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자, 그럼 이제 계약이 체결된 겁니다. 도장들 찍으시지요.”
“네, 그럼 오늘이라도 바로 사용이 가능하겠지요?”
“아! 물론이지요. 아까 보셨잖습니까? 청소까지 완벽하게 돼 있는 상태니까 언제든지 입주 가능합니다. 자,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네...... ”
여자는 복덕방 사장이 내미는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고, 복덕방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기찬에게 목례를 한다.
“음...... 그럼 나중에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러시죠.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삼십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신고 있는 하이힐이 아니더라도 능히 팔등신이 됨직한 늘씬한 키에 용모 또한 빼어나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멀리 사라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장이 소파에 엉덩이를 던지며 담배를 꺼내 문다.
“아...... 젠장...... 저런 년 끼고 사는 놈들은 어떤 놈들일까? 야! 기찬아. 복비나 줘라. 우리 닭이나 한 마리 시켜서 소주 한 잔 하자.”
사장은 기찬에게 복비를 받는 것이 내심 미안했던지 닭 한 마리로 생색을 내려는 모양이다. 기찬은 뚫어지게 바라보던 계약서를 품에 접어 갈무리하며 멀뚱한 표정을 짓고는 사장을 쳐다본다.
“어라! 형님...... 아직 못 들었나 보네? 어제 집에 가다가 형수 만나서 줬는데...... 뭐라더라? 무슨 오피스텔이 좋은 게 나왔는데 계약금 다만 얼마라도 빨리 걸어 둬야 한다고 하기에...... 형님한테는 형수가 말한다고 하더니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네.”
“뭐야? 아니...... 이 여편네는 제 물건 챙기는데 왜 내 돈을 끌어 가?”
“어따...... 형님, 부부간에 네 주머니, 내 주머니가 어디 있어요? 돈일랑 나중에 달라고 하고 술 한 잔 하실 거면 어서 닭이나 시켜 봐요. 내가 살 테니까......”
말을 마친 기찬이 주변을 정리하며 일어서려 하자, 사장은 전화를 하다 말고 기찬을 바라본다.
“야! 닭 시키라면서 넌 어딜 가려고?”
“으응, 금방 올 테니까 시켜 놓아요. 혹시 모르는 일인데 얼른 은행에 대출 서류 집어넣어야지. 여유 부리다가 자칫 잘못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텐데...... 미리 상담 받아 둔 거라서 서류만 접수 시키면 되니까 금방 올 겁니다.”
“허헛! 참 나...... 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가 와.”
한참 후 은행을 나서는 기찬은 휘파람이 절로 나오는 표정이다. 은행 담당 직원도 건수를 올리는 일이니 모든 조치를 미리 하고 기다리다가 일사천리로 일을 매듭지어버렸다. 이제 하루만 기다리면 대출금이 기찬의 통장으로 꼽힐 것이고, 이후로는 전세를 얻은 그 여자가 전세권을 설정하든 말든 기찬이 돈을 운용하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덕방을 향해 가는 기찬의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저...... 기찬씨, 저 미라예요.”
“아! 미라씨...... 적당할 때, 내가 전화 한다니까 왜 그리 조급하게 굴어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오늘도 나오라고 전화가 와서......”
“......”
“어, 어떻게 하죠?”
“에이 씨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저, 전...... 지금 학교에 있어요.”
“몇 시에 만나자고 합디까?”
“저녁 일곱 시요.”
미라의 몸을 탐하는 녀석들로부터 미라에게 호출명령이 떨어졌으니 곱든 밉든 도와주기로 한 바에야 더 이상 미룰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변태 같은 녀석들일지라도 남녀상열지사에 설마 여러 놈이 개떼처럼 덤비지는 않을 것이니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을 것이다.
장소를 들은 후 몇 가지 당부사항을 전해 준 뒤에 전화를 접어 넣는다.
복덕방 사무실에 도착하자 오래지 않아 술과 안주가 들어온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 불렀는지 어제 보았던 다방의 아가씨가 뒤이어 들어오고 좌석은 금방 질펀하게 변해 버린다. 이제 기찬의 입장에서는 볼 일도 모두 정리가 된 셈이니 더 이상 불편한 좌석에 있기도 껄끄러워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아니, 왜? 벌써 가려고?”
“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준비할 것도 좀 있고...... 며칠 후에 다시 들릴게요.”
