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부- (18/40)
  • -18부-

    “이거야 원...... 기가 막혀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시각, 기찬의 지프에는 흰 색 바탕에 수사차량이라는 검정글씨, 붉은 색 사선이 그어진 팻말이 운전석 앞에 놓여 있었다.

    급히 차를 몰아가는 기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은 차에 붙여 둔 경광등이 번쩍거려서만은 아닐 것이니, 소공동 사채 사무실을 찾아왔던 젊은 부부와의 거래를 약속하는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하고 있던 기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네......”

    “아! 기찬아...... 나야, 나...... 병국이.”

    “어, 어...... 선배...... 무슨 일이야?”

    “허이구...... 이거 크, 큰일 났어......”

    병국의 너스레에 기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자신을 찾기 위해 미라가 병국에게 접근했었고, 그런 미라를 잊지 못해 기찬을 통해 수배하려던 병국에게 미라의 입장을 고려해 복덕방 사장의 부인인 애경을 붙여줬던 일이 병국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것은 단지 불길한 예감만이 아니었다.

    “애경씨 말이야. 다른 남자를 만나느라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내가 뒤를 밟아보니 웬 놈을 만나더라고...... 그래서 따지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그만 여관 주인이 신고를 해서 지금 경찰서에 잡혀왔거든...... 그런데 지금 애경씨 남편한테 경찰에서 연락이 간 모양이야. 이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너한테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나 참...... 아니...... 미쳤어? 도대체 제 정신이냐고...... 그 여자가 선배 마누라야? 뭐야?...... 그따위로 처신을 하면 그 남편한테 내 입장이 뭐가 되냐고?...... 엉?......”

    “미, 미안해...... 지금 집에도 연락을 못하겠고, 너한테도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 돼서 너한테 먼저 전화한 거야. 이 전화도 빨리 끊어야 되나 봐......”

    “이런 씨바...... 나한테 전화를 하면 뭘 어쩌라고...... 몰라! 혼자 알아서 해.”

    홧김에 전화를 끊어 버렸으나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 결국 기찬이 강요한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끝내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배경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다고 하더라도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애경과 병국을 모두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술좌석에서야 얼마든지 각각의 지인을 만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지 술좌석에서의 소개인사 한 마디로 그런 불륜이 만들어질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테니 미친 놈 대접을 받지 않으려면 기찬을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복덕방 사장의 입장에서라면 기찬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을 테지만, 그것 역시 하소연의 차원일 뿐, 설혹 애경과 병국 모두가 기찬을 지목해 뚜쟁이로 매도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시선을 흐려 난국을 벗어나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걸려온 전화번호를 조회해 경찰서를 확인한다. 지금 차를 몰아가고 있는 기찬의 궁금증은 병국과 싸웠다는 그 상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병국의 말로 보아서는 영감은 아닌 것 같았고, 일전에 여관에서 나오던 그 사내는 아닐지 기찬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르신...... 접니다,”

    “아! 자넨가? 허허...... 자네가 어쩐 일로 내게 전화를 다......”

    “아, 하하...... 아닙니다. 그저 별 일은 없으신지 인사차 전화 드렸습니다.”

    “아! 고맙네. 별 일이야 뭐...... 안 그래도 내 조만간 자네가 있다는 곳에 한 잔 하러 갈까 하는데......”

    “네, 그러시죠. 이거 제가 꼭 장삿속으로 전화한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하하......”

    “응? 허허허...... 그런가?......”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세......”

    애경을 소개해 줬던 유정의 아버지 조사장에게도 별 일은 없는 모양, 상대는 역시 여관에서 봤던 그 사내인 모양이다.

    “다행히 영감은 아닌 모양이고......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더니...... 최병국이 때문에 오히려 그놈이 불쌍하게 됐군.”

    방배동 지수의 집에서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집을 둘러보자마자 부리나케 꽁지를 감추더니 결국 이런 사단을 만들어 내려고 애경이 그리 서두른 모양이다. 시간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니 기찬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본다.

