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Chapter 120
스윽.
분명 내 손은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물을 통과시킨다.
“이거 신기하네?”
흥미로운 웃음을 지으며 손과 발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아니, 아서 님. 그게 재밌어 할 일입니까?”
“형님,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나보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더 난리였다.
특히 타일로와 펠리드는 펄쩍 뛰었는데, 그 얼굴이 완전 울상이었다.
“재미없어? 난 재밌는데.”
울상이다 못해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장난을 그만뒀다.
“혹 강력한 저주가 아닌지?”
나름 지식이 상당한 갈린이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니. 저주라면 진즉 알아챘지.”
그 현상이 저주일 턱이 없다.
만약 저주였다면 그 이질감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적어도 이 세계에 내 감각을 속일 수 있을 만한 저주는 없어. 그건 단언할 수 있지.”
“흐음. 저주가 아니라면 뭘까요. 존재가 사라지는 현상이라니…….”
“그래서. 그걸 알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불러 놨어.”
“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대한 분의 부름에 답했나이다.”
갈라진 차원의 균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다, 당신은……?”
장내의 대부분은 그 정체를 모르나 아슬론과 관련된 갈린은 알고 있다.
“아슈리아 님!”
모습을 드러낸 건 태초부터 엘프와 함께해 온 엘프의 역사, 대장로 아슈리아였다.
“아슈리아?”
“설마 엘프의 대장로……?”
그 이름을 듣고서야 반응하는 이들.
적어도 이곳에 엘프의 대장로 아슈리아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엘프의 탄생과 함께한 당신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테지.”
“허허. 과찬이십니다. 하나 그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내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허허 웃은 대장로.
꽤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을 보니 과연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을까?”
곧장 희미하게 변한 팔과 다리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곧바로 상태를 확인하는 대장로.
신중하게 내 몸 상태를 관찰하던 그의 눈에 기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군요.”
그리고 곧장 답을 내놓았다.
“존재의 흔적?”
하지만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그 단어의 뜻을 모른다기 보다는 왜 멀쩡하던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각 평생세계에 존재하는 아서 님의 존재를 죽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그렇습니다. 누군가 시간 여행을 통하여 그 세계에 존재하는 아서 님을 제거하고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
그 순간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평행 세계?”
“시간 여행?”
“대체 그게 무슨…….”
“으음. 확실히 아슬론. 그자라면 가능한 일이긴 하지.”
펠리드를 비롯한 대다수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갈린만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역시 배운 게 있어서 그런지 금방 알아먹는다?”
“뭐, 확실히 비겁한 방법이긴 합니다만, 이보다 확실하게 아서 님을 제거할 만한 방법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 그건 인정. 나를 건드릴 수 없으니 평행 세계의 나를, 그것도 아무런 힘도 없을 때의 나를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 하여간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묘안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나는 너무 강력하기에 건드릴 수 없을 테니 시선을 돌려 평행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죽인다.
그것도 시간 여행을 통해 가장 약했을 때의 나를 죽이고 있을 테니 이 얼마나 손쉬운 방법이란 말인가.
“그나마 현재의 아서 님과 크게 차이가 있는, 과거의 아서 님을 죽이고 있기에 이러한 현상이 발발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티끌도 모이면 태산이 되는 법. 죽어 가는 존재가 많을수록 서서히 아서 님의 존재도 소멸을 향해 다가갈 것입니다.”
대장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녀석들이 이번에는 머리를 제대로 썼네.”
이번만큼은 녀석들의 전략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 이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두면 소멸이 계속 진행될 터인데……?”
“계획은 무슨.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최선이야.”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장로와 나 사이에 펠리드가 끼어들었다.
“시간을 여행하는 그들이 평행 세계의 형님을 제거하면 소멸에 이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혹 과거로의 여행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시다면 왕국은 물론 대륙의 정보를 모두 모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다급한 펠리드와는 달리 나는 무척 여유로웠다.
“과거로 가는 방법? 그거야 이미 알고 있거든.”
진한 웃음을 짓는 내게 다가온 건 대장로였다.
“시간을 여행하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보유한 유물의 힘이 필요할 터인데…….”
“녀석들이 가능한데 내가 불가능할 턱이 없잖아?”
아공간을 열어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째깍째깍.
그것은 작은 소음을 동반하는 황금 회중시계였다.
물론 내 아공간에 보관된 물건인 만큼 평범한 시계는 아니다.
“그건……?”
“역행의 회중시계. 마계의 마신 녀석을 쥐어패고 빼앗은 신물이지.”
72마신 중 14위의 권좌에 있던 레라지에의 신물.
시간의 권능을 다루는 그의 신물인 만큼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강력한 유물이었다.
“호오. 아주 강력한 힘이 깃든 유물이로군요. 확실히 그 정도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면 시간 여행을 하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번에 그 가치를 알아본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유물이 있음에도 왜 가만히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인지?”