“으응...... 그래, 그럼 안 나간다. 나중에 보자.”
“네......”
한동안 함께 보조를 맞춰가며 일 한 사이에, 몇 푼 안 되는 소개비를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괘씸해서 그랬는지, 우연한 기회를 이용해 그 마누라와 은밀한 관계까지 몰고 간 자신도 사장을 보기에 썩 개운한 입장은 아닐 것이니 마주 앉아 있는 것이 편한 좌석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여보세요? 김지영씨?”
“네...... 누구시죠?”
“네, 저 집주인 강기찬입니다.”
“아! 네, 네...... 무슨 일로......”
“네, 별 일은 아니고...... 아까 서둘러 입주를 하실 것처럼 말씀하셔서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 네...... 호호호...... 고맙습니다만, 아직은 없지...... 싶어요.”
“하하...... 네, 잘 알았습니다. 그저 동생처럼 생각하시고 제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전화 주십시오.”
“암요. 집에 하자가 있으면 당연히 집 주인에게 전화를 해야지요. 호호호......”
“아...... 이것 참, 공연히 주인 행세를 한 셈인가요? 하하...... 그럼 끊겠습니다.”
“네......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전화를 끊는 기찬의 입에 미소가 어린다.
“김지영이라......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제법 귀여운 얼굴에...... 게다가 기품까지 느껴진단 말이야. 뭐 하는 여자인지 궁금한데......”
기찬. 집안에 여자라곤 어머니뿐이었으니 어려서부터 마음 한 구석에는 여자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던 터였다. 위로 일곱 살 터울의 형이 장가를 갈 때에도 고운 얼굴의 형수를 똑바로 마주 쳐다보질 못할 정도의 숙맥이었지만, 재학시절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여진의 난잡함으로 남녀관계라는 것이 결코 신비한 것만은 아니며, 여자라는 존재가 그리 전율을 느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어제 부동산 사장 부인인 애경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연배의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전에 없이 각별한 느낌이었다.
“이거...... 씨바...... 내 몸에 제비족의 피가 흐르나? 왜 갑자기 사모님, 여사님들이 눈앞을 어지럽히나?”
어젯밤 몸을 풀어준 애경이 용돈 하라며 쥐어준 수표 몇 장은 아직도 지갑 안에 들어 있어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괜히 두들겨 본다.
“엄마, 저 오늘 조금 늦을지도 몰라요. 친구들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래,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혹시 친구들 만나면 어디 일자리라도 있는지 알아보고......”
“네, 알았어요.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전세 대금으로 받은 돈 중 일부를 어머니에게 전해주고 난 뒤라서 그런지 유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배웅을 받는다.
“크크크...... 이래서 사람이 돈을 벌어야 한다니까......”
한참을 늘어지게 쉬고 난 후여서인지 몸은 날아갈 듯 가볍다. 오늘 만나게 될 녀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승사자를 만나는 셈이니 벌써부터 몸을 풀 생각에 전신이 뻐근해져 온다.
기찬은 군대시절 남모르는 사연이 있었다. 그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명칭은 일반 수색대와 다를 바 없었으나 특수한 업무를 전담하는 곳으로서 오로지 청와대의 경비를 목적으로 하는 부대였다.
강원도 모처에 청와대와 꼭 같은 실물 크기의 건물을 건조해 두고, 그곳에서 먹고 자며 침투와 방어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 오로지 일과의 전부였다. 간혹 청와대 앞뜰에 파라솔이라도 한 개 쳐졌다면, 그 다음 날 즉시 부대의 앞뜰에도 같은 파라솔이 배치되는 정도였으니 그 부대원들의 자부심이나 기상은 가히 일당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청와대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위성으로부터의 노출을 꺼려 위장막으로 가려져 있다는 점뿐일 것이다.
간혹 외국의 인사들이 국빈자격으로 내한할 경우, 은밀하게 청와대를 경호하는 이들은 전투경찰도, 경호실 직원들도 아닌 바로 이들이었다.
