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Chapter 98
넓은 땅덩이만큼 아크란 대륙에는 다양한 왕국과 제국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엘프가, 드워프가, 그리고 오크가 세운 제국도 있으나 누가 뭐라고 해도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인간’의 제국이 가장 강성하다고 할 수 있다.
동쪽의 임펠 제국.
서쪽의 도리아 제국.
남쪽의 크발칸 제국.
그리고 한때는 대륙의 절반을 넘게 지배하였던 강철의 제국 크루노아.
이 중 크루노아 제국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초대 황제이자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마검사 레이안이었다.
당시에는 대륙 최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강자였던 탓에 크루노아 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강철의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없는 법.
레이안의 죽음과 함께 크루노아 제국은 추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5대 황제인 그웬 체제에 왔을 때는 유일한 제국이라는 위상도 추락, 그들을 견제하는 3개 제국이 새롭게 건국되고야 말았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이를 견제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지만 당시의 크루노아 제국은 ‘악의 축’이라는 취급까지 받는 처지였다.
이에 맞서 새롭게 건국된 임펠, 도리아, 크발칸 제국은 악의 제국에 맞서는 정의로운 제국으로 둔갑해 있었고, 강철의 제국이라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츰 힘을 잃어 이제는 제국이 아니라 왕국으로 취급받고 있던 그때 한 사람이 등장했다.
궁정 마법사 아슬론.
대륙에 아무런 명성도 없었던 한낱 마법사의 등장으로 크루노아 제국은 다시금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오트안 산맥의 마물 폭동.
무려 1개월 동안 이어진 대륙의 흉년.
티모레 항구의 해일 사건 등.
단지 제국 내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륙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 온갖 사건과 전쟁, 재해 등을 예언하거나 해결한 것이다.
-샘의 현자!
-그는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신이 내려 준 구세주다!
항상 예언할 때면 샘에 가서 점을 치는 그 행동으로 인하여 ‘샘의 현자’라는, 아크란 대륙 역사상 세 번째의 현자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아슬란이 소속된 크루노아 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편되었다.
대륙을 좀먹고 있는 악의 제국에서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수호의 제국이 되었다.
사실 그것은 크루노아 제국의 꿈이었다.
그간 수십만 명의 백성들과 무수히 많은 권력자, 그리고 제국 출신의 강자들이 이루고자 했던 일을 단신으로, 그것도 고작해야 10년 만에 이루어 낸 것이다.
이후 샘의 현자 아슬론과 크루노아 제국은 대륙을 수호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 과거의 추락을 벗어나 대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고작 한 사람, 샘의 현자 아슬론으로 인해서 말이다.
*
퐁당!
푸른 샘물에 작은 돌멩이가 떨어져 파문이 일었다.
“흐음…….”
그리고 번지는 파문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중년의 사내.
남루한 회색의 로브와 허술한 나무 지팡이를 든 그의 눈빛은 세상 그 어느 별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왔군!”
파문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드디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조금은 초라한 중년인과는 달리 보석, 그리고 온갖 화려한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그들은 어딜 봐도 명백한 귀족들이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이 하나의 나라에 소속된 이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슴에 새겨진 문양은 대부분이 제각각,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이곳에 대륙의 수많은 유명 귀족들이 다 모여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샘에 깃든 지식이 제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가 입을 열었다.
“현자님,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흉흉한 일들이 많이 벌어져 불안해하던 차였습니다.”
“최근에 대흉년 또한 있지 않았습니까. 대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불안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들이 물었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명예와 권위를 지닌 귀족들이 이곳 지식의 샘에 몰려든 이유는 최근 흉흉한 여러 ‘전조’ 때문이었다.
대흉년을 시작으로 마물의 폭동, 그리고 드래곤의 위협 등 최근 너무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본래 거대한 재앙이 닥치기 직전 여러 전조를 동반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대륙의 사람들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혹여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움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끼리 교류를 가지던 그들은 이러한 불안감을 공통적으로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급기야 지식의 샘, 크루노아 제국의 상징인 샘의 현자 아슬론을 찾아오게 되었다.
-최근에 불길한 전조가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예언을 해 달라.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부탁일 수 있다.
하지만 샘의 현자는, 진심으로 대륙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는 그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권능을 발현하였다.
그것이 바로 황성 지하에 마련된 지식의 샘에서의 예언 의식이었다.
돌을 던져 생기는 파문을 통해 샘에 담긴 지식을, 그 미래를 엿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던 예언이었던 터라 모두가 기대 반, 불안 반을 가지며 그 내용이 나오길 기다렸다.
“샘은 불안에 떨 필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오오!”
예상과는 달리 예언의 내용은 그 어느 때보다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평화가 지속된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그 내용의 진위 여부에 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눈앞에 있는 이는 샘의 현자였다.
