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부- (19/40)

-19부-

“저...... 기찬씨......”

“으응?...... 누님?...... 하하...... 기분 좋은데?...... 어쩐 일로 누님이 나한테 기찬씨라고 할 때가 다 있어?”

“저...... 기찬씨, 지금 시간 괜찮아?”

“으응? 점점...... 하하...... 누님 옆에 누구라도 있어요?”

“음...... 그럼 지금 여기로 좀 올 수 있겠어?”

미림이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지수는 다소곳한 성격상 기찬과 섹스를 한 직후가 아니라면 이름을 부르는 예도 없었고, 반말을 한 적은 더욱 더 없었다. 곁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지, 누군가를 의식하는 듯 동문서답 식의 전화통화를 끝낸 기찬은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허 참...... 모녀간에...... 바쁘게 불러 대네......”

차를 몰아 간 지수와의 약속장소에는 아니나 다를까 지수의 친구인 듯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합석해 있었고, 그 중에는 상당한 미모를 가진 여자들도 자리를 하고 있어 기찬의 눈이 빛을 발한다.

“기찬씨...... 여기......”

“아! 누님......”

기찬이 자리로 오자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환성을 올리며 지수의 곁을 비워준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네, 어서 앉으세요. 저희는 지수 친구예요. 반가워요. 호호호......”

“아유, 계집애...... 그동안 한 번도 안 보여주더니......”

지수는 어느새 얼굴이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기찬은 분위기로보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점포를 보러 다니던 중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고, 여자들의 행색을 보아하니 돈 많은 유한마담으로 보여 애인 한둘씩은 거느리고 있을 테니,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길이 없으나 다소곳한 지수를 무시하는 발언으로 자존심을 건드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장님만 사는 곳이 있다면 애꾸눈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병신 취급을 받을 테니 끼리끼리 유흥문화를 즐기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아니라는 듯 정숙한 체 행세를 한다면 그 또한 꼴불견이었을 것이고, 이제 나이 먹어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도 젊은 애인 한 명쯤은 있으니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기찬씨, 빨리 왔네?”

“으응, 누님이 부르는데 총알같이 와야지. 나, 마침 소공동에 있었어요. 친구 분들이에요?”

“응, 아유...... 계집애들이 자꾸만 자기를 보여 달라고 해서......”

“하하...... 그럼 오늘은 제가 한 턱을 내야 할 분위기 같은데, 어디로들 모실까요? 말씀만 하십시오.”

역시 기찬의 짐작이 들어맞았는지, 지수도 자연스럽게 호응을 해 주는 기찬의 손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당기며 교태를 흘린다.

“어머! 계집애...... 그 손 좀 놓고 얘기하면 안 되겠니? 호호호......”

“어머머! 저 계집애...... 남편밖에 모르는 줄 알았더니...... 세상에...... 호호호......”

“얘, 얘...... 요즘은 중간도 못가는 것들이 소문만 무성하게 흘리고 다니지. 이제 보니 프로는 지수가 프로다. 얘......”

곳곳에서 지수의 친구들이 한마디씩 수다를 풀어놓고, 기찬은 명함을 꺼내 모두에게 전달한다. 보아하니 애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젊기로 친다한들 기찬보다 젊은 애인일 리도 없을 것이고, 사회적 지위로 본다한들 기찬의 명함을 따라오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제 기찬은 친구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지수의 얼굴을 세워주기로 작정한 듯 지수에 대한 서비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머머! 사장님이시네요? 세상에...... 젊으신 분이......”

“사장은요?...... 그저 조그만 가구공장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애인이라고 한들 용돈 줘가며 키우는 비리비리한 호스트 바 녀석들 아니면, 술집에서 오다가다 만난 녀석들이 전부일 테니 사회적으로 건실한 위치에, 기찬 정도의 허우대라면, 이제 지수의 친구들은 그 꼬리를 확실히 내려야 할 입장이 되어 버린다.

“참, 그런데...... 이 시간에 소공동은 왜?......”

“아! 내가 누님한테는 아직 말을 안 한 모양이네...... 요즘 현찰을 놀리고 있기가 뭐해서 소공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차렸어요. 거기도 직원들이 다 알아서 하니까 나야 뭐...... 여전히 백수건달처럼 왔다 갔다 하기만 하는 거지. 하하하......”

지수의 질문에 답을 해 줌으로써 완전히 경기는 지수의 압승으로 끝을 보게 되고, 지수의 친구들은 질투심인지, 부러움인지 눈가에 불길이 일어난다. 지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주는 기찬에게 한없는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나저나 이 시간이면 식사들은 하셨을 테고...... 마땅히 대접할 것도 없는데...... 누님이 나중에 찻값이라도 계산해야 되겠는걸......”

기찬은 지갑을 뒤적여 백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꺼내 지수에게 쥐어주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다음에 언제 다시 한 번 불러주시면 분위기 좋은 곳으로 모실 테니까, 식사 시간 맞춰서 연락 주세요. 오늘은 제가 볼 일도 있고 해서 이렇게 선만 뵈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누님, 나 먼저 가요. 나중에 전화 해.”

“으응, 그래...... 잘 가......”

