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형님, 여기 있어요. 잘 챙겨 둬요.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조건 없으니까 소개 좀 빨리 해주시고......”
“그래, 알았다. 너 이 자식, 그 대신 이번에는 복비 나한테 제대로 갖다 줘야 돼. 네 형수한테 줘 봐야 나한테는 십 원짜리 동전 한 닢 안 돌아온단 말이다.”
“하하하...... 알았어요. 거 참...... 내가 그런 걸 알았나? 이번에는 아예 계약금에서 바로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래, 그러면...... 어디 보자. 며칠 전에 다녀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집을 구했나?......”
장부를 뒤적이는 복덕방 사장을 바라보며 기찬은 미소를 짓는다.
일전에 계약한 아파트의 열쇠를 관리 사무실에서 찾아서 복덕방 사장에게 맡기고 다시 전세를 의뢰하고 있는 중이었고, 빈 아파트를 돌아보니 보기보다 깨끗이 사용한 것 같아 새로 도배를 해줘야 하는 따위의 걱정도 덜어서 기분 또한 흐뭇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야! 요즘 강기찬이가 너무 잘 나가는 모양인데...... 아파트도 두 채씩이나 관리하고...... 어디 괜찮은 주식 있으면 나한테도 소개 좀 해 봐라. 같이 좀 먹고 살자.”
“아이고, 형님은...... 이 집이야 어디 내 겁니까? 남의 집 관리해 주는 건데...... 돈도 바로 송금해 줘야 되고...... 자, 형님...... 이만 갑니다.”
“허허...... 그래. 연결되면 바로 전화해 줄 테니까 즉시 뛰어 와.”
“네.”
아닌 게 아니라 기찬의 근황을 돌아보자면 주식투자로 일군 아파트가 한 채에다가 뜻하지 않았던 미라와의 연계가 이루어지면서 기획실장과 사장으로부터 받아 챙긴 돈만 해도 이천만 원이고, 이미 흥정을 마친 기획실장으로부터는 앞으로 오천만 원이 더 입금이 될 것이었다.
예정되어 있는 사장과의 술자리를 통해 얼마간의 돈이 더 입금될 수도 있는 일이니 최근의 기찬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저축을 한다고 해 봐야 얼마 만에 집이라도 한 채 장만할 수 있을 것인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생을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것이 틀린 말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 비한다면 기찬의 앞으로는 아파트뿐만 아니라 작은 정원이 딸린 고가의 방배동 주택마저 등재되어 있는 입장이니 장차 먹고 놀기로 작정한다고 해도 당장의 씀씀이는 앞으로 미라가 해결해 줄 터, 놀기 삼아 여진이나 미라 같은 여자들을 건사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요즈음이었다.
“으음...... 선배, 많이 기다렸어?”
“아, 아니...... 나도 금방 왔어.”
말은 그리 하지만 한참을 기다린 듯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있어 초조한 심정을 알게 해 준다.
최병국...... 얼마 전 미라의 채근으로 기찬을 찾았던 대학 시절의 선배였다. 기찬을 만난 후로는 미라를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전후사정을 물어 오지만, 사실대로 말해 주기도, 다른 이유를 둘러대기도 기찬으로서 쉽지만은 않은 입장이었다.
단지 어려운 일만 해결해 주고 각각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라면 별 일 아니니 선배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고 잊으라고 권유하겠지만, 본의 아니게 미라의 뒷배를 봐주는 입장이 되어 버렸으니 미라가 몸을 팔든, 웃음을 팔든 병국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기는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으음...... 선배, 그만 잊는 게 좋겠어. 보아하니 집도 절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 애, 알고 보니까 여진이 친구더라고...... 선배가 알면 기분 나빠 할까 봐 말 안하려고 했었는데...... 내 이름도 아마 여진이한테 들은 모양이더라고......”
“여진이?......”
“으응, 선배도 대충은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여진이...... 그 애가 어떤 앤지...... 요즘 학교는 나오고 있나?”
병국은 속이 상한지 생맥주를 벌컥거리며 들이키고 있었다.
“끄윽...... 그, 그랬던 거냐?”
“......”
“여진이도 학교에 안 나온 게 제법 됐지. 아마...... 그 녀석도 휴학을 한 모양이던데......”
“그래?”
속이 부담스러웠는지 연신 신트림을 올리던 병국이 기찬을 바라본다.
“음...... 그 날 너한테는 무슨 부탁을 하든?”
“선배도 짐작할 거 아냐? 여진이 일이었어. 옛날...... 그런 일......”
“그, 그래? 그럼 여진이 좀 언제 한 번 만나게 해 줄 수 있니? 넌 알 고 있을 거 아냐?”
아마 병국은 여진을 통해 미라를 수소문하기 위해 그러는 모양이었지만, 기찬은 이쯤에서 못을 박는다.
“에이...... 선배도 참, 은근히 순정파일세...... 여진이, 그 계집애가 그런 일로 우릴 만나줄 것 같아? 제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여우같은 계집앤데...... 나도 전화번호도 몰라요. 그 날도 약속장소를 따로 잡아서 어디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안다고 하더라도 사석에서 그 애들 만나려면 적어도 몇 백은 준비해서 가야 할 걸...... 게다가 계집애들도 자기들 입장이 있을 텐데 섣불리 알려줄 리도 없는 일이고...... 이제 그만 털어 버려요. 보아하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모양이구먼.”
“......”
“갑시다. 내가 이차 한 잔 살 테니까...... 이제 그만 잊어버리고......”
