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Chapter 158
“결국은 때가 왔군요.”
덤덤한 시선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던 펠리드.
슈우우우-
그의 시선 너머, 백광을 발하는 유성이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절망이 떨어지는구나.’
경지가 미약한 펠리드도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힘.
백광의 유성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발산되고 있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으나 그것이 점차 가까워지자 펠리드 또한 그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희망은…….’
그가 시선을 돌렸다.
“…….”
“…….”
그곳에는 지금껏 소튼 왕국을 지켜 준 백전의 용사들이 있었다.
타일로, 갈린, 킬리아, 그리고 샬롯.
전진해 오는 수많은 외부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온, 그야말로 무패의 용사들.
하지만 줄곧 여유 있던 그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지고 있었다.
‘지배자란 말이지.’
‘이건 좀 선을 넘긴 했네.’
티는 내지 않고 있었으나 영민한 펠리드가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어쩌면 소튼 왕국은, 아니 대륙의 운명은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폐하.”
그러한 펠리드의 기색을 읽은 것일까.
킬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든 폐하와 가엾은 백성들을 지킬 것입니다.”
“내가 무어라고 그대의 말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대들의 노고가 크기에 우려가 되는 것뿐입니다.”
위로하는 킬리아의 말에 펠리드는 애써 웃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에.
“그럼 전장으로 나가 보겠습니다.”
“그대들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펠리드의 말에 이들은 생각했다.
‘신이 우리를 도울까?’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우려는 고스란히 현실로 드러났다.
*
“하하…….”
“하하하…….”
“어이가 없네.”
지배자들이 떨어질 장소에 도착한 일행은 드러난 광경에 헛웃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오라, 필멸자들이여.」
「이제 너희의 최후가 다가왔으니.」
조금 전 펠리드는 일행에게 신의 축복을 언급했었다.
하지만 신이라는 것들은 그들을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너희는 이 별과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사나운 기색을 여실히 드러낸 갈린이 물었다.
일행의 앞, 그곳에는 수많은 신격과 고대의 신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호의가 아닌 적의, 그리고 살의를 품은 채 말이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너희가 하는 일은 그저 발악에 불과하니.」
갈린의 말에 의지를 보낸 것은 모든 신격의 수장인 ‘창조’였다.
시초자에 의해 처음으로 탄생한 신격이자 모든 신격, 그리고 고대 신의 위에 있는 첫 번째 존재.
「현실을 받아들여라. 이제 이 별은 우주의 존재들에 의해 파괴된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으니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수밖에.」
창조를 비롯한 모든 신격, 그리고 고대의 신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굴종의 의미였다.
“현실이라. 너희가 말하는 현실은 모든 것을 저버리고 저 외부의 녀석들에게 굴복하겠다는 건가 보지?”
타일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500년 동안 마계를 방랑하여 격에 도달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얻으면서 깨달음 또한 얻었다.
세계의 질서, 그리고 그 규칙.
그렇기에 이들이 시초자의 의지를 배반한 채 외부자에게 붙어먹으려는 것을 알아챈 것.
「우리라고 해서 터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알아야 한다. 생존해야만 미래가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위하여 미래를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지랄!”
하지만 타일로는 그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미래가 아니라 그저 편안한 길을 선택한 거겠지. 이 머저리들아, 모든 것을 탐하는 저 외부의 존재들이 너희를 살려 둘 것 같아? 어차피 지금 막지 못하면 별은 물론 모든 게 끝이라고.”
현실을 직시한다면서 정작 눈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외부자는 모든 것을 탐식하는 존재.
공존할 수 없는 존재에게 굴복하는 게 어떻게 미래를 위한 길이란 말인가.
당장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결국 절망을 안게 될 뿐이다.
「그것은 두고 보면 알겠지. 지금 우리의 사명은 주제도 모른 채 반항하는 너희를 없애는 것이다.」
“하! 그렇겠지. 외부자들에게 붙어먹으려면 공물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그것이 지들의 목숨 줄인 줄도 모르고 말이지.”
타일로과 갈린은 눈앞에 있는 신격들을 비난했다.
「너희는 우릴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라!」
창조의 말과 함께.
콰아아아아-
그들의 의지가 장내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과 사를 결정 짓는 강렬한 의지의 발현.
물론 일행에게 향한 것은 오직 죽음을 담은 신격들의 의지였다.
그러나.
「너희만 격이 있냐? 나도 있다!」
타일로는 죽음을 실은 그 의지를 가뿐하게 무시했다.
「흐음?」
그제야 장내에 있는 신격들은 느낄 수 있었다.
타일로, 아니 그뿐만 아니라 갈린, 그리고 킬리아까지 모드 격을 이루었음을 말이다.
「네 녀석들은…….」
깜짝 놀란 창조와 신격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들 세 명은 공석이었던 최상위의 격을 얻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승리의 타일로.
질서의 갈린.
그리고 탄생의 킬리아.
창조와도 비견되는, 지금껏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최상위 격을 일으킨 그들은 죽음의 의지를 가뿐하게 흘렸다.
