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Chapter 99
‘어쩐지 존재의 무게가 형편없더라니.’
솔직히 말해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늘 예상은 빗나가는 법.
막상 마주한 샘의 현자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인외의 경지인 10써클에 오른 초월의 마법사?
‘인외는 개뿔. 써클이라는 경지에 머물러 있으면 다 거기서 거기지.’
말을 붙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나 인외니 초월이니 거창한 말을 붙이는 거지 실상 10써클이란 건 어차피 써클이라는 한정된 경지에 머무른 이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가볍게 뻗은 내 주먹 하나 못 피했지.
진짜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으면 조금 전 동작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막아 냈을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치유 마법으로 코피를 지혈한 녀석이 분통을 터뜨린다.
‘호오, 과연!’
과연 현자라서 그런지 치유 마법도 사용할 줄 아는 모양이다.
하긴. 현자라는 호칭이 부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
“귀 안 들려? 말했잖아. 가짜랑은 볼일 없다고.”
“네 이놈!”
분통은 곧 호통으로 바뀌었다.
“내 그래도 네가 왕국의 왕자라 대우를 했건만 어찌 이리 건방을 떨 수 있단 말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내가 누구라고…….”
“너? 샘의 현자로 변장하고 있는 가짜.”
그리 말하며 반응을 살폈다.
“헛소리!”
하지만 녀석은 이를 헛소리로 치부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녀석을 유심히 응시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기세를 읽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것 봐라?’
지금껏 수많은 이들을 만나며 그들의 기세를 읽어 거짓과 진실을 파악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가짜 현자는 정말 내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었다.
음성의 떨림, 그리고 느껴지는 기세는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었지만.
‘세뇌로군.’
곧장 진짜 녀석이 행한 악행을 파악했다.
장담하건대 녀석은 자신이 진짜라고 믿게 세뇌당한 다른 인물일 것이다.
그러니까 녀석 입장에서는 가짜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인 것.
아무리 내가 예리하게 녀석을 관찰해도 거짓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침입자다!”
“현자님을 지켜라!”
지식의 샘에서 일어난 소란에 반응하여 병력이 진입했다.
척척척- 칠흑의 갑옷, 그리고 갑옷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비상하는 매,
‘검은 매 기사단이로군.’
그 문양을 통해 곧장 그들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검은 매 기사단.
샘의 현자 아슬론이 대륙을 방랑하며 거둔 고아들로 이룬 무력 집단.
한낱 고아에 불과한 이들로 구성된 집단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할까.
처음 검은 매 기사단이 등장했을 때 모두가 품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간의 평가는 단단한 착각이라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샘의 현자를 떠올릴 때면 반드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사건.
오트안 산맥에서 일어난 마물 폭동.
평소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오직 먹이 사냥에만 열을 올리던 마물들을 규합한 변종 오우거 타렉의 등장과 함께 대륙은 역사상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마물 군단에 의해 피해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가장 큰 화약을 벌인 이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이들, 검은 매 기사단이었다.
위기의 순간 영웅처럼 나타난 그들은 아슬론을 필두로 강력한 마물 군단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들 검은 매 기사단 모두가 7써클, 그리고 7성의 경지를 이룬 마검사라는 점이었다.
사실 마검사라는 게 흔히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자연에 퍼져 있는 마력을 빌려 쓰는 마법사
그리고 마력을 자신의 몸 안에 축적하여 이를 기로 전환하는 기사.
이 두 가지 에너지를 동시에 다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특이체질이나 혹은 대단한 재능을 지닌 이가 아니면 마검사가 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시선이었는데, 수백 명이나 되는 마검사 기사단이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그리고 이들의 대단한 활약을 통해 마물 군단은 패배하였고, 대륙은 최소한의 피해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검사만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란 말이지.’
그 대단하신 위명의 기사단이 눈앞에 있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지만 사실 그리 새롭지는 않다.
“검은 매 기사단은 당장 침입자를 제압해라!”
“충!”
아슬론의 명령에 곧바로 답한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색색의 마력이 발현되어 검에 덧씌워진다.
누군가는 화염을, 누군가는 빙결을, 그리고 누군가는 번개를.
다양한 속성이 검에 부여되었고.
콰콰콰콰콰!
이것이 그들에게 축적된 기와 합쳐져 더욱 강렬한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검은 매 기사단의 가장 큰 특징.
단순히 마법과 검을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두 성질의 에너지를 융합하여 본래의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파팟!
사방을 포위한 녀석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순발력을 높인 보조 마법 덕분에 그 움직임은 굉장히 민첩했고.
슥, 스슥!
마력과 기가 융합한 녀석들의 검격은 상당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새삼 추억이 떠오르네.’
하지만 그 검격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건 ‘추억’이었다.
과거 원정대원들의 복수를 위하여 마계를 방랑하던 그때.
나는 어떻게든 강해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연구했다.
기, 마력, 마기, 신성력.
다룰 수 있는 모든 걸 다루려 했고,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기와 마력의 융합이었다.
지금 검은 매 기사단이 발현한 건 내가 가장 초기에 발견했던 형태였다.
내 기준에서 녀석들의 융합 형태는 10단계 중 고작 1단계.
아무래도 녀석들에게 개안(開眼)의 기회를 줄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그딴 수준으로 나랑 어울리기는 무리지.”
스릉-
아공간에 보관되어 있던 아무 검을 꺼냈다.
