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Chapter 114
다크 엘프의 여왕 제네리아.
그녀는 지금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 녀석이 왜 살아 있지?’
조금 전 강력한 비전 마법을 발현하여 세계수와 그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이들 중에는 눈앞에 있는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단지 눈으로 확인한 것뿐만 아니라 탐지 마법을 발현하여 주변의 기척을 파악했었다.
분명 일대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했건만, 왜?
어째서 이 작자가 눈앞에 있는 것인지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대규모 환영 마법이다.」
그리고 그녀의 스승, 정확히는 그 존재의 파편인 눈동자가 정답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환영 마법은 기척을 숨기지는…….”
「의지를 더한 강력한 마법은 모든 감각을 속일 수도 있으니.」
“…….”
하지만 제네리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자가 나보다 강하단 말인가?’
스승의 말은 곧 눈앞에서 집중하고 있는 저 인간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나는 다크 엘프의 여왕이자 비전 마법의 시초이다.’
외형과는 다르게 그녀는 대장로 아슈리아와 같은 연배이며 태초의 다크 엘프이자 가장 강력한 비전 마법을 연마한 존재였다.
물론 인간이 그 유한한 삶에 비해서는 강력한 존재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 다크 엘프와 비교했을 때나 ‘강하다’는 거지, 그녀와 비교하는 건 그야말로 반딧불과 달빛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이치.
그녀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건방지구나, 인간!”
감히 자신을 무시하고, 스승의 흔적만 쫓는 인간을 향하여 기세를 발산했다.
드드드득-
강대한 마력을 품은 기세가 장내를 짓눌렀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고작 기세의 발현만으로도 대지가 흔들릴 정도였다.
“…….”
하지만 그녀의 절대적인 기세에도 상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랑곳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다.
‘무시해?!’
무시로 일관했다.
여전히 시선은 스승의 존재 파편을 향해 있었고, 그녀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놈!”
분노한 그녀는 곧장 수식을 완성하며 하나의 마법을 발현했다.
스으으-
놀랍게도 그녀의 마력은 세상을 흑백으로 물들였고.
뚝!
마땅히 흘러가야 할 시간의 흐름이 멈춰 버렸다.
시간 정지.
비전 마력을 통하여 얻은 절대적인 권능 중 하나로, 반드시 돌아가는 세계의 톱니바퀴를 일시적으로 멈출 수 있는 마법이었다.
「건방진 인간, 비전 마법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해 주마.」
멈춰진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그녀.
화르륵-
그리고 그녀는 마계의 불길을 끌어온 헬 파이어를 완성했다.
비록 조금 전과 같이 거대한 불꽃은 아니나 비전 마력을 압축하여 만든 것이기에 위력만큼은 조금 전보다 더욱더 강력하다.
「죽어라!」
그리고 그녀의 손을 떠난 헬 파이어가 아서를 향해 날아갔다.
화륵, 화르륵!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강력한 마계의 불꽃.
그러나.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대로 멈춰 있어야 할 아서의 입이 열렸다.
“뭐, 뭣?!”
당황한 제네리아.
어떻게 시간 정지에서 풀려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당황과는 상관없이 아서는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마계의 불꽃은 무슨.”
날아오는 헬 파이어를 보는 아서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마계의 불꽃은 말이야…….”
마치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듯이 중얼거린 아서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화르륵!
그의 손에서 녹색의 불꽃 덩어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크기. 그것은 덩어리라고 말하기 힘든 아주 작은 불씨에 불과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마계의 불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리 말하며 손바닥 위에 떠 있는 불씨를 후, 불었다.
둥실둥실-
마치 민들레 씨앗이 날리는 것처럼 아주 느릿하게 날아가는 불씨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제네리아의 불꽃과 충돌했고.
슥!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침묵의 충돌이 있었다.
“마, 맙소사!”
하지만 그 광경은 제네리아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둥실둥실-
그녀가 발현한 강력한 헬 파이어는 간단히 소멸한 것에 비해 아서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남아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뭐? 비전 마력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어쩌지. 마계의 불꽃이라는 건 말이야, 마기를 사용해야만 진정한 힘을 끌어 올 수 있는 법이거든.”
제네리아의 헬 파이어가 간단히 소멸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계의 불꽃을 일부 끌어왔지만 아서는 마기를 이용하여 직접 마계의 불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계에 피어난 불꽃의 근원과도 같은 것.
그 힘의 일부를 끌어온 불꽃이 근원에 파괴당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이잇!”
당황, 그리고 경악한 그녀는 수십 개의 헬 파이어를 발현했다.
고작 저 작은 불씨에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평소와 같은 지극히 차분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작은 불씨 안에 숨은 위력을, 근원의 힘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스륵, 스르륵-
발현한 수십 개의 헬 파이어는 불씨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화르륵!