여자 나이 서른일곱, 남편은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한창 일 할 나이일 것이고, 자녀들도 제법 커서 알아서 운신할 나이이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처지라면 남아도는 시간에 다른 할 일이라곤 친구들끼리 모여 수다나 떠는 일일 것이다.

여자들도 자기들끼리는 남자 못지않은 음담패설에 숨이 넘어간다고 하니 공공연히 애인에 대한 것이 화제에 올라 그 나이쯤에 숨겨둔 애인 한 명 없다면 친구들 사이에서 사회적 금치산자 대접을 받는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게다.

“여보세요?”

“네, 누구십니까?”

“나요. 강수사관......”

“아! 네, 네...... 안녕하십니까? 저, 저...... 무슨 일로......”

기찬은 일전에 미림이와의 원조교제 건으로 붙잡혔던 사내에게 전화를 넣어 상황을 파악하려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채팅을 통해 만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넘어갔는데 미림이의 전화를 받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삼각지와 소공동에 카메라 장치를 해 준 후, 연락이 끊기고 나서는 한 숨을 돌리던 사내가 다시 기찬의 전화를 받고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당신...... 내 조카하고 만나게 된 경위가 어떻게 된 거지? 당시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기왕 접수한 사건이니 좀 알아보자고...... 당신을 처벌하려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고......” 

“저...... 그, 그게 저희 가게에 가끔 오는 손님인데...... 저도 연락처나 이름도 잘 몰라요. 이쪽은 워낙 조립식 컴퓨터 따위를 기웃거리는 젊은 애들이 많이 와서......”

“이름도 잘 모르는 녀석한테 돈을 주고 계집애를 만나러 간다는 게 말이나 되나? 엉?”

“아, 아니요. 워낙 자주 드나드는 놈이기도 했지만, 돈은 나중에 줘도 된다고 해서......”

“나중에?...... 얼마를 주기로 했지?”

“이, 이십만 원이요.”

“그 녀석은 그 뒤로 온 적이 있나?”

“아니요. 아마 그 근처 어디쯤에 숨어 있었다면, 제가 체포되는 것을 봤을 텐데 나타나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그래, 잘 알았소. 다음에 봅시다.”

“네, 네......”

죄 지은 놈이 발을 뻗고 잘 수 없는 것은 주지의 사실, 기찬에게는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통하지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적절한 처벌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좋았겠지만, 사내는 언제 또 기찬에게 전화가 걸려올지 몰라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는다.

“허허...... 참, 제 조카 만나러 왔다니까요.”

이제 이십대 중반인 기찬을 말만한 여고생들이 넘쳐나는 여학교에 쉽사리 넣어줄 리 없는 일이니 정문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운동장에는 체육시간인지 녹색체육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뛰어다니다 기찬을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어댄다.

“내 참...... 계집애들도 저러는 모양일세......”

수업중이어서 전화로 불러낼 수도 없는 일이니, 할 수 없이 수사관 신분증을 보여준 뒤 교정으로 들어선다.

운동장 한 구석 그늘진 나무 아래에 적당한 벤치가 있어 엉덩이를 걸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담배를 피워 문다.

“저...... 거기요.”

“......”

“교내에선 금연이거든요.”

근처 바라보이는 곳이 교무실인 듯 누군가가 소리를 치고, 기찬은 알았다는 손짓을 보인 뒤 담배를 비벼 끈다. 괜히 머쓱해진 기찬은 멀리 학생들을 바라보고, 잠시 후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본다.

“저...... 실례지만 혹시 강기찬씨 아니신가요?”

“......”

안경 뒤로 보이는 눈빛이 아주 선한 여자였다. 

“누구지?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닌데......”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는 기찬의 생각 뒤로 여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머! 맞구나...... 너, 강기찬 맞지?”

“네에...... 맞긴 맞는데...... 누구신지......”

“어머! 이 자식...... 나 모르겠어? 하기야...... 벌써 몇 년 전이니?...... 너 신입생 때 내가 동아리 졸업반 선배였잖아? 기억 안 나? 나, 은숙이야..... 이은숙.”

“아, 아...... 누나...... 은숙 누나...... 그런데 얼굴이 왜 이리 바뀐 거야? 고쳤어? 크윽...... 아야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뾰족한 구둣발이 날아오고, 기찬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죽는 시늉을 한다.

학창시절에도 그만그만한 선배들에게는 굳이 선배라고 할 뿐, 형이나 누나라는 호칭은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은숙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고학년이기도 했거니와, 후배들을 정말 동생처럼 잘 챙겨주기도 해 누나라고 했던 기억이 살아난다. 하지만, 워낙 말수도 적고 고학년이라 그랬는지 동아리 모임에도 자주 나오지 않아 쉬 잊어버렸던 모양이고, 무엇보다도 기찬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군대에 가 버렸으니 더 이상 말할 바도 아니었다.

“으응, 그랬구나?...... 참, 여긴 웬 일인데......”

한동안 옛날 얘기를 하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기찬의 방문 목적을 뒤늦게 물어온다.

“아, 내 조카가 여기를 다녀......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누나는 결혼했어?”

