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Chapter 122
“사실 과거 어떤 미친 녀석 때문에 시간을 거스른 적이 있거든.”
평행세계로 가지 않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미친 녀석?”
“그게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시간 여행이라는 게 보통 일도 아니고, 내가 그런 귀찮음까지 감수했다고 하자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 같다.
“있어. 레라지에라고, 마계에 살던 72명의 머저리 중 하나.”
「으헉!」
내 말에 가장 격정적으로 반응한 건 펠리드의 오른쪽 어깨에 있던 1,315호였다.
“왜? 불만 있어?”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리고 마신왕 폐하시라면 그러한 말을 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금방 입을 다문 1,315호.
“어쨌든 그 녀석이 시간의 권능을 지니고 있어서 말이야. 녀석의 함정에 속아 평행세계로 추방당한 적이 있었지.”
15위 안의 권좌를 사용할 때의 내 힘은 이미 마신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녀석들은 나를 상대하기를 꺼려 했고(사실은 꺼렸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나를 마계에서 추방하기 위한 작당 모의를 했었다), 그 최초의 함정이 바로 시간의 역행이었다.
무력은 있으나 지식이 얕았던 나는 녀석들이 파 놓은 함정을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시간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정말 아찔했지. 만약 내게 어느 정도의 힘이 없었다면 또 다른 세계, 그러니까 평행 세계도 찾지 못한 채 영원한 시간의 미로를 헤매야만 했을걸?”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본래 내가 이동한 곳은 비틀린 시간의 공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뒤틀려 버린 시간의 축이 낳은 괴상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 공간을 본신의 힘만으로 깨부쉈고, 오랜 시간 헤맨 끝에 평생 세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다른 세계의 나를 만났지.”
현재와는 조금 다른 세계.
그곳에서 나는 현재의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망나니가 아닌 천재, 왕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왕자를.’
녀석은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엇나갔던 나와는 달리 왕재에 어울리는 품격과 재능을 두루 갖춘, 완벽한 왕자였다.
사실 뒤늦게야 밝혀진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무(武)에 대한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게 밝혀진 건 원정대와 함께 마계에 도착한 이후.
그렇기에 과거에는 이러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평행 세계의 나는 이러한 재능에 일찍 눈을 떴고, 왕국의 1왕자에 걸맞은, 아니 대륙의 천재라 칭송받는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당시 만났던 녀석의 경지라 하면… 음, 그래!”
나는 갈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갈린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 할 수 있겠군.”
“홀로 수련을 해서 저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녀석의 재능은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누구보다 대단했거든.”
녀석의 재능은 내가 천재라 인정한 타일로, 그리고 갈린의 재능을 합친 것보다 더 나은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세기에,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
“녀석을 본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지. 나를 직접 제거할 수 없다고 여긴 존재들이라면 분명 평행세계의 나를 노릴 수도 있겠다고.”
수많은 평행 세계의 나를 제거한다면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을 터.
그렇기에 나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녀석을 훈련시키기로 했다.
“과거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막대한 힘을 들여 시간의 축을 뒤틀었고, 녀석을 훈련시켰지. 토가 나올 정도로 아주 혹독하게.”
물론 처음에는 반항이 심했다.
애초에 지금 가진 능력만으로도 세계를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이렇게 죽기 살기로 훈련해야 하느냐고.
해서 녀석에게 말했다.
-언젠가 네가 감당하기 힘든 존재들이 너를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훈련은 그때를 위한 것. 너는 강해져서 좋고, 나는 내 생명을 구할 수 있어서 좋고. 이런 걸 보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말하는 거지.
하지만 녀석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가혹한 구타가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의 방에서 몇백 년을 보냈던 것 같다.
본래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는데.
‘녀석과 함께 훈련하다가 문득 깨달음이 찾아와서 말이야.’
하필이면 그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버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 위하여 녀석과 함께 오랜 수행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평행 세계의 나.
덕분에 녀석은 내가 예상한 것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녀석 또한 인외의 영역에 도달, 마침내 격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맙소사!”
격이라는 말에 가장 격정적으로 반응한 건 갈린이었다.
역시 아슬론과 함께했던 녀석이라 그런지 격의 영역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그가 얻은 격이 무엇입니까?”
갈린의 물음에 나는 녀석의 격을 떠올렸다.
“시간.”
녀석이 얻은 격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발현한 시간의 방에서 수련하다 보니 이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뭐, 어찌 됐든 녀석은 시간이라는 강력한 격을 얻을 수 있었고.
“나와 비등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겁 없이 덤비더라고.”
그간 당한 게 억울하다며 내게 덤벼들었다.
물론 녀석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의 힘을 얻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시간의 격이라고 한다면 모든 격 중에서도 최상위로 꼽는 아주 강력한 능력. 그러한 점을 얼핏 깨닫고 있었던 녀석은 승리를 자신하며 덤벼들었지만.
“겨, 결과는 어떻게……?”
격을 얻은 이들 간의 전투.
그 결과가 궁금했던 갈린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졌으면 내가 이 자리에 있겠냐? 당연히 녀석은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날 정도로 줘 터졌지.”
기껏 수백 년 동안 시간을 내어 가르쳐 줬더니 건방지게 이빨을 들이댄다?