    “이거...... 요즘은 내가 무슨 팔자에 매 번 경찰서 출입인가......”

    기찬은 병국이 자신에게 연락을 했다는 점에서 더욱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일을 저질러 두고서 기찬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은 너도 뒤가 구린 일이 있으니 다치기 싫으면, 알아서 자기가 나갈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병국이 아는 기찬은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저 학교를 다니다 군대에 다녀 온 백수건달에 불과할 뿐인데, 자신의 경솔한 행동으로 빚어진 일에 물귀신처럼 기찬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니, 기찬이 가족을 동원하든, 변호사를 선임해서 합의를 이끌어 내든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치부를 보이지 않는 선에서 해결해 달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씨바...... 법대에 다닌다는 인간이 잔머리만 늘어가지고......”

    결국 자신은 애경과 동침 장면에서 걸린 것도 아니고, 다만 애경의 불륜현장에 뛰어들어 싸움을 했을 뿐이니 오해에 의한 단순한 폭행사건이라고 우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애경 또한 낯 뜨거운 불륜상대끼리의 싸움이라고 굳이 주장할 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었다.

    다행히 아직 복덕방 사장은 도착하지 않았고, 경찰의 협조를 받아 애경을 만날 수 있었다.

    “뭐야? 도대체...... 아까 그렇게 부리나케 나가더니 애인 만나러 갔던 거야?”

    “아유, 몰라...... 기찬씨...... 나 어떻게 해? 저 망할 놈의 새끼 때문에 이제 꼼짝없이 간통으로 콩밥 먹고 이혼 당하게 생겼으니......”

    “콩밥은 무슨...... 최병국, 저 인간은 뭐라고 얘기 없어?”

    “아유, 저 개새끼...... 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자기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해 달라는데...... 아닌 게 아니라 샛서방끼리 싸움난 거라고 할 수도 없고...... 저 새끼 법대생이 맞긴 맞는 거야?”

    “뭐, 어떻게 하겠어? 저 인간 끌어들여봐야 자기만 우스운 꼴 되고, 일도 점점 복잡해지는데...... 또 하나는 전에 여관에서 본 그 남자야?”

    “으응......”

    “참 나...... 일단 그 남자 설득해서 저 인간은 오해로 싸움이 난 거라고 말해 주라고 해. 빨리 하나라도 훈방으로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 나머지는 합의를 보든 말든 하지. 그렇게 해 주면 영창은 안 가도록 내가 중간에서 남편하고 합의를 보게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자, 빨리...... 시간 끌다 남편 오면 공연히 더 복잡해진단 말이야.”

    이미 경찰들도 샛서방끼리 싸움이 난 것을 모두 알고 있어 입가에 웃음이 걸려있지만, 폭행 당사자 간에 단순오해였다고 입을 맞춘 사안이기도 하고, 기찬의 선처요구도 있어 병국을 훈방하기에 이른다.

    “미, 미안해...... 기찬아......”

    “앞으로는 우리 얼굴 보지 맙시다. 뭐요? 사내새끼가 돼 가지고...... 치사하게...... 이만 가쇼. 저 여자 남편 오기 전에...... 아! 마침 저기 오네...... 빨리 가 버려.”

    “으응, 그래, 다음에 보자.”

    상기된 표정으로 경찰서 마당을 가로질러 오던 복덕방 사장은 기찬을 발견하고 막 그 앞을 떠나는 병국을 돌아본다.

    “어, 어?...... 야, 기찬아...... 넌 여기 웬 일이냐?”

    “아! 형님...... 누가 싸우다 잡혀왔다고 해서...... 방금 합의 보고 돌려보내는 중이었어요. 아! 그나저나 형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요? 나, 여기서 조금 전에 형수를 본 것 같은데......이제 형님이 온 걸 보니 정말 그 여자가 형수였던 모양이네?”

