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Chapter 124
쿠쿠쿠쿠쿠!
마계의 가장 밑바닥, 72계층에 속하는 핏빛 대지의 대기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굉음을 동반하던 중.
콰챠챵!
유리가 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깨어져 나갔고, 깨어진 공간 속에서 빛의 구체 4개가 튀어나왔다.
분명 빛의 구체로 보였던 그것은 핏빛 대지와 접촉하는 순간.
슉!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쿵쿵!
상공에서 떨어진 건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으악!”
“끄윽!”
제대로 낙법을 하지 못한 타일로와 갈린이 앓는 소릴 냈다.
타일로는 그렇다 쳐도 갈린이 그 정도 높이에서 낙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차원과 차원을 넘어 마계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 과정 중 어마어마한 현기증을 동반했기에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너 보통이 아니네. 여기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나는 의외로 멀쩡한 킬리아를 보며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신성한 보호막을 펼친 상태였다.
은은한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그 힘은 신성력이 분명했고.
‘마계에서도 발휘가 된다고?’
그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과거 이곳에 도착했던 용사 일행 중에는 대륙에서도 가장 유명한 신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힘을 잃은 것처럼 신성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데 킬리아는 그녀와는 정반대로 무리 없이 신성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하는 마음으로 타일로와 갈린을 응시했다.
“어, 뭐야? 히, 힘이……?”
“마나가 없어?!”
지면과 키스한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던 녀석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확실히 과거와 같은데.’
과연 예상했던 대로 모든 힘을 잃은 게 분명했다.
‘일정한 영역에 도달하거나 마기가 아니면 힘을 발휘하지 못해야만 정상인데…….’
자연스레 시선은 킬리아에게 향했다.
웅웅!
여전히 황금빛 보호막을 거두지 않은 그녀의 주위로 강력한 신성력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는데,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진 느낌인데요?”
“더 강해져?”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내부를 살펴본 결과 그 힘이 더욱더 강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참, 신기하네. 보통은 모든 힘을 잃어야만 하는데.”
“그런가요?”
킬리아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뭐,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 당황하고 있는 두 녀석을 바라본다.
“아, 아서 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힘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혹 차원 이동 중에 어떤 문제가……?”
“아니, 아무런 문제 없었어. 이 녀석들이 나를 뭘로 보고.”
당황하는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힘을 잃는 게 정상이야. 마계는 대륙과는 전혀 다른 마나의 구조를 지니고 있거든. 그것을 배워야만 온전히 힘을 쓸 수 있지.”
“마나의 구조가 다르다면?”
“여기서는 마나가 아니라 마기(魔氣)라고 부르지.”
그리고 그것이 녀석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기도 하다.
‘마기를 다룰 수 있게 되면 비약적인 경지의 상승을 이룰 수 있지.’
마계의 마나 구조는 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고, 또한 사납기 그지없어 다루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면 후에 대륙으로 돌아갔을 때 마나를 다루는 실력 자체가 달라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마족들이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다.
이러한 마기에 길들여진 마족들은 단순히 육체의 단단함뿐만이 아니라 마나를 다루는 능력 또한 월등히 앞서는 것.
물론 단순히 마기를 다루는 것뿐만이 아니라 녀석들은 이곳에서의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과거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츠츠츠츠-
아공간에서 몇 개의 물건을 빼냈다.
터터텅!
지면을 장식한 그것은.
“무구?”
“이것을 왜 꺼내신 겁니까?”
바닥에 쏟아진 강력한 무구들을 본 타일로와 갈린의 불길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 험악한 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몸을 보호해야 할 거 아냐.”
“몸을 보호한다는 말씀은……?”
“어, 짐작하고 있는 게 맞아. 너희는 나와 동행하지 않아. 여기 핏빛 대지에 남아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생존해야 해.”
“…….”
너무 당황하면 말을 잃곤 한다.
지금 타일로와 갈린의 심정이 딱 그러할 것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예상했던 대로 타일로와 갈린은 펄쩍 뛰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인데 저희를 따로 떨어뜨리겠다는 겁니까?”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대륙과 같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힘을 잃은 상태.
그것도 마계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생존하라는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재밌겠네요.”
하지만 두 명과 달리 킬리아는 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마계에서의 생존이라.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
그녀의 담담한 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쯧, 명색이 사내라는 것들이 그리 담이 작아서야. 그럴 거면 고추 다 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건 뭐? 분명히 말했지. 너희를 이곳에 데려온 건 수련을 위한 것이라고. 설마 상승의 경지를 꿈꾸면서 목숨을 걸 각오도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 막무가내 수련이 경지의 상승에 도움이 될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왜 보장이 없어. 여기 산증인이 있잖아.”
나는 나를 가리켰다.
“아서 님 말입니까?”
“그래, 내가 달리 이런 힘을 손에 넣었겠냐. 마계에서의 혹독한 수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하지만 아서 님은 마계에서 금방… 아!”
타일로와는 달리 지난날의 사정을 모르는 갈린.
하지만 이내 무언가를 예상한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설마 시간의 축이…….”
“정답.”
그 이상은 설명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군말 없이 수련에 임해. 특별히 너희에게는 과거 내가 가지지 못했던 무구도 지급하잖아. 내가 예전에 이런 무구를 얻었으면 아주 날아다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수긍한다.
