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부- (12/40)

-12부-

“무슨 말씀인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 누님이 살던 그 아파트 전세를 어르신이 얻어 주신 것이라는 말도 듣고 왔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우리 누님에 대한 애정으로 그렇게 해 주신 것으로 알고 그냥 접수할 겁니다. 그 대신 저도 선물을 드릴 테니까 이제 저희 누님은 잊어버리세요.”

“선물이라니?......”

“음...... 부동산 업자라는 여자가 찾아 왔었지요?”

“아! 그랬지.”

“그 여자 어떻습니까? 제 견해로는 우리 누님보다는 못해 보이지만, 그만하면 썩 괜찮은 여자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제가 잘 아는 분인데 어르신이 이제 우리 누님을 못 만나실 테니 그 대신 여흥을 즐기시라고 추천해 드리는 겁니다. 여기 전화번호 받으시고...... 저도 나이는 젊지만 사람 사는 정은 알고 있습니다. 그간 저희 누님을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기도 하고......”

“아! 하지만......”

“그 여자는 부동산 업무를 보고 있으니까 어르신이 관심 가지고 지켜보면 서로 도움이 되는 분야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야기는 모두 해 뒀습니다. 아마 전화하시면 반갑게 받을 겁니다. 다만 가정이 있는 여자니까 늦더라도 귀가는 꼭 시켜 주시고...... 그 여자도 어르신한테 필요 이상 매달리거나 불편하게 해 드리진 않을 겁니다.”

“아, 아니...... 젊은이는 뭐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하...... 그저 한량이죠. 뭐...... 그 대신에 더 이상 제 누님에게 힘들게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제분들도 합의를 해 드려야 되겠지만, 거기에서는 제가 따로 합의금을 요구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아! 잠깐...... 나도 젊은이한테는 염치없는 입장이지만, 내가 젊은이 누이를 그렇게 자식들에게 욕보일 생각은 없었네. 내가 애당초 자식들을 잘못 키웠어. 옛날 같으면 죽부인도 아비가 끼고 자던 것은 자식이 쓰지 않는 법인데...... 이것들이 어찌 제 아비 인생을......”

“뭐...... 재산을 넘본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어쨌든 그 재산을 그래서 조금 축내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저...... 언제든 젊은이가 빼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차라리 그 합의금은 내가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지 않겠나?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싶어도 이제 자식들이 머리가 굵어지니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차라리 이 기회에 시간을 두고 자식들과 의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아! 하하하...... 저야 상관없습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요. 제 연락처도 적어 드릴 테니 필요하실 때 전화 주십시오.”

“자, 그럼 입회하에 합의서를 적도록 합시다. 고맙소.”

당장 가족들을 꺼내 달라는 유정의 성화를 경찰서 업무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달래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영감을 만나 합의를 이루고 헤어진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아, 어서 오세요. 도장 파시게요?”

다시 기찬은 한기주와 을지로에서 만나 여기저기 골목을 기웃거리다 한 가게에 들어가고, 머리가 하얀 노인이 구석에서 도장을 깎다가 그들을 맞아들인다.

“네...... 저...... 도장을 똑같이 파고 싶은데...... 그게 기술적으로 가능한가요?”

“새 도장을 동시에 파는 거라면 기계를 이용해서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재질에 따라서는 결이 다르다든지...... 자세히 보면 조금은 다르겠지요.”

“그게 아니고 사용하던 거라면 도저히 안 될까요? 말하자면 위조 차원이라든지......”

“아니?...... 뭐 하시는 분인데 그런 걸......”

기찬은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제시한다.

“아! 네...... 형사 양반이신가 보다......”

“허허...... 네, 뭐 비슷한 겁니다. 수사상 이런 일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니 원...... 도둑놈들은 날고 기는데......”

“글쎄올시다. 혹시 도장을 가져올 수는 있는가요? 에이...... 아니겠지...... 가져올 수 있는 도장 같으면 뭐 하러 위조를 하겠어? 그렇죠?”

“네, 물론 그렇죠. 아! 도장을 정교하게 찍어 올 수는 있는데요.