    기찬은 시치미를 잡아떼고, 사장은 다시 얼굴이 상기되어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이미 기찬이야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니 그저 귓등으로 흘려듣고, 사장을 위로하는 척하며 함께 들어선다. 

    신원확인 과정에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 정식으로 소장을 작성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거요? 형님...... 형수는 만나볼 거야?”

    “......”

    “상대 남자도 안 보고?......”

    “안 봐. 씨바...... 밖에서 내 눈에 띄었으면 개 패듯이 두들겨 패기라도 하겠지만, 여기서야 그게 가당키나 하겠냐? 저런 년을 더 이상 데리고 살 수도 없는 거고...... 이대로 콩밥이나 먹이는 수밖에......”

    “형님도 참...... 콩밥은 무슨...... 뭐 생기는 게 있다고...... 합의 보자고 하면 미친 척하고 합의 봐요. 형님, 허우대 멀쩡하겠다...... 새장가 들면 되는 거지. 돈만 있어 봐요. 예쁜 여자들이야 널렸지. 내가 형님한테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롭게 처신해요. 기왕 헤어질 거면 헤어지는 마당에 추한 꼴 보이지 말고...... 돈이 최고 아니요? 돈이......”

    “하긴...... 그건 그런데 말이야...... 뭐, 일단 이렇게 해 두면 저쪽에서도 무슨 연락이 있겠지.”

    “그래, 그렇게 해 두고 가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돈 얘기를 꺼내서인지 아니면 기찬과 함께 다니던 팔등신 미녀 지영을 떠올렸는지 의외로 복덕방 사장도 냉정을 유지하고, 바람을 잡는 기찬에게 순순히 넘어온다. 하기야 바보가 아니라면, 이미 소장 작성과 함께 끝난 사이에 미련을 둘 필요도 없는 일이니 실리를 택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기찬과 사장은 피차가 머리 아픈 일에 일찍 쉬고 싶다는 핑계로 술자리도 일찍 파하게 되고, 기찬은 다시 애경이 있는 경찰서로 향한다.

    “저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야?”

    “으응, 공무원......”

    “그래, 이젠 이혼해야 할 텐데...... 둘이 결혼 할 거야?”

    “칫...... 저 사람이 결혼해 주기나 하겠다. 사내놈들이야 다 똑같지. 남의 여자니까 탐을 내는 거지. 같이 살자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아유...... 씨...... 위자료 한 푼도 없이 이게 뭐야...... 그 새끼 때문에......”

    “참 나...... 영창 안 가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 저 친구한테 내일 변호사 붙여서 합의 보라고 하고, 나오게 되면 당장 갈 데도 없을 테니 짐 대강 챙겨서 우리 집으로 가 있어. 우리 집 알잖아? 노량진......”

    “내가 가도 돼? 어른들 안 계셔?”

    “지금 빈 집이나 마찬가지야. 일단 나오면 전화부터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쨌거나 애경은 효용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이젠 이혼까지 하게 되어 자유로운 입장이 될 것이니 일견 홀가분한 처지가 되어 기찬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동산 업무에도 능하니 밥 벌어 먹고 살 걱정은 없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맡길 만한 일은 차고 넘치는 입장이었다.

    “어머머! 결국 그렇게 된 거야?”

    “그래, 그러니까 여기 오면 우선 저 방을 쓰라고 해. 아니면 누님이 큰 방으로 가든지......”

    “싫어. 여기가 자기가 쓰던 방이라면서?...... 내가 이 방 쓸 거야.”

    “푸훗...... 그거야 누님이 알아서 하고...... 그래, 레스토랑 할 만한 자리는 찾아 봤어?”

    “아니, 내일도 좀 더 돌아봐야겠어.”

    “그래, 그럼 천천히 돌아 봐. 돈은 벌써 마련되어 있으니까...... 아유...... 난 좀 자야겠어. 너무 피곤해.”