청와대 주변의 전투경찰은 그저 단순히 방문객들을 통제하거나 안내하는 차원이었고, 경호실 직원들은 이동 중의 경호 업무 위주였기 때문에 청와대를 기점으로 하는 암중의 경호 및 유사시의 작전권은 표면상 수도 방위를 책임지는 사령부에 있었으나, 그것은 허울뿐이었고 실제로는 기찬의 소속부대원들이 파견 형태로 암암리에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휴가를 나올 때에도 비록 사병 신분이지만 권총은 항상 휴대를 하게 되어 있고, 비상시의 작전 소집 장소는 다름 아닌 청와대였으니, 오래 전 지나간 대통령 시절에는 그 부대권한이 막대해 장병들의 휴가 길에 마을 군수들에게 지시를 해 역 앞에서 픽업해 집 앞까지 모셔가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부대는 바로 실미도 부대라고 알려졌던 공군 편제 하의 침투부대가 사라지면서 육군으로 작전권이 이양된 후, 오로지 청와대의 방어를 목적으로 창설된 비밀부대였던 것이다.
훈련소 시절, 훈련 겸 놀이 삼아 자주 하는 격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찬에게 교관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 계기는 별 것 아니었다.
“이봐...... 너!”
“네.! 강기찬 훈련병!”
“너, 사회에서 무슨 운동 했어?”
“아무 운동도 안했습니다!”
“이 새끼! 장난하나? 바른대로 말 못해!”
고함 소리와 함께 날아 든 군화 발에 정강이가 차이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대군기가 편한 곳으로 배속 받기 위해 사회 경력을 은폐하는 훈련병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네, 네! 숨쉬기 운동했습니다.”
“이 새끼가......”
그날, 기찬은 모진 얼차려와 완전군장에 밤늦게까지 연병장을 돌아야 했고, 교관 사무실에 끌려가서는 결국 하지도 않은 합기도며 태권도 따위 격투기 운동의 고수로 둔갑하는 자인서를 쓰고서야 훈련병 내무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름지기 유사시 청와대를 경비하는 비밀부대의 구성원을 차출하는 일에 속칭 뺑뺑이를 돌리지는 않았을 테니 모르면 몰라도 기찬이 그 부대에 배속 당하게 된 배경에는 그 교관의 역할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제대를 하고 보니 과연 그 교관에게 내밀었던 자인서를 훨씬 뛰어넘는 실전무술의 달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군부대에서, 그것도 청와대를 암중 경호하는 비밀부대에서 배우는 것이라고는 순도 높은 살인기술뿐이었으니 달리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어머! 아니요. 저도 금방 도착했어요.”
“자, 그럼...... 지금부터는 내가 근처에서 따라붙을 테니까 당황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나, 믿지요?”
“네, 기찬씨만 믿을게요.”
“자, 그럼......”
미라를 불러낸 녀석은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제법 대로변의 카페를 약속장소로 정해 두었다. 하기야 미라가 정조를 유린당한 후 이미 여러 차례 같은 행위를 반복해서 당했다는데, 녀석들이 아직도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미라의 나체를 찍어 둔 사진도 있다고 하니, 앞길이 구만리 같은 여대생이 신세를 망치자고 작정하지 않는 한, 자신들을 해코지할 일도 없으리라 믿고 있을 것이다.
“어라? 이상한데......”
기찬은 미라를 만나러 나온 녀석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법 덩치가 있어서 힘깨나 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옷차림이나 들고 있는 가방을 보아도 영락없는 샐러리맨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대 양아치 녀석들인 줄만 알았는데...... 아닌가? 이거 씨바...... 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리는 거 아냐?”
잠시 생각할 여유도 없이 녀석과 미라의 움직임에 기찬도 따라서 자리를 벗어난다.
화양리 일대는 다양성의 천국이었다. 수많은 인파들 사이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쫓아 다다른 곳은 장급 여관이었다. 녀석을 따라 입구로 들어서는 미라는 고개를 돌려 기찬을 찾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시야 안에 기찬이 있을 리가 없는 일이다.
잠시 후, 기찬이 망설이는 듯 지갑을 열어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붉은 카펫을 따라 들어서며 안내실 유리창을 두들긴다.
“실례합니다.”
“방 드릴까요?”
오십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테이블에 앉으며 고개를 숙여 기찬을 바라보고, 기찬은 지갑을 열어 얼핏 신분증을 보여준다.
“기관에서 나왔습니다. 방금 들어간 사람들 몇 호실입니까?”
사내는 잘 볼 수 없었다는 듯, 재차 신분증을 요구한다. 기찬의 나이라고 해야 아무리 많이 보아 주어도 고작 이십 여세로 보이니 사복경찰일 리는 없을 것이고, 군인 신분증이라는 것을 미처 본 적이 없으니 무작정 방을 알려 줄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나...... 이것 참, 군 수사관이라니까요. 자, 얼른 보시고......”