은혜도 모르는 짐승 녀석을 완전히 아작 내 버렸다.
“그래도 꽤 하더라고.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상대 중에서는 녀석이 최고라 단언할 만했어.”
마계, 환계, 유계, 천계.
모든 차원을 넘나들며 그곳의 강자란 강자들은 다 상대했지만 녀석은 내가 만났던 상대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도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해야만 제압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잘근잘근 밟아 주고 평행 세계를 떠나 현실로 돌아왔지.”
물론 그것도 다 계획의 일환이었다.
형편없이 밟힌 녀석은 내 수준에 이르기 위하여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테고, 그렇게 엄청난 경지에 도달한 녀석을 제거할 수 있는 건 나를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행 세계의 나를 제거하여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멍청이들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는 셈.
“그러니까 내가 왜 걱정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
내 말에 장내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갈린을 제외하면 격이라는 영역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를 확실하다.
내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스으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흐릿하게 변한 육신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과연 그렇군요!”
감탄사를 터뜨리는 대장로.
“평행 세계는 계속해서 증식하는 법. 제한된 시간 내에 모든 평행 세계의 존재를 처치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가 생성되어 또 다른 아서 님이 탄생하게 되지요. 그들은 아서 님이 말했던 평행 세계의 존재를 처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장로가 그럴듯한 가설을 내세웠고, 신빙성 있는 그 말에 나도 동의를 표했다.
“그나저나 아슬론 녀석, 평행 세계로 가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와 병력을 쏟았을 텐데, 안 됐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일일이 나설 필요도 없이 알아서 병력을 소모시켜 주니, 이 얼마나 간편한 일이란 말인가.
“이왕이면 막대한 병력을 쏟아서 큰 타격을 입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자는 계산에 철저한 자. 가망성이 낮은 일에 그리 큰 투자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갈린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음모를 꾸밀 겁니다. 좀 더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계획을 말입니다.”
“쯧, 근데 이게 점점 귀찮네. 대가리를 치려고 해도 워낙 꽁꽁 숨은 탓에 꼬리만 자르는 판국이니.”
사실 처음에는 쉽게 녀석의 머리통을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나 철저하게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지 좀처럼 그 실체를 보기가 힘들었다.
물론 아예 타격을 주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파 놓은 굴, 그리고 꼬리가 많은 탓에 아무리 잘라 내도 그 실체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들을 심문하면 얻을 수 있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펠리드가 가리킨 곳에는 아슬론의 첫 실험작, 카인과 아벨이 있었다.
“글쎄, 이 녀석들도 클론이라서. 아마 아는 게 별로 없을걸.”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순 있겠으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봤을 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뭐, 그래도 아예 정보가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작은 정보라도 내놓기를 기대하며 카인과 아벨에게 다가갔고.
짝, 짜악!
곧바로 녀석들의 뺨을 후려쳤다.
단순히 힘을 주어 때린 게 아니라 ‘각성’의 의지를 실은 것이기에.
“헉!”
“으헉!”
비명을 지른 녀석들이 단번에 깨어났다.
“여, 여긴……?”
“헉! 그대는?”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다가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긴말은 하지 않으마.”
웅웅웅!
나는 녀석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던 신념의 무기를 생성했다.
주위를 가득 채운 그 무기를 바라본 녀석들은.
“으음…….”
“…….”
신음을 흘리거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묻는 말에 답하면 고통 없이 죽여 주마. 하지만 만약 거짓을 답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겠다면.”
파지직!
고통의 격이 실린 창 하나가 검붉은 스파크를 발산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거다.”
꿀꺽!
그 격의 힘을 깨달았는지 침을 삼키는 녀석들.
“아슬론, 녀석과 관계된 것을 모두 말해라.”
그리고 나는 녀석들에게 질문했고.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반항하는 카인과는 달리 모든 것을 체념한 아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거나 혹은 중복되는 것들뿐.
‘그래, 이게 정상이지.’
한낱 실험작, 그것도 클론에 불과한 녀석들이 많은 것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난 곳은 마계의 생체 실험실 중 하나였고…….”
“잠깐!”
나는 들리는 한 단어에 녀석의 말을 멈추게 했다.
“마계? 분명 마계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탄생한 곳은 마계의 20계층인 생사의 강, 그곳에 위치한 클론 공장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지금껏 놓치고 있던 부분을 상기해 낼 수 있었다.
‘왜 내가 대륙에만 한정 짓고 있었지.’
아슬론.
녀석은 인외의 영역에 도달한 강자.
당연히 각 차원에 손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녀석이 아니었던가.
「마, 마신왕 폐하!」
아벨의 말과 함께 1,315호가 경호성을 지르며 내게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인데?”
「큰일, 큰일입니다. 지금 마계에서 긴급 소집령이 발동했습니다.」
“긴급 소집령?”
「그것이, 새로운 마신왕이 탄생했으니 모든 마족은 긴급히 복귀하라는…….」
말을 하는 도중이었다.
슈슉!
1,315호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소환되어서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갑자기 일어난 일련의 상황에 당황하는 이들.
“가야 할 곳은 정해졌네.”
하지만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번에 내가 향해야 할 곳은 당분간 방문하기 싫었던, 마계라는 끔찍한 장소라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