“그러면 티 없이 깨끗한 백지에다가 도장을 찍어 와 봐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오십 장이든...... 백 장이든...... 꼭 필요하다면 한 번 해 보지요. 그래도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주 똑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네, 물론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골목을 계속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리다가 한 인쇄소로 들어간다.

“실례합니다. 저...... 용지만 가져오면 똑같은 종이에 같은 잉크로 인쇄가 가능한지요?”

“아! 그럼요. 얼마나 찍으시게......”

“네, 그건 나중에 봐서......”

“가져오세요. 얼마든지 되니까......”

이들이 갑자기 도장이며 인쇄골목을 쏘다니고 이것저것 묻고 다니는 것을 보아 무언가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사전조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것 봐요. 한실장.”

“네......”

“당신도 이미 감 잡았을 테니까 이젠 내가 알려 준 곳으로 가서 영진 기획실장을 만나요. 앞으로 자주 만나야 할 테니까 나중에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가능하면 접속 비밀번호를 알아오는 게 좋겠지.”

“네, 하여튼 그 분야는 제가 전문이니까 가서 의논해 보고 필요한 건 전부 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은진씨하고 소공동 쪽으로 나가 이것저것 알아 볼 테니까 혹시 늦더라도 그렇게 알고...... 일단 한실장이 일을 마치는 대로 전화를 해요.”

“네, 아유...... 그거야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아, 이 양반아. 당신 마누라를 내가 편한 대로 하자니 부담스러워서 그러지. 하하하......” 

“하하...... 사장님도 참......”

한기주는 모처럼의 활동에 마음이 들뜨기라도 한 듯 기찬의 결정은 마치 지상명령처럼 생각하고, 기찬은 한기주와 헤어져 차에 올라 길음동 쪽으로 차를 몰아간다.

은진과 이젠 남 같은 사이도 아니니 내외할 일도 없지만, 그래도 불편해 할지 몰라 미리 전화를 걸어 방문을 알려준다. 처음 관계 맺기를 마치 강간이나 다름없이 일을 치러 버렸으니 앞으로의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은진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지 않고서는 그 성공을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아파트에 도착할 때는 이미 한낮이 되어 몹시 따가운 햇볕이 부담스럽고, 아파트를 여러 번 돌아서야 가까스로 그늘진 곳에 주차를 한다.

“은진씨...... 아휴...... 날이 무척 덥네.”

“좀...... 씻으시겠어요?”

“으응, 그래야겠어. 은진씨도 들어오지?”

“어머! 아, 아니에요. 전 됐어요.”

기찬의 넉살 좋은 요구에 은진은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미 서로 살을 섞은 사이라 해도 대낮에 집에 찾아와 내놓고 요구하는 기찬에게 기가 막혀 말도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하...... 등 좀 밀어 달란 말이야. 옷 버리기 싫으면 알아서 벗고 들어오고......”

기찬이 거실에서부터 허리띠를 풀기 시작하자 은진은 몹시 당황해 발코니 커튼을 서둘러 가려 버린다.

“아유...... 사장니임......”

콧소리를 길게 내며 책망하는 은진을 뒤로 두고 기찬은 욕실로 들어선다. 두 사람이 모두 데면데면 쑥스러워한다면 공기가 가라앉겠지만, 기찬이 워낙 천방지축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니 그 뒷수습을 하며 뛰어다니다 어느새 은진도 긴장이 제법 이완됐는지 욕실 문을 열어둔 채 물줄기를 맞고 있는 기찬의 곁을 오가며 벗어 둔 옷가지를 정리한다.

“은진씨......”

“네......”

“어서 들어오라니까...... 안 오면 내가 나간다.”

“아, 알았어요. 갈게요.”

“그냥 벗고 와. 옷 버리지 말고......”

“아유, 어떻게...... 난 몰라.”

은진이 할 수 없이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린 채 욕실로 들어서 기찬의 등을 거품을 내 문질러 주고, 기찬은 등을 맡긴 채 가슴에 비누질을 한다.

“어허...... 시원하다. 한 집에 살면 이런 건 참 좋겠다. 그렇지? 서로 등도 밀어 주고......”