장소를 옮겨 마주앉은 두 사람, 기찬은 무슨 생각에선지 애경을 불러내기 위해 전화를 했고, 이제 시선을 던져 출입문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여기야.”
“어머! 혼자 있었던 게 아닌가 봐?”
“아, 안녕하세요?”
병국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애경은 기찬의 옆으로 자리를 한다. 누나뻘의 여자가 기찬에게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나 그것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고 있는 기찬의 모습을 보면 둘의 관계를 짐작 못 할 일도 아니니 병국의 입장에선 기찬이란 녀석이 가히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게다가 대화 도중 간간이 들려오는 ‘그 이’니 ‘남편’이니 하는 말들은 곧 이 여자가 가정이 있는 유부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술자리는 무르익어 가고 병국도 어느 정도 분위기에 동화되어 갈 무렵, 기찬은 화장실에 가는 듯 자리를 벗어나며 애경에게 눈짓을 하고, 애경은 이내 자신도 화장을 고치고 온다며 자리를 벗어난다.
“아이 차암...... 왜? 잠시를 못 참고......”
애경의 투정에 기찬은 속으로 기가 막히지만 그저 웃어넘긴다.
“큭...... 못 참긴...... 이 여편네야. 네가 못 참지. 내가 못 참니?”
“어머머! 말 막 함부로 할 거야? 정말 미쳤어. 미쳤어.”
토닥거리며 가슴을 때리는 애경의 팔을 잡으며 기찬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오늘, 내 말대로 좀 해.”
“뭐, 뭐를......”
팔을 기찬에게 붙잡힌 채 눈빛을 빛내며 애경은 무언가 기대에 잠기는 모양이다.
“저 친구...... 우리학교 선밴데 이제 졸업반이거든. 잘 사귀어 두면 앞으로 제법 그림이 나올 거야. 지금 사법시험도 준비하고 있으니까...... 다른 건 묻지 말고......”
“어머! 그, 그럼......날 보고......”
기찬의 입술이 다가와 애경은 더 이상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마주 안은 팔로 기찬의 등만 두들긴다.
“으흡...... 쭈우웁......”
“그게 날 돕는 거야. 애경이, 넌 내 여자잖아. 그렇게 해 줄 거지? 잘 생각해 봐. 너에게도 손해되는 일은 아니야.”
“몰라.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무슨......”
자신을 마치 창녀 취급이라도 하는 것 같아 불쾌했지만, 이미 자기 할 말만 하고 저만치 앞서 들어가는 기찬의 뒤를 바라보며 애경은 분명 홀대를 당한 느낌인데도 알 수 없는 흥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머! 뭐, 뭐야? 내가 왜 이래......”
걸음을 좌석을 향해 옮기며 애경은 다시 속셈을 굴린다. 어차피 자신이 기찬과 살림을 차린 사이도 아니고, 기찬이 자신에게 이 정도로 프리하게 나온다면 이 기회를 통해 서로가 구속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수도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사법시험을 본다고? 호호...... 그거 괜찮지......나이가 젊으니...... 힘도......”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기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어서 와서 그리 앉아. 오늘은 이 선배가 마음이 괴로우니까...... 애경씨가 파트너가 돼서 위로도 좀 해 주고......”
“어머!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실까? 실연이라도 하셨나? 호호호......”
애경은 자연스레 병국의 곁에 앉아 교태를 늘어놓고, 잠시 당황한 듯 보이던 병국도 이내 기찬의 뜻을 알아채고, 쑥스러운 미소를 흘린다.
결국 기찬은 잠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서고 두 사람을 남겨 둔 채 술집을 빠져 나온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가 머리를 풀어 헤친 듯 하늘로 퍼져나간다.
“휴우...... 이것이 일타이피라는 건가? 큭큭......”
기찬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유난히 적극적인 애경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는지 병국에게 슬쩍 밀어붙여 버린다. 이것으로 애경이 자칫 자신과의 관계에 무게를 실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는 셈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태도를 변함없이 유지한다면 자신도 승복한다는 뜻일 테니, 그 때부터는 그야말로 기찬의 입장에 맞춰 이리저리 내돌려도 아무 하자가 없는 물건이 되는 셈이어서 그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병국도 새로운 경험에 눈을 뜨게 되면 더 이상 미라를 향한 막연한 그리움이나 여자에 대한 동경이 해소될 테니 그에 대한 부담도 덜게 되는 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야! 너는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외박이나 하고...... 어머니 걱정하시게......”
“어! 형...... 어쩐 일이야? 형수도 오셨네? 헤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에이그...... 도련님, 식사는 하셨어요?”
“네, 지금 술도 한 잔 하고 오는 길이라 밥 생각은 없어요. 커피나 한 잔 타 주실래요? 난 형수가 해 주는 건 다 맛있더라......”
“호호......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처음 결혼하면서부터 따로 나가 살림을 살았던 형 내외가 집을 찾아와 모처럼 사람 사는 집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도 내심 흐뭇하게 생각하는 큰 아들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어머니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자, 커피 드세요.”
“네, 고맙습니다.”
더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셔 가며 분위기를 살피자 엄마가 기찬을 조심스럽게 부른다.
“저...... 기찬아.”
“네, 엄마...... 왜요?”
“저기...... 네 형이......”
“네...... 형이 뭐요?”
기찬의 형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형수와 함께 가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런 능력의 뛰어난 점이나 성실함에 있어서 기찬의 엄마는 항상 기찬에게 형을 본받으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해 왔던 것이다.
