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Chapter 138
녀석은 매우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비단과 같은 재질이었는데, 상체를 덮은 건 검은색 외투, 그리고 같은 재질과 색의 바지였다.
어떻게 보면 잠옷과도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뭔가 다르다.
외투 안에는 뻣뻣해 보이는 재질의 하얀 속옷과 결정적으로 목 부근을 장식한, 길쭉하게 내려오는 스카프가 장식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별에 직접 진체를 드러낸 게 얼마 만인지.」
하지만 무엇보다 특색이 있는 건 녀석의 몸이었다.
마치 검은 안개가 뭉쳐져 있는 것처럼 실질적인 육체가 없었다.
「…네 녀석이 계약의 대상이로군.」
얼굴을 형성하고 있는 검은 안개가 나를 응시했다.
“계약의 대상?”
「그러니 계약을 이행하도록 하겠다.」
츠츠츠츠-
녀석의 의지는 내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가시를 생성했다.
「그만 소멸해라.」
중얼거림과 함께.
파파파팟!
내 주변을 장식하고 있던 검은 가시가 날아왔다.
“소멸은 개뿔.”
물론 녀석의 바람대로 내가 죽을 일은 없다.
「멈춰.」
뚝!
내 육신을 당장에라도 꿰뚫을 것처럼 다가오던 검은 가시는 허공에서 멈췄다.
내 의지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음?」
특정한 사물의 시간마저 빼앗아 갈 수 있는 능력.
그 권능을 목격한 지배자 녀석이 의외라는 듯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고작해야 하찮은 피조물 따위의 의지가 이리 강력하다니?」
늘 봐 왔던 반응이다.
하찮은 피조물이 어쩌고저쩌고.
“하여간 좀 한다 하는 녀석들의 반응은 늘 이런 식이라니까. 그리고 말이야, 진짜 놀랄 만한 건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이렇게 쉽게 놀라면 곤란하다.
진짜 놀랄 만한 건 이제부터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돌아가.」
검은 가시에 멈췄던 시간을 풀었다.
단지 풀기만 한 게 아니라 가시에 실려 있던 지배자의 의지를 없앤 후 반대로 녀석에게 돌아가도록 의지를 부여한 것.
쉬쉬쉭!
뾰족한 침 방향을 지배자 쪽으로 돌린 검은 가시가 본래 권능을 발현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푹, 푸푸푹!
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돌아간 검은 가시는 그대로 지배자의 육신을 관통했다.
「재밌군. 내 의지마저 해소할 수 있을 줄이야.」
가시에 의해 육체 곳곳에 구멍이 뚫렸으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곧이어 가벼운 기운이 일어났고.
스르륵-
구멍이 뚫려 있던 괴상한 옷과 검은 안개가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군.’
흐트러지지 않은 기운.
그것이 나타내는 건 검은 가시가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름 강력한 기운이 깃들어 당연히 조금은 타격을 줄 줄 알았건만 조금 의외의 상황이긴 했다.
「오! 모르고 있었나? 나와 같은 지배자들의 진체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힘이 필요하지.」
그리고 내 심중을 파악한 녀석이 여유롭게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힘을 지닐 수 있는 존재는 나와 같은 지배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스스스스-
가벼운 손짓과 함께 주변을 떠다니고 있는 검은 가시를 없앴다.
「내가 왜 이러한 사실을 너에게 알려 주는지 알겠느냐?」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네가 설명하는 건 무척 좋아하는 녀석이라서?”
「조롱인가? 하지만 그 제멋대로인 태도도 마음에 들어.」
“굳이 네 녀석의 마음에 들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어엉?”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이 변태 새끼가 갑자기 왜 사랑 고백을 하고 지랄이지?
「하하하, 너희가 말하는 사랑이나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냥 너라는 존재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왜?”
「하찮은 피조물이 가질 수 없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 내가 강해서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
「뭐, 간단히 말하면 그렇겠지.」
“그래서, 마음에 들어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본래 성격 같았으면 당장 달려들어 녀석을 두드려 팼을 테지만 얻고 싶은 정보가 있었기에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니 어쩌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지배자라는 존재인 만큼 정보를 얻어 두면 여러모로 좋을 테니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다. 네가 피조물답지 않게 강하기 때문에 제안을 건네는 것이다. 아니었다면 당장 소멸시켜 버렸겠지. 내게 영겁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해도 하등한 피조물과 대화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역시 건방진 우주의 존재답게 말하는 것 자체가 싸가지가 없다.
하지만 내색할 수 있나.
내심을 감춘 채 녀석의 말에 경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별을 오고 가며 적합한 인재를 찾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네가 내 앞에 나타났으니,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말하는 운명이 아니겠느냐.」
“저기, 그런데 아까 계약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내가 계약의 대상이라며.”
「물론 그렇지. 나는 두 개 영혼을 받는 조건으로 너를 제거해야만 하는 계약을 수락했다.」
“그 계약이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네가 맺는 계약이면 그 페널티가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 내가 만약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시, 그러니까 네 녀석을 죽이지 않을 때 그에 수십 배에 해당하는 영혼을 그에게 줘야만 한다.」
“오! 그럼 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영입하겠다고?”
「물론이다. 너와 같은 대리자가 있다면 그깟 영혼 수십 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리자?
그건 또 처음 듣는 용어였다.
“대리자라는 게…….”
