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Chapter 127
녀석은 마족.
72마신의 역사가 담긴 기운과 마주한 순간, 강력한 정신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다만 문제가 있다면 모든 기력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점인데.
‘금방 발딱 일어나게 해 주마.’
그건 내게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쓰러진 녀석에게 다가가 손을 대었다.
우우웅!
곧바로 일어나는 검붉은 기운.
그것은 마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마기였다.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녀석의 근원과 같은 마기를 침투시켜 몸 안을 샅샅이 살폈다.
“이건……?!”
단순한 기력 문제라고 생각했건만 문제는 내 예상보다 심각했다.
‘킬리아와 같은 증상인데?’
놀랍게도 그 상태는 킬리아와 흡사했다.
아니, 흡사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빨려 나간 생명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아마 내가 일찍 안드로말리우스가 된 1,315호를 구하지 않았다면 영원에 가까운 그 생명력이 바닥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여간 아슬론, 그 음흉한 새끼.’
녀석이 굳이 마계에 온 이유, 그리고 마족들을 통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서둘러야겠군.’
물론 그 전에 대략적인 사정을 듣기 위한 정보원을 깨울 필요가 있다.
츠츠츠츠츠-
마기의 성질을 변형하여 안드로말리우스의 내부에 침투시켰다.
그것은 치유의 의지가 깃든 것.
변형된 마기는 부족한 녀석의 기력을 채워 주었고.
「으허억!」
곧장 의식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아, 아서 님?!」
“그래, 이제는 알아보겠냐?”
「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분명 솔로몬의 부름을 받고…….」
둔기라도 얻어맞은 듯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리도 아니다.
정신 지배는 대상의 의식을 임의로 조종하는 것.
그 부작용이 상당하기에 대륙에서도 금기된 술법 중 하나였다.
물론 마족이라는 강력한 생명체를 정신 지배할 수 있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게 아슬론이라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짝!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을 향한 볼기짝.
「헛!」
각성의 의지가 실려 있었던 볼기짝에 녀석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아슬론에게 소환되고 나서 어떤 일이 있었지? 기억을 더듬어서 상세히 말해 봐.”
「아, 알겠습니다.」
효과가 있었는지 정신을 차린 녀석은 조금 전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금 전 강력한 힘에 의해 저는 1계층인 황금의 탑에 소환되었습니다. 물론 소환의 힘을 발휘한 것은 솔로몬이었습니다.」
“녀석이 아슬론이겠지?”
「그건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그의 행보로 봐서는 그것이 진짜 아슬론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확실한 건?”
「…엄청난 강자라는 사실입니다. 소환된 마족 모두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그 정도야 간단한 일이지.”
하지만 그 말이 내게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모든 마족을 압도하는 일?
누군가에게는 크게 보일 수 있겠지만 내게는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궁금한 것은.
“나와 비교하면 어땠지?”
내 전력까지는 아니어도 그나마 내 일부를 보아 온 녀석이 아닌가.
그렇기에 정확한 비교는 무리더라도 대략적인 힘의 차이는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신왕 폐하의 전력을 본 적이 없으니 정확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제가 보아 온 모습만으로 비교하자면… 조금 전의 솔로몬이 더 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호오, 그래?”
녀석은 격을 이룬 내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격을 이루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대륙에서는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 나보다 더 강한 것으로 생각한다?
‘재밌네.’
과연 이번 아슬론의 분신은 내게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까?
조금은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건 됐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네가 이렇게 된 거지?”
분명 1,315호에 불과했던 녀석이 어떻게 갑자기 72마신의 권좌를 차지했는가.
「모든 마족을, 아니 정확히는 최상급 마족들을 소환한 솔로몬은 우리가 선택받은 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음, 딱 사기꾼이 약 팔기 전에 하는 전형적인 말이로군.”
「문제는 그 사기꾼이 상당한 힘을, 그리고 사기를 진실로 만들 특별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특별한 물건?”
「일전에도 말씀드렸던 레메게톤의 서입니다.」
“아!”
녀석이 말하는 레메게톤의 서는 분명 내 기억이 있는 것이었다.
과거 1,315호를 처음 만난 것도 레메게톤의 서를 통해서였다.
물론 과거의 레메게톤은 레플리카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번에 솔로몬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과거 72마신을 굴복시켰던, 그들의 맹약을 받은 진품이 분명했습니다.」
“아슬론이라면 충분히 과거에 마계를 정복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을 테니까.”
놀랍지도 않다.
아슬론이 가진 힘이라면 마계는 물론 모든 차원을 다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레메게톤의 서를 이용하여 진화의 권능을 완성했다고 말했습니다.」
“진화의 권능이라면…….”
「당시 자리한 모든 마족을 72마신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네가……?”
「그렇습니다. 레메게톤의 서는 자리하고 있던 모든 마족을 72마신의 권좌에 앉힐 수 있는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후보 2위까지 올라갔다고 해도 복잡한 마신 계승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누구도 권좌의 권능을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솔로몬이 가진 레메게톤의 서는 그러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황금의 탑에 모인 모든 마족을 72마신으로, 그 권좌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
「레메게톤의 서에서 나오는 힘을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고 했으나 제가 지닌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마신의 맹약을 통해 만들어진 신물이니만큼 마족인 녀석이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마족들을 진화시켜서 얻고자 했던 게 뭐지?”