    모처럼 집으로 돌아온 기찬은 지영에게 애경의 일을 당부해 두고, 지친 몸을 자리에 누인다. 생각해 보니 병국의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썩 나쁜 결과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된다.

    이내 이부자리를 파고드는 지영을 품에 안고 꿈결로 접어든다.

    “아! 그러면 이제는 영진처럼 이 회사 명의로 재직정보나 급여정보를 만들어도 되겠네요?”

    “네, 어제 얘기가 다 됐어요. 그 대신 그 회사는 노숙자들 명의로 바꾸고 나서 하도록 해요. 공장 부지는 내가 먹기로 했고...... 조금 있으면 나올 테니까 그 두 사람 모두 신용카드 있는 대로 전부 회수해 가지고 그 동안 밀린 돈도 다 막아주고......”

    아침 일찍 소공동 사채 사무실로 나온 기찬은 한기주에게 어제의 일을 설명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진이 대화에 끼어든다.

    “어머! 사장님, 카드는 왜요?”

    “으응, 그 사람들 양껏 대출 받아가지고 부도처리 할 생각이거든.”

    “말도 안 돼요...... 사람도 부도가 있어요?”

    “그럼...... 인간부도가 왜 없어?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저 시간만 지나면 다정상으로 돌아오니까...... 그것도 나라에서 지켜 준다니까...... 법으로...... 하하...... 기가 막힌 일이지.”

    이어서 기찬은 어제 오고간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고, 한기주는 이미 개인회생제도에 대해 알고 있으니 기발한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쳐온다.

    “하하...... 그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네요. 그러니까 신용카드도 다시 회복시켜가지고 최대한 끌어당긴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신용구매금액 한도 끝까지 카드깡을 날리는 거지. 뭐, 많잖아? 백화점 상품권이든...... 구두 상품권이든...... 현금서비스도 한도 끝까지 받아내고...... 두 사람 카드를 모두 그렇게 하면 최소한 일이천은 더 당길 수 있잖아. 카드가 몇 장이나 있는지 모르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일은 수월해지지.”

    “어머머......”

    “어차피 개인회생 들어가면 모든 채무가 동결되니까 상관없어. 심지어는 개인 돈도 못 받는데...... 그것 때문에 억울한 채권자들도 무지하게 많거든. 희한한 일이지만 법으로 채무자는 그렇게 보호를 해 주면서도 채권자를 보호해 주는 프로그램은 없어요. 법이 아니라 깡패야. 깡패...... 뭐, 나라에서 신용불량자를 줄이겠다고 제도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어쩌겠어? 하하하...... 나야 고맙지......”

    “그러면 사장님 돈은요?”

    “이그...... 아까 설명할 때는 뭘 듣고...... 나는 그 대신 땅을 먹잖아. 최소한 오천만 원 가치는 되거든. 아마 그 친구들은 그 땅을 다시 찾지도 않을 거야. 자기들한테는 필요도 없는 땅인데...... 그러니까 내가 그 땅을 천만 원에 먹는 대신 그 친구들은 최대한 자금을 끌어당겨 주는 거지. 실제 우리 돈은 천만 원만 주면 되니까...... 참! 그리고 이제 오늘부터 수금이 되면 내 통장에 있는 돈 더 이상 쓰지 않아도 회전이 될 텐데......”

    “네, 사장님...... 오늘부터 수금이 될 겁니다. 그러면 그 돈 주고도 충분히 돌아갑니다. 어제 자료 송부 한 뒤에 접수 받은 것만 해도 수입이 천만 원정도 예상되는데요.”

    “그러면 그 사람들 나오는 대로 공장 명의나 땅을 이전해야 하니까 강희씨는 가까운 법무사 사무실 한 군데 수배해 두고......”