“오오!”
“훌륭한 명검이로다!”
아무거나 꺼낸다고 꺼냈는데, 보는 귀족 입장에서는 그런 명검이 또 없나 보다.
뭐, 내가 지닌 것 중에서 ‘보물’에 들어가지 않는 게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카카카캉!
사방에서 쇄도하는 녀석들의 검을 가볍게 튕겨 냈다.
마치 파리를 쫓듯 허술한 동작이었으나 그 허술함이 기사단이 펼친 합공을 연이어 튕겨 내고 있었다.
“합!”
“흐압!”
하지만 녀석들은 포기를 모르는 것처럼 더욱더 강력한 힘을 부여하며 덤벼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녀석들을 벨 수 있을 테지만.
‘그건 너무 시시하잖아.’
해서 녀석들에게 가르침을 줄 생각이다.
물론 이 가르침을 받고 녀석들이 깨달음을 얻을지 아니면 절망에 빠질지는(솔직히 말해서 절망에 빠질 확률이 99%지만)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고작 하나의 속성을 융합하는 건 너무 옛날 방식이잖아?”
끊임없이 덤벼드는 녀석들을 향해 이죽였다.
그리고.
화륵!
화염 속성의 마법을 검에 부여하였다.
사실 마법을 다루는 이라면 사물에 속성을 부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하나의 속성을 부여하는 일이 아니었다.
솨아아-
불과 물이 공존한다.
파지직!
그리고 그곳에 번개의 기운이 머물렀다.
3개 속성이 끝. 아니?
그곳에 대지와 바람, 그리고 빛과 어둠이 머무른다.
“무, 무슨?!”
“맙소사…….”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덤벼들던 검은 매 기사단 전원이 입을 벌린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녀석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 다중 속성을 다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다중 속성을 동시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니까.
여기에 한 가지 더.
콰아아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기를 주입했다.
여러 개 속성과 함께 나의 기가 한데 어울리며 찬란한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게 단계로 치자면 한 7단계쯤 되려나?”
다중 속성과 기의 융합.
그 찬란한 빛은 녀석들이 발현한 하나의 속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었다.
“7, 7단계라고? 그럼 그 이후의 단계도 있단 말이냐?”
하지만 검은 매 기사단보다 더욱더 놀란 건 아슬론이었다.
당연하겠지. 검은 매 기사단을 창단한 것도, 그리고 그들을 교육한 것도 모두 그일 테니까.
사실 조금 전 녀석의 존재를 관찰할 때 확인했다.
세간에는 그냥 마법사라고, 현자라고 알려진 녀석 또한 마검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놀랐을 것이다.
자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경지를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차피 보여 준 거 확실하게 다 보여 주자.
“그리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면.”
내 수준이 고작해야 이 정도에 머무를 턱이 없지 않은가.
1,000년이 넘도록 오직 강해지는 것 하나만을 연구해 온 나의 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악!
나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에너지 마기를 주입하였다.
그 순간 찬란하던 빛이 점차 색을 잃었다.
찬란한 빛을 대신하여 검에 부여된 건 회색의 기운.
“이게 바로 혼돈이라는 것이지.”
여러 가지 기운이 뒤섞여 마침내 혼돈의 기운을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혼돈의 기운은 대륙에, 아니 모든 차원에서 존재하는 기운 중에서도 최상위에 들어가는 것.
이 기운을 다룰 수 있는 건 신격을 제외하면 없었다.
“…….”
“…….”
경악하며 놀라던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혼돈의 기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경험해 보진 못했겠지만 그 기운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힘’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놀랐어? 그런데 이걸 어째. 이게 끝이 아니거든.”
오랜만에 단계를 거치다 보니 옛 생각도 나고 즐겁다.
아, 물론 여기에 놀라는 반응까지 더해 주니 가르치는(?) 맛이 더 있다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혼돈의 기운은 내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기운이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 양념을 더 추가해야만 한다.
「합일(合一)!」
마지막 추가할 재료는 의지였다.
그것도 보통의 의지가 아니라 억겁의 세월 동안 단련된, 오직 강해지고자 하는 내 의지가 벼려 낸 그 힘이 더해진 순간.
뚝!
차원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인해 주위의 모든 마력의 흐름이 단절되어 버렸다.
“허업!”
“커흑!”
갑작스레 일어난 마력의 단절로 마력을 다루는 모든 이들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력을 다루는 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
그런데 이 한정된 공간에서는 마력을 다룰 수 없으니 그 허전함을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완성한 최고의 기운이자 속성, 공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새까맣게 물든 기운이 검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궁극적으로 완성해 낸 속성인 공허.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로 돌려 버리는 최강의 속성이었다.
덜덜덜덜-
비록 공허에 대해서 모르겠지만 그 기운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는 공포에 물들 수밖에 없다.
장내의 모두가 공포에 물든 채로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가짜와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고…….”
녀석이 세뇌당한 가짜인 이상 할 이야기, 그리고 들어야 할 정보는 없다.
하지만.
“세뇌당한 본래 주인이라면 다르지!”
그리 말하며 공허가 담긴 검을 휘둘렀고.
서걱!
그것은 현자로 위장한 가짜가 손에 쥔 나무 지팡이를 두 동강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끄으악!」
나무 지팡이에 깃들어 있던 존재.
가짜 현자를 지배하고 있었던 정신체는 소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