“아유, 몰라요. 기주씨는 이런 거 한 번도 해 달라고 한 적 없단 말이에요.”

이윽고 은진이 등에 물을 뿌리고 나가려 하자, 기찬이 그냥 내보낼 리가 없는 일이니 바로 물을 틀어 은진의 머리부터 물을 적셔 버린다.

“엄마야!...... 아유, 사장니임......”

“어딜 가. 옷도 다 벗고 들어오고선...... 하하하......”

“이러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기찬은 아랑곳 않고 은진을 끌어안고 눈을 바라본다. 막상 기찬이 정색하고 눈을 바라보니 은진은 똑바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은진씨...... 은진씨......”

“네......”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봐. 그럴 수 있어야 앞으로 나하고 정말 한 몸처럼 일할 수 있어. 그래야 은진씨도 한실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고...... 자, 어서......”

기찬이 은진을 거푸 흔들어 대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찬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버리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 또 다시 눈길을 피한다.

어느새 잔뜩 발기한 기찬의 상징이 은진의 아랫배를 스쳐 자극하고, 두 사람은 목젖을 움직여 마른 침을 삼킨다.

“자, 다시...... 다시 쳐다 봐.”

“......”

쏟아지는 물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은진도 이제는 피하지 않고 기찬의 얼굴 가까이에서 눈빛을 맞춘다. 짙은 눈썹, 넓은 이마, 오뚝한 콧날도 가슴에 담아둔다. 이젠 이 사람을 내 남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모양이다. 남편과도 안 해본 낯 설은 이 해프닝이 오히려 이 사람과는 자연스러운 듯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다가온다.

심장의 고동소리마저 들려올 듯 아주 가까이, 원래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인 것처럼 이 사람의 눈길이 나를 빨아들인다. 그래, 이게 이 남자의 냄새였어. 뭔지 모를 자극으로 나를 이끌어 가던 그 냄새. 이 남자도 나를......

“흐으읍...... 쭈우웁...... 으흥......”

은진의 상념은 마저 이어지질 못하고 기찬에 의해 멈춘다.

“은진씨, 사랑해.”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하악......”

기찬은 끌어안은 은진의 등을 쓰다듬으며 호흡을 진정시켜준다. 낯설어 했던 기찬과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진정이 안 되는 것은 이곳이 욕실이고 벗은 채여서만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몸에 비누칠을 해가며 은밀한 곳도 망설임 없이 애무를 이어 나간다. 

“자, 이리 엎드려 봐.”

“네......”

“후우욱......”

“아아학...... 너무 이상해......” 

기찬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은진의 감창이 욕실을 울린다. 욕조를 붙잡은 채 엉덩이는 기찬에게 맡기고 고개를 처박아 버린다. 어느 순간 모든 감각은 맞닿은 그곳으로만 몰리고 어느새 팔도 다리도 내 것이 아닌지 느낌도 모를 순간이 오고야 만다.

“흐윽...... 으, 은진씨......”

“네에...... 하악......”

잘게 부서진 경련이 끝도 없이 몰려오고 두 사람은 끝내 무릎이 꺾여 버린다.

“형님, 저...... 강기찬입니다.”

“아, 아...... 기찬씨...... 반가워요.”

“지금 사무실 근처에 와 있습니다. 잠시 나올 수 있습니까?”

“네, 네...... 내려가지요.”

기찬은 은진과 함께 소공동으로 나와 이것저것 쇼핑을 마친 뒤에 미라의 오빠 송만호에게 연락을 취한 모양이다. 은진은 어느새 날렵한 아가씨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곁에 서 있는 기찬은 그녀와 잘 어울려 두 사람이 커플이라고 해도 전혀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깁니다.”

세 사람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미라의 오빠 송만호가 기찬을 끌어들인 것으로 꾸미기로 약속을 한다. 은밀한 작전 계획이 펼쳐지는 도중에도 은진은 기찬에게 틈틈이 시선을 보내 애정을 과시하고 어처구니없이 만호는 둘의 관계를 애인 사이로 믿어 버린다.