중요한 건 굳이 녀석이 힘을 소비해 가며 마족들을 72마신으로 진화시킨 이유다.
그 음흉한 녀석이 선의로 마족들을 변화시켰을 턱이 없으니 분명 목적이 있을 터.
「다행히 끝까지 레메게톤의 힘에 저항했던 터라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내 의도대로였다.
녀석이 모르는 사이 내 존재를 무의식 깊숙한 곳에 각인시켜 두었기에 엄청난 저항력을 얻은 것.
아마 그것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정신을 지배당하여 어떤 일이 생겼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황금의 탑 안에 숨겨진 계층을 찾고 있었습니다.」
“응? 숨겨진 계층?”
그건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1계층인 황금의 탑이 끝이 아니었던가?
「사실 저도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솔로몬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숨겨진 계층에서 태초의 외부자들이 남긴 유물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72마신의 힘을 지닌 마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녀석이 마계로 찾아와 너희를 진화시킨 거로군!”
그제야 겹겹이 쌓여 있던 의문이 풀렸다.
솔로몬이 갑작스레 마계를 찾아온 이유.
‘외부자의 흔적을 발견했던 모양이로군.’
신인류를 생산해 내기 위하여 외부자의 흔적을 추적하던 녀석은 마계에서 그 단서를 발견한 것 같다.
‘그 방법도 알고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숨겨진 계층.
그리고 72마신을 통하여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을 정도면 그 유물을 얻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제가 정신 지배당하고 난 이후 곧장 숨겨진 계층을 찾아 떠났으니 빨리 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녀석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로 봐서는 아마 아주 강력한 유물일 테니 말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설령 강력한 유물이 아니라고 해도 녀석이 하는 행사를 방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1계층까지 가려면 나머지 70계층을 뚫어야만 하는데…….」
뒤늦게 생각난 사실에 녀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닌 게 아니라 1계층까지 가려면 나머지 70계층을 뚫고 황금의 탑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레메게톤의 서가 아니라면 이동할 방법도 없고. 이거 큰일이로군요.」
“쯔쯧. 그렇게 같이 다녔는데도 아직도 나를 모르는구나.”
내가 녀석에게 아직도 이 정도의 신뢰도 주지 못하다니.
“물론 마계에서의 공간 이동이 불가능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말이야, 매개체가 있으면 말이 다르거든.”
「매개체… 말입니까?」
녀석이 의문을 표했다.
도대체 이곳에 어떤 매개체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네가 있잖아. 아슬론과 접촉한 바로 너.”
「아하!」
그제야 자신의 이마를 치는 안드로말리우스.
「그렇군요! 제 정신을 지배하였던 그의 힘이 남아 있을 테니!」
“그 정도 흔적이 남겨져 있다면 그 뒤를 쫓는 건 문제도 아니지.”
만약 아슬론과 접촉한 녀석이 없었다면 그 말대로 72계층부터 1계층을 뚫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녀석은 분명 아슬론과 접촉했고, 그 힘의 지배를 받았다.
물론 조금 전 내가 그것을 깨부수긴 했지만 여전히 아슬론이 발휘한 힘의 잔재가 남아 있을 터.
“그럼 시작한다.”
그렇기에 그 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녀석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웅웅웅!
내 의지를 담은 마기가 녀석의 몸 곳곳을 넘어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아마 보통의 정신을 가진 녀석이라면 마족이라는 강력한 생명체의 정신에 침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갖 일이란 일은 다 겪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고작해야 마족의 정신 따위가 내게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아득한 정신세계를 넘어 마침내 도달한 곳은.
‘왔다!’
정신 지배를 위하여 아슬론이 침투시킨 기운의 잔재였다.
스으으으-
마치 나를 피하려는 것처럼 다급히 피하려는 그 기운에 접촉.
‘이제 이 기운과 같은 것을…….’
아슬론이 남긴 기운의 분석을 마쳤다.
그 뒤에 할 일은.
콰아아아아!
나의 의지가 핏빛 대지를 넘어 마계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 크기의 영역은 마계 전체를 아우를 정도였고.
“빙고!”
공을 들일 필요도 없다.
조금 전 안드로말리우스의 의식 속에서 마주한 기운과 같은 것을 확인한 순간, 곧장 의지를 발현하였다.
「추격.」
나의 의지가 해당 기운의 추격을 원하자.
슈슈슉!
곧장 공간과 차원을 넘어 기운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이?!」
「침입자다!」
곧장 들려오는 마족들의 웅성거림.
하지만 내 눈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마족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 황금빛 찬란한 갑옷을 입은 한 사내가 보인다.
비록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어서 외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특유의 기운이 누구를 나타내는지는 빤했다.
“여어, 또 만났네. 이번이 몇 번째더라?”
나는 아슬론의 분신 중 하나인 솔로몬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