기찬은 할 수 없다는 듯,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사내에게 내민다. 놀랍게도 수사관 신분증이라는 증명에는 국방부 장관의 압인이 찍혀 있고, 고급재질의 코팅에 표찰의 형태로 집게고리까지 달려 있었다.
“사, 삼백 이호로 갔습니다.”
“자, 카드 키...... 이리 주시고, 주인장은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잠깐 조사만 하고 조용히 데리고 나갈 거니까...... 그리고 군에서 하는 일에 공연히 경찰이 개입하면 아저씨 피곤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되니까 알아서 하시고......”
“아, 아! 네, 네...... 알았습니다. 아무쪼록 사고 없이 빨리 데리고 나가시기만 한다면야......”
기찬은 더 이상 사내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단으로 발을 옮긴다.
방 앞에 도착해 잠시 귀를 기울여 인기척을 탐지한 후에 망설임 없이 카드 키를 밀어 넣어 방문을 개방한다.
녀석은 이미 미라를 찍어 누르고 입술을 헤집다가 기찬이 들어서는 소리에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다.
“다, 당신...... 누구요?”
기찬은 다시 한 번 신분증을 꺼내 사내에게 건넨다.
“헌병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앉으시죠.”
몹시 당황한 사내는 기찬과 미라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신분증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하지만 이내 기찬에게 빼앗기고는 허망한 눈길로 초조하게 기찬을 바라본다. 의뭉스럽게 기찬은 미라를 바라보고 말을 던진다.
“아가씨는 뭐요? 직업여성인가?”
“아, 아니요. 저......”
“그럼 저 쪽 뒤로 가 있어요. 아가씨도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저...... 도대체 헌병이 무슨 일로......민간인에게......”
사내는 다시 기찬에게 말을 붙인다. 분위기로 보아 미라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닌 것 같았으나 자신이 벌이고 있는 행위가 떳떳하지 못한 처지니 그저 조심스러울 뿐이다. 게다가 군 수사기관이라니......
“당신은 가만히 있어. 말 할 기회를 줄 테니까...... 당신, 어느 회사 소속이지?”
“저...... 영진 기업입니다만......”
“부서는?”
“총무부 기획실입니다. 제가 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당신, 신분증하고 그 가방 이리 올려 봐.”
“아니...... 도대체...... 이런 법이......”
사내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의자 밑으로 너부러지고 만다. 기찬은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미라에게 사내의 가방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여,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는 저 사람과 무슨 관계요?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아가씨도 처벌 받을 수 있어?”
기찬이 둘의 관계를 모를 리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를 모르는 사이인 것으로 보이기 위함이니 미라는 그저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다가 끝내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혀 울음을 터뜨리고 주저앉는다.
“으흠...... 말 안 해도 알 것 같군. 당신 어서 이리 와서 앉아. 보아하니 부하 여직원에게 압력을 가해 성추행까지 일삼고 있는 모양이니...... 지금 이 일이 아니더라도 당신 온전하게 빠져 나가기는 쉽지 않겠어.”
“아, 아닙니다. 그, 그게......”
“시끄러워.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 전에 신분증이나 이리 내. 당신 회사에서 지금 군부대에 로비를 해서 보급품 납품을 추진한다는 첩보가 입수된 상태야. 이미 며칠 전부터 내사를 하던 중에 당신을 주목했는데, 오늘 내가 뜻밖의 수확을 하나 더 올리는 셈이지.”
“저, 전...... 그런 거 모릅니다. 생전 처음 듣는 얘긴데......”
기찬은 이미 분위기가 장악되었다는 판단인지 더 이상의 주먹질은 없었고, 사내의 신변에 대한 파악을 하고 있었다. 한참의 메모가 끝난 후, 사내를 바라보곤 욕실의 수건을 던져 준다.
“나 이런...... 코피가 나면 가서 닦을 일이지. 멍청하게 그러고 있나? 엉?”
긴장을 한 탓인지, 두려워서 그랬는지 사내의 와이셔츠 앞섶이 온통 붉어지도록 흐르는 코피를 그저 방치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 이제 당신 신변은 완전히 나에게 장악되었어. 지금 군에서 당신 회사를 내사 중이라는 것이 발각된다면 그것은 무조건 당신 입에서 나온 얘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알아서 몸조심, 또 입 조심할 것을 명심하라고...... 협조하는 것 봐서 살려줄 수도 있지만, 허튼 짓을 하거나 입을 함부로 놀리면 저 여직원을 성추행 한 것까지 모조리 엮어서 오래 오래 콩밥을 먹게 해 줄 테니까......”