자고로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조차 속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웃기는 일이지만 이 경우도 해당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약 삼십 분정도의 설명이 있은 후 세 사람은 사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실례합니다.”

“네, 어서 오세요.”

기찬 일행은 사무실에 올라가 기존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튼다. 곳곳에 책상들과 그 위의 컴퓨터, 빽빽한 전화선들이 엉켜 무척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의 모습이지만 각각의 책상에 파묻혀 골을 싸매고 씨름하는 이들이 대부분 만호처럼 속아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이 세상 먹고사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 일전에 얘기한 분이 이분인가?”

“으응, 이 분도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내가 받는 명단을 나누기로 했어. 게다가 이 분은 영진기업인가...... 하는 회사에 높은 분을 잘 아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쪽에서도 밀어준다고 했지. 아마.....”

“아! 그러십니까? 이거, 반갑습니다. 저는 조상환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강민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차영미라고 불러주세요.”

기찬이 자신의 이름을 달리 말하고 은진도 어처구니없이 차영미라고 소개를 한다. 바야흐로 무언가 시작이 되는 모양이다.

“네, 네...... 그럼 어떻게 하나? 이렇게 오실 줄을 모르고 자리를 미처 준비도 못했는데...... 전화도 선을 당겨 와야 할 테고......”

“아, 아닙니다. 마침 제가 잘 아는 분이 근처에 조그만 사무실을 갖고 있는데, 마침 거기가 비어서 그곳을 쓰기로 했습니다. 다만, 여기 송사장님에게 듣기를 거래 코드는 조상환 사장님만 갖고 계시다고 해서 저도 그것을 좀 이용하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자신의 코드를 이용해서 거래를 성사시키면 자신의 통장으로 수수료가 입금될 테니 물론 사양할 일이 아니다.

“아! 그러셔야죠. 그야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얼마든지 쓰십시오.”

“네, 그럼 저도 영업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 미쓰차가 신청서를 전해 드릴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입력 작업을 해도 되겠지요?”

“네, 그럼요. 두 분이 아는 사이시니까 우리 송사장 컴퓨터를 쓰셔도 되고, 정 바쁘시면 제 컴퓨터를 쓰셔도 됩니다.”

“네, 네......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신청을 받는 대로 바로 오겠습니다.”

조상환과 인사를 나누고 밑으로 내려온 세 사람은 서로의 연기를 칭찬해 주며 웃음을 날린다. 

“자, 그럼 형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님은 앞으로 아까 알려드린 번호로만 전화를 하셔야합니다. 제 이름도 잘 기억해 두시고......”

“네, 그러지요. 강민호씨. 하하하...... 제 이름에서 점만 하나 빼면 되잖습니까?”

“하하하...... 자,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호와 헤어져 소공동 골목을 빠져 나온다.

“은진아.”

“네......”

“후훗......”

“왜요?”

“흐흐흐...... 그냥 불러봤어. 우리 애인행세 하니까 너무 좋다. 그렇지?”

“어머! 꼭 어린애 같아요. 호호호......”

“우리...... 저기 좀 들렀다가 갈까?”

“어머! 정말 미쳤나 봐요.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기찬은 은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은진은 기찬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다정한 한 쌍의 모습을 연출하며 명동으로 향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팔이 은진의 가슴을 스쳐 지나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한 번씩 가볍게 쥐어보는 기찬을 은진은 여지없이 허리를 꼬집어 응징한다.

“은진이, 머리도 좀 다시 해라. 아주 발랄한 아가씨처럼 나오게......”

“음...... 그럼 커트를 할까요? 아주 짧게.....”

“그래, 그게 좋겠다. 자, 당장 가자. 한실장 만나려면 아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네......”

민소매 옷에 얇은 니트를 두르고 청반바지로 날씬한 다리를 강조한 은진은 누가 봐도 귀여운 아가씨로 보였다. 이제 머리까지 기찬의 취향에 따르니 어쩌면 은진은 욕실에서 기찬과의 낯 설은 눈 맞춤 이후 최면이라도 당한 듯 마치 조교 당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점점 기찬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나올 무렵, 한실장에게서 연락이 오고 두 사람은 소공동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저...... 사장님......”