“이 자식이...... 그럼 이 미모에 아직까지 못가고 있을까 봐? 벌써 하나 물었지. 호호호......”

“참 나...... 누나 많이 변했다? 하하...... 아!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안경 안 썼잖아? 그러니까 내가 금방 못 알아봤지.”

“푸훗...... 그때는 한참 멋 부리고 그럴 때 아니니? 렌즈였지. 호호......”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야?”

“으응, 그 사람도 선생님이야. 뭐...... 우리같이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어디 다른 곳에서 인연 만들기가 쉽지 않잖니?”

“기가 막혀서...... 정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들으면 거품 물고 쓰러질 소리 하시네......”

“네 조카는 누구니?”

“뭐, 말하면 알아? 일학년 김미림......”

“김미림?...... 아! 친조카가 아닌 모양이구나?”

마침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려 은숙도 자리에서 일어서고, 기찬은 명함을 꺼내 전해준다.

“이제 누나 여기 있는 것도 알았으니 가끔 누나 보러 올게. 뭐...... 월급날 같이 에스코트가 필요할 때 전화해.”

“야! 요즘은 다 통장으로 들어와서 에스코트 필요 없는데...... 호호호...... 그래, 다음에 한 번 보자.”

“응, 나도 이제 조카한테 전화 해 봐야겠네. 누나, 다음에 봐.”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 문득 유명한 시인이 남긴 시의 구절이 떠오르고, 기찬에게 은숙은 그런 느낌을 주는 아스라한 추억 같은 것이었다. 그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자들도 그저 여자일 뿐 이제는 배설의 대상으로 삼아 버리는 기찬이었지만, 학창시절 추억 속의 은숙은 여전히 누나로 남아 있어 조금은 낯 설은 기분이 들었다. 건물 안으로 사라져 가는 은숙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전화를 꺼내 든다.

“미림?......”

“네, 외삼촌...... 어디 계세요?”

“으응, 여기...... 운동장 구석에 커다란 나무 밑인데...... 그러면 알 수 있어?”

“아! 네...... 나중에 종례 마치면 바로 갈게요.”

“그래...... 알았다.”

재잘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사이로 미림이가 달려온다. 걱정거리가 있는 녀석치고는 밝은 표정이어서 오히려 기찬이 머쓱해지고, 외삼촌이라기에는 그저 오빠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만하니 친구들의 시샘을 받으며 교정을 빠져나간다.

“그래, 그 녀석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아는 언니 통해서 알았어요. 친구들하고 여의도 놀러 갔다가......”

“그럼, 연락처는?”

“메일로 보내요. 전화번호 같은 건 모르고......”

“그 언니라는 애는 누군데...... 학교 선배야?”

“네......”

“그럼 그 메일 주소 좀 여기 메모지에다 적어 봐. 외삼촌이 알아 볼 테니까......”

기찬의 입장에서 메일주소를 통해 신원확인을 하는 것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굳이 군 계통의 수사망을 통해서 할 것도 없이 일선 경찰기관에서도 수사협조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니 그렇게 그 메모지는 기찬의 주머니로 모습을 감춘다.

녀석도 제법 은밀하게 아이들을 관리하는지 전화연락은 되지 않는다고 하니 나름대로 꼬리를 감춘 채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양이었지만, 이제 기찬에게 꼬리를 잡혔으니 그 끝을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용돈벌이를 해서 탕진하는 계집애들도 나름의 필요에 의해서 하는 일일 테니 제 한 몸만 조심하면 탈이 날 리 없을 것이고, 신고를 할 이유도 없는 것이겠지만, 이제 미림이로 인해서 그 감춰진 사연이 차츰 드러나게 될 모양이었다.

“그럼 미림이는 이제 학원으로 가는 건가?”

“네, 쉬는 시간도 없어요. 치......”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리는 미림이를 학원까지 태워준 후, 차를 돌리며 손을 흔들어 준다. 경찰서에 잡혀 갔던 날의 미림이에게 기찬은 마치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였다. 자신을 체포하며 겁을 주고 막말을 해 대던 무서운 경찰들과 몇 마디 수군거리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자신을 데리고 나오고, 그가 온 뒤로는 무서운 경찰들도 자신에게 친절하게만 대해 줬던 기억들은 마치 흠모하는 연예인에게 매료당하듯 기찬에게 빠져들게 만들어 버렸다.

아빠와 엄마의 회사 사장님이라지만, 그저 이웃집 오빠 같은 연령의 기찬이 자신에게 친절히 다가서며 외삼촌이라고 부르라는 주문을 해 올 땐 무서운 경찰서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천만의 원군을 얻은 것만 같았다. 어떤 고민스런 일도 기찬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거...... 시간도 어정쩡하고......”

미림이와의 약속으로 지수와 일찍 헤어져 온 것이 은근히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잠시 기다리게 해 두고 다시 만날 약속이라도 잡아 둘 것인데, 전화기를 꺼내들고 망설이던 중에 전화가 울린다.

“안녕하세요?”

“네, 누구시죠?”

낯 설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귀에 갖다 대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호...... 아까 만났던 지수 친구예요. 이제 모두 헤어졌거든요.”