평소 엄마의 그러한 태도는 기찬의 형이나 형수 역시 잘 알고 있던 점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기찬은 항상 형이나 형수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신이 기여하는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가정은 늘 화목했으나, 학창시절부터 엘리트였던 형이나 형수는 단지 윗사람이라는 입장 외에도 그런 면에서 기찬에 대한 약간의 우월감도 있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엄마의 무거운 표정은 뭔지 모를 중압감을 느끼게 해 기찬은 자못 궁금한 표정으로 엄마를 채근한다.
“네 형이 사업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 집을 담보를 잡히자는구나.”
그랬던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을 테니, 큰 아들과 비교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작은 아들도 엄마에게는 챙겨야 할 자식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일일 게다. 게다가 엄마가 보기에 썩 슬기롭지도 못해 걱정스럽다면 오히려 그 기량이 뛰어난 자식보다는 남모르게 한 가지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일 것이니 이제 그 마지막 보루인 이집을 큰 아들이 사업상 쓰겠다는 것이 작은 아들 기찬을 보기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었다.
“네. 도련님, 단지 보증만 서는 거예요. 저희가 이번에 아주 조건이 좋은 거래처가 생겼거든요.”
형수가 나서는 것을 보니 가구점에 관계되는 일일 것으로 보이나, 기찬의 평소 성격에 비추어 반대하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이니 형이나 형수는 엄마와 달리 별로 걱정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될 일을...... 뭘...... 저한테까지 물어 보세요?”
“어머! 그것 보세요. 어머니...... 제가 도련님도 찬성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호호호......”
“으흠...... 그,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꾸나. 형제간에 그렇게 마음을 써주니 고맙구나. 기찬아.”
“에이...... 엄마도 참, 별 말씀을 다 하시네. 잘 나가는 큰 아들을 팍팍 밀어 주셔야지요. 헤헤...... 그리고 이 집이야 당연히 엄마 집인데...... 엄마 마음대로 하시는 게 뭐가 이상해요?”
지켜보고만 있던 기찬의 형도 한 마디 거든다.
“그래, 어쨌거나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상황은 잘 풀리고 있으니까......”
“그래, 형. 형하고 형수가 알아서 잘 하겠지.”
모처럼의 가족회동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그 밤은 밝은 웃음 속에 저물어 가고 있었다. 기찬의 평소 성격 역시 그러했지만, 지금의 기찬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이미 나름의 기반이 있는 셈이니 이 일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별 걱정은 없는 입장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일이 잘못되어 가족들이 한 집에 모여 살 수 있다면 평소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어머니에게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는 모양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수야 없었겠지만, 이미 기찬은 과거의 기찬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찬이니?......”
“네, 네? 누구...... 신지......”
“호홋...... 나야. 나...... 여진이...... 정말 오랜만이다.”
“이, 이런...... 망할 계집애. 너 어디냐?”
“나, 이제 집에 가는 중이야. 오늘 미라도 가게에 나왔더라. 네가 벌써 머리도 얹어줬다면서?”
“머, 머리를 얹어 주다니? 그리고 지금 몇 신데......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호...... 네가 미라 마스터 일을 보기로 했다면서? 나중에 미라가 다시 전화하겠지만 마담 언니가 너 한 번 보자더라. 내가 너에 대해서 말을 해 주긴 했지만 매사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 새벽에...... 하여튼 너도 나중에 볼 수 있는 거니?”
“으응, 아마 그렇게 될 거야. 호호...... 그래, 나중에 보자. 나도 너 빨리 보고 싶어.”
전화기를 던져두며 도깨비 같은 계집애를 생각하니 지난 시절이 떠올라 입가에 절로 팔자가 그려진다.
“도련님......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아! 네......”
“식사하셔야지요.”
“네, 네...... 나갑니다.”
어제 마신 술도 있는데다가 새벽에 여진이 전화를 받고 잠을 설치다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또 형에게 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뒷골이 찝찝해진다. 부리나케 바지를 꿰고 거실로 나선다.
“이 자식이...... 제대한 게 언젠데...... 아직도 태평스럽게 늦잠이야?”
“아, 이거 참...... 헤헤......”
“당신은 그만 해요. 모처럼 만나서 잔소리만 해 대고......도련님, 어서 씻고 오세요. 상 차려 둘게요.”
“하하....... 역시 형수 밖에 없다니까......”
욕실로 들어서는 기찬의 뒤통수에 형의 목소리가 한 번 더 꽂힌다.
“야! 그리고 네 형수는 나하고 어디 들렀다 가야 되니까, 네가 네 형수 차 운전해서 남영동 가게에 좀 갖다 둬라. 알았지?”
“으응? 어제...... 차 따로 타고 왔어?”
“그래. 열쇠는 여기 식탁 위에 있으니까......”
“으응, 알았어.”
백수 입장에 못 한다고 거절해 봐야 또 핀잔만 들을 테니 고분고분 말을 듣고는 욕실로 들어선다.
“엄마...... 저 그럼 형수 차 갖다 주고 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괜히 네 형수 차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엄마도 참...... 소자가 비록 백수라지만 나름대로 바쁜 몸이올시다. 그런 걱정 접어 두시고...... 헤헤...... 그럼 소자, 나가옵니다.”
형제간에 얼굴 붉히지 않고 너그럽게 처리해 준 것에 다행스럽다는 생각이었을 테니 엄마도 기찬의 뒤를 바라보면서 고마운 마음에 미소를 짓는다.
