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Chapter 143
“아이니!”
아이니의 말을 들은 셀렌 부인이 경악하며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네?”
“아저씨에게 그런 무리한 부탁이라니.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하지만…….”
“말했지 않니. 청명의 기사님은 아무나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음. 아무나 볼 수 없는 사람이라.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다.
그 청명의 기사라는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녀석 수천 명도 더 불러올 수 있는데 말이야.
“어… 저기…….”
“어서 사과드리렴.”
하지만 셀렌 부인은 내 말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저기 아저씨…….”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는 아이니.
“죄송…….”
“아니다. 그런데 그 소원 말이야.”
“아니에요. 아저씨, 괜찮아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아니. 그게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부탁이긴 한데.”
“네?”
“그게 무슨……?”
아이니와 셀렌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본다.
“그 청명의 기사라는 양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데려올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아마 그란델 왕국에서 이름 좀 나가는 녀석인 것 같은데, 아무리 내가 타국 사람이라고 해도 기사 정도 되는 녀석 데려오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이 소원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런데 굳이 그 청명의 기사를 데려올 필요가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는 아이니.
“그 청명의 기사를 데려오는 이유가 산적단을 토벌하는 거라며?”
“네.”
“그럼 굳이 청명의 기사를 데려올 필요가 없어.”
“왜요?”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아저씨가요?”
“그래.”
아이니, 그리고 셀렌 부인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거 참. 산적단이 문제가 아니라 이 왕국조차도 손짓 하나면 끝낼 수 있는데.
이거 내가 참 강한데,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네.
“아저씨, 사냥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 어… 음… 그렇지. 사냥꾼이지.”
“사냥꾼이면 아빠와 같이 사냥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죠?”
“…그렇지.”
“그런데 사냥꾼이 어떻게 산적단을 잡아요?”
이 녀석.
조나단을 닮지 않았는지 엄청 명석하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접근하니 할 말이 없다.
“아이니! 무슨 무례를. 엄마가 분명히 말했지. 사람들은 때론 거절을 할 때 돌려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아! 그럼 지금이……?”
“그래. 청명의 기사님은 아무나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기껏 사냥꾼… 아, 죄송해요.”
“…아닙니다.”
“어쨌든 사냥꾼 신분으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야. 그러니 고집은 그만 부리고. 괜히 아저씨 곤란해하시잖니.”
“하지만 어떤 소원이든 빌라고 해서…….”
“아이니,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이 많단다. 그러니 더 아저씨를 곤란하게 하지 마렴.”
“네에…….”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는 녀석.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는 그들을 설득시킬 순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그러니까 그 청명의 기사니 뭐니를 데려오면 다 해결되는 거지?”
“아니에요. 아이가 철이 없어서 한 소리니…….”
“괜찮습니다. 그럴 만한 능력은 되니 청명의 기사를 데려오도록 하죠. 그리고…….”
나는 아이니를 똑바로 응시했다.
“잠시 아이니와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별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강렬한 신념이 담긴 눈으로 셀렌 부인을 응시했고.
“그러세요. 다만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근방을 잠깐 돌 테니 말입니다.”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 아이니와의 동행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아이니.”
“네.”
“아저씨랑 잠시 걸을까?”
“좋아요.”
고사리와 같은 아이니의 손을 잡은 채 마을을 걸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 청명의 기사라는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니?”
“…….”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니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청명의 기사님을 모른다고요?”
“유명한 사람이니?”
“그란델 왕국이 낳은 최고의 기사.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라 불리는 데몰린 님을 모른다고요?”
“…그래. 내가 좀 한적한 산에서만 지내서 말이야.”
“뭐, 그렇다면 그럴 수 있죠. 청명의 기사님은 말이죠. 아주 대단하신 분이에요. 귀족이 아닌 평민의 신분인데도 오직 실력만으로 기사 서약을 통해 기사의 직위에 오르셨죠.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녀석은 마치 자신의 업적이라도 되는 듯 쫑알쫑알 청명의 기사에 대한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 업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평민임에도 실력으로 기사 서약을 맺었다.
