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Chapter 137
“네 녀석은……?”
“아서, 네놈 아서로구나!”
빨갱이와 파랑이가 나를 알아본 듯 소리쳤다.
“단번에 알아보는 것을 보니 내가 꽤 유명해졌나 보네.”
사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녀석들이 하는 행사마다 방해했던 게 나였으니까 말이다.
“위대하신 분의 행사를 방해하는 훼방꾼!”
“지금 여기서 죽어라!”
우우우웅!
내 손에 가로막힌 불과 얼음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응, 안 죽어.”
하지만 녀석들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흡!”
한 차례의 기합과 함께 격의 권능을 일으켰다.
파스스-
순수한 파멸의 권능이 흘러나와 내 손에 가로막혀 있던 불과 얼음의 기운을 소멸시켰다.
“이런!”
순수한 파멸의 권능에 놀란 녀석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뛰어나네.’
마치 허물을 벗듯 잔상을 남기는 그 동작은 특별한 기술을 발현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대가 아서로군.”
빨갱이와 파랑이가 물러났을 때야 마침내 말을 거는 소녀.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이를 속이는 게 유행인가?’
분명 외형은 10대 소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내재되어 있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눈은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그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맞아, 그런데 그렇게 묻는 당신은 아마도 은왕림의 림주겠지?”
“비록 원치 않는 자리이긴 하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곤 하더군.”
“뭐, 당신과는 할 이야기가 많으니 이 싸움이 끝난 뒤에 보자고.”
할 말은 많지만 지금 당장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흐아압!”
잠시 물러나 있던 빨갱이와 파랑이가 쇄도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과 같이 불과 얼음 속성의 무기를 꺼내 든 녀석들이 그것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나도 돕겠…….”
“방해되니까 잠시 물러나 있어.”
돕겠다고 나서는 녀석을 밀쳤다.
투웅-
가볍게 밀쳤으나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한 림주는 저 멀리 튕겨져 날아갔고, 그제야 나는 훼방꾼이 없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화르륵!
쩌저적!
대기를 불사르는,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대기를 얼려 버리는 상반된 기운이 육신을 노리고 날아든다.
어떻게 보면 각각의 공격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쿠웅!
상반된 두 개의 기운이 만나는 접합점, 내가 있는 곳에는 엄청난 힘의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모든 생명체를 파괴하기 위한 초월의 힘.
그것은 빨갱이와 파랑이가 발현한 기운의 합일로 나타난, 절정의 권능이었다.
「얼음과 불이 합일하니.」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의 권능이 발현될지어 다!」
다시금 울려 퍼지는 노래.
노래를 통하여 의지의 힘을 강화하고 있었다.
쿠쿠쿠쿠쿵!
확실히 의지의 노래는 권능을 강화했고, 점차 힘의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할망구가 비명을 터뜨렸다.
“누가 보면 위기에라도 처한 줄 알겠네.”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확실히 두 녀석의 합공은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게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의지의 노래라는 건 그런 식으로 발현하는 게 아니거든.”
게다가 계속 노래를 발현하며 의지를 강화하고 있었지만 녀석들의 노래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 검은 살겁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이들의 피로 제련되었으니.」
의지가 꿈틀거리자 곧장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게 무슨……?”
나의 의지가, 그 노래가 시작되면서 주변을 잠식하고 있던 빨갱이와 파랑이의 기운이 소멸했다.
힘을 더 큰 힘이 누르는 것과 같은 이치.
나의 거대한 의지 앞에서 녀석들의 나약한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희생을 통하여 완성된 검. 그 검의 탄생은 저주받은 탄생이며.」
휘오오오오!
주변의 마력이 휘몰아친다.
그 마력의 폭풍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건 붉은 입자.
츠츠, 츠츠츠츠-
겨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입자가 휘몰아치는 마력과 결합하여 특별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혈겁을 종식할 희생의 검이다.」
곧이어 완성된 하나의 검.
붉은 입자가 모여든 그것은 피의 검이었다.
“…….”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검 앞에 빨갱이와 파랑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덜덜덜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짓눌리는 공포에 몸을 떠는 것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완성된 의지의 검은 지금까지 걸어온 수라(修羅)의 길, 그 업의 노래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업으로 완성되었기에 피의 검, 아니 수라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 줄 수밖에 없다.
「수라의 검.」
수많은 이들의 피로 완성한 수라의 검을 손에 쥐었다.
찌릿!
심상 속에서만 완성하였던 검의 감촉이 찌릿하게 다가온다.
‘과연 수라의 검이로구나!’
내 의지를 통하여 완성된 것이지만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내게 살생을 요구한다.
물론 내가 만든 의지의 검에 현혹될 일은 없다.
“이제 알겠지. 무엇이 진정한 의지의 노래인지.”
완성된 수라의 검을 한 번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일련의 행동에 빨갱이와 파랑이는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 놓고 아직 생에 미련이 남았어?”
비록 외형은 젊으나 그들의 나이는 족히 수백 살은 넘었다.
어쩌면 나와 같이 1,000년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늙은이들.