“에구...... 저 녀석 벌어 오는 거라도 아껴 써서 모아두는 수밖에......”
전면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넓게 꾸며진 가구점의 앞마당으로 차가 한 대 들어선다.
“야! 미쓰진...... 오랜만이다.”
“어머! 기찬씨...... 웬 일이야?”
“으응, 형수가 형하고 어딜 가는지 날 보고 차 좀 갖다 두라고 해서...... 야, 뭐 시원한 거라도 한 잔 줘라. 모처럼 오빠가 왔는데......”
“피......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네가 어떻게 내 오빠가 되니? 쉰 소리하지 말고 거기 얌전히 앉아있어. 뭐 마실래? 콜라라도 한 잔 줄까?”
“그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미쓰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후훗...... 계집애, 늘씬한 건 여전하네......”
미스진은 형수의 여동생이니 기찬과는 사돈인 아가씨다. 형의 입장에서도 가게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자신의 처제라면 믿을 수 있는 일이니 처제에게 가구점의 경리를 맡기고 있는 것이고, 기찬과는 나이도 동갑이어서 간혹 만나면 오빠라는 등 농담이나 주고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도 가구점에 와서 일을 배우라는 핑계로 배달이나 시킬 생각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절 이 곳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 기찬이었다.
“야, 그런데 형수가 사업을 확장하기라도 하는 거야? 갑자기 왜......”
“아! 그거?...... 거래처 사장님 중에 한 분이 인도네시아 쪽에 괜찮은 생산 공장을 한 군데 소개해 준 모양이야. 이쪽에 그 지사가 있다는데...... 가구라는 게 주문생산이 많다 보니까 그 금액도 만만찮고...... 당연히 담보가 보증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형부하고 언니 앞으로 돼 있는 건 죄다 설정이 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그렇지.”
“으응, 그렇구나. 야! 그건 그렇고 너는 월급 타면 다 뭐하니? 가끔 연락해서 술이라도 한 잔 사지.”
“호호호...... 내가 미쳤니? 영양가 없이 너한테 돈을 쓰게......”
“젠장...... 형수는 안 그런데 너는 영...... 사돈어른한테 한 번 여쭤봐라. 혹시 너...... 어릴 때 어디서 주워온 거 아닌지......”
“뭐, 뭐야? 이게...... 너, 이리 와.”
“아, 아...... 하하하...... 나 이만 간다. 잘 있어.”
기찬은 가게를 뛰어나와 여전히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미쓰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택시를 잡아탄다.
“아저씨, 노량진이요.”
잠시 차 안에서 지나치는 경치를 구경하던 중 전화벨이 울려 번호를 보니 복덕방 사장의 번호였다.
“으응? 벌써 전세 임자가 나섰나?”
이내 귀에 대고 말을 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야, 야! 강기찬......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소개한 아파트 말이야.”
“네, 그게 왜요?”
“야, 인마...... 조금 전에 소개하러 손님 모시고 갔더니, 누가 이사 들어오고 있더란 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열쇠 꽂아보니 틀림없이 그 집 맞던데...... 너, 누구한테 사기 당한 거 아냐?”
“네에? 그, 그럴 리가......”
“야, 다시 확인해 봐. 그 사람들 매매 계약서까지 내가 확인해 봤어. 그리고 컴퓨터로 등기 열람해보니까 그 사람 이름으로 나오던데, 뭐...... 에이, 자식...... 잘 좀 알아보지 않고......”
“이, 이런 씨바...... 아, 알았어요. 내가 지금 가 볼게요.”
기찬은 기사를 재촉해 흑석동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아파트에 도착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한참 이삿짐이 들어가고 있고, 오가는 짐꾼들 사이로 이사 온 사람인 듯 보이는 젊은 부부가 보였다. 기찬은 냉큼 그들에게로 다가간다.
“저...... 잠시 실례 좀 합시다.”
“아, 네......”
“혹시 오늘 이사 오시는 분들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이 집을 사서 오신 건가요?”
“네......”
“아, 이런...... 저도 이 집에 전세를 계약한 사람인데...... 호, 혹시...... 언제 집을 사셨나요?”
“아, 그러세요? 저런...... 사기를 당하신 모양인데...... 저희들은 이미 열흘 전에 이 집을 샀는데요.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복덕방에서도 다녀갔는데...... 잘 좀 알아보시지...... 쯧쯧쯧...... 이 집 인테리어도 저희들이 다 다시 고친 거거든요.”
“아! 어쩐지 도배지도 깨끗하고, 집이 너무 새 집 같더라니...... 아, 잘 알았습니다. 그럼......”
할 수 없이 근처의 피시방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자식을 잡아야 하겠지만, 계약을 애경이 남편 모르게 처리했으니 그 계약서를 들고 경찰서를 찾아 갈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등기부 등본을 최종확인하고 정식 발급을 받아야 고소를 하든 말든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정히 문제가 된다면 애경이 남편에게 소개비를 떼어 먹으려 했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으니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겨 가면서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어어! 이런...... 씨바...... 아휴...... 다행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기찬의 얼굴이 순간 환히 펴지면서 급하게 자리를 벗어난다.
한 걸음에 동사무소로 달려가 주민등록 등본을 발급받고 창구직원에게 이것저것 상의를 마치더니 밝은 얼굴로 문을 나선다.
“뭐, 뭐요? 그, 그럼......”
