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Chapter 119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클론인 1,005호는 아슬론과 관계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나름 쓸 만한 것도 있었고, 아주 쓸모없는 사적인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아슬론이란 존재가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 그리고 신념을 가진 바보가 얼마만큼 미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알겠다. 그럼 그만 가라.」
굴종의 종에 의해 멍한 눈빛으로 변한 1,005호.
나는 녀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을 줬다.
스윽-
내가 만든 신념의 검이 녀석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툭.
클론의 목이 분리되어 지면을 굴렀다.
반항이나 기타 어떤 저항도 없었다.
그저 나의 손에 죽음을 맡겼고, 그 대가로 고통 없이 보내 주었다.
지잉, 지이잉-
「크윽…….」
다시금 신념의 힘을 발휘한 순간 귓가에 거대한 이명이 파고들었다.
단순한 이명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 신호.
나를 이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운명의 힘이었다.
‘더는 무리다.’
이 이상 신격의 육신으로 지내다가는 그 거대한 힘에 잡아먹혀 인간으로서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곧장 힘을 풀었고.
파앗!
내 육신을 감싸고 있었던 빛의 기운이 사라졌다.
“후우…….”
그제야 분리하려는 운명의 힘이 사라졌다.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건 역시 위험하네.’
과거 존재하던 일곱 마수를 깨우던 것과는 또 다른 영역.
아마 신격을 흡수하는 등의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시간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크허허헝!」
익숙한 야수의 포효가 들린다.
‘빌어먹을!’
신격의 흡수로 사라졌던 하나의 야수가 다시금 깨어났다.
아니, 깨어났다기보다는 부활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흔적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 7마리의 마수가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다.
‘힘을 쓴 대가인가?’
그제야 깨달았다.
내게 허락되지 않은 그 힘을 사용한 대가는 과거로의 회귀였음을.
다시금 내면에는 7마리의 야수가 자리 잡았고, 운명의 압박은 거세질 것이다.
‘쯧, 별수 없지.’
만약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쓰지 않기 위해 수를 냈겠지만, 몰랐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 이번은 어쩔 수 없는 일.
다음부터는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확은 있으니…….’
상념을 멈춘 채 나란히 쓰러져 있는 카인과 아벨을 응시했다.
비록 완성품은 아니나 아슬론이 완성한 신인류의 첫 표본이 아닌가.
녀석들에게서 들을 내용이 많다.
그리고 하나 더.
‘외부자가 사용한 지팡이란 말이지.’
조금 전까지 클론이 사용했던 강력한 유물.
웅웅웅!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만한 그것을 손에 쥔 순간이었다.
퍼석!
“음?”
이질감과 함께 지팡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건 뭐랄까.
마치 내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과 비슷했는데.
퍼엉!
곧이어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현자의 지팡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쯧, 레플리카(Replica)였나?”
레플리카.
복사본을 말한다.
인간을 복사한 것은 클론이라고 한다면 물건, 즉 지금과 같은 유물을 복사한 것은 레플리카라 칭했다.
지금 폭발한 것은 진품이 아니라 레플리카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타인의 손이 닿았을 때 폭발하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여간 너구리 같은 녀석. 도망갈 수 있는 굴이란 굴은 다 파놨구나.”
대륙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이답게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엔 나를 만나야 할 거다.’
제네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제자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니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장은 아니었다.
‘일단은 이 녀석들을 옮기고…….’
쓰러진 카인과 아벨을 양손에 안았다.
그리고 나의 보금자리를 향해 이동하려고 할 때였다.
두근!
“음?!”
별안간 찾아온 기이한 느낌.
하지만 그건 비단 느낌만을 전해 준 것이 아니었다.
두근두근!
“크으…….”
마치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강렬한 고통을 동반했다.
마계를 정복한 이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고통에 당황하며 상체를 숙였다.
“이 무슨……?”
갑작스러운 고통에 당황했지만 그건 순간에 불과했다.
어느새 고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그 모든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털썩.
재빨리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내 몸을 관조했다.
혹 클론 녀석이 뭔가 저주라든지 내가 눈치채지 못한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으으으으-
의지를 동원하여 나의 몸을 관조한 결과.
“이상은 없는데?”
그 어떤 곳에서도 저주나 다른 이질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나를 속일 만한 저주가 존재할 턱이 없었다.
그런 게 존재했다면 진즉 나는 죽고 없어졌을 테니까.
‘뭔가 이상해.’
하지만 안심할 수가 없다.
분명 고통은 사라졌으나 기이한 느낌이 여전히 나를 압박하고 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건.
‘상실감.’
상실감이었다.
뭔가를 잃은 듯한 느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듯한 그 느낌은 확실히 나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일단은 이동하자.’
당장 알아챌 수 있는 게 없으니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다.
다시금 지면에 쓰러진 카인과 아벨을 안은 채로 마기를 발현.
슈슈슉!
곧바로 공간을 넘어 소튼 왕국으로 이동했다.
*
“으라압!”
힘찬 기합성을 터뜨린 타일로가 지면을 박찼다.