그런데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아 놓고 아직도 생에 미련이 남아 있다니.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모두 말하겠습니다.”
“위대하신 분과 대적한다고 들었습니다. 기꺼이 그 정보를…….”
원래 가진 것이 많을수록 아쉬움이 남는 법.
아무래도 녀석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경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쉽사리 생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웬만하면 이렇게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겠지만 눈앞에 모든 것을 초월한 수라의 검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모든 것을 다 말하겠다, 라…….”
아무래도 이 녀석들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존재가 어떤 녀석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쯔쯔, 고통 없이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도 너희는 그른 것 같다.”
“그게 무슨……?”
하지만 빨갱이의 말이 끝나기 전.
“우웁!”
“으윽!”
나란히 비명을 터뜨리며 심하게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뼈가 멋대로 뒤틀린다.
“사, 살려…….”
“아, 미안. 맹약에 의한 부분은 나도 쉽게 건들 수가 없거든.”
녀석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없다.
파직, 파지직-
손을 가까이 가져가자 흰색 스파크가 맹렬하게 튀었다.
모든 외부의 힘을 차단하는 강력한 결계와도 같은 힘.
그것은 절대적인 맹약으로 생긴 법칙. 아무리 내가 모든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맹약으로 생긴 법칙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만한 힘을 가지게 된 것도 녀석의 힘이었던 것 같은데, 말조심을 했었어야지.”
그 강제성을 봤을 때 아마도 녀석들은 아슬론과 존재의 맹약을 맺었을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지금과 같은 강력한 힘을 받았겠지.
받을 당시에는 몰랐을 테지. 후에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을 말이다.
“끄윽, 끄으윽…….”
멋대로 뒤틀린 녀석들의 육신은 점차 압축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붉은, 그리고 푸른 구슬로 변했다.
휘오오오!
그와 함께 나타난 건 미지의 기운을 품은 블랙홀이었다.
스으, 스으으-
흡입력을 발휘한 블랙홀이 두 개의 구슬을 모두 집어삼켰다.
팟!
그것이 끝이었다.
두 개 구체를 흡수한 블랙홀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쯧.”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강력한 맹약의 힘이었기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마냥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녀의 모습을 한 림주가 놀란 토끼눈을 뜬 채로 다가왔다.
도무지 일련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눈빛이다.
그도 그럴 게 자신과 비슷한 힘을 지닌 두 명의 존재가 순식간에 소멸했는데, 어찌 놀라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아슬론이라고, 쓸데없이 철저한 녀석이 벌인 짓이지.”
물론 그 이상의 대답을 해 줄 의무는 없다.
“그보다…….”
곧장 림주를 응시했다.
“내가 이 신전에 볼일이 있는데, 들어가도 되지?”
굳이 막겠다면 실랑이를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본녀의 힘으로는 그대를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대가 들어가고 싶다면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 허나.”
잠시 말을 끊은 림주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 아무리 그대가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신전에 펼쳐진 결계를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응? 결계?”
“그렇다. 그것은 이곳의 탄생과 함께 신전을 지켜 온 강력한 것. 이 강력한 힘을 뚫고 신전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건 오직 태초의 선택을 받은 이뿐이니.”
“그래?”
림주의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신전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이다. 결계는 다가오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는 힘을…….”
하지만 림주는 그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지는데?”
내가 지극히 멀쩡한 모습으로 신전의 경계선 안으로 발을 들였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당황하는 림주.
하지만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태초의 선택을 받은 이가 나거든.”
“뭐, 뭐라?!”
“얼마 전에 태초의 눈이라는 것을 얻은 적이 있어서 말이야. 아마도 태초의 선택이라는 게 그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어?”
“…….”
내 말에 당황한 림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녕 그대가 선택된 존재라는 말인가?”
“보면 몰라? 네가 분명히 말했잖아. 이 결계는 선택된 존재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다고.”
신전에 들어온 것으로 나는 선택된 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림주는.
털썩.
“응?”
돌연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단지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부복하듯 상체를 지면에 바짝 기대며 말을 이어 갔다.
“미천한 존재가 위대하신 분, 태초의 후인을 뵙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림주.
“태초의 후인?”
“그렇습니다. 미천한 존재는 탄생과 함께 한 가지 계시를 받았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태초의 힘을 지닌 후인이 올 테니 혹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성심을 다하여 모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음, 그래. 그건 대충 알겠어. 그런데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잠깐만 나와 볼래?”
“네?”
“…….”
하지만 나는 림주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곳을 무섭게 노려봤다.
치지직-
조금 전 빨갱이와 파랑이가 흡수한 블랙홀이 나타났던 곳. 그곳에서 거대한 힘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콰앙!
장내를 떨어 울리는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존재의 맹약에 따라 동맹의 적을 제거하겠다.」
그것은 이 대륙의 생명체가 지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아니었다.
쿠콰콰콰콰!
엄청난 기세의 폭풍과 함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
「가시로 뒤덮인 자, 이곳에 강림하였노라!」
“지배자?”
익숙한 기운.
그것을 감지한 나는 녀석이 지배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