    “네, 알았습니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국내 경제환경이 대외신인도에 미치는 영향 따위를 고려해서 연구된 것인지 개인회생제도는 신용불량자의 외형적 숫자는 줄였을지 몰라도 그렇게 악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절름발이 제도인 것이다. 채권자는 정규은행, 상호저축은행, 파이낸스, 캐피탈...... 어떤 이름의 금융기관이든 신용대출에 대해서는 이 제도를 피해 갈 수 없었고, 심지어는 새벽시장에서 콩나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의 깊게 패인 주름처럼 눈물 젖은 돈마저도 이 제도만 들이대면 그저 채무자가 다달이 송금해 주는 푼돈에 감사해야 할 뿐 그 채권을 소리 높여 주장할 수도 없었다. 

    형편이 넉넉해서 이웃 간에 돈을 융통해 주는 경우보다는 서로 나누는 정 때문에 내 형편이 어려워도 빌려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푼돈이나마 이자를 볼 수 있다면 어려운 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 곤궁한 가운데에서도 타인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 

    그저 종이쪽지 한 장, 각서 따위를 받아 두거나, 혹은 불여튼튼 확실한 처리를 한답시고 공증을 받아둬도 역시 이 제도를 들이대면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하며 채권자의 모든 법적 권리는 그 기능이 일거에 정지되어 버리니, 이때부터는 악덕 채무자들이 큰소리를 치게 되는 희한한 세상이다. 

    이제 사무실은 상담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강당에는 전날 신청한 사람들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 시장바닥을 방불케 한다. 서울역에서 공수해 온 노숙자들은 깔끔한 차림으로 변모해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고, 한기주는 그들을 진두지휘해 대출 상담을 꾸려가고 있었다.

    기찬의 책상 위에는 여러 종류의 신용카드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전날 상담을 했던 젊은 부부 중 여자가 앉아 기찬을 바라보고 있다.

    “음...... 아줌마 이름이 김...... 소영?......”

    “네......”

    “하하...... 예쁜 이름이네요. 어제 술을 많이 드셨는데 속은 좀 괜찮으세요?”

    기찬은 카드를 들여다보며 공연히 너스레를 떨다가 소영에게 카드를 이용한 편법대출을 설명해 주고 비밀번호를 묻는다. 

    “어머! 그럼 카드회사에서도 나중에 아무 말을 못한다는 말씀이세요?”

    “네, 그래요. 은행이든, 카드회사든, 개인 돈이든...... 모든 채권자들의 채권금액을 통틀어서 일정비율만 갚아주면 끝나는 거니까...... 기왕 개인회생제도를 이용하기로 작정했는데 아낄 거 뭐 있어요? 잔뜩 끌어당겨야지. 자, 나갑시다.”

    “어, 어디를요?......”

    “카드 연체 돼 있다면서요? 돈을 막아주고 며칠만 기다리면 한도가 다시 살아나니까 그 때 사그리 끌어당겨야 당신들이 원하는 금액을 맞춰주지.”

    “아! 네, 네......”

    소영의 남편은 이미 강희와 함께 공장 및 땅에 대한 권리 이전 문제로 외부에 나가 있는 상태고, 혼자 남은 소영을 기찬이 그냥 둘 리가 없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이 부부의 생사여탈권을 기찬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소영은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골목을 벗어나 여관으로 발길을 향하는 기찬의 뒤 멀찍이 떨어져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소영에게로 기찬이 다시 돌아간다. 이미 많은 여자들을 섭렵한 뒤라서 그런지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기찬을 소영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젠 더 뺄 것도 없잖아? 이미 공장과 땅은 내 앞으로 돼 있을 것이고...... 아, 아...... 물론 약속대로 돈은 구해 줄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말고...... 자, 들어가지?”

    다른 말은 필요도 없었다. 느닷없이 기찬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반말은 기득권을 쥐고 있음을 나타내고,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내용은 충분한 협박이고 공갈이니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기찬에게 떠밀려 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리고 남편이 장사를 준비하든 취직을 하든......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우리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하는 게 어때? 아까 봤잖아. 정신없이 바쁜 거...... 뭐, 복잡한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심부름만 해도 월급은 적지 않게 줄 테니까......”