“아! 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어머! 너무 사무적이시다...... 몹시 바쁘신 것 같더니 역시...... 호호호...... 일은 무슨 일이겠어요? 그저 한 번 다시 뵙고 싶어서 그러지요.”

“아! 네...... 하하...... 뭐, 아무 때고 우리 누님한테 연락만 주시면 잘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상의 드릴 것도 있고, 마침 사업을 하신다니까 알아두시면 좋은 정보도 있고 해서 따로 좀 뵈었으면 싶거든요. 제 목소리 기억 안 나세요? 아까 제일 구석에 앉았던......”

여자는 지수의 친구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화려한 외모였다. 마치 곁에 있는 지수의 다른 친구들은 이 여자의 들러리라고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고, 모르면 몰라도 그 분위기를 본다면 이 여자가 지수를 애인 하나 건사할 줄 모르는 골동품 취급을 해 불쾌하게 만들었을 것이니,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수로 하여금 자신을 불러내 친구들 앞에서 젊은 애인이라고 시위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이 여자였을지 모를 일이다.

은근히 자신의 외모를 시위하려는 듯 기찬의 기억을 더듬어 들어오고, 마침 무료했던 기찬이 굴러들어오는 떡을 사양할 리 없는 일이다.

“아! 하하...... 왜 모르겠습니까? 아...... 그러면 시간이 언제가 좋으실까요? 뭐, 지금도 괜찮으시다면......”

“네, 그래요. 잘 됐네요. 음...... 그럼 이 쪽으로 오시겠어요? 여기 서교동인데......”

“네, 그러시죠. 근처에 가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도도한 기품을 유지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값싸게 보이기 싫었던 것인지, 만나자고 청한 입장에서 오히려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이지만, 굴러가는 자동차에 몸만 실으면 될 뿐이니 다른 이유가 필요 없다.

대로에서 다소 떨어진 한적한 길가에 작은 호텔이 자리하고 있어 과연 장사가 될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일층의 커피숍에 다리를 길게 드리우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기찬의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에요.”

“아! 네...... 하하...... 종아리가 서늘하십니다.”

자리에 앉는 기찬으로부터 의외의 짓궂은 인사가 튀어나온다. 이렇게 따로 만나자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지수와 자신이 불륜이라는 것을 피차가 인식하고 있는 바에 공연히 불필요한 세간의 예절을 앞세워 거리를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머! 네...... 호호......”

여자 역시 자세를 바꿔 다리를 교차시킬 뿐 여전히 늘씬한 종아리로 기찬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눈앞의 젊은 사내가 친구 지수에게 예속된 관계도 아닐 것이며, 불륜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그 기득권을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니 그저 차지해 버리면 그만인 셈이다.

“저...... 혹시 고영준 의원님이라고 아세요? 이름 들어보셨나요?”

“아! 네......”

여당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 계파의 중견이었다. 지수의 친구에게서 엉뚱하게도 정치가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기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희 시아버님이세요.”

“아! 네...... 그러시군요?”

역시 그런저런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결혼한 여자들에게 처녀 적 미모와 견줄 만한 것은 역시 남편의 명함이며 재산 따위였을 테니 시아버지가 나름대로 명망 있는 정치인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상당한 자신감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찬에게 있어 정치라는 것은 그저 고리타분한 영감 냄새 풍기는 내용일 뿐이니 별 무반응, 오히려 찬물을 끼얹은 듯 여자에 대한 관심이 식어 버리고 바로 용건을 물어보게 된다.

“그래, 제게 상의하신다는 말씀은?......”

“어머! 아, 네...... 호호......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하하...... 좀 그런 편입니다.”

굳이 이런 자리에서 딱딱한 정치 얘기며, 심드렁한 정치인들에 대한 것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기찬은 그 대꾸마저도 성의 없이 받아낼 뿐이었다.

“그러시면 오히려 잘 된 일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강사장님도 기왕에 사업을 하고 계시니까 이 기회에 당에 가입을 해 두시면 다른 사업가들과 교류하시는 데에도 널리 유용한 점이 많으실 거예요. 저희 남편도 청년 분과를 맡고 있어서 서로 도움도 될 것이고......”

“아하! 무슨 말씀인가 알겠습니다. 하하하......”

기찬은 전신에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공연히 헛물을 켜고 난 기분이랄지 공연한 기대에 들떠 있었던 만큼, 그만큼의 허무함에 빠져 버린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차라리 후원회 같은 게 있다면 제가 음...... 그러고 보니 아직 저는 이름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하......”

“어머! 참, 저는 한금주라고 해요. 호호...... 아유, 죄송해요.”

“아! 금주씨...... 저는 그저 개인 자격으로 가끔 후원회비나 내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머! 그러시겠어요? 호호...... 사실 저희들에게는 그게 더 좋은 일이지만요. 그래도 가끔 모임에 나오시면 경제인들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실 텐데......”

“하하...... 저는 정치고 경제고 간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금주씨 정도라면 제 관심이 가긴 하는데 말씀입니다.”

“어머머! 자꾸 그러시면 지수한테 다 일러줄 거예요. 호호호......”