오히려 그 힘을 흡수한 불씨는 커졌고, 이내 사람의 얼굴만 한 크기만큼 커졌다.
“이, 이럴 수가……!”
그제야 그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임을 깨달은 그녀는 비틀대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힘이…….”
찰나에 불과한 순간 그녀의 세상은 파괴되었다.
사내가, 아서가 간단히 발현한 작은 불씨 하나로 인해서 말이다.
그 상실감은 말도 안 되게 컸고, 그녀는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화르륵!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마계의 불씨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꺄아악!”
불멸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공포에 짓눌린 적이 없던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팟!
그녀가 죽는 일은 없었다.
“쯧. 그러게 방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녀의 앞을 막아선 존재로 인해 겨우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마치 물결을 형상화한 듯한 푸른 로브를 걸친 사내.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제네리아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
샘의 현자 아슬론.
그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
“이야, 드디어 만났네.”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을 품은 존재.
마치 마력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상대를 보는 순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바로 샘의 현자라 불렸던 아슬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설마 이 녀석이 직접 나타날 줄이야.’
만남이 반갑긴 하다.
그러나 샘의 현자가 직접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 온갖 장치를 마련했던, 철저한 녀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고작 제자 하나 구하겠다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전해 듣기로는 죽었다고 하던데, 그건 새로운 육신인가 봐?”
녀석은 법칙을 비튼 자.
아마도 환생을 통하여 새로운 육신을 얻었겠지.
“뭐, 그런 셈이지. 그리고 대화를 나누기 전에 잠깐…….”
아슬론이 손을 휘젓는 동작을 했고.
슈욱!
다크 엘프의 여왕은 순식간에 차원을 넘어 미지의 장소로 이동했다.
“호오?”
비록 간단한 이동 마법이었지만 범상치 않다.
‘역시 범상치 않네.’
이동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 집중을 통해 그 흔적을 쫓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내가 제대로 마음먹고 실패한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날 어떻게 봤는진 모르겠지만 나름 내 사람은 챙기는 사람이라서.”
내 의중을 파악한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사람이라. 그럼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은 전부 네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로군.”
“부정하지는 않지. 그들은 계획을 위해 필요한 이들일 뿐, 내 사람이라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흐음. 인류를, 대륙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 대단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게 아니었던가?”
“잘 알고 있군. 맞아, 그것이 내 계획의 일부긴 하지.”
잠시 뜸을 들인 아슬론은 이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계획에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이들은 아니지.”
‘그럴 줄 알았다.’
결국 녀석의 계획이라는 건 자신이 선택한 몇몇 이들의 생존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륙 수호라는 거창한 말로 속이고 있을 뿐.
“그리고 이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건데 말이야.”
후드 안에 감춰진 녀석의 뜨거운 시선이 닿았다.
“아서 왕자, 그대 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 중 하나야.”
“뭐?!”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녀석의 행사를 모두 방해한 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니.
“미친 거 아냐?”
그렇기에 솔직한 나의 감상을 말했다.
“아니, 정신은 과거보다 지금이 더 멀쩡해. 그렇기에 그대를 신세계에 넣은 것이고.”
“나를? 왜? 우리는 적이잖아.”
“적?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갑자기 우리가 우호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의 앞에서는 지금까지 일어난 사소한 장난 따위는 얼마든지 웃으며 넘길 수 있지.”
“사소한 장난이라…….”
녀석의 말에 나는 지금껏 행한 일들을 떠올렸다.
클론 공장을 박살 내고, 위대한 일원 및 녀석의 제자, 그리고 각국의 중요 인사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것이 사소한 장난 측에 들어갈 만한 일이었던가?
“별의 운명이 걸린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사소하다 할 수 있지.”
“뭐, 굳이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어쩌지? 앞으로도 네 계획을 방해할 것만 같은데?”
“그렇겠지. 지금까지의 행보로 봤을 때 분명 그리 말할 것 같았지.”
그럼에도 한 점의 동요도 없다.
대체 이 녀석은 뭘까?
배포가 큰 걸까,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걸까.
‘현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고.’
이쯤 오면 녀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 생각이 궁금한가?”
그리고 녀석은 내 내심을 정확히 파악하며 물었다.
“…….”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꽁꽁 감춰 왔던 내가 이렇게 직접 나섰을 때는 분명 뭔가 큰 결심이 있었겠지? 그리고 그 결심은 아서 왕자 그대와 관련이 있다.”
“나와?”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이니 곧장 본론을 꺼내도록 하지.”
그리고 마침내 아슬론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소튼 왕국의 아서여, 나의 뒤를 이어 이 위대한 계획을 완성시켜 주지 않겠나? 그대야말로 내가 찾고자 했던 후계자, 나의 위대한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재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