“으응...... 왜?......”

“저, 어쩌면 좋아요?”

“뭐를?......”

“저, 오늘 너무 행복했어요. 앞으로 사장님이 저를 떠나시면 어쩌나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기찬은 은진의 어깨를 힘주어 안아준다. 이 순간만은 행인의 시선도 의식치 않는지 은진은 기찬의 손이 가슴어리에 닿아도 그대로 둔 채 땅만 보고 걸음을 옮긴다.

“흐음...... 드디어 은진이가 사나이 강기찬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군...... 하하하......”

“저, 장난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 그런 걱정하지 마. 항상 곁에 있어 줄 테니까...... 그 대신 한실장에게도 더욱 잘 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재미있게 알콩달콩 살면 되는 거지.”

“네, 그럴게요. 기주씨에게도 정말 잘 해 줄 거예요. 처음에 다른 여자들과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그냥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젠 제가 같은 이유로 이렇게 미안해질 줄은 몰랐어요.”

“어찌 보면 그게 사랑을 제대로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지. 단순히 부부가 살을 섞고 산다고 해서 서로를 사랑하고 산다고 생각하는 건 그냥 의식하는 것뿐이야. 진짜 사랑은 방금 은진이 말처럼 무의식중에 느끼는 그런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이어야 하는지도 모르지. 은진이도 노력해 봐. 미안한 감정이 사랑하는 감정으로 바뀔 수 있도록...... 사랑하는 상대가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놓고 봤을 때, 아주 최근의 일이라잖아. 그것도 물론 육체적으로 국한한 말일뿐이고...... 지금도 고도의 가르침은 감정적인 부분, 정신적인 교감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권장하잖아? 나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은진이도 스스로 행복하게 살아.”

“네...... 저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보니 어느새 약속장소 가까이 도착해 두 사람은 몸가짐을 다시 하고 주변을 돌아본다.

“아! 저쪽에 보이네...... 잘 됐다. 그 사무실하고도 썩 멀지 않은데......”

“정말 그러네요. 어서 가요.”

“으응......”

사무실은 삼층이어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들어선다. 앞서 올라가는 은진의 팽팽한 엉덩이가 기찬의 시선을 잡고, 기찬은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쥐어 본다.

“아이...... 다 왔어요. 이젠......”

“후훗...... 아! 아쉽다. 하하......”

두런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한실장이 마중을 나오는지 구둣발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예요. 어, 어?...... 와...... 당신...... 하하하......”

“어머! 왜요?......”

“아, 아니야. 하하...... 몰라보겠어서......”

한기주의 말을 기찬이 받아 낸다.

“아휴...... 덥다. 오늘 수고 많이 했지요? 은진씨가 이젠 나하고 애인처럼 지내야 하는데...... 어때요?...... 좀 젊어 보이죠?”

“아유...... 네, 저도 몰라보겠는걸요. 하하하......”

“됐어...... 그러면 성공이지. 뭐...... 그래, 이 사무실은 누구 이름으로 했어요?”

“네, 서울역에 가서 노숙자 한 사람 돈 좀 쥐어주고 구했습니다. 나중에 복잡한 일 생길지도 몰라서 아예 임대료도 삼 개월 치를 선불로 줬습니다.”

“네, 잘했네요. 전화는?......”

“전화도 모두 처리하고요. 아마 내일이면 깔릴 겁니다. 영진에 박실장 만난 일도 잘 해결됐고, 도장도 아까 그곳에 찍어서 전해 줬습니다.”

“아유...... 오늘 바쁘셨겠네?”

“하하...... 아닙니다. 아...... 정말 모처럼 사는 것처럼 사니까 재미가 납니다.”

“자, 좀 앉읍시다.”

“네, 참...... 그리고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출회사 같으면 서류가 그다지 복잡하진 않아서 갖추기가 썩 어려울 것 같진 않습니다.”

“아! 알아 봤어요?”