내가 이 경지를 얻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솔깃한 것이다.
‘물론 너희가 나와 같은 힘을 손에 넣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빼먹은 건 이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1,0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 시간의 벽을 허물 수는 없다.
물론 여기서 생존하면서 얻는 깨달음이 많을 거라는 건 확실히 보장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럼 다들 무구를 착용해. 너희가 이곳의 괴물들에게 갈가리 찢기는 건 나도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에 얼른 자신에게 맞는 무구를 착용하기 시작한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셋은 내가 준 무구를 모두 착용했다.
“이건… 상당한 보물이로군요.”
평범한 무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홀린 듯 자신이 든 검을 바라보는 타일로.
“상당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대단한 보물들이지. 마신이라 불렸던 녀석들이 즐겨 사용했던, 녀석들의 신물이거든.”
사실 내가 건네준 건 보통의 물건이 아니었다.
한때 마계를 지배했던 72마신, 녀석들이 사용했던 강력한 신물이었다.
물론 마기를 다룰 수 없는 지금 상태에서는 그 힘을 모두 이끌어 낼 수 없을 테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몸을 보호해 줄 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
무구를 착용을 마친 타일로에게 너덜너덜한 가죽 책을 건넸다.
“이건……?”
그것을 받은 타일로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과거 내가 핏빛 대지를 지나며 적은 일기. 너희가 생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한 번씩 읽어 봐.”
혹여 내가 광기에 침식당하여 내가 아닌 존재가 될까 봐 적어 놓은 일기장이었다.
하루하루 그것을 읽으며 내 안의 광기를 잠재웠고, 겨우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다.
목적은 광기에 침식당하지 않기 위한 기억의 산물이었지만 핏빛 대지에서 생존해야 하는 녀석들에게는 아주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줄 건 다 전해 줬으니.”
딱!
곧장 손가락을 튕겨 마기를 발현했다.
슈슈슉!
그와 함께 타일로, 킬리아, 갈린은 공간을 넘어 미지의 장소로 이동되었다.
“잘 살아남아 보라고.”
그래도 나름 녀석들을 배려하여 가장 가까운 안전지대로 보냈다.
사실 그곳에 보낸 이유에는 녀석들에게 안전지대의 역할과 그 중요함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녀석들의 이동과 동시에 갑작스레 날씨가 변하기 시작했다.
붉긴 했지만 그래도 낮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곳에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밤.
스으으-
그곳을 비추는 건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달이었다.
“푸른 마력의 밤이라…….”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핏빛 대지의 가장 공포스러운 밤인 푸른 마력의 밤이 찾아왔다.
한기가 지배하는 이 밤에는 영혼을 찾아 헤매는 존재가 먹이를 노리니.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과거였다면 이 빌어먹을 밤에 욕설부터 나왔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갑다.
아니, 오히려 이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자…….’
의지의 집중을 통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관조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질적인 기운이 집결되어 있는 곳을 느낄 수 있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악- 푸른빛이 육신을 감쌌고, 이마에 특별한 표식이 새겨졌다.
“그래, 나 여기 있다. 그러니 어서 와라.”
사신의 표식.
푸른 마력의 밤, 핏빛 대지에 서식하는 사냥꾼들이 놓은 덫을 통해 발현되는 사냥감의 표식.
이 표식이 새겨진 자는 반드시 핏빛 대지의 사냥꾼, 푸른 사신의 방문을 받아야만 한다.
과거 가장 많은 원정대의 목숨을 앗아 갔던 사신의 방문을 말이다.
하아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신의 숨결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다. 아마도 강력한 내 마기를 읽은 듯 주위 곳곳에서 푸른 사신의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펄럭!
마침내 나타난 푸른 사신 무리.
칠흑의 어둠 속에 동화한 녀석들이 특유의 망토를 펄럭이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과거에는 내가 힘이 없어서 너희를 그냥 두고 봤어야만 했거든.”
과거 나는 푸른 사신을 제거하지 못했다.
모든 물리, 마법 공격을 통과시키는 푸른 사신의 특별한 능력을 감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능력만으로 보자면 72마신인 안드로말리우스보다 강력한 존재.
그렇기에 과거에는 녀석들을 두고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꿈틀.
의지가 움직인 순간 주변을 가득 메운 신념의 무기.
우우우우우-
그 순간 강력한 힘의 파동을 감지한 푸른 사신 녀석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오로지 영혼을 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본능의 존재들이었지만 그만큼 힘의 감지는 뛰어나다.
내 힘을 느낀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하고 도주하려고 하는 것.
그러나 그것을 지켜볼 내가 아니다.
“아무래도 너희를 내버려 두면 녀석들이 고생할 것도 같으니.”
비록 안전지대로 보냈다고는 하지만 타일로 일행에게 푸른 사신은 버거운 존재다.
과거의 빚 청산과 함께 녀석들의 안전을 위하여 이 빌어먹은 녀석들은 반드시 제거한다.
“여기서 소멸해라.”
파파파파파팟!
내 의지와 함께 날아간 신념의 무기가 푸른 사신 무리를 꿰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