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Chapter 128
“아서……?”
전과는 달리 이제는 확실히 나를 아는 눈치다.
하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번번이 녀석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니 이제 얼굴 정도는 외워 뒀겠지.
“응, 맞아. 이번에도 네 계획을 갈아 버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지.”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녀석이 계획을 실행할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까.
“하하하, 그걸 대놓고 말하다니. 과연 재밌는 사람이로군, 그대는.”
하지만 내 말에 녀석은 화를 내거나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투구 안에 숨겨진 금안을 일순간 반짝일 뿐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하찮은 인간 따위가 설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아슬론을 대신하여 나선 건 주위를 장식하고 있던 72마신이었다.
고오오오!
녀석들이 내뿜은 기운이, 그 의지가 대기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호오?”
조금 전 봤던 안드로말리우스와 같이 과거의 정식 72마신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었다.
물론 그 강력함 이면에는 녀석들의 생명 에너지의 소모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힘이 생겼다고 좋아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그거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걸? 너희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만 그 힘이라는 게 너희의 수명을 깎는 거여서 말이야.”
나름 진심을 다하여 충고했지만.
「닥쳐라!」
「그 혓바닥을 당장에 뽑아 주마!」
녀석들은 내 충고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성을 내며 생명의 힘을 더욱더 뽑아낼 뿐이었다.
아슬론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흐음, 그 짧은 시간에 꽤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어쩌지, 이들은 이미 나의 충직한 수하가 됐는데 말이야.”
아슬론은 보란 듯이 주위의 72마신을 가리켰다.
“개미가 1마리나 72마리나 거기서 거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자랑은.”
“훗,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지만 어쩌지? 이번에는 네가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아슬론의 시선이 나에게서 멀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가자.
휘오오오!
황금의 탑에서는 본 적 없었던 거대한 차원의 문이 생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숨겨진 계층의 입구는 열렸으니 말이다.”
차원의 문 너머로 전해지는 기운은 확실히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기이한, 그리고 이질적인 힘을 담고 있었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군.’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질감.
분명 그것은 일전에 만났던 지배자에게서 느꼈던 것과 흡사한 기운이었다.
소위 말하는 외부자의 기운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대가 찾아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과거처럼 내 계획이 어그러지는 일은 없을 것 같군.”
녀석의 눈매가 초승달을 그린다.
아마도 벌써 계획이 다 완성된 것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아?”
“미안하지만 늦었어.”
그리 말한 녀석이 차원의 문을 넘으려 했다.
“어딜!”
하지만 그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기에 곧장 의지를 움직였다.
웅웅!
손에 쥐어진 것은 의지로 뭉쳐진 창.
그것이 완성되는 즉시 힘을 실어 쏘아 보냈고.
쉬이익!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의지의 창이 차원의 문 안으로 이동하는 아슬론의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어림없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서는 훼방꾼이 있었다.
검은색 갈기를 자랑하는 사자의 얼굴, 그리고 검은 안개와 같은 육신을 가진 녀석은.
‘마르바스?’
72마신 중 제5위의 권좌에 앉은 최상위 마신 중 하나.
레메게톤의 서를 통하여 완전한 힘을 얻은, 새로운 5마신이 신념의 창을 가로막고 섰다.
콰앙!
어김없이 신념의 창이 녀석에게 적중했지만.
「크흐흐흐.」
놀랍게도 녀석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아이기스?!”
마르바스의 신물인 염소 가죽 방패, 아이기스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모든 공격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절대의 방패.
‘내 의지를 막아 낼 수 있다고?’
절대적인 방어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그게 내 의지의 영역까지는 아니다.
과거에도 마르바스의 아이기스를 내 손으로 직접 부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의지의 크기로 창을 내질렀건만, 그것은 막아 낸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솔로몬 님이 하사한 힘과 아이기스의 능력이라면 나는 무적이니라!」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츠츠츠츠-
아슬론은 차원의 문을 넘었고, 녀석이 사라짐과 동시에 차원의 문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제도 모르는 인간 녀석.」
「여기가 네 녀석의 무덤이 될 것이다.」
마르바스를 시작으로 72마신 모두가 각자의 신물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레메게톤의 서를 통하여 더욱더 강화된 각각의 신물.
아이기스, 스톰브링어, 다인슬레이프, 구라가라, 아조트, 바리사다 등 강력한 권능을 지닌 신물이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아슬론을 보낸 녀석들은 전력을 다하여 의지를 발현했고.
콰콰콰콰콰!
신물을 통하여 더욱더 강력해진 권능이, 그 색색의 찬란한 기운이 나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쇄도했다.
찌릿!
확실히 과거의 72마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이다.
지금의 내 육신에 찌릿한 느낌을 전달해 줄 정도라면 최소 관찰자 이상의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놀아 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마음 같아서는 녀석들과 한바탕 놀아 주고 싶지만 숨겨진 계층으로 떠나간 아슬론이 마음에 걸린다.
녀석이 외부자의 유물을 발견하게 된다면 조금은 골치가 아파질 터.
그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조금 빨리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와라.」
의지가 움직인 순간.
뚝!
시간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하게 나를 향해 쇄도하던 72마신의 권능은 그 자리에 멈춰야만 했다.
그러한 현상은 운명의 법칙마저도 거스를 만한, 강력한 힘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것.