“아! 네, 네...... 알았습니다.”
사내는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잘만 하면 기찬에게 협조해 궁지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자, 이젠 아가씨...... 이리 와서 앉아.”
기찬은 미라의 가방과 소지품 따위를 마찬가지로 검색하고 자연스럽게 한 회사 직원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도록 유도를 한다. 결국 미라의입을 통해 그간의 일을 다시 한 번 들음으로 해서 사내는 기찬의 허락이 없이는 올가미에 걸린 채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다시 한 번 사내를 향한 매타작이 벌어지고......
“자, 아가씨는 이 회사와 관계도 없고 혐의가 없는 인물로 드러나서 보내주겠지만, 아가씨 신변도 내가 확보하고 있는 이상, 만약 오늘 있었던 일들을 발설하게 된다면 아가씨 신변을 더 이상 보장해 줄 수는 없어. 그 대신 이 인간들로부터 받은 고통은 내가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줄 테니까 추후 다른 일이 생기거나 이 자식들이 괴롭히면 언제든지 내게 전화를 하도록......”
기찬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미라에게 남긴다. 이로써 미라는 녀석들의 올가미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 셈이다. 기찬은 미라를 내보내기 위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문 밖에는 사태의 추이가 궁금했는지 여관의 주인이 안절부절 못한 표정으로 서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하하...... 자, 이제 큰일은 다 끝났습니다. 이 아가씨는 혐의가 없어서 귀가조치 시키고, 저 안에 있는 사내는 더 조사할 게 남아 있으니까 주인장은 어디 전화해서 국밥이나 두 그릇 배달시켜주시면 좋겠는데......”
여관 주인은 고개를 뽑아 방안을 보고는 기겁을 한다.
“아, 아! 네, 네...... 아, 알았습니다.”
“저기...... 나중에 청소를 하거나 해야 할 테니, 제가 나갈 때 비용 청구하세요. 다 국방부에서 지불해 드릴 겁니다.”
“아, 아닙니다. 다 나라에서 하시는 일일 텐데...... 괘, 괜찮습니다.”
허둥지둥 내려가는 여관 주인 뒤로 미라의 등을 떠밀며 귓속말을 전해 준다.
“자, 나중에 내가 전화해 줄게. 먼저 가세요.”
“아! 네......”
기찬은 배달되어 온 국밥을 천연덕스럽게 사내와 함께 뜨면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사실은 미라의 오빠가 명예퇴직으로 실직을 하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가장이 실직을 하게 된 후, 매양 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미라의 올케가 파출부 일이라도 구하려 했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일자리를 어렵사리 구한 것이 지금 이 회사 사장의 집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장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미라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져, 만일의 경우 그 입막음을 위해 사장의 지시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찬은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 이것 참...... 그럼 그 사진은 어디에 있지? 나체사진을 찍었다면서?”
“그, 그건...... 회사 제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당신...... 집이든, 회사든 간에 나중에 전부 압수 수색할 거니까...... 시간을 줄 때 미리 완전하게 삭제해. 다시는 복구할 수 없도록 파일을 몇 번씩 갈아엎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아! 네, 네...... 알았습니다.”
“그리고 당신하고 함께 겁탈했다는 그 인간 인적사항도 지금 나한테 줘.”
“아! 김비서 말씀이십니까? 여, 여기 명함이 저한테 있을 겁니다.”
사내는 허둥지둥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기찬에게 내민다.
“자, 이 자식도 당신하고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될 거야. 하지만...... 두 사람...... 앞으로 패가망신하지 않고 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남으려면 서로 이 일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함구해야 하니까, 서로 간에 알아도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되겠지?”
“아! 네...... 무, 물론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러지. 당신은 나중에 따로 연락을 취할 테니까...... 내 연락 받게 되면 즉시 움직이도록...... 자, 나갑시다.”
“네, 네......”
사내는 온 몸이 결리는지 엉거주춤 일어서서 행여 기찬이 다시 부를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을 빠져나간다.
기찬도 여관을 빠져나와 대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보니 그럴 듯한 연탄구이집이 보여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걸친다.