「외부자의 개가 된 너희들을 더는 봐줄 이유가 없겠지.」
「그러니, 여기서 죽어라!」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것은 타일로였다.
의지가 움직인 순간 어느새 그의 존재는 신격의 한가운데 도달했고.
스스스슥-
의지의 검이 춤을 추며 주변의 신격을 베기 시작했다.
「크윽!」
「으윽!」
필멸자의 그 어떤 공격에도 피해를 받지 않는 신격.
하지만 승리의 격을 이룬 타일로는 신격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그의 손은 거침이 없었고, 또한 정확했다.
「너희들이야말로 별에 기생하는 해충. 살아갈 가치가 없는 너희야말로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갈린과 킬리아.
격을 이룬 두 존재 또한 전장에 난입하여 신격과 고대의 신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쾅, 콰콰콰쾅!
강렬한 권능에 의하여 폭음이 발생했고.
「이놈들!」
「죽어!」
의지의 힘이 난무했다.
어떻게 보면 서로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쟁으로 보이나 사실 그것은 비극이었다.
외부자라는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초자에 의지를 배반한 이들이, 같이 뭉쳐야 할 그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 이놈들…….」
놀랍게도 승부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신격들이 아니라 타일로 일행에게 기울고 있었다.
「왜? 너희가 당연히 이길 줄 알았나 보지?」
「어림도 없는 소리.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 왔는데.」
「고작해야 타고난 힘을 가지진 당신들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어요.」
500년이다.
불멸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짧은 시간일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그 시간 동안 일행은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어떻게든 아서의 뒤를 쫓기 위해서.
더는 그 뒤만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1분 1초를 소중하게 여겼고, 그렇게 500년이 지났을 때 그들은 아서가 보는 광경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자, 이제 나와!」
게다가 그들이 준비한 선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쩌저적-
공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신격들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고.
「마신왕 폐하의 명령을 받고, 72 마신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새로이 72마신의 권좌를 얻은 이들.
일행과 함께 수련을 거듭하여 마침내 마족의 운명을 벗어나 진정한 격을 얻어 낸 수하들이었다.
게다가 나타난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별의 운명을 좀먹는 벌레들을 처리해라!」
또 다른 공간의 균열.
그곳을 빠져나오고 있는 건 환계의 마수, 아니 이제는 신수(神獸)라 불러야 될 이들이었다.
과거 아서의 침입에 털릴 대로 털린 그들은 지난 날의 나약함을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수련을 거듭하였다.
그렇게 환계를 지배하던 일곱 지배자들은 마수의 영역을 벗어나 마침내 신수에 들어섰던 것.
「만수의 주인에 반하는 모든 존재를 멸하라!」
그리고 그들을 데려온 것은 그라시아스였다.
아서의 부재와 별의 운명이 위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환계로 돌아가 사정을 알렸고, 마침내 출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지원 병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의 죄를 사할 기회다. 정의가 여전히 존재함을 모두에게 보여 주어라!」
화악!
엄청난 빛이 잠시나마 칠흑의 공간을 내리쬔다.
살랑-
내려오는 건 하얀 기운에 물든 깃털.
그리고 빛의 날개를 한 천사들이 하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서에 의해 정화된 이 천상의 존재들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 위하여 정의의 칼을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실현할 기회에 망설이지 않고 나선 것이었다.
마계, 환계, 그리고 천계.
가만히 지켜보는 다른 차원과는 달리 이들은 외부자의 침입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아서, 그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 빌어먹을 녀석들이!」
갑작스레 등장한 병력에 당황한 창조.
「네 녀석은 더는 우리를 대표하는 격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더는 그를, 그리고 신격들을 별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은 수많은 병력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은 필사적이었기에 장엄했다.
파스스-
쓰러지는 건 창조와 함께 운명을 배반했던 신격들이었다.
압도적인 공세 앞에 별의 운명을 배반한 그들은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이, 이럴 수가…….」
마지막 남은 건 창조.
시초자가 처음으로 탄생시킨 이 태초의 존재는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당황한 감정을 내보였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그는 사방을 둘러싼 적에 의해 소멸의 순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쾅!
백색 유성이 마침내 대륙에 떨어졌다.
쾅쾅쾅쾅!
하나가 아니다.
수십 개의 유성이, 지배자의 진체가 담긴 유성이 마침내 대륙에 떨어졌고.
고오오오오-
절대의 존재를 발휘하는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하! 너희는 이제 끝이다. 외부의 존재들이, 지배자가 너희를 벌하러 징벌하러 올…….」
하지만 창조의 의지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퍽!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창조의 진체가 산산히 부서졌다.
「도움도 되지 않는 하찮은 벌레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손을 까닥하는 것으로 최상위 신격인 창조를 소멸시킨 실루엣과 같은 그림자 무리. 마침내 대륙에 떨어진 지배자들이 서서히 그 존재감을 키워 가고 있었다.
“…….”
“…….”
그 거대한 존재감에 장내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빌어먹을!’
‘이것이 지배자?’
‘상상 이상…….’
물론 그것은 타일로 일행도 마찬가지.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의해 그들의 존재는 먼지와도 같이 작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