지이잉-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지금 내 육신을 감싸고 있는 갑옷이었다.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는 빛의 갑옷은 나의 의지, 신념, 투기가 빚어낸, 황홀한 작품.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갑옷이 아니라 격을 이룬 나의 육신이기도 했다.
지잉-
그리고 다음 순간 멈췄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여전히 나를 위협하는 72마신의 권능.
그리고 그 위협에 내가 한 행동이란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하압!」
기합성을 발하는 것.
하지만 그 기합성이 이루어 낸 일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아아아-
단순히 기합을 터뜨렸을 뿐이지만 나를 소멸시키기 위한 72마신의 권능을 소멸시켰다.
「뭐, 뭣이!?」
「무슨… 이런……?」
고작해야 기합성으로 인하여 소멸된 권능을 본 72마신은 경악했다.
「놀라기는 아직 이를 텐데?」
고작해야 권능의 소멸에 놀란다?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스윽.
의지가 일어난 순간 나의 육신은 이미 대상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흐읍!」
조금 전 내 의지의 창을 막아 낸 마르바스.
녀석은 순식간에 나타난 나를 보고서는 얼른 아이기스를 들었다.
부웅!
녀석이 일으킨 마기와 아이기스가 결합하면서 강력한 보호막을 생성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녀석이 인지하기 전에 그 육신을 꿰뚫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의 차이를 느껴 봐라.」
조금 전 의지의 창을 막아 내고 의기양양했던 녀석의 모습.
녀석의 오만을 깨부수기 위해 지루한 시간을 참았다.
후웅!
그와 함께 행한 것은 단순한 정권 찌르기.
아무런 기교도, 어떠한 권능도 섞지 않은, 그냥 순수한 주먹에 불과했다.
「어리석은…….」
어떠한 권능도 섞여 있지 않음을 깨달은 녀석이 다시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지만.
콰챠챵!
녀석은 보아야만 했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주먹이, 절대의 방패라 여겼던 아이기스를 부수고 녀석의 육신을 유린하고 있음을 말이다.
아이기스를 넘은 내 주먹은 곧장 녀석의 육신에 닿았고.
푸확!
녀석의 육신을, 그리고 영혼을 폭사시켰다.
순수한 힘만으로 육신과 영혼, 그리고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킨 것.
‘너희는 안드로말리우스와 다르니까.’
내 편인 안드로말리우스야 어떻게든 살릴 노력을 했지만 녀석들은 다르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데다가 살려 둬 봐야 어차피 후에 문제만 만들 골칫덩이들.
여기서 모두 죽일 작정이었다.
「이, 이럴 수가!」
간단히 소멸하는 마르바스를 본 녀석들이 경악한다.
하지만 진짜 경악할 일은 그것이 아니라 다음부터였다.
「소멸해라.」
나의 의지가 그것을 원했고, 육신이 저절로 움직였다.
팟!
조금 전과 마찬가지.
나는 단순히 주먹을 내질렀을 뿐이다
푸확!
그리고 가장 근처에 있던 마신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소멸하였다.
「모두 소멸해라.」
파파파파팟!
그리고 이어지는 주먹은 녀석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모두의 육신을 강타했다.
푸화화확!
그것은 찰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때 주변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레메게톤의 서를 통하여 한층 강력해진 72마신은 찰나의 순간에 모두 소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숨겨진 계층으로 도망간 아슬론, 녀석을 잡아야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지만.
‘차원의 문 분석은 이미 끝났다.’
조금 전 차원의 문을 관찰한 이유는 그 문을 이루고 있는 힘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는 차원의 문을 이루고 있는 근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윽-
가벼운 손짓으로 주위의 물건을 끌어왔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72마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그들의 신물.
레메게톤의 서로 한층 강력해진 새로운 신물이었다.
‘분명 차원의 문에 이 72개 신물의 힘이 섞여 있었다.’
굳이 정보를 얻지 않고 72마신을 전부 죽여 버린 이유는 차원의 문이 이 72개 신물로 열렸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열쇠는 손에 넣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
강력한 의지를 통하여 입구를 개방하는 것.
「열려라!」
내 의지가 그것을 바랬고.
파직, 파지직!
허공에 둥실 떠 있던 72개의 신물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기운은 점차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졌는데.
‘음?!’
그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현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츠츠츠츠츠-
내 의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공간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리고 열린 입구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72개의 신물이었다.
물론 그건 레메게톤의 서로 강화된 새로운 신물이 아닌, 과거로부터 계승되어져 내려온 진정한 신물이었다.
웅웅웅!
새로운 신물에 반응하듯 허공을 둥실 떠다니던 72개의 신물이 마찬가지로 스파크를 내뿜으며 특정한 기운을 발산했고.
콰앙!
곧이어 각기 다른 기운이 충돌하여 큰 폭발을 발생시켰다.
‘이건?’
그리고 내 눈앞에 드러난 것은.
휘오오오!
조금 전 아슬론이 생성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차원의 문이었다.
‘이건 훨씬 더 강력하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이 조금 전 차원의 문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을 파악한 그 순간.
「오라… 절대의 힘을… 오랜 시간… 마침내… 다가왔음이니…….」
문 너머로 들리는 누군가의 의지. 그것이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뭐, 일단은 들어가 보는 수밖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원의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