    “......”

    “지금도 궁금한 게 많을 거 아냐? 이런 기회에 배워 둬도 좋잖아? 그래야 세상 살면서 남들에게 속는 일도 없을 거고......”

    “네...... 나중에...... 상의해 보고요......”

    나중에 남편과 상의한다는 그 말이 기찬의 귀에는 남편과 상의해 보고 기찬의 잠자리에 들겠다는 말로 연상이 돼 혼자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린다.

    기찬의 곁에 여자가 없어서도 아니고 단지 병적으로 흐르는 그의 컬렉션에 또 하나의 명단이 오르는 것뿐이니 부족한 시간에 샤워도 없이 일을 치른다.

    머뭇거리는 소영의 벨트를 풀어내자 통 넓은 원피스의 허리가 펼쳐지고, 이후로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역시 절박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기대야 하는 때에 빠른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니 자력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에 기찬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소영의 몸부림도 비로소 시작되는 셈이다.

    “그, 그래도 씻고 올게요. 땀이 났을 텐데......”

    “괜찮아. 시큼한 땀 냄새도 나쁘지 않지...... 시간도 없잖아?......”

    “흐윽......”

    이미 외간남자와 여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소영에게는 충분한 흥분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특이한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말이 여러 가지 있을 것이지만, 뒤웅박 팔자라는 말처럼 여자의 변심을 합리화시켜주는 말도 드물 것이다. 

    자신의 몸을 드나드는 그것에 마음을 주지 않는 한, 그것은 그저 이물질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미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여러 가지 환경을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것은 소영도 어쩔 수 없었다.

    “휴우...... 자, 이번에는 여기 엎드려 봐. 땀이 나서 안 되겠어.”

    “하악...... 하악...... 네, 이렇게...... 하면 돼요?”

    소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덩이를 잔뜩 내밀고 기찬에게 허락을 구한다. 이것이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에 마음으로 동의를 했으니 사회적으로 남편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새로운 강자로 그녀 인생에 등장한 기찬에게 수청을 들고 보호를 요청하는 셈이다.

    “내 탓이 아니야......”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는 소영의 엉덩이로 기찬이 달려들고 수없이 반복되는 허리 짓에 이리저리 물이 튀고 살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댄다.

    “으흑...... 하악......”

    “조, 좋아...... 조금만 더......”

    어느덧 몰려오는 사정감에 그 끝이 부풀고 소영의 골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하악...... 그래...... 여자 인생...... 뒤웅박 팔자라는데......”

    엎어진 소영의 몸 위로 기찬이 덮쳐누르고, 아직도 사타구니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분신들을 맞으며 소영은 그렇게 혼자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아! 당신......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어머! 여보...... 벌써 왔어요? 저는 사장님이 카드 막아 주신다고 해서......”

    “아니, 이 판국에 카드는 왜......”

    소영의 남편은 이미 사무실에 돌아 와 있었고, 강희는 기찬의 책상 위에 공장과 땅에 대한 등기서류 따위를 올려두고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은 남편에게 카드대출에 대해 설명해 주고 남자는 기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렇게 하면 보다 수월하게 돈이 만들어지겠군요?”

    사내는 방금 자신의 아내를 겁탈한 기찬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 올린다. 과연 무엇이 감사하다는 것인지 기찬은 소영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 소영은 기찬의 눈길을 누가 볼세라 피해 버린다. 여자의 변화무쌍한 표정변화를 남자로서는 따라 하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찬은 소영의 남편에게 말을 이어간다.

    “그 뿐만이 아니고 대출도 금융기관 별로 단계가 있어서 신용도에 따라 등위별로 거래를 할 수가 있어요. 하위기관으로 갈수록 이자가 비싸지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자를 상관할 필요가 없으니까 순차적으로 전부 대출을 신청할 겁니다. 하다못해 단 돈 오백만 원이라도 더 나오면 좋은 일 아닙니까?”