「대리자는 지배자의 권리를 대신하는 존재다. 수많은 지배자가 이 대리자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지. 물론 내게도 대리자가 있었으나 내 후광만 믿고 까부는 덕분에 얼마 전에 녀석을 처리했지. 해서 공석이 된 그 자리를 네가 대신해 줬으면 한다.」
아마도 그 대리자라는 게 녀석들의 손발이 되어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는 녀석들인 것 같다.
“그럼 내가 얻는 이득은 뭐지?”
물론 그 대리자라는 자리에 일말의 관심도 없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관심 있는 척 연기를 펼쳤다.
「대리자가 된다면 우주를 지배하는 나의 권능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되니. 그리고 내 권능을 받아들여 너는 지금의 너보다 훨씬 강력한, 그리고 완벽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다.
그래도 명색이 대리자인데 이만한 혜택을 제공하는 건 당연하지.
「너는 온 우주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가시로 뒤덮인 자, 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쿠쿠쿠쿠쿵!
나를 유혹하기 위한 일부 진심을, 그 진실된 힘을 끌어냈다.
「너는 나의 대리자가 되어 온 우주를 누비며 그 막강한 힘을…….」
“응, 안 해.”
「그래, 당연히 그러… 지금 뭐라고 했지?」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던지 당황하는 녀석.
“네 부하 노릇 안 한다고.”
「지금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잘 모르겠는데?”
「나는 계약에도 불구하고 너를 나의 대리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이 네 녀석의 목숨을 거둬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아! 내 목숨 가지고 협박을 하시겠다?”
「협박이 아니다. 네 녀석에게는 선택할 권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선택권이 없기는 개뿔.
「이래서 피조물들의 천박한 생각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고작해야 나약한 의지를,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인 주제에.」
그제야 본성이 어느 정도는 나온다.
나를 끌어들이려 할 때는 뭐 대단한 존재인 것마냥 떠들어 댔지만 본성은 저렇게 안하무인인 것들.
“그 말에는 나도 공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자기가 무슨 대단한 존재인 것마냥 으스대는데, 어휴, 꼴 보기 싫어서 정말.”
「아무래도 네게는 대리자의 자격보다는 참된 심판이 필요할 것 같구나.」
열이 받았기 때문일까?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던 녀석의 진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검은 안개가 점차 유형화되기 시작해 이내 가시가 뾰족이 드러난 형상을 만들었다.
가로 뒤덮인 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녀석의 진체는 셀 수 없이 많은, 그야말로 무한한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나의 가시는 너에게 영원한 고통을 선사하리니.」
녀석이 자신의 진체에서 뽑아내 가시를 들자.
부우웅!
점차 커지기 시작한 그것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가시가 되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너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가시가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긴 가시의 공포.
그것은 웬만큼의 존재가 아닌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이 공포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하여간 허세는.”
물론 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다가오는 거대한 가시, 그것을 보면서도 나는 그 위엄에 짓눌리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
녀석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 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공포란 말이야…….”
의지가 움직인 순간 나는 인간이란 육신의 허물을 벗어났다.
지잉, 지이잉-
육체와 영혼 모두 신격에 도달한 그 순간 진동하는 듯한 이명에 고막을 때린다.
‘시끄러워.’
그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을 받아들이라는 운명의 속삭임이었다.
이래서 웬만하면 격을 이루기가 싫다.
마치 파리가 왱왱대는 것처럼 운명이 자꾸만 강요를 하니까.
‘조금만 참자. 태초를 취하게 되면 이 빌어먹을 운명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물론 최종 목적은 모든 태초의 보물을 차지하여 완전히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 있는 빌어먹을 훼방꾼, 지배자를 처리해야만 한다.
「파멸.」
아공간을 나온 파멸의 검을 손에 쥐었다.
의지의 검이 아니라 굳이 파멸을 손에 쥔 건 태초의 눈을 얻어 창안한 권능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무결의 검.’
인간의 육신일 때 펼쳤던 무결의 검.
스윽-
위로 든 검을 아래로 가볍게 떨군다.
일직선의 궤적을 그린 파멸이 지면에 바짝 가까이 닿는 순간.
쩌억!
나를 향해 다가오던 거대한 가시는 반으로 갈라지며 쪼개졌다.
격을 이룬 상태에서 펼친 무결의 검은 지배자의 권능을 간단히 소멸시킬 정도의 힘을 자랑했다.
「이, 이 무슨!」
전력을 펼친 지배자 가시로 뒤덮인 자는 경악했다.
「그 힘은 분명… 절대자의 씨앗?!」
당황하던 녀석이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일전에 만났던 지배자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네 녀석, 위선자로군.」
위선자.
지배자의 탄생을 막는 지배자 무리.
조금 전 노출된 감정에서 지배자에 대한 적개심을 읽었기에 녀석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그리 말한 녀석의 진체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상대하는 것보다 절대자의 씨앗이 나온 것을 알리려는 행동이었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그것을 허용할 이유가 없다.
스슥, 스스스슥-
파멸을 든 손을 어지러이 휘두르며 검격을 펼쳤다.
환영처럼 사방에 그려지는 궤적. 그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결의 검을 담은, 격의 힘을 담은 절대의 검이었다.
「으아아아!」
심상치 않은 공격이라는 것을 파악한 녀석이 가시를 뾰족하게 뿜어내며 발악했지만.
서걱서걱!
전력이 담긴 내 검식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마치 무가 썰리듯이 잘려 나간 가시.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앗!
「크윽!」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나의 검이 녀석의 진체를 깊숙이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