“네, 그럴 겁니다. 지금 그쪽에서 갖고 있는 계약서를 보니까 저보다 날짜가 빠른 것은 분명한데...... 그쪽에서 등기이전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 주인이 다시 전세를 내놓은 모양입니다.”
기찬은 다시 아파트로 돌아와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와 마주앉아 각각의 계약서 따위를 늘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쪽은 정상적인 거래를 한 것이지만, 등기이전을 늦추는 사이에 전 주인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과실이 있다면 등기이전을 늦게 한 게 과실이지요. 등기이전을 제 때 했다면 등본 상에 그쪽 이름이 나타났을 테니 전 주인이 사기를 치려는 마음도 먹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면 아저씨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부인인 듯 보이는 여자가 근심어린 얼굴로 기찬에게 말을 붙여온다. 아파트를 날리는 줄 알고 긴장하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도 못했던 그녀를 이제서 자세히 보니 이삿짐을 나르느라 옷차림이 허술해서 그럴 뿐, 갸름한 얼굴에 반듯한 이목구비와 화장품 모델을 해도 좋을 정도의 투명한 피부의 소유자였다. 편안한 관계로 만났다면 좋은 시간이 되었으련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기찬으로서는 이 부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긋고 싶을 뿐이었다.
“제가 그쪽보다 계약을 늦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저는 바로 확정일자를 받아 두었기 때문에 등기부 등본 상의 주인과 정상거래를 한 셈이 되는 것이고,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은 등기이전을 늦춘 그쪽이랍니다. 전세 입주자가 있는 집을 줄 돈 다 주고 매입한 셈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제가 전 주인에게 준 전세보증금도 그쪽에서 저에게 갚아야 하는 겁니다. 지금 알아보고 오는 길이에요. 자, 여기 제 등본을 보세요. 날짜가 여기 있지요?”
기찬은 종이를 펴서 상대에게 펼쳐 보이고, 젊은 부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자, 어쨌든 저는 이 집을 다시 전세를 주려 했었고, 아직 이사를 들어오지도 않은 입장이니까 일단 짐부터 정리하시고 잘 아실만한 법무사나 변호사를 만나서 상의를 해 보세요. 지금 그쪽도 입장이 딱하게 된 모양인데 며칠 말미를 드릴 테니까 잘 알아보십시오.”
아파트를 나서는 기찬의 이마 위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휴우...... 그래도 복덕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게 몸에 밴 덕에 죽다가 살았네. 그나저나 저 친구들은 살림살이를 보니 신혼부부인 것 같던데...... 인생살이 새 출발 기똥차게 시작하는구먼...... 계집애는 내 또래나 됐겠나...... 곱상하던데...... 으읏!”
젊은 부부와 대화중이어서 진동으로 돌려 두었던 전화기가 진저리를 친다.
“여보세요.”
“기찬씨, 저예요.”
“으응, 미라야. 그래......”
골치 아픈 일이 해결되고 나니 미라의 목소리가 괜히 반가워 다정스레 전화를 받아 넘긴다.
“네, 여진이가 전화했었다면서요? 지금 시간이 어떤지 여쭤보려고요.”
“응, 괜찮아. 나야 백순데 아무 때면 어때서......”
“치잇, 그래도 너무 백수, 백수 하지 마세요.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 호호...... 그러면 지금 좀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으응, 그래......”
미라에게 장소를 들어보니 종로 한 복판 알만 한 위치였다. 평소 같으면 그런 곳에 드나들 형편이 아니니 팔자 좋은 놈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치부하던 곳에 발길을 들이게 된다.
다시 차를 잡아타고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잊고 있던 시장기가 고개를 치켜든다.
“저...... 실례합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손님들은 없을 것이고, 이 안을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종사원일 것이라는 짐작에 그 규모가 짐작되는 술집이었다. 몇 개 층을 모두 사용하는지 실내에 상하층을 잇는 계단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어 애당초 술집으로 설계를 한 집으로 보였다.
“어떻게 오셨는지......”
“네, 송미라양을......”
“아! 네, 이리 오시지요.”
웨이터인 듯 보이는 사내도 기찬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고, 그 역시 기찬이 지나치게 젊다는 생각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룸으로 안내를 해 준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운동장만 한 실내의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그라스와 도구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 드나드는 손님의 수에 맞춰 안내하는 룸이 미리 지정되어 있다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잠시 후 인기척과 함께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본다.
“기찬아!”
소리와 함께 품 안으로 달려드는 계집애는 다름 아닌 여진이었다.
“너...... 이 자식...... 도대체 얼마만이니?”
학창시절 한 번도 끌어안아 본 적이 없는 여진이었던 터라 물컹하게 와 닿는 가슴의 감촉이 새삼스럽다. 여진 역시 기찬에게 남녀의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으나,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기찬에게는 더 숨길 것도 없으니 그저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 미라는......”
“쳇...... 누가 마스터 아니랄까 봐 미라는 엄청 챙기네. 잠깐 어디 갔어. 기다리면 올 거야.”
“음...... 여진이, 너는 그동안 돈 좀 모았니? 학교도 휴학 중이라면서......”
“후훗...... 학교야 뭐...... 그저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오래 오래 써 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뿐인데......”
“그래? 하긴...... 나도 학교에는 별로 뜻이 없더라. 그나저나 그러면 여긴 너나 미라처럼 일하는 대학생들이 많겠네......”
“집집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가게는 거의 다 그래. 대부분 대학생들이야. 미라처럼 실제 재학 중인 아이들도 많고......”