지금껏 수백 번의 예언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야말로 ‘진짜 예언가’가 아닌가.
그의 예언이라면 당장 내일 대륙이 멸망한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럼 최근 일어난 대흉이나 불길한 전조는……?”
하지만 유독 의심이 많은 귀족이 재차 물었고.
“하하하, 그것은 재앙에 관한 전조가 아니라 늘 반복되는 운명의 굴레이지요. 여러분들께서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겠으나 샘은 정확히 예언했습니다. 앞으로는 이 평화가 지속될 거라고. 그러니 불안에 떨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말입니다.”
재차 확답하는 말에 그제야 모두가 안심한다.
“그래? 정말 아무 일 없는 게 확실해?”
하지만 때아닌 평화를 깨뜨리는 음성이 있으니.
“무슨 그런 망발을!”
“감히 누가!”
샘의 현자가 그렇다고 하는데 감히 그 누가 있어서 그 말에 반발할 수 있단 말인가.
대로한 귀족들이 사방을 둘러보며 음성의 주인공을 찾았다.
“나다, 이 새끼들아.”
그리고 입구 쪽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응?”
“누구?”
분노한 음성에 이어 의문이 터져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습을 드러낸 이를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식의 샘에 있는 이들 모두는 교류를 가진 귀족들.
그런데 그들이 가진 교류에서 푸른 머리칼을 찰랑이는 미남자는 없었다.
“가만?!”
하지만 아예 모으는 얼굴은 아니었다.
“당신은 혹시…….”
“소튼 왕국의 망나니 왕… 아차차!”
“그래, 생각났다. 아서 왕자님이 아니십니까?”
다들 각자의 왕국에서 꽤 높은 위치의 인물들이었기에 다른 왕국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아서의 경우에는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워낙 악명이 자자해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서 왕자님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정체를 파악한 이후에도 의문은 여전했다.
그들이야 작정을 하고 크루노아 제국을 방문해 아슬론과 대면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예언을 진행하는 중에 함부로 난입할 수는 없는 것.
“무슨 일이긴. 우리 잘나신 현자님을 뵈러 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아서 왕자의 말에.
“그 무슨!”
“지나치십니다!”
“어허, 여기가 소튼 왕국인 줄 아시오?”
곧장 호통이 뒤따랐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소튼 왕국이 아니었다.
아니, 설령 그가 소속된 왕국이라 해도 제국의 궁정 마법사이자 대륙의 예언가인 아슬론에게 이리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아,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로한 귀족들과는 달리 아슬론은 지극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저벅- 그는 아주 맑은 눈빛은 유지한 채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아서 왕자와 대면했다.
“왕자님, 제게 볼일이 있으신지요?”
“볼일이야 많지.”
“하하, 저는 항상 소문을 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왕자님에 대한 소문은 확실히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군요.”
망나니 왕자라는 부분을 꼬집어서 말한 것이다.
“뭐, 마냥 틀린 소문은 아니지.”
물론 아슬론의 비아냥에 아서 왕자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보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게 되니까 좋네.”
“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의문이 터져 나왔다.
“직접 보게 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따로 통신하여 연락한 적이라도 있었습니까?”
보지 않고 대화했다 함은 통신 마법이나 도구를 사용했을 때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슬론의 기억에서 이 망나니 왕자와 따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흐음…….”
하지만 아서 왕자는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유심히 샘의 현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그랬군.”
그러다가 이내 자신의 손뼉을 치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어쩐지 흑막 녀석이 이렇게 뻔히 돌아다닐 리가 없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래, 알 턱이 없지.”
씨익- 아서 왕자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의미의 미소가 더욱 진하게 번지고.
“일단 너랑은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네.”
“…….”
순간 아무리 침착한 아슬론이라고 해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뭔가, 이 자신감은?’
아무리 망나니 왕자라고 해도 멀쩡히 남의 황성에서, 그것도 제국의 중요 인사에게 이리 무례할 수 있다니.
“참으로 무례하시군요. 당신의 왕국에서는 그것이 허용됐을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하지만.
퍽!
갑작스레 전해진 충격으로 인해 아슬론은 그 이상 말을 잇질 못했다.
“커허헉…….”
안면에 느껴지는 강렬한 진동과 함께.
주르륵- 그의 코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저런!”
“맙소사!”
“싸, 쌍코피?!”
그 모습을 확인한 귀족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인외의 경지, 마법의 종족인 드래곤 중에서도 도달하는 이가 극히 드물다는 10써클의 경지에 이른 샘의 현자가 쌍코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쌍코피를 낸 대상이 바로 소튼 왕국이라는 소국의 망나니 왕자라는 사실.
“자, 가짜는 그만 퇴장하고, 이제 진짜가 나와 줘야 할 것 같은데?”
샘의 현자에게 쌍코피를 선물해 준 아서 왕자는 특유의 그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