“저...... 기찬씨......”
“어어? 아직 안 갔어요?”
“네...... 밖에서 기다렸어요.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하하...... 이제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머지 한 녀석 신원도 제가 파악해 뒀으니까...... 내일이면 모든 게 정리 될 겁니다.”
기찬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속사정에 대해서 미라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 줘야 하는지 내심 고민스러운 입장이었다. 보아하니 미라는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듯 보이는데 사실대로 알려 줬다가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갈등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미 개입해 버린 일, 미라를 곤경에 몰아넣은 사장이라는 인간도 한 번쯤은 대면을 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른다.
“저...... 술 한 잔 받으세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기찬씨...... 이제 저한테 말씀 놓으세요. 제가 많이 불편해요.”
“그래요? 그럼 같이 말을 트도록 하지요. 우리 나이도 같을 텐데......”
“네...... 저는...... 천천히 그럴게요. 저는 그냥 이게 편해요.”
“음...... 뭐, 그럼 그러든지......”
기찬도 같은 또래끼리 존대를 하는 것이 내심 불편하던 차였지만, 섣불리 반말을 함으로써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홀대를 한다는 인상을 심어줄까 걱정스러워 그랬던 것이니 이젠 홀가분하게 그 짐을 털어 버린다.
“저...... 여진이하고는 그냥 친구 사이신가요?”
“칫...... 술맛 떨어지게 그 계집애 얘기는 왜 꺼내? 너한테 내 이름 팔아먹고 아직까지 전화 한 통화도 없잖아.”
“그, 그건...... 자기도 연락처를 모른다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그 계집애가 되먹지를 않았다니까...... 그래도 같이 학교 다닐 때에는 제법 친하게 지냈는데 고작 몇 년 세월에 전화번호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건, 자기가 사는 무대가 나 따위 인간은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도 좋다는 무의식의 반증일 뿐이니까......”
“......”
제법 적지 않은 횟수의 잔이 오가고, 어느덧 두 사람의 얼굴이 닳아 오른다.
“미라, 너는 집이 어디니?”
“여기서 멀지 않아요. 천호동이에요.”
“가자. 내가 바래다 줄 테니까......”
주변에 학교들이 있어 그런지 아직도 거리에는 또래의 젊은 남녀들이 차고 넘친다. 취기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취기를 빌어 그러는 것인지 미라가 팔짱을 끼고 기찬을 의지한다.
“나...... 집 나올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집을 왜 나와?”
기찬은 내심 당황했다. 미라가 집을 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일에 대해서 올케가 개입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기라도 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오빠가 실직상태라서 새언니가 일을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빌붙어서 놀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르바이트를 하면 하는 거지. 집을 왜....... 너...... 호, 혹시...... 여진이랑......”
“......”
“이...... 망할 놈의 계집애. 내 당장......”
기찬은 전화기를 꺼내 여진에게 전화를 하려 했으나, 전화번호가 바뀐 지 오래니 알 턱이 없는 노릇이었다.
“저, 이 계집애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하지 마세요. 기찬씨. 이미 오래 전에 마음먹은 일이에요. 이 일과 상관없이...... 하지만 지금 이 일을 정리하지 않고는 마음 편히 그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으흠...... 이제 알겠군. 그래서 여진이가 나를 수배해 보라고 했던 모양이지?”
“네...... 기찬씨에겐 여러 모로 죄송해요. 공연히 지켜 줄 가치도 없는 계집애 때문에 어려운 일을 부탁 드려서......”
“휴우...... 할 수 없는 일이지. 네가 그렇게 결심했다면...... 그것도 세상사는 한 방법일 테니......”
“그래도 나...... 친구처럼 생각해 줄 수 있어요? 여진이 같이......”
“허허...... 참 나...... 그야 물론이지. 별 소리를 다 한다. 그까짓 게 뭐 대수라고......”
미라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기찬을 바라본다. 미라의 느닷없는 행동에 기찬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왜, 왜?”
“흐흑......”
미라는 갑자기 설움이 북받치는지 기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당황스런 사태에 기찬은 거리를 둘러보며 할 수 없이 미라를 길옆으로 데리고 물러나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감정을 추스른 미라가 말문을 연다.
“저...... 기찬씨, 부탁이 더 있는데......”
“부......탁? 뭔데...... 말해 봐.”
“음...... 앞으로도 내가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주는 후견인 같은 거......”