기찬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주위의 인테리어를 둘러본다.
“야, 야...... 촌놈처럼 뭐를 그렇게 두리번거리니? 그리고 너...... 통장 번호 기억하니?”
“으응, 그건 왜?”
“으응, 이따가 마담 언니 오면 너한테 통장 번호 물어 볼 거야. 그래서......”
“그건 왜? 미라한테 듣긴 들었다만, 마담이 송금해 주는 거니?”
“으응, 아니...... 마담 언니가 자기 소속의 아가씨니까 사실 확인을 하는 차원이지. 실제로 내 마스터이기도 하고...... 내가 미라한테 마담 언니에게 소속돼서 같이 하자고 해도 굳이 너하고 하겠단다. 글쎄...... 푸훗......”
“후훗...... 나야 고맙지 뭐...... 야, 그런데 마담이 네 마스터라면 대단한 여자인 모양인데...... 이 바닥이 제법 험할 텐데......”
“호호호...... 하기야 남자들 몇은 찜 쪄 먹고도 남을 언니지. 그렇지만 언니는 명목상 그런 거고 실제로는 따로 있어. 박상사라고......”
“박상사?”
“으응, 마담언니 애인이야. 그 아저씨가 다 뒤를 봐 주고 있거든. 그러니까 나도 그 박상사 아저씨 소속이고...... 그러니까 연예인처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야. 이 술집은 방송국이고...... 마담 언니는 연예인을 거느리고 있는 연예 소속사, 그리고 너 같은 마스터들은 그 수입을 일정 부분 나누는 매니저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 거야.”
“후훗...... 매니저? 말이 좋아 매니저지. 마담은 펨프고 우리 같은 놈들은 포주와 다를 바도 없는 일 아니야?”
“어머! 이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펨프에 포주라니...... 너, 행여 마담 언니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마라.”
“아, 누굴 바보로 알아?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이건 좀 낫겠구나. 이 짓만 그만두면 그런 고리도 끊어질 테니...... 사창가처럼 사람을 강제로 잡아 가두고 인신매매하듯이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악착같이 벌어서 시집가면......
“그건 그런 셈이지만 개중에는 못된 인간들도 있어. 그래서 마담 언니가 불안하니까 언니 밑에서 일하는 애들은 일일이 마스터들을 만나 보려고 하는 거고......”
“아! 그런 거였어?”
“으응, 실제로 시집갔다가 남편 모르게 다시 일하러 나오는 애들도 있거든. 그럼 돈을 나누는 게 아깝다는 생각에 마스터 없이 일 하다가 낭패 보는 애들도 있고...... 그리고 너, 아까 마치 연예인에 비교하니까 웃던데...... 우리 처지가 뭐, 연예인만 못한 줄 아니? 우리처럼 일하다가 픽업돼서 지금 가수니 연기자니 하는 애들도 몇 있다고......”
“아! 그래?”
“호홋...... 그것도 다 빛 좋은 개살구야. 여기저기 인사할 곳은 많지. 몸은 피곤하고...... 그리고 거기라고 해서 사타구니 벌릴 일이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 나도 전에 제의 받았었지만 언니가 말려서 안 했던 것뿐이야. 여기 있으면 그런 쪽 사람들도 많이 오거든.”
“음...... 그렇구나. 그나저나 시집갔던 애들이 다시 나오는 건 뭐야? 돈 때문에?”
“그렇지. 이 짓이 좋아서 하는 애들이 몇이나 되겠어? 뭐, 요즘이야 동네 노래방에만 가도 아줌마들 차고 넘친다면서? 푸훗...... 애들이야 뭐 길거리에 내놓으면 배우 뺨치는 얼굴에 모델들이 울고 가는 몸매니까 아줌만지 아가씬지 알 게 뭐야?”
“허허...... 참......”
“그러지 말고 너도 차츰 괜찮은 애들 보이면 손 좀 뻗어 봐. 어차피 미라 뒤를 봐 주려면 여기도 자주 와야 할 텐데...... 미라 하나만 보기에는 수입이 적을 거 아니니? 나야 마담 언니 눈치가 있어서 적극 소개를 해 주기 어렵지만, 미라한테 말해서 새로 시작하는 애들이나 결혼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애들 소개 좀 하라고 해.”
“에이......”
“서로 공생하는 거야. 바보야...... 마스터 없이 일하다가 양아치 같은 놈들 만나서 신세 망치고 죽을 고생해서 벌은 돈 다 뺏기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지. 이 바닥에서 기생하는 양아치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그런 놈일수록 친절하기는 얼마나 친절한데, 처음 그렇게 접근해서 마음 약한 계집애들 홀딱 넘어가면 그 때부터는 골을 있는 대로 다 뽑아먹지. 그런 놈들이 아까 말한 대로 여자들 사창가로 팔아먹고 하는 놈들이야. 너, 행여 마스터를 그런 놈들하고 비교하면 안 된다. 이름 있는 마스터는 신사적으로 자기 주변을 관리하는 사람이 많아. 결혼할 때도 깨끗이 놓아주고...... 그래야 그 주변에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아이들도 늘어날 거 아니니?”
“으음...... 그도 그렇겠군. 아닌 게 아니라 이것도 수요공급이 있을 테니......”
