳은 일이었다.

“뭐, 뭐야? 그럼......”

“그래, 이 나쁜 새끼야...... 내가 넘겨짚어 봤다. 어쩔래?”

또 한 번 기찬은 뒤로 넘어질 듯 아득함을 느낀다. 말없이 소라를 바라보지만 찬바람만 날릴 뿐, 눈도 한 번 깜짝하지 않는 소라에게 질려 버리고 만다.

“어떻게 알았니? 설마......”

“미친 새끼...... 설마 언니가 말해 줬냐고 묻고 싶은 거니?”

“......”

기찬은 국으로 쏟아지는 비난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소라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법도 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그 날...... 주방에서 우리 태도가 이상했다는 거야?”

“말이라고 해? 내가 나타나니까 얼굴이 빨개져서 입술을 닦질 않나?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은 하나도 없는데...... 잔뜩 달아올라가지고...... 그 날 두 사람 거기서 키스한 거 맞잖아?”

“풋......”

기찬은 어이없게도 소라에게 걸려 넘어갔다는 것이 허탈해 웃음을 짓고 만다. 일면 다행스러운 것은 설마 소라가 제 언니 불행해지길 원치는 않을 테니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웃지 마. 이 나쁜 새끼야...... 웃음이 나오니? 제 형수를 그렇게 해 놓고...... 언니가 지금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살까? 흐윽......”

“......”

기찬은 그저 유규무언이었다. 소라에게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달라질 것도 없으니 더 이상 변명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너희 두 사람 고기 사러 간다고 나갔을 때, 차라리 집으로 바로 가 버리지. 가게는 뭐 얼어 죽을 마감을 본다고 들리니? 들리길...... 샤워하고 나서 머리도 다 안 말린 채 나타나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지. 너희 두 사람 평소에도 심상찮았단 말이야.”

“아! 그런......”

“내가 언니한테 조금 심한 농담을 해도 웃기만 했던 언니가 그날따라 발끈했던 것도 이상했고...... 결국 찔렸던 게지.”

“집에는 누가 와 있니?”

“오늘이 아빠 생신이라 큰 형부도 와 있고, 다 와 있어.”

“아! 아...... 그렇구나. 형도 와 있겠네......”

“너...... 이 새끼, 언니를 생각해서 일단 비밀은 지켜 주겠지만, 앞으로 언니를 더 이상 못 살게 군다거나 하면 너,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언니한테서 떨어져. 알았어? 우리 언니가 잘못되면 다 죽는 거야. 형부한테도, 너희 엄마한테도 전부 다 말해 버릴 거니까......”

“야, 야...... 너 미쳤어?”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더 이상 언니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너는 아까 그런 술집여자들이 어울려 이 새끼야. 그런 여자들한테나 가 봐.” 

표독스런 눈빛으로 싸늘하게 기찬을 노려보던 소라는 시선을 거두고 찬바람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려 버린다.

아득한 시선을 들어 바라본 새벽하늘은 푸른 별빛만 무심하게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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