“그래, 그러지. 아까도 얘기했잖아. 그게 뭐 어려운 일이야. 걱정하지 말고......”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여진이와는 다른...... 이 일을 시작하려면 처음엔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하던데...... 무서워서......”
“뭐, 뭐야? 그러면...... 그 말은 지금 나 보고 미라, 네 배경이 되어 달라는 거니? 그...... 이른 바 기둥서방이라는 거......”
“......”
반응이 없다는 것은 그저 처분만 바란다는 뜻일 테니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찬은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다가 모종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 어차피 미라의 올케와 연관된 일들도 끝내 해결을 보아야 할 일이고, 노느니 염불한다고 그 과정을 캐내다 보면 적잖은 부수입도 뒤따를 것이니 매양 공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내가 무슨...... 정의의 기사도 아니고, 나 같은 양아치 새끼도 도움이 된다면야...... 미라, 너 좋을 대로 해라.”
“고, 고마워요. 기찬씨...... 앞으로 기찬씨만 믿을게요.”
“그, 그래...... 거 참...... 허허......”
“어차피 누군가는 뒤를 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탈 없이 오래 갈 수 있다던데...... 그리고 그 중에는 나쁜 사람들도 있어서 여자를 심하게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버는 돈도 거의 다 빼앗아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이런 쳐 죽일 놈들......”
“정한 비율이 있는 모양이에요. 앞으로 제가 버는 수입 중에서 꼬박 꼬박 기찬씨에게 송금해 드릴 게요.”
“아,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해서 버는 돈인데......”
“아, 안돼요. 실제로 그런 연결고리가 없다면 저를 차지하기 위해서 덤비는 인간들이 또 생겨난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그래? 여진이가?”
“......”
“참...... 기가 막혀서...... 그러고 보니까 전부 여진이, 이 계집애가 코치를 해 주고 있는 모양이네.”
“사실은 자기 뒤를 봐 주는 사람에게 같이 소속돼서 일하자고 하던데...... 저는 기왕 기찬씨에게 어려운 일도 부탁드렸으니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었으면 싶어서...... 여진이도 기찬씨 실력이나 배짱이라면 못할 일도 아니라면서...... 다만 그런 부탁을 들어 줄 지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흐릿한 조명 아래, 기찬은 미라를 더듬어 간다. 미란 역시 기찬에게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부딪혀 온다. 선남선녀로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찬은 미라에게, 미라는 기찬에게 각각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흐음...... 하악......”
결국 미라의 종용을 뿌리치지 못하고 여관으로 따라 들어서고 말았다. 이제 그녀의 가녀린 몸뚱이는 그 도착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여정을 시작함에 있어 그 공식적 첫 항해를 시작하는 셈이다.
한참의 애무에 이어 그녀의 은밀한 곳이 젖어 갈 무렵, 기찬의 율동이 격해지기 시작한다.
“후욱...... 후욱......”
군살 없이 매끈한 그녀의 편평한 배를 지나 다시 약간의 둔덕이 솟아오르는 그 어림에는 고운 방초가 이리저리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열락에 힘겨워 하고 있었다.
이미 남성을 체험한 미라였지만 그 기억이라는 것은 그저 황망하고 끔찍한 것뿐이었으니, 결코 그 결심한 앞으로의 행보가 자칫 유희라거나 돈맛을 본 철없는 계집애들이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과 견주어 비교할 일은 아니었다.
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과연 얼마이겠는가? 결국 모두가 그 각개의 가치관에서 출발하는 일이겠지만, 기찬 자신은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학업을 위해, 또 다른 미래의 전개를 꿈꾸며 어느덧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의 한 귀퉁이로 몰려 버리고 있다는 절박감이 미라를 이리 잡아끄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미라는 숨 가쁜 열락이 피어오르자 이미 의식의 끈을 놓쳐 버리고 그저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겨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고통과 수치스런 기억은 이미 의식 저 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담대하고 용맹한 기사에게 몸을 의탁한 공주처럼 미라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마저 어리고 있었다.
장대한 기찬의 일부가 오래도록 미라를 관통해 그녀의 영혼마저 정복해 버릴 즈음, 그녀의 깊은 곳에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그 폭죽은 마치 감당하지 못할 해일이 밀려오듯 그녀의 빈 영혼과 가슴을 충만하게 채워주고 아득한 나락으로 점점 몰아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