“그래, 게다가 싸움이랄지...... 조직의 힘도 무시 못 하는 거거든. 기찬이, 네 배짱이야 내가 인정한다만...... 호호호...... 너, 몰랐지? 옛날에 우리 학교 앞에까지 나 쫓아왔던 양아치 패거리 말이야. 그 애들이 그런 놈들이었다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마담언니 소개로 여기 박상사 아저씨한테 마스터 일을 봐 달라고 했던 거고......”
“와...... 그러면 그 박상사라는 양반은 대단한 사람이겠구나. 관리하는 아가씨들도 제법 많겠지?”
“으응, 여기 우리 가게에 나오는 아가씨들 중에 한 이십 퍼센트는 그럴 걸. 그 수입만 해도 어지간한 사업가 못지않지. 거기다가 잘은 모르지만 이 술집도 그 아저씨 거라고 하던데...... 하지만 마담 언니하고 일정부분 나누는 모양이니까 그 속사정이야 내가 잘 모르지.”
“으음......”
“그러니까 너도 미라한테 잘 해 줘. 그러면 너도 금방 클 수 있을 거야. 좋잖아? 제대로 된 마스터에겐 계집애들이 죽는 시늉까지 하는데...... 심지어는 결혼하고서도 사람 일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라면서 마스터한테 일부러 눈도장 찍으러 다니는 계집애들도 있다니까......”
“야, 그럼 너도 그...... 박상사라는 사람하고 보통 관계는 아니겠네?”
“이...... 씨...... 너, 지금 뭘 알고 싶은데...... 그 사람하고 잤냐고? 호호호...... 그야 당연한 일 아니니? 지금이라도 마스터가 다리 벌리라면 그렇게 하는 거지. 너도 미라 머리 올려줬다면서?”
“아! 머리 올려준다는 게 그 뜻이었냐? 하하하......”
“그래, 그런 거야. 몸뚱이는 마스터에게 완전히 맡기고 보호를 받는 거지...... 그러니까 너...... 나한테 집적거릴 생각 하지 마라. 이미 너도 마스터이기 때문에 네가 나하고 어떤 사이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자칫 오해사면 남의 아가씨 채 가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 받고 칼부림 날 수도 있어.”
“야...... 무시무시하다. 그런 소리하지 마라. 이거야 원...... 어디 무서워서 친구끼리 손이나 한 번 잡겠냐?”
“푸훗...... 그래서 네가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내가 먼저 말해 주려고 들어온 거야. 마담 언니한테도 미리 친구 사이라고 말해 뒀으니까 그런 오해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지만 밖이라면 몰라도 이 술집 안에서는 조심해야겠지?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진 말고...... 나도 너 좋아하니까 밖이라면 옛정을 생각해서 한 번쯤은 줄 수도 있지 않겠니? 호호호......”
그 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서고 기찬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 아니?”
“어머! 왜 이렇게 놀라세요? 호호...... 안녕하세요? 제가 이 집 마담이에요. 앉으세요.”
“아! 네, 네......”
“그런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왜 그리......”
“아,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잠시......”
그녀는 얼마 전 기찬의 아파트에 전세를 들어 온 바로 그 여자였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실내의 조명이 다소 어두웠지만 분명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만 여자가 모른 척 하고 넘어가길 원하는 것 같으니 기찬도 그저 따라 줄뿐이었다.
“어머! 언니가 너무 미인이라 그런 모양인데요. 글쎄...... 애가 이래요. 예쁜 여자라면 그저 위아래도 모르고...... 호호호......”
“어머! 설마 그럴까? 호호호...... 여진이하고 미라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실력이 대단하시다고 들었는데......”
“아, 아닙니다. 그저 제 몸 하나 건사하는 정도지요.”
“호호...... 겸손하시기는...... 그래요. 이렇게 뵙고 보니까 제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분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요. 얼굴도 참 미남이시고......”
“아이고...... 이런......”
“호호호...... 그러면 여진이 네가 안내를 좀 해 드려라. 마침 사장님도 근처 어디에 볼 일이 있어서 나오셨다는데, 나중에 인사라도 시켜 드리고......”
“어머! 정말이세요? 와...... 너 운 좋다. 호호...... 자, 가자. 어서 따라 와.”
“으응...... 자, 그럼......”
마담에게 엉거주춤 인사를 한 후, 어리둥절한 채 여진을 따라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마담이 자신에게 일일이 구경을 시켜주는 의도를 알 수 없어 궁금해 하던 차에 한 곳에 이르러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내실, 그것도 아가씨들 대기실로 가는 한 쪽 면에는 온통 멀티비전으로 장식이 되어있어 룸 안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러니 결혼한 여자들이라도 룸 안의 손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어, 만에 하나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 모를 사고를 대비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또한 그 앞에는 헤드폰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얼마든지 대화 내용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니, 행여 다른 아가씨들을 채가는 따위로 마스터 간의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라면 아예 포기하라는 포고이기도 한 것이다.
“야...... 시설이 그저 사람 딱 질리게 하는구나......”
“호호...... 여기 사장님이 철저하다니까...... 그래서 우리도 일하기 편하고...... 아가씨는 많으니까 손님 얼굴 보고서 싫어하는 애들은 안 들어가면 그만이거든.”
“와...... 그러면 아까 우리가 들어가 있던 방도 여기에 다 보였었겠네?”
“그야 당연하지. 어쩌면 여기서 마담언니가 다 듣고 봤을 수도 있겠지. 호호호......”
“허...... 이것 참......”
여진이 슬쩍 기찬에게 매달리며 귓속말을 해 온다.