“네...... 보통 대출 서류는 세 가지를 보거든요. 재직여부하고 급여정보, 그리고 신원정보니까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되고 인감증명까지만 손님이 준비해 오면 우리는 재직서류하고 급여정보만 꾸며주면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한 컴퓨터 자료를 영진 기획실장이 준비해 주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응용해서 가짜를 만들어 내면 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이제 밥이 익기만 기다리면 되는 거로군.”

그랬다. 기찬은 일전 가구공장 박사장이 개입됐던 사기사건에 연루되었던 대출회사를 예의주시했고, 뭔가 다른 곳보다 허술한 점이 있기에 사기꾼들이 이용했을 거라고 보고 그곳을 거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두었다. 대출서류 중 빼놓을 수 없는 급여정보와 재직증명서류는 영진기업의 박실장을 통해 위조서류를 꾸밀 수 있도록 조치하고 앞으로 무직자들을 대거 모집해 대출을 진행시킬 예정이었다. 

물론 대출이 불가능한 무자격자들에게 위조서류를 꾸며 대출을 해주는 것이니만큼 수수료는 기존 사채업자들보다 배를 받아내도 무리가 없을 것이고, 어차피 그런 형편에, 그런 돈을 대출 받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니 나중에는 어마어마한 금융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을 지금 기찬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과정에 있어 불법으로 받아내는 수수료는, 그것도 엄청난 비율의 수수료를 받을 것이니 그것으로 미라의 오빠 송만호가 구제될 것이고, 그 터지는 모든 사고를 끝내 책임져야 하는 중계인은 송만호에게 사기를 친 그 동료 조상환이 될 것이다. 그런 채널을 유지하려면 백지위임한 수표를 금융기관에 보증서류로 제출한다고 하니 그것은 무한책임과 같은 것이었다.

조상환의 평생을 이룬 기반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것은 물론, 남은 평생을 갚아도 못 갚는 빚을 지게 되는 것이고, 어쩌면 그의 나이를 보았을 때 빚에 시달릴 기회조차 없이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며, 어마어마하게 발생할 불법수수료는 노숙자 명의로 된 기찬의 통장을 살찌울 것이었다.

와중에 기찬의 비위를 상하게 한 영진기업 사장도 불법대출 사건에 대한 기업 이미지 실추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으니 기찬의 악마성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내일은 바로 현수막 제작해서 전화연결 되고 컴퓨터 깔리는 대로 서울 시내를 도배해 버리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되면 일일이 상대하지 말고 저쪽 강당에 어느 정도 모았다가 기업 설명회 하듯이 한꺼번에 처리하시고......”

“네, 네...... 물론 그래야죠. 줄 세우는 정도 잡무처리는 노숙자들 데려다가 써도 목욕만 시키면 금방 광이 날 겁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갑시다. 나도 함께 가서 파티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두 사람만의 시간을 드릴 테니까 오늘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아 참! 그건 모두 경비로 처리하세요. 하하하...... 아직 통장에 돈 많이 남았죠?”

“하하...... 그럼요. 아직 끄떡없습니다.”

“자...... 그럼 내일 봅시다.”

“네, 안녕히 가십시오.”

“사장님,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뵐게요.”

기찬은 엄마가 이사를 하신 후, 한 번도 찾아뵙지를 못했으니 엄마를 찾아 뵐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제 한 여름이니 해가 길어 날은 아직도 대낮같기만 하다.

“아, 씨...... 아침나절에 영감이 자식들하고 그렇게 지내는 것을 보고 나니까 영 마음이 무거워서...... 우리 엄마도 이참에 좋은 영감 찾아서 확 시집을 보내 버릴까?...... 하하하......”

과연 기찬은 말릴 수 없는 천방지축이었다.

기찬의 형은 한강변의 아파트에 둥지를 들고 있었고, 자연히 그곳은 보라의 가구점을 경유해서 가는 코스였다. 기찬의 차가 가구점 앞 공터로 들어선다. 형수 보라와의 속정을 나눈 후 아직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보라의 살 냄새가 그리울 때도 되었다. 그리고 보라와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기찬에게는 평소 애틋하게 생각했던 형수였으니 보라가 보고 싶은 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미쓰진, 잘 있었어?”