쉬익!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상대를 향해 짓쳐 들었으나.
“하하, 고작해야 그 정도라니. 이거 실망인데?”
하지만 상대인 갈린은 평온하다 못해 여유로웠다.
그리고.
팟!
그의 육신이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어디?!’
그 순간의 움직임을 타일로는 인지하지 못했다.
“뒤!”
뒤쪽에서 들리는 음성에.
휙!
재빨리 뒤돌아서서 목검을 휘두른다.
스윽!
하지만 그의 목검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없어?!”
놀란 나머지 당황한 음성을 내뱉었다.
“하하하, 고작 그런 단순한 속임수에 당하다니!”
정작 갈린이 나타난 곳은 뒤가 아니라 오른쪽 사각지대였다.
퍽!
“크헉!”
그의 주먹이 타일로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내장이 뒤집히는 고통과 함께 육신이 붕 떴고.
쿠당탕!
형편없이 날아간 타일로는 지면을 굴렀다.
“제길……!”
공격을 허용한 타일로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턱.
어느새 다가온 목검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승부는 이미 끝난 것 같은데?”
냉정한 눈으로 쓰러진 타일로를 응시하는 갈린.
“…제가 졌습니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타일로와 갈린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시간의 격차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검과 마법 모두 9성에 이른 갈린을 어찌 타일로가 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 대련은 단순히 둘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타일로가 기대한다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마법과 검 모두 초월의 경지에 달한 상대는 과연 자신의 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확실히 재능은 뛰어나.”
갈린은 조금 전 대련을 통해 타일로의 재능을 봤다.
‘확실히 미친 재능이야.’
그 자신도 아슬론의 눈에 띄었을 정도로 굉장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타일로의 것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뭐랄까.
‘마치 검을 위해 태어난 재능이랄까?’
검을 위해 태어난 사람.
딱 그 말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검에 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할 게 없어 보였으며 그 무엇도 가능할 것만 같다.
솔직히 말해 검에 관해서는 알아서 습득할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르칠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너무 단순해. 심계가 없어. 결투란 건 적을 속이기 위한 승부. 특히 지금과 같이 경지가 높지 않을 때는 어느 정도 요령이 필요해.”
타일로의 검술은 정직했다.
결투란 건 모름지기 적을 속이는 승부. 하지만 타일로는 정직한 기교를 부릴 뿐 심계를 섞지 않았다.
“지금까지야 굳이 심계를 섞지 않아도 될 만한 상대를 만났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아니 아서 님과 함께하다 보면 수많은 강적과 마주하게 될 터. 그러니까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발휘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타일로는 곧장 그 뜻을 받아들였다.
재능이 뛰어나지만 교만하지 않다.
검에 관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
‘그게 더 무서운 법이지.’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웃고 있었지만 갈린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이 미친 재능을 지닌 타일로가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되면서도 두려웠다.
‘뭐, 일단은 적이 아니니. 아군이라면 이만큼 든든한 이도 없겠지.’
그나마 다행한 점이라면 이제 둘은 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서라는 이를 매개체로 하여 이제는 아군이 되었기에 두려운 한편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해 봐. 나는 마법을 사용해서 네 뒤에 음파를 생성했지만 이것 말고도 돌멩이나 다른 사물을 이용해…….”
그렇기에 갈린은 아낌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쩌저적!
돌연 그들이 서 있는 연무장 옆의 공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공간의 균열?!”
놀란 갈린이 재빨리 타일로의 앞에 섰다.
이 정도 규모의 공간 균열을 일으킬 정도면 보통 상대가 아닐 터.
스윽.
검을 들어 혹시 모를 상대에 대비한다.
하지만 그가 검을 사용할 일은 없었다.
“아서 님!”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공간의 균열을 넘어 도착한 것은 적이 아니라 그들이 모셔야 할 주군인 아서였기 때문이다.
털썩.
균열을 넘음과 동시에 양손으로 안고 있었던 두 사람, 카인과 아벨을 내려놓는다.
“수련 중이었냐?”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한 신색이 아서가 말을 걸었지만.
“어어……?”
“이건……?!”
타일로와 갈린. 두 사람은 경악한 채로 아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못 볼 사람이라도 봤냐?”
경악하는 그들의 반응에 아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 그게…….”
“아서 님, 도대체 무슨 일이……?”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보다 더욱더 놀라고 경악한다.
“왜? 무슨 일인데?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말이라도 시원하게 하면 모를까, 왜 저리 말을 더듬는단 말인가.
“아서 님, 팔이…….”
“오른팔, 오른팔을 보십시오.”
경악한 두 사람이 아서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오른팔……?”
그제야 자신의 오른팔을 보게 된 아서.
“씨발, 이게 뭐야?!”
놀란 그는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오른팔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곳에 손을 가져가 봤는데,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통과할 뿐이었다.
“육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그것은 육신의 소멸을 나타내는 것.
게다가 그 변화는 단지 오른팔에만 나타난 게 아니었다.
오른팔에 이어서 오른발도 희미하게 변한 채로 소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