금주는 예쁘게 눈을 흘기며 고영준의원의 명함과 자신의 명함을 테이블 위로 올려둔다. 금주의 명함에는 고 의원 후원회 명의의 계좌번호가 인쇄되어 있어 아예 이런 용도로 쓰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어차피 세비만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정치인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기찬은 스스럼없이 말을 이어간다.

“음...... 후원을 해 준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해 오는 청탁 따위를 다 들어주기도 힘이 드는 일일 텐데......”

“아! 네...... 그래서 후원 모임을 가끔 열어요. 그러면 거기에서 서로 인사도 나누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교분들을 쌓게 되고, 서로 서로 정보들을 나누는 거죠. 요즘은 청탁을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도 별로 없어요.”

“그래도 간혹 뉴스에 나오는 걸 보면......”

“호호......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쯤 되면 그건 한두 푼 후원회비로는 될 일이 아니지 않겠어요?”

“하하...... 그도 그렇겠군요. 아...... 그렇다면 이거...... 저는 그냥 헛돈 쓰는 기분인데요?”

“아이 참...... 그러니까 강사장님도 가끔 후원 모임에 나와 보시라니까요.”

“그럼 기회 봐서 한 번 나가보지요. 언제 연락 주십시오.”

기찬이 명함을 집어 품에 갈무리를 하자 비로소 금주의 얼굴 표정이 밝아진다. 실세 의원의 후원회 모임에 참석할 정도면 적잖은 금액을 지참해야 할 터이니 금주의 입장은 영업사원이나 별반 다를 일이 없는 터, 시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등에 업고 행세도 하며 사랑받는 며느리로서의 몫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기찬을 바라본다. 

“호호...... 그럼 이제 딱딱한 얘기는 그만하고...... 지수, 걔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아유...... 전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 계집애 그저 숙맥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 네...... 지수씨 남편을 저희 회사로 데리고 왔습니다. 뭐,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안출입도 하게 되고...... 하하...... 또 저하곤 성씨도 같아서 그저 그렇게 누님, 동생으로 지내니 보기에 이상할 것도 없고, 좋잖습니까? 하하하......”

“어머! 그러시구나......”

“금주 누님도 저하고 친하게 지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친구 남동생인데...... 하하......”

“어머머! 아유, 못됐다. 남자들은 다 도둑놈이라더니...... 호호호...... 자꾸 그러시면 정말 지수한테 다 일러 줄 거예요.”

금주도 싫지는 않은 듯 눈을 흘기며 교태를 흘려온다. 서로가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출발한 만남이니 손목 한 번 잡지 않았어도 이미 두 사람에게 지켜야 하는 선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한창 바람을 잡는 기찬의 발목을 전화가 울려 잡아 버린다.

“으응? 미림이?...... 왜?.......”

“아유, 외삼촌......”

“으응, 그래...... 또 무슨 일이니?”

“그 오빠가 여기 학원에 와 있어요.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 같아요.”

“으응, 그래...... 알았다. 외삼촌이 지금 갈 테니까 밖으로 나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네...... 빨리 오세요.”

전화를 끊는 기찬에게 금주가 의아한 듯 바라본다.

“어머! 미림이가 누구예요? 외삼촌이라고 하면 혹시 지수...... 딸이에요?”

“아! 네...... 제가 그랬잖아요. 집안에도 출입을 자유롭게 한다고......”

“어머, 세상에...... 호호호...... 어머! 지수 계집애...... 너무 좋겠다. 호호호......”

“자...... 그러면 금주 누님은 다음에 봅시다. 오늘은 우리 조카가 급한 일이 있어서 제가 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어머! 은근히 기분 나빠지는데요? 지수 계집애한테도 밀리고 그 딸애한테도 밀리는 것 같아서...... 호호호......”

“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후원금 빵빵하게 넣어 드려서 누님 체면도 살려 드리겠습니다.”

“어머! 정말이시죠? 제가 확인해 볼 거예요?”

“그래요. 내일 입금해 드릴 테니까 확인해 보세요. 하하......”

금주도 후원회원 모집만이 목적은 아니었을 터, 나름의 아쉬움이 있는지 헤어지기 전 악수를 나누는 손에 힘을 주어 기찬에게 정을 실어 보낸다. 기찬은 윙크로 애정표현을 한 후에 차에 올라 미림에게로 방향을 잡아간다.

“그래, 정치인 하나 정도 연줄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방배동 학교 근처의 학원 가까이 도착해 차를 세워두고 걸음을 옮긴다. 이미 학원까지 와서 미림이를 기다린다면 미림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후환을 없이 하려면 아주 끝을 보아야만 할 모양이었다. 

“으응?......”

학원의 입구에는 어디서 본 듯한 녀석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으나 기찬은 그저 그 녀석을 지나쳐 학원으로 들어서고 접수처를 지나 이 층으로 올라서며 미림이에게 전화를 넣는다.

“아래에 흰 티셔츠 입은 녀석이니? 청바지 입고......”

“네, 외삼촌...... 지금 오신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너는 그냥 교실에 있어. 나오지 말고......”