기사 수행 도중 일어난 여러 난해한 사건을 해결하며 청명(淸名)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항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다.
사악한 마룡 기르탄에게 잡힌 공주를 구하며 모든 국민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었다.
‘조금 과장된 소문이 있는 것 같지만, 확실히 평범한 녀석은 아닌 것 같네.’
아무리 소문이 과장되는 면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 업적을 줄줄이 나열할 정도면 확실히 보통 인물은 아니다.
“어쨌든 너는 그 청명의 기사가 보고 싶은 거지? 산적단을 토벌해야 한다는 핑계로 말이야.”
“앗! 어떻게 알았어요?”
볼이 붉게 물드는 아이니.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녀석은 산적단 토벌을 핑계로 청명의 기사라는 유명 인사가 보고 싶은 것이었다.
“빤하지. 그럼 그 청명의 기사를 보는 게 네 소원이라는 거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청명의 기사님이 오시면 그레쉬 산적단도 토벌할 수 있고…….”
“그래. 그렇겠지. 어쨌든 잘 알았다.”
녀석의 내심을 파악했으니 목적을 모두 이루었다.
“혹 나 때문에 곤란하신 건가요? 그러면 소원은 들어주지 않아도…….”
“아니, 조나단 형님이 내게 신신당부한 게 있어서 말이야.”
무리한 부탁도 아니지만, 설혹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무리한 부탁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실행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조나단 형님의 마지막 부탁이었으니까.
대륙을 안겨 달라고 했어도 그 소원을 이뤄 줬을 것이다.
그에 반해 청명의 기사라는 녀석을 보고 싶다는 소원은 소원 축에도 낄 수 없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줄래? 아저씨가 얼른 청명의 기사를 데려올 테니까.”
“네? 하지만 여기서 왕성까지는 거리가…….”
“아아, 걱정할 필요 없어. 아저씨가 걸음걸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거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하지만…….”
스윽-
곤란해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 조나단 형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고, 그 형님이 부탁한 일은 그게 무엇이든 완수해야만 하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네 소원을 들어주는 것. 바로 청명의 기사를 데려오는 거지.”
그리 말한 후 아이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마 이 일에 대해서 셀렌 부인에게 말할 테지만, 상관 없다.
어차피 이 일은 금방 끝날 테니까 말이다.
‘어디 보자. 그란델 왕성이…….’
기감을 넓혀 그란델 왕성을 탐색했다.
지이잉-
찾는 건 무척 간단한 일이다.
인근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그리고 가장 강력한 기가 뭉친 곳을 찾으면 되니까.
‘여기!’
탐색이 끝났으니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슈슈슉!
곧바로 공간을 넘었다.
주변의 광경이 순식간에 뒤바뀌며 마침내 도착한 곳은.
“누, 누구냐!”
높게 솟은 웅장한 성이 보이는 곳.
왕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그리고 그 앞을 막은 건 왕성의 경비대였다.
창을 꼬나쥔 녀석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여기가 그란델 왕성 맞지?”
나는 경계하는 녀석들에게 물었고.
“그, 그렇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경거망동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아아, 움직일 생각 없으니까 진정해. 내가 이래 보여도 굉장히 예의가 바른 사람이거든.”
물론 내 말에 동의할 녀석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말을 좀 전해 줘.”
“무, 무슨…”
“소튼 왕국의 아서가 왕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이야.”
“소튼 왕국?”
“아서……?”
“그래. 그렇게 말하면 대충 알아들을 테니까.”
아무리 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지만,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이 왕국, 아니 대륙에 퍼져 있을 터.
그 이름만 대도 굳이 소란을 피울 필요 없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
눈치를 보는 경비 둘.
