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Chapter 146
“그러니까 당신…….”
“무엄하오! 일국의 왕에게 예를 표하시오!”
말을 이어 가려던 도중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세월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듯 잔주름이 가득한 노인.
어딜 봐도 높으신 분으로 보이는 그는 쿠린의 옆에 서서 노한 음성을 터뜨렸다.
“디미튼 공작.”
“네, 폐하.”
“물러나시오.”
“네? 하지만 저 무도한 자가…….”
“분명 내가 말했소. 물러나라고.”
그 순간 쿠린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무형의 압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짐이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것은 장내의 모두에게 하는 경고였다.
이 양반, 참 살벌하기도 하지.
그래도 자기를 걱정해서 나선 사람인데 저리 강경하게 대응하다니.
사람 무안하게 말이야.
“…….”
평소 쿠린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강경한 그 대응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사람들은 슬쩍 발을 뒤로 빼며 나서지 않겠다고 의사까지 표명할 지경이었다.
“이제 됐군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진즉에 통제를 해야 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쿠린.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위압감은 찾아볼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해서 어떻습니까? 제가 데몰린을 대신하여 지인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혹 저로는 부족한 것인지……?”
“그럴 리가요. 청명의 기사 따위가 감히 쿠린 왕과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요.”
“뭐, 일단은 그런 셈이죠.”
“그럼 가시죠. 준비는 필요 없으니 곧장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죠.”
대단하신 양반이 선뜻 나서 주겠다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다.
“경들은 들으시오.”
마나를 실은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진다.
“짐은 중요한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니 나머지 일은 경들이 알아서 하시오. 하하하하하!”
하하하.
건국왕이라고 해서 엄청 무게 잡는 이를 상상했더니, 이거 나만큼이나 막가는 양반일세?
“자, 그럼 가시죠.”
어서 안내하라는 듯 손을 휘젓는 쿠린 왕.
“그럼 갑니다.”
물론 힘들게 이동할 필요는 없다.
이미 아이니가 사는 마을의 좌표는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기에 내가 할 일은 마력을 발현하여 그곳으로 순간 이동하는 것뿐.
슈슈슉!
내 마력이 나를, 그리고 쿠린 왕을 감쌌고, 우리는 곧장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라진 장내.
“…….”
“…….”
한동안 정적만이 감싼 그곳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청명의 기사 데몰린은 자조 섞인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정말 대단하십니다!”
순간 이동 마법을 통해 마을 어귀에 도착한 순간 쿠린 왕이 감탄사를 토해 냈다.
“순수한 무의 업도 대단한데 거기에 마법까지 배웠다니. 그야말로 전설에나 나올 법한 마검사의 모습이 아닙니까!”
쿠린 왕이 놀란 건 내가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간단한 마법이 아니라 공간을 넘나드는 고위의 마법을 사용해 상당히 놀란 것 같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자꾸 칭찬해 대니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나라도 조금은 쑥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심을 사기 위한 아부나 거짓이 아닌, 순수한 감탄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 마을이 있었군요.”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왕국 전체를 알 수 없는 법이죠.”
“흐음…….”
하지만 쿠린 왕은 못내 그것을 신경 쓰는 듯했다.
‘될성부른 떡잎이란 말이지.’
보면 볼수록 이 양반은 호감이 간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곧장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다.
‘펠리드와 닮았단 말이지.’
가장 사랑하는 동생 펠리드.
쿠린 왕은 녀석과 많이 닮았다.
물론 외형이나 성격이 닮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외형 성격은 전혀 딴판이다.
한 명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룬 건국왕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내가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가는 이였으니까.
그럼에도 두 사람이 닮았다고 느껴지는 건.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겠지.’
뱀의 혓바닥과 같은 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보를 걸어간다.
두 사람은 성군의 자질을 갖춘 현명한 왕이었다.
“흐음…….”
주변 지리를, 마을을 눈에 새겨 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주변을 계속 살피는 쿠린 왕.
아마도 그는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백성이 사는 곳을 눈에 새기고 있을 것이다.
“자,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아저씨!”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아이니가 한 걸음에 달려온다.
“…….”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쿠린 왕을 보고서는.
“호, 혹시 이분이 청명의 기사……?”
잔뜩 기대감을 안은 채 물었지만.
“미안하다, 아이니.”
하지만 나는 녀석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 말에 청명의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아이니는 실망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하. 이 녀석, 사람 민망하게 얼굴에 대놓고 실망감을 써 놓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실망할 필요 없어. 아저씨가 청명의 기사 따위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모셔 왔거든.”
“대단한 사람이요?”
아이니를 의문이 가득 찬 눈으로 쿠린 왕을 응시했다.
혹여 소란이 일까 왕관과 화려한 망토를 벗어 던지고 왔기에 드러나 있는 건 번쩍이는 은색 갑옷뿐이었다.
은빛 광택의 갑옷과 등에 메고 있는 건 거대한 대검.
아이의 시선으로는 용병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쿠린 왕에게서 무얼 그리 대단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에이…….”
다시금 실망감이 아이니의 얼굴에 떠오른다.
“으하하하하하!”