“네, 알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집에 갈 때는 저 데리고 가셔야 돼요.”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는 기찬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녀석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어딘가에서 본 얼굴인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선뜻 움직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자판기 옆으로 몸을 숙여 밖을 내다본다.

“가만 있어보자. 저 자식은...... 아! 그래...... 그 때 본 녀석이야......”

자신에게 항문섹스를 처음 경험하게 해 주었던 유정이 떠오르고 그녀의 가족들을 경찰서에서 꺼내주기 위해 갔던 날, 함께 따라왔던 유정의 남자친구라는 녀석이었다. 기찬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린다. 이젠 더 이상 신원확인을 할 필요도 없어진 일이니 천천히 전화를 꺼내 이층의 창가로 다가가 유정에게 전화를 넣는다.

“여보세요?”

“으응, 오빠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장난치지 말고......”

“자식...... 오빠라니까...... 후훗......”

“어, 어머!......”

비로소 기찬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기찬이 말을 잇는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오빠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게다가 전화를 한다고 해 놓고 왜 먼저 전화를 하게 만드는 거야?”

“칫...... 그거야 내 맘이지. 왜? 무슨 일인데요?”

“허 참...... 너 그거 반말이니? 존댓말이니?”

“그것도 내 맘이고, 듣기 싫으면 전화 끊어요.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예요?”

“좋다. 까짓 거...... 같이 늙어 가는 사이에...... 전에 너하고 같이 왔던 네 남자친구라는 애...... 이름이 뭐니?”

“그건 왜?......”

“이 자식이 또 반말...... 인마, 은근히 신경 쓰여서 그러지...... 내 경쟁자 같던데...... 하하하......”

“피...... 웃기고 있어...... 그 애도 오빠랑 나이가 같을 걸...... 나하곤 반말 하는 사이니까 너하고도 반말하는 거다 왜? 떫니? 호호호......”

“어휴...... 너하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까불지 말고 이름이나 말해 봐. 내가 어디서 본 애 같아서 그래.”

“그래?...... 이윤호라고 하는데......”

“그래, 알았다. 다음에 보자. 끊는다.”

“어, 어...... 오빠, 오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기찬은 전화기를 덮어 버린다. 자신의 볼 일을 다 보았으니 버릇없는 계집애의 넋두리 따위를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걸음을 옮겨 일층 현관 밖으로 나서고 대뜸 녀석의 어깨를 짚는다.

“이윤호씨?......”

“으응? 누구시죠?”

“나, 모르겠어? 왜 일전에 경찰서에서 한 번 봤을 텐데...... 유정이 따라서 유정이 아버지하고 함께 오지 않았던가?”

“아, 아...... 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허억......”

기찬이 내지르는 주먹질에 명치를 거머쥐고 주저앉는다.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숨을 들이키며 주저앉은 녀석의 목덜미를 쥐고 한 곁으로 물러나니 비명소리도 없이 조용히 일을 치러 버린다.

“왜, 왜...... 이러세요?”

“나?....... 왜 이러냐고?...... 나, 미림이 외삼촌이야.”

“......”

기선을 제압당해 숨 쉬기가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기찬을 올려다본다. 이미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도망가도 소용없는 일, 기찬이 내미는 수사관 신분증을 보고는 대꾸도 못하고 다시 바닥에 주저앉는다.

“자,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아직 아무 일도......”

기찬의 눈을 바라본 녀석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주변에서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한두 명씩 학생들이 두 사람을 둘러서기 시작했고, 난처해진 기찬도 이 자리에선 이 정도로 마무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좋다. 뭐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나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그 대신 너, 앞으로는 미림이는 물론이고 유정이에게도 접근금지다. 알았나?”

“네, 네......”

“지갑 꺼내 봐.”

“네?......”

“지갑 말이다. 이 자식아...... 내가 네 놈 신원을 알아둬야 말을 안 들어 처먹으면 나중에라도 잡아 조질 거 아냐?”

더듬거리며 내미는 지갑을 뺏듯이 낚아 채 신분증을 포켓에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킨다.

“가 봐. 이제......”

“그, 그건......”

“너, 오늘 일로 다 끝난 게 아니야. 내 조카 입장을 봐서 네 놈을 잡아 처넣진 않겠지만, 한 번 쯤은 나를 더 봐야 되지 않겠어? 나중에 봐서 직접 주든지 우체통에 넣어 주든지 할 테니까, 애들 앞에서 더 두들겨 맞기 싫으면 오늘은 이만 가 봐라.”

두고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지만, 이 경우는 다른 이야기이니 녀석의 걸음걸이는 바지 안에 똥 싼 녀석처럼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기적거리며 사라져 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두 지켜보고 있었는지 어느새 미림이가 내려와 팔짱을 걸어온다.

“으응?...... 너 수업은 다 끝난 거야?”

“네, 어서 가요. 또 독서실에 가야 하는데...... 오늘은 안 갈 거예요. 신경도 쓰이고...... 그냥 집에 가요.”

“그래, 그러자.”

하루 종일 모녀간의 일로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날은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림이와 함께 들어서는 기찬을 보고 김비서와 지수는 매우 놀란 듯 두 사람을 맞아들인다.

“아, 아니?...... 사장님이 어떻게......”

