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Chapter 108
‘가장 위대한 자란 말이지…….’
장내에 들어선 순간부터 누가 느르하인지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기이한 모양의 나무 의자.
마치 스스로 의자로 변한 것만 같은 의자에 앉은 저 미남 엘프가 느르하일 것이다.
‘확실히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네.’
온갖 거창하게 표현을 했기에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대면하게 된 엘프들은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떨거지라 생각했던 하이 엘프들도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 강력한 자연의 힘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두 엘프, 대장로라 불리는 아슈리아, 그리고 느르하의 수준은 관리자나 지배자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수준이었다.
“인간이라. 언제 인간이 이 정도 수준까지 올라왔지?”
내 수준을 가늠하지 못한 것에 상당히 놀란 대장로가 물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걸. 내가 좀 변종이라서 말이야.”
그들의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빤했다.
하지만 내가 특출 난 거지, 인간의 수준이 이렇게 오른 건 아니지 않은가.
“…….”
잠깐의 침묵.
‘이것들 봐라?’
하지만 나는 느르하와 대장로가 수작을 부리고 있음을 파악했다.
민감한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이질감.
그것은 분명 두 엘프가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의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비밀 이야기는 참을 수 없지.’
이럴 때 사용하기 딱 알맞은 신물이 있다.
츠츠츠츠-
나는 곧장 아공간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수십 개의 귀를 한 군데 뭉쳐 놓은 듯한 기괴한 동상이었다.
물론 평범한 동상은 아니다.
72마신 중 48위의 권좌를 차지한 하겐티의 신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엄청난 효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에 마기를 주입하는 순간.
「…그의 경지가 보입니까?」
곧장 대장로의 의지를 도청할 수 있었다.
하겐티의 신물 ‘세상의 귀’는 소리, 의지 그것이 무엇이든 뜻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도청할 수 있다.
「그의 업이 보이질 않습니다. 마치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만 같이 흐릿하군요.」
「흐음, 느르하 님에게도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면 그것을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해야 하겠군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한낱 인간 따위가 그 영역에 도달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그렇긴 합니다만,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경지를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범상치 않은 건 사실이니.」
두 엘프는 빠르게 의지를 주고받았다.
물론 그 내용이라는 것은 나에 대한 경계였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주 잘못 짚었다.
‘난 감추고 있지 않은데?’
지금껏 나는 단 한 번도 내 경지를, 그 힘을 숨겨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것을 숨길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녀석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경지를 숨기는 독특한 권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나큰 착각에 빠진 녀석들은 이미 결론을 지은 채 대화를 멈추곤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설마 거목의 심장부에서 인간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그대와 같이 범상치 않은 인간이라면 맞이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
속내를 감춘 채 푸근한 미소를 짓는 대장로.
과연 나이를 그냥 먹은 게 아닌 듯 여우와 같은 심계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건 하나 확실히 알아 둬야 할 것 같네만. 그대의 방문 목적이 궁금해서 말이야.”
한마디로 호의로 접근하는 것이냐, 적의로 접근한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그건 대답 여하에 따라 다르지.”
영감 엘프가 나서고 있었지만 내 관심사는 그가 아니다.
시선을 돌려 세계수의 의자에 앉아 있는 느르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느르하, 네게 물어볼 것이 있다.”
“내게?”
“그래,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아마 내가 너희가 환영할 만한 손님일지, 아니면 여길 쓸어버릴 악당이 될지가 달라질 거라서 말이야.”
그것은 명백한 도발.
“감히!”
“인간이 참으로 무례하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왕궁, 황궁에서 자주 봐 왔던 반응이다.
대장로나 느르하와는 달리 내 티끌만큼의 수준도 파악하지 못한 하이 엘프들이 기세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만!”
하지만 느르하는 기존의 어리석은 지도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주제도 모른 채 나서려고 하는 그들에게 일갈한 그.
“질문이라.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녀석의 안광이 번뜩인다.
“…광오하군. 아무리 그대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은 영역에 도달했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그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을 텐데?”
느르하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빤했다.
“이곳? 아! 설마 세계수의 영역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 인간. 거목의 심장부, 아니 세계수의 영역에 있는 이상,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우리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녀석의 말은 사실이다.
엘프의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세계수는 강력한 힘을 지닌 태초의 생명체.
당연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마력의 침묵’이라 불리는 결계였다.
느르하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수의 영역에 들어가는 곳(특히 세계수와 가까울수록)은 마력의 침묵 현상이 일어나 그 어떤 이도 마력, 혹은 기를 사용할 수 없다.
단, 예외가 있다면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이들, 그러니까 세계수에서 태어난 엘프들이었다.
쉽게 말해서 세계수의 결계가 펼쳐져 있는 이곳에서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은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쯧. 자신의 힘도 아니고, 고작해야 세계수의 결계 따위를 믿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무척 실망이 큰데.”