“어머! 백수, 취직했다면서?...... 축하해.”

“아! 이 계집애가 또 시비를 하네. 그려...... 야. 넌 오라비가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냉큼 달려와서 술이라도 한 잔 사야지. 입으로만 닦아 버리는 거야?”

“이게 또 누나한테 들이대네......들이대길......”

“형수는?......”

“언니?...... 저 뒤에 주방에 있는 모양인데...... 들어 가 봐.”

“응, 그래......”

가구 사이를 돌아 들어가 주방에 들어서니 보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형수......”

“어머! 도련님......”

기찬은 즉시 목소리를 죽여 속삭인다.

“잘 있었어?”

“네...... 도련님, 보고 싶었어요.”

보라도 따라서 목소리를 죽이고, 그래서 그런지 더욱 내밀한 분위기가 연출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엉킨다.

기찬은 뒤를 돌아보곤 보라를 주방 출입문 구석으로 몰아 가 허리를 끌어안는다. 보라의 가는 팔이 기찬의 목에 감기고 뒤 이어 달콤하고도 짜릿한 살맛을 보게 된다.

“흐으읍...... 후루룹......”

“아...... 도련님......”

기찬의 팔이 부드러운 실크스커트 자락을 움켜쥔다. 그 부드러운 감촉 밑으로 단단한 거들이 만져지니 대번에 인상이 구겨진다.

“에이...... 형수, 뭐야? 오늘 거들 입었어?”

“어머...... 도련님, 총각이 진짜 모르는 게 없어요. 오늘 치마가 너무 힘이 없는 실크라서 입었어요. 푸훗......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도련님이 싫어하는 거 알았으면 안 입었을 텐데...... 피...... 그리고 전화 한 번 없다가 오늘 갑자기 올 줄 알았나요? 뭐......”

“의자에 잠깐만 앉아 봐. 가슴 좀 만지게......”

“아이...... 소라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우리 차라리 나가요. 네?”

“조금만 만지고......”

기찬은 끝내 보라의 실크 브라우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드러운 젖가슴과 젖꼭지의 감촉을 느낀다.

“언니......”

“어머머!......”

진소라...... 보라의 동생이니 기찬과는 사돈 사이며 동갑이어서 밤낮 서로 간에 오빠, 혹은 누나라며 다투듯 지내는 사이였다. 

갑자기 소라의 목소리와 주방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리자 기찬과 보라는 한껏 들떠서 회포를 풀다가 기겁을 해서 가슴의 손을 빼내고, 치마를 단속한다.

“언니, 손님 오셨는데...... 어머! 언니 얼굴이 왜 그래?”

“어머? 내 얼굴이 왜?......”

보라의 대답이 없자 찾으러 들어온 듯 주방에 들어선 소라가 언니를 보고 놀라 외치고 보라는 립스틱 자국이라도 번진 줄 알고 입술을 더듬으며 거울을 보고 몹시 당황한다.

“아니...... 얼굴이 왜 그렇게 달아올랐어? 어디 아픈 거야? 몸살 아냐?”

순간 보라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소라는 언니가 걱정되는 듯 보라의 이마를 짚는다.

“아, 아......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보지. 괜찮아. 자...... 나가보자.”

“으응...... 기찬씨, 너는 뭐......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줄까?”

주방에서 어정거리는 기찬에게 소라가 말을 던지고, 가게로 나서던 보라는 다급하게 소라의 말을 끊어 버린다.

“아, 아니야. 도련님, 집에 가서 고기 구워 드릴 거니까 그냥 둬. 조금 있다가 같이 시장에 가기로 했어.”

“아! 그래?...... 알았어.”

소라도 보라의 뒤를 따라 매장으로 나가 버리고 기찬은 두 자매의 반응을 재미있어하며 손을 들어 바라보곤 미소를 짓는다. 마치 묻어날듯 부드럽던 피부의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있다.

“큭큭...... 형수가 몸이 달대로 달았군. 우리가 언제 시장을 가기로 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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