“후훗...... 너 거기서 나한테 덤벼들었으면 어떻게 됐겠니? 호호호......”
“야, 야...... 그 박상사라는 분도 근처 어딘가 있다는데 조심해야지. 괜히 오해 받는다면서......”
“피이...... 무섭니? 호호호...... 잠깐만 기다려 봐.”
여진은 잠시 대기실로 들어가더니 얇은 카디건 한 장을 걸치고 나와 손짓을 한다.
“기찬아, 따라 와.”
“어딜 가는 거야? 응? 여긴 밖으로 나가는 길 아니야?”
“그래, 잠자코 따라 와 봐.”
여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앞서서 비상계단을 내려가고 큰 길로 나서더니 여관으로 들어간다.
기찬은 여진의 행동에 기가 질려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따라 들어선다. 여관 주인은 여진을 익히 아는 듯 아무 말 없이 키를 넘겨주고, 여진은 다시 기찬을 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방 안으로 들어 선 여진은 기찬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후훗...... 놀랐지.”
“야!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이야. 도대체...... 너, 이러면 안 된다면서...... 게다가 그 박상사라는 사람도 근처에 있다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너는 들키면 입장 곤란해질 거 아냐?”
“그래서 일부러 지금 온 거야. 나, 사실은 너 좋아했잖니? 학교에 다닐 때는 자격지심에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도 못하고 일부러 도도한 척 굴었지만...... 그래서 어제 미라한테도, 마담 언니한테도 미리 말해 뒀어. 오늘 너 오면 밤에 내가 데리고 나갈 거라고......”
“뭐, 뭐야? 이 계집애가 아주 제 멋대로야. 야! 네가 좋다면 나는 무조건 네 말대로 해야 되는 거냐?”
“으흥...... 왜 그래? 기찬이 넌 싫어? 앞으론 기회도 별로 없잖아. 난 이렇게나마 너하고 학창시절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은데...... 나, 너 사랑한다니까...... 그때도 넌 나를 많이 이해해 줬잖아.”
“아...... 이것 참...... 야, 박상사라는 사람도 온다고 했잖아. 갑자기 너 찾으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밤에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잖아? 자, 어서 나 좀 안아 줘. 기찬아......”
여진의 처지가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학창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자기 좋다고 매달리는 여진을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박상사와 내연의 관계라는 마담에게까지 내락을 받아 둔 상태라고 하니 별 일이야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할 수 없이 여진의 입술을 받아들인다.
“으흠...... 하아......”
“여진아......”
기찬도 젊은 청춘, 피 끓는 나이였으니 이미 재학 시절부터 여진을 안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 만약 여진이 기찬의 말을 들어 이 세계에서 발을 빼냈다면, 지금쯤 누구보다 행복한 연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돌아 비로소 마주 하고 있는 셈이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애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하늘거리는 여진의 옷가지가 급기야 발 위로 흘러내리고, 두 사람은 허송한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뜨겁게 마주 안는다.
“하악......”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마주쳤다고 해서 지난 시간 캠퍼스를 뛰어다니던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 행여 자신이 이런 곳에 몸을 붙여 산다고 무시당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는 없는 일, 온 정성을 기울여 여진의 몸을 데워준다.
“기...... 찬아...... 그, 그마안......”
여진은 기찬의 품 안에서 숨이 넘어가고, 어느덧 기찬의 손길은 여진의 하체로 이어지고 있었다. 분홍빛 고운 속살은 이미 촉촉한 이슬을 비추며 손짓을 하는 듯 기찬을 불러들인다.
“흐읍......”
“하아악......”
기찬의 머리카락 사이로 여진의 깍지 낀 손이 경련을 일으킨다. 도대체 언제였을까? 남자로부터 애정 어린 애무를 받아본 것이 언제인지도 가물거린다. 아니, 그런 적이 있긴 있었던 것일까? 속살을 유린하는 기찬에게 한껏 다리를 벌려 받아들이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기 어려운 감각을 일깨우는 기찬을 자신도 모르게 옥죄어 버린다.
“허엉......”
여진의 옥문으로부터 감로수가 쏟아진다. 뿜어지는 물줄기에 얼굴을 적시며 기찬은 고개를 들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숨을 고른다. 이윽고 위용을 자랑하는 기찬의 분신이 여진의 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용을 갖추고 맞닿은 감촉에 여진은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일으킨다.
“하악...... 미, 미안해. 기찬...... 아. 괜찮은 거야?”
기찬의 얼굴을 적시게 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여진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바쁜 숨결 사이로 안부를 묻는 달콤한 향기를 토해 낸다.
“하아악...... 너무...... 커......”
자신을 가득 채우는 포만감에 놀라고 들이닥치는 격렬함에 한 번 더 고개를 꺾는다. 단단한 기찬의 몸에 손톱자국을 남기는 것에 대한 염려는 이미 여진의 안중에 없는 일이니 희고 가느다란 손끝을 기찬의 등에 파묻은 채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싣는다.
“으으으으...... 왔어...... 울컥, 울컥......”
“하아아아악...... 기찬......아......”
마지막 크게 들이치는 기찬의 허리놀림으로 참으려 했던 신음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다리를 옥죄어 풀어주지 않으려는 듯 안긴 채 매달리는 여진의 이마에는 방울방울 땀방울이 맺혀 있고 기찬의 등으로는 여진의 손톱자국이 선명해 두 사람의 간절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아직도 한낮의 햇빛은 여관 창문으로 훈풍을 밀어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