“하하, 건방지군. 감히 인간 따위가 함부로 부를 만한 힘이 아니다.”
대장로와 의견을 교환했던 것과 달리 느르하 녀석은 꽤 강경하게 나왔다.
아마 인간 따위에게 조금이라도 양보하려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게 정상이긴 하다.
명색이 자신의 영역에서, 그것도 하찮게만 여긴 인간이 왔는데 강하게 나가는 게 정석이긴 하지.
“응, 나는 돼.”
아무래도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니 조금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강제력을 동원해야 할 것 같다.
“모처럼 힘 좀 써 볼까.”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웅웅웅!
아공간을 빠져나온 파멸이 웅후한 검명을 토하며 내 손에 안착했다.
스으으으-
마치 한 몸이었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 오른손을 통해 스며든다.
‘확실히 잘 만들었단 말이야.’
새삼 이 검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괜히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게 아닌 듯 확실히 드워프가 만든 검은 내가 소지하고 있는 그 어떤 신물보다도 편안했고, 또한 나와 잘 통했다.
그렇기에 내 모든 힘을 가감 없이 펼칠 수 있다.
“네 녀석들이 증명을 원하니 확실히 증명해 줄 수밖에.”
힘의 증명을 원해?
그렇다면 확실히 보여 준다.
콰콰콰콰콰콰!
자연스레 뿜어져 나온 나의 기세가 세계수가 억제하고 있는 영역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마력의 침묵이 펼쳐진 공간. 세계수의 힘이 나를 억누르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발악하기는.”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거센 압박.
하지만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수준이라는 거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흐읍!”
오랜만에 상당한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콰콰쾅!
분명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연이은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이, 이럴 수가!”
그 현상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느르하와 대장로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폭발이 나타내는 것.
그것은 나의 힘을 억제하지 못한 세계수의 결계가 밀려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곳을 지켜 왔으며 그 누구의 힘도 허락지 않았던 세계수의 결계가 밀리고 있는 것이다.
그 뜻을 알고 있다면 두 엘프처럼 경악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쿠쿠쿵!
가감 없이 발현한 내 기운은 세계수의 결계를 완전히 몰아냈다.
“이래도 네가 유리해 보여?”
결계를 밀어냈기에 나 또한 다른 엘프들처럼 세계수의 영역에서 자유로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
내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덜덜덜-
세계수의 결계가 밀려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이 엘프들도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부릅뜬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지.
“그리고 이건 손님 대접이 엉망인 것에 대한 일종의 서비스라고 해 두지.”
느르하에게서 얻어 내야 할 정보가 많다.
그렇기에 애초에 기를 죽일 작정으로 더욱더 강력한 힘을 끄집어냈다.
화악!
마치 빛이 퍼져 나가듯 나의 존재와 의지가 거목의 심장부를 가득 채웠다.
“으으으…….”
“마, 맙소사!”
그 힘을 깨달은 녀석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자, 그럼 경악하는 녀석들을 까무러치게 만들어 볼까?
웅웅!
손에 쥔 파멸에 나의 막대한 마기와 의지를 모두 주입했다.
그 엄청난 힘을 받은 파멸은 점차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스으으으으-
이내 그 모든 빛을 갈무리하여 무색의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힘.
끝내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야 마는 내 존재의 힘이자 내게 주어진 운명의 격인 파멸의 힘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결계의 보호를 받아 왔으니, 이제 알 껍질을 깰 때가 됐지.”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엘프 녀석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세계수의 보호 아래 번영을 누려 왔다.
아무리 태초부터 존재해 온 숲의 종족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
그렇기에 나는 이 불평등을 깨고자 한다
“그만 사라져라!”
의지를 담은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스윽!
나는 내 모든 기운을 담은 파멸을 머리 위에서부터 땅 끝으로, 한 차례 그었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뭐, 뭐지?”
“분명 엄청난 기운이 공간을 갈랐거늘.”
“대체 이게 무슨…….”
당황하는 엘프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엄청난 기운이 응집된 파멸이 분명 공간을 갈랐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하이 엘프들과 달리 느르하와 대장로는 그 변화를 눈치챈 것 같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변화를 감지한 그들이 분노와 원망으로 일갈했고.
그와 동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슥.
공간이 갈라진다.
스스슥!
아니, 공간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엘프들을 보호해 왔던 세계수의 결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콰챠챠챠챵!
조금 전 파멸로 인하여 베어 버린 공간이, 세계수의 결계가 완전히 박살 나면서 굉음을 동반했다.
“언제까지 세계수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래. 인제 부모의 품을 벗어나 독립할 때도 됐잖아?”
그런 그들을 향하여 세상의 이치를 설명해 줬다.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자식은 결코 성장할 수 없는 법.
그렇기에 손수 결계를 깨부숴 줬으니 오히려 내게 절을 하며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