“하하...... 미림이를 못살게 구는 녀석이 있다고 해서 혼을 좀 내주고 왔습니다.”

“아이, 외삼촌......”

물론 원조교제에 대한 얘기를 기찬이 꺼낼 리는 없겠지만, 미림이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 기찬을 만류하고, 지수 역시 가슴이 내려앉는다. 지수는 서둘러 기찬을 맞아들여 분위기를 바꿔 버리고, 어찌 됐든 세 사람의 비밀스런 사연에 김비서만이 눈을 멀뚱거릴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이 방은 안 쓰던 방이라서......”

“으응?...... 괜찮아. 그나저나 김비서는 잠들었어?”

“네, 아유...... 웬 술을 그렇게 먹이셨어요? 술도 못 먹는 사람을......”

“후훗...... 그래야 내가 누님을 차지할 거 아냐? 이렇게......”

“어머! 아, 안돼요. 지금은 미림이도 집에 있는데......”

지수의 허리를 감아 안는 기찬을 밀어낸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술판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기찬은 의도적으로 김비서에게 건배를 권해 진작부터 김비서는 떨어져 버렸다. 미림이도 방에 들어가고 난 뒤, 기찬은 사용치 않는 이 층의 빈 방으로 올라와 잠을 청하며 지수가 올라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참, 그나저나...... 금주라는 여자 말이야.”

“어머! 금주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지수는 허리에 감긴 기찬의 팔을 풀어내다 말고 바짝 다가앉는다. 금주의 이름을 들이대 지수의 관심을 유발해 냈으니 이것도 작전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으응, 아까 헤어지고 난 뒤에 전화가 왔더라고...... 만나자고......”

“어머! 이 계집애...... 정말 웃기는 애라니까...... 그래서요? 만나셨어요?”

“으응, 뭐...... 별 일은 아니더라고...... 자기 시아버지가 정치인이라면서 후원회에 가입해 달라던데......”

“그래서요?”

“뭐, 알았다고 했지. 그런 사람 알아두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때가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얘기는 없었고요?”

“다른 얘기 뭐?...... 이런 거?......”

기찬은 지수의 사타구니에 손을 밀어 넣고 지수는 기겁을 하며 물러나 앉는다.

“아이 차암...... 기찬씨...... 미림이 때문에 안 된다니까요. 잠깐만...... 잠깐만...... 그러면 살짝 가보고 올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끝내 손을 놓아주지 않는 기찬을 그렇게 달래두고 지수는 눈을 흘긴다.

“그냥 주무시고 계세요. 나중에 미림이 잠들면 그 때 올라올게요.”

“안자고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

창을 열자 뒷집과의 경계에 나무가 많이 있어 그런지 신선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무리 봐도 이 집은 시내와 가까운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며 공기도 좋아 그냥 처분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집이었다. 이만한 이 층 양옥집을 일부러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 지수의 가족에게는 별도의 자금으로 집을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밤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기찬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저...... 오늘은 그냥 주무셔야 되겠어요. 미림이가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고 잠을 안자서......”

“이런...... 그래도 잠깐만 들어 와.”

문턱에서 소곤거리는 지수의 팔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럼...... 금주한테 가 버린다.”

“어머머! 가세요. 그럼......”

고개를 돌려 나가려고 하는 지수를 다시 붙잡아 입술을 덮어 버린다. 이미 기찬의 짓궂은 장난에 많이 익숙해진 지수도 금주의 이야기를 꺼내자 토라진 듯 쉽게 입술을 열어주지 않다가 한 순간 목에 팔을 둘러오며 달콤한 살을 내주고 만다.

“흐으읍...... 으흠......”

가는 허리에 팔을 감아 꺾어 버릴 듯 힘을 준다. 

부드러운 가슴에 코를 묻고 향기를 들이마시니 지수의 몸에서도 가느다란 떨림이 감지되어온다.

“하아악...... 지금은 안 된다니까...... 기찬씨......”

“누님, 그럼 잠깐 나갑시다. 골목 안에 내 차가 있잖아? 응?”

“아...... 정말 미쳤나 봐...... 안 돼요. 차라리 여관으로......”

“그래, 그럼 그러든지......”

기찬은 지수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팔을 이끌어 계단을 내려선다. 현관을 열고 대문을 벗어날 때까지도 두 사람은 지수의 차림이 잠옷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머! 이래서야.......”

기찬은 할 수 없다는 듯 지수를 차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미 날은 어두워 사방은 어둡기만 할 뿐 골목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니 두 사람의 밀회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좁은 차 안으로 들어오니 아득하기만 한 것이 서로의 체취에 빠져 호흡은 점점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금지된 상대와 금지된 공간에서 금지된 행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그 흥분을 몇 배로 배가시켜주었고, 옷가지를 떼어내는 손길이 더디기만 할 뿐이었다.

후욱...... 후욱......“

“하악...... 기찬씨...... 살살......”

잠옷이라야 벗길 것도 없으니 팬티만 내린 채 엎드린 지수의 하얀 엉덩이 사이로 허리를 밀어붙이고, 지수는 조수석 등받이를 접어두고 그 위에 엎어진 채로 기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골목 끝으로 보이는 큰길에는 이따금씩 차가 지나다니며 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어! 엄마......”