그리고 쿠린 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야, 데몰… 아니 청명의 기사가 아니고 내가 와서 실망한 것이냐?”
“네… 앗!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하하하, 자신의 감정을 속일 필요는 없다. 요즘 청명의 기사 녀석이 꽤 이름을 알리고 있다고 하더니,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청명의 기사 녀석… 이요?”
새삼 놀랍다는 듯 쿠린 왕을 응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청명의 기사님도 아니고 녀석이라니.
그러한 호칭을 쓸 수 있는 자가 이곳에서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 녀석이지. 이래 보여도 내가, 아니 이 아저씨가 청명의 기사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니 말이야.”
“대단한 사람이요? 아저씨는 누군데요?”
당돌한 표정은 지은 아이니가 쿠린 왕을 도발(?)했다.
자신이 우상으로 삼은 청명의 기사를 모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 아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나중에 녀석이 쿠린 왕의 정체를 듣게 되면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저씨?”
“네, 아저씨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청명의 기사님을 녀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예요?”
“하하하하, 아저씨는 말이다. 음…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군. 만백성의 어버이라고나 할까?”
“어버이요?”
“그래. 어버이.”
“우리 아빠는 아저씨가 아닌데요?”
“물론 그렇겠지. 내가 말하는 건 피로 이어진 혈육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의무로 묶인 사이를 말하는 것이란다.”
“어휴.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하고 있는 겁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와 쿠린 왕을 번갈아 보는 아이니.
“왕이야.”
그리고 나는 간단히 말했다.
“네?”
“왕이라고.”
“왕? 왕이요? 왕이라면…….”
“그래, 그란델 왕국의 쿠린 왕. 너희 왕국의 가장 큰 어버이 되시는 몸이지.”
“네에?!”
놀라서 몸이 굳은 아이니.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쿠린 왕을 바라봤다.
“하하, 그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길 필요야…….”
“어, 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아이니.
“엄마!”
아예 등을 돌린 녀석은 마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외지에 방문한 왕의 행차를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
“아이고, 아이고.”
“이걸 어떻게…….”
“왕께서 대체 무슨 일로…….”
마을의 중앙에 모인 사람들.
그들은 갑작스레 모습을 나타낸 쿠린 왕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쿠린 왕이다.
일국의 왕, 그것도 그들이 속해 있는 그란델 왕국의 왕이 행차하였으니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것.
“다들 그리 긴장할 필요 없다. 비록 내가 왕이라곤 하나 지금은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 말이다.”
그리 말한 쿠린 왕은 셀렌 부인의 품에 쏙 안겨 있는 아이니를 응시했다.
“듣기로는 최근에 산적단이 출몰하여 마을에 해를 끼치고 있다지?”
“그, 그렇습니다, 폐하!”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급히 답했다.
“내 비록 그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여 마을을 방치하긴 하였으나 왕으로서,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어찌 그 일을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마땅히 짐이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함이 옳다.”
“허, 허나 폐하께서 직접 나서는 건…….”
촌장이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본래 위에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고 병력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왕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혹여 일이 잘못되어 왕에게 위해가 가는 날이면 그들의 목이 떨어질 게 빤했으니 말이다.
“으하하하하하!”
그 걱정에 쿠린 왕이 웃었다.
하긴, 기가 막히겠지.
대륙에서도 상대가 몇 없을 것 같은 강자를 걱정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산적단 따위를 토벌하는 일에 말이다.
“걱정하지 마라. 짐이 이래 보여도 나름 실력에는 자신이 있으니.”
“하지만…….”
“자, 그럼 산적단 토벌을 시작해 볼까?”
촌장의 말을 듣지도 않은 쿠린 왕이 잠깐 눈을 감았다.
“으음?”
“갑자기 무슨……?”
갑작스레 눈을 감는 그 행동에 모두가 의문에 빠진다.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십시오. 곧 있으면 마을의 문제가 해결될 테니.”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환히 보인다.
기를 넓게 펼쳐 주변을 샅샅이 탐색하고 있는 쿠린 왕의 행위가 말이다.
“여기로군!”
마침내 눈을 뜬 쿠린 왕은 이미 산적 색출을 끝냈다.
스윽-
그리고 그는 등에 메고 있던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갈라져라.」
놀랍게도 의지의 힘이 부여되자.
차차차차차차-
대검이 갈라졌다.
놀랍게도 그의 대검은 수십 개의 검이 뭉쳐져 만들어진 형태였던 것.
「내 앞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것들에게 죽음을!」
수십, 아니 수백 개로 흩어진 검에 살의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파파파파팟!
그의 의지가 깃든 검이 허공을 선회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곳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신비한 일련의 광경이 지나간 후.
“끄아아악!”
“아아악!”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쉬이익-
비명과 함께 돌아온 것은 핏자국이 묻은 수백 자루의 검.
“자, 짐이 저 어리석은 산적단을 토벌하였다. 이제 마을의 문제가 사라졌으니 축제를 벌여야 하지 않겠느냐. 으하하하하하!”
쿠린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산적단을 토발했다굽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련의 광경에 의문에 빠진 마을 사람들은 그저 의심에 찬 눈초리로 쿠린 왕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