    “아! 네...... 그렇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돈을 떼어먹기로 작정한 사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기찬은 은진에게서 수수료로 들어온 돈 중 천만 원을 전달받아, 사내에게 건네며 말을 잇는다.

    “자, 우선 내가 약속한 천만 원은 여기 있어요. 그리고 이제 대출을 신청하면 나머지도 순서대로 나오긴 할 건데...... 당장 무슨 계획이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당분간 내 일손을 돕는 건 어때요? 아직 일처리에 대해서 미진한 부분도 있고, 궁금한 것도 많을 텐데......”

    사내가 거절할 일이 아니었으니 당장에 대답을 해온다. 이미 땅과 회사를 정리했는데, 돈을 손에 쥐기도 전에 만에 하나라도 기찬이 잠적을 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그를 그리 내몰았을 것이다. 남을 속여 재물을 취하자니 세상 모두가 도둑놈에 사기꾼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차마 기찬을 감시할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함께 일하자는 기찬의 제의는 천사의 합창보다도 달콤한 것이었다. 

    “자, 그리고 꼼꼼히 잘 살펴봐요. 앞으로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두 사람 이름으로 된 자산은 전부 동결이 돼 버리니까...... 혹시 잊고 있던 예금 같은 것은 없는지......”

    “아유, 우리 형편에 예금이라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보험은?......”

    사내는 아내 소영을 돌아보며 묻기라도 하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소영이 더듬거리며 말을 받는다.

    “보험이...... 아마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다시 정확히 확인해요. 중간에 찾는 경우 돈을 손해 볼 것 같으면, 차라리 그것도 대출을 받고 날려버리고......”

    “아! 네...... 아, 알았습니다. 그건 잊고 있었습니다.” 

    “자, 그럼...... 미룰 것도 없이 오늘부터 당장 일을 돕도록 해요. 강희씨가 좀 도와주고......”

    “네, 사장님...... 자, 두 분 이리 오세요.”

    기찬의 사무실은 그렇게 은밀한 가운데 내밀한 사연을 품은 일꾼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었다. 

    “조만간에 애경이도 여기 데려다 놓으면 아주 유용하겠군......”

    기찬의 생각을 흩어놓는 전화소리에 전화기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고, 이미 소영과 그 남편은 강희의 인도를 받아 노숙자들과 함께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 안녕하세요? 저...... 미림이에요. 외삼촌......”

    “으응, 그래...... 하하...... 우리 예쁜 미림이가 외삼촌한테 전화를 다 주고...... 그래, 무슨 일인데...... 설마 벌써 용돈이 다 떨어진 건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으응, 말해 봐.”

    “저...... 외삼촌이니까 말씀 드리는 건데요. 자꾸만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뭐야?...... 지난번에 그놈이?......”

    “저...... 그게...... 중간에서 연락해 주는 오빠가 있거든요. 이젠 안 만나려고 해도...... 이러다가 학교까지 찾아올까 봐 걱정이 돼서......”

    기찬은 감이 오는 게 있었다. 원조교제라는 것도 거래라면 거래일 터, 중간에서 소개를 하고, 다리를 놓아 주는 대신 거간꾼처럼 양쪽에서 돈을 먹는 존재들이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말이 소개비일 뿐, 실제로는 사내로부터 돈을 받아 챙기고 일부만 계집애들에게 주는 것일 테니 어린놈들이 사창가 포주의 뺨을 치고도 남을 놈들인 것이다.

    “으응, 그래...... 미림이는 지금 어디에 있니?”

    “저, 학교 공중전화예요.”

    “아! 참...... 그렇지.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지. 그래, 외삼촌이 학교 마치기 전에 갈 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려. 학교에서 보자.” 

    “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