대장로는 물론 모두가 의문에 빠졌다.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유물도 있겠다 당장 과거의 세계로 가서 적들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한때는 과거에 살았던 이력이 있거든.”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그건 하등 쓸모없는 거정에 불과하다.
과거 1,00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낼 때 나는 과거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왜?
빌어먹을 레라지에 녀석이 나를 과거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녀석의 음모를 분쇄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과정 중에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신을 얻은 것이 있다면.
‘그 누구도 과거의 나를 온전히 제거할 수 없다.’
현재의 나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평행 세계에 있는 모든 나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누구도 평행 세계의 나를 온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형님. 믿고 계신 바가 있습니까?”
역시 눈치가 빠른 펠리드가 먼저 물었고.
“그래. 평행 세계의 나를 제거하겠다고? 풋. 녀석들은 절대 그 뜻을 이루지 못할걸.”
설사 그 음모를 실행하는 게 나라고 해도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평행 세계의 나 중에는 아주 괴물 같은 녀석이 하나 있거든.”
시간 여행을 하며 만났던 평행 세계의 나.
수많은 나를 만났지만, 그중에는 아주 괴물 같은 녀석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의 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정말 괴물 같은 녀석 말이다.
*
“드디어 마지막이로군.”
회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무리가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물을 통하여 시간 여행을 한 아슬론의 클론들이었다.
800호부터 시작해서 810호까지.
총 11명의 클론은 마지막 남은 아서를 제거하기 위하여 소튼 왕국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왕성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린 덕분에 그들은 금방 목표로 한 왕성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지.”
왕성 앞에서 멈춘 클론 무리 중 하나, 800호가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원래의 시간으로 복귀할 수 없으니 마음껏 파괴 활동을 해도 되겠지?”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과거로 여행을 오게 된 그들은 다시금 현재로 돌아갈 수 없다.
갈 수 있는 방법이야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하는데, 굳이 클론을 위해서 그러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
아서를 제거하기 위해 떠나온 클론의 역할은 대상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
그리고 과거에 남겨진 그들은 다시는 현실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미아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차츰 그들의 육신은 붕괴하게 되어 조만간 소멸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소멸을 맞이하기 전에 마음껏 깽판을 칠 심산이었다.
“흐흐흐. 아주 박살을 내 주마.”
비록 임무를 위해 이곳에 왔으나 곧 있으면 소멸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다.
더 활동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마음껏 발현하기 위한 마력의 집중이 이어졌고.
쿠쿠쿠쿠쿠쿵!
레플리카 현자의 지팡이에서 뿜어진 마력이 왕성의 위로 거대한 운석을 만들었다.
운석 소환.
그것도 보통의 운석 소환과는 달리 강력한 파괴의 힘을 담은 ‘소멸의 운석’을 소환하였다.
“고통 속에 무너져라. 으하하하하!”
800호의 절대적인 마력이 담긴 운석이 왕성을 향해 다가간다.
외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받아 낼 수 없는 위력.
모두가 그것으로 임무가 완수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랄하고, 자빠졌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콰콰콰쾅!
왕성 위를 장식한 운석이, 소멸의 힘을 담은 운석이 파괴되었다.
“어어……?”
“무슨!”
경악하는 클론들.
단순히 파괴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
첫 파괴 이후 이어진 일련의 동작으로 인하여 운석의 조각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파스스스-
말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린 소멸의 운석.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800호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 나왔다.
도대체 누가 있어서 그의 마력이 담긴 운석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들이 남의 집에서 뭐하는 짓거리야!”
잠시 후, 그들은 그 주인공과 대면할 수 있었다.
탓.
왕성을 훌쩍 뛰어넘어 그들의 앞에 도달한 이.
소튼 왕가의 상징인 푸른 머리칼과 하얀 피부,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의 주인공은.
“아서?”
“네 녀석이 어째서?”
100호의 영상 마법을 통해 아서의 얼굴을 익혔다.
분명 눈앞에 있는 건 그들이 제거해야 할 평행 세계의 아서였다.
아주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여야 할 그가 어째서 지금 이곳에, 운석을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아하! 그때 녀석이 말했던 적이라는 게 너희들이구나?”
평행 세계의 아서는 웃었다.
얼마 전 그를 찾아온 ‘녀석’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너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세계의 적들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 아주 독하게 훈련시켜 주마.’
녀석이 말했던 그때가 바로 지금일 터.
“그런데 어쩌나.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망나지 왕자가 아니거든.”
평행 세계의 아서는 웃었다.
다른 세계의 자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의 아서는 다르다.
쿠콰콰콰콰콰!
그의 의지가 뻗어 나간 순간 클론의 몸을 옥죄는 거대한 힘이 사방을 잠식했다.
“대화는 됐고, 일단 좀 맞고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