하지만 그란델 왕국도 아니고 타 왕국 출신이 왔다는데, 어찌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국간의 일에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녀석들이기에 말투도 존대로 바뀌었다.
다다닷-
경비 하나를 남겨 둔 녀석이 곧장 성 안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얌전히 있자. 지금은 깽판 치려는 목적이 아니니까.’
그리고 사라지는 녀석을 보며 나는 최대한 나를 다스리기로 다짐했다.
물론 그건 앞으로 나올 녀석들의 태도에 달려 있겠지만 말이다.
*
“대, 대장님!”
일단의 소란과 함께 들어오는 경비병.
“무슨 소란이냐! 내 누누이 정숙을 지키라 했거늘.”
소란에 눈살을 찌푸린 경비 대장 자일은 들어오는 경비병을 나무랐다.
“크, 큰일입니다.”
하지만 나무라기 전에 경비병이 먼저 선수를 쳤다.
“큰일?”
성의 경비를 보는 이들에게 큰일이라고 한다면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무슨 일이냐. 차분히 말해 보아라.”
“그, 그것이 소튼 왕국의 아서라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소튼 왕국? 아서?”
자일은 곧장 고민에 빠졌다.
‘소튼 왕국이라 하면 남쪽의 소국. 그런데 그곳에서 무슨 일로?’
그란델 왕국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소국.
그런데 그 왕국의 인사가 무슨 일로 성을 방문했다는 말인가.
“네. 그 아서라는 자가 폐하를 뵙기를 청하기에…….”
“무엇이!”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건 분노의 고함이었다.
“네 녀석 무슨 생각이냐! 아무리 타 국가에서 왔다고 해도 함부로 폐하를 뵙길 청하는 그 말을 그냥 듣고 넘겼단 말이냐?”
“아니, 그것이…….”
“어리석은 녀석, 아무리 국가 간의 일이 그리 막무가내로 정해지는 것인 줄 아느냐.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다. 만약 그가 소튼 왕국의 중요 인사였다면 당연히 미리 약속을 잡았겠지.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칠 일이 있겠느냐.”
“아!”
그제야 경비병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확실히 국가 간의 일은 사전에 협의가 되어야만 한다.
이렇듯 갑자기 국가 간의 일이 정해지지는 않을 터.
“설혹 그자가 소튼 왕국의 중요 인사라고 해도 그렇다.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은 일이 분명한데 국왕 폐하를 감히 뵙기를 청한단 말이냐!”
왕이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이 요청될 턱이 있나.
아니, 요청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내 지금 당장 그자를 만나 봐야겠구나.”
자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방지게 국왕 폐하를 만나길 청한 그 자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리라.
그리 생각한 그는 걸음을 빨리하며 곧장 성의 복도를 걸어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무슨 소란이냐?”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자라스 후작님을 뵙습니다.”
성의 복도.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중년인이 자라스 크라일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란델 왕국의 병권을 쥐고 있는 최대 귀족 중 하나.
그 앞에서는 감히 누구도 건방을 떨 수 없었다.
“예의는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소란스럽단 말이냐.”
“성문 밖에 소튼 왕국의 사자라는 자가 찾아와서는 행패를 부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소튼 왕국?”
“네, 소튼 왕국의 아서라는 자가 국왕 폐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다며…….”
“감히!”
자라스 후작이 노기를 뿜어냈다.
감히 그 누가 있어서 약속도 없이 국왕 폐하를 뵐 수 있단 말인가.
“해서 그자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
하지만 조금 전까지 노기를 터뜨리던 자라스 후작의 상태가 이상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눈가를 깜빡이는 그.
“소튼 왕국. 아서. 소튼의 아서… 허업!”
마침내 기억 속에서 원하는 이름을 떠올린 자라스 후작.
“소튼 왕국의 아서! 패, 패왕이 왕국에?”
패왕 아서.
최근 대륙을 휩쓸고 있는 그 이름을 떠올린 자라스 후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