“으응, 아직도 안자니? 늦었는데......”

“으응...... 준비할 게 있어서...... 외삼촌은?......”

“으응, 주무시겠지...... 아까 이 층으로 올라가셨어.”

“그 방 곰팡이 냄새가 많이 날 텐데...... 사용을 안 해서......”

“어머나? 그럼 우리 미림이가 방이라도 바꿔 드릴 거니? 호호호...... 아까 방향제 갖다 드려서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일찍 자렴.”

“네...... 엄마. 엄마도 주무세요.”

엄마, 아빠와의 술자리에서 기찬이 수사관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미림이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이 가슴을 차지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외삼촌이라기보다는 또래의 오빠라고 해도 좋을만한 나이이니 미림이의 방심은 너무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

엄마가 나간 뒤 공연히 분주해진 마음에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물을 찾는다.

“너, 넘어져요. 조심해요.”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바쁘게 이 층 계단을 내려오고, 미림이는 깜짝 놀라 몸을 부엌으로 숨긴다. 기찬에게 손목을 잡힌 채 허둥지둥 끌려가는 엄마는 잠옷차림이었다.

“어, 엄마가...... 왜......”

사춘기 소녀에게 상상치 못할 일은 없었다. 속이 다 비치는 잠옷차림의 엄마가 이 층에는 왜 갔으며,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은 그 다음 상황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기찬을 이성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몹시 혼란한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었고, 아빠를 배신해 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 따위도 아니었다. 이미 씀씀이 문제로 아픔을 겪었던 미림이는 원조교제 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엄마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아빠의 실수로 망해 버린 집안을 기찬의 도움으로 다시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으니, 이 상황을 아빠가 알게 되어선 곤란하다는 생각부터 들어 안방의 인기척을 살피게 된다.

“아, 아빠...... 미안해요......”

이미 커 버렸다고 하기엔 아직 어리기만 한 미림이였지만, 자신의 주변에 널리 포진해 버린 기찬의 영향력을 느끼기엔 충분한 나이였다. 기찬의 도움 없이 과거의 영화를 회복할 수 없다는 정도는 엄마나 아빠가 그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영악해져 버린 미림이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엄마의 부정으로부터 시선을 외면해 버린다.

“저, 저는 모른 척...... 할 거예요. 죄송해요. 아빠......”

고개를 빼 바라보니 골목 끝 기찬의 차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뒤로 하고 까치발을 들어 방으로 향한다.

“하아악...... 여, 여보......”

“후욱...... 후욱......”

어느덧 기찬은 지수의 엉덩이를 끌어안고 욕정을 뿜어 대고 있었다. 울컥거리는 분출을 느끼자 강하게 마지막을 조여 주는 지수의 뒤에 매달려 기찬은 마지막 허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하...... 우...... 누님, 정말 잘 조여 주는데...... 흐윽...... 좋아......”

“하악...... 티, 티슈는 어디 있어요?”

“으응, 그 옆에 있잖아.”

대강의 뒤처리 후에 두 사람은 나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집안으로 사라지고, 골목을 바라보던 미림이도 서둘러 자리에 누워 버린다.

“뭐, 별 일 없지?”

“네...... 아직 안 가 봤어요. 안 씻어도 돼요? 어서 씻고 주무세요.”

“누님은? 누님 먼저 씻어.”

“안 돼요. 난 조마조마해서...... 기찬씨 먼저 씻고 주무시면, 난 그 때 씻을게요.”

기찬이 몸을 서둘러 씻고 나오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자신 역시 조심스런 장소에서 일을 치르고 나니 심장의 박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었다. 여유를 부려가며 샤워를 즐길 형편이 아니니 대강 물만 뿌린 뒤 밖으로 나선다.

거실 소파에 앉아 기찬이 나오기만 기다리던 지수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서고, 기찬은 이내 이 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몸을 누인다.

미림이는 눈을 감고 있어도 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실에서는 두런거리는 인기척이 끊이질 않으니 미림이의 가슴도 그에 따라 두근거리고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계집애들은 부모들이 그러면 반발하던데...... 난 나쁜 계집애인가 봐......”

기찬이 마련해 주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말도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이미 들었고, 열악해진 경제 환경에 빠진 미림이는 종전의 여유로움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다. 덩치만 어른과 다름없을 뿐 여전히 철부지이니 미림이는 기찬의 그늘에서라도 보호를 받고 싶었던 모양, 그 점에 대해서는 사실 여느 어른들도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엄마와 기찬의 부정 현장을 목격해서라기보다는 그 일을 못 본 척 덮어주고, 안락한 환경을 택한 자신과의 거래가 더욱 놀라워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선다. 방금 샤워를 한 듯 향긋한 샴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우리 미림이...... 자니?......”

“......”

“미림아?......”

“......”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자 곧 다시 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진다.

“후우...... 차라리 독서실에 갈 걸 그랬나 봐......”

미림이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엎드려 베개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하고,

창밖으로는 바람이 부는지 창문이 소리 내어 덜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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