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Chapter 97
『원정대 마계 진입 첫날.』
끊임없이 펼쳐진 핏빛의 지평선.
“이, 이곳이 마계?!”
“이제 영영 돌아갈 수 없겠구나…….”
“무슨 소리! 샘의 현자께서 말씀하셨잖아. 마왕을 죽이면 탈출할 수 있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조금 전 마계에 당도한 마계 원정대는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원래 인간이란 게 그렇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오는 불안감, 그것도 강력한 마족과 마왕이 도사리고 있는 마계라면 그 불안감의 정도가 더욱더 클 수밖에 없다.
“엉엉엉. 엄마, 아빠!”
그리고 그 극단적인 예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게 소튼 왕국의 아서 왕자였다.
“아이고, 왕자님.”
“체통을 지켜 주십시오. 이 무슨 꼴불견입니까.”
“왕자님, 조금만 진정을…….”
그를 수행하기 위해 온 기사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비록 왕위에서 멀어진 존재긴 하나 그래도 여전히 1왕자가 아닌가.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망나니 왕자는 쉽사리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소란이 일고 있는 왕자 무리와는 멀리 떨어진 전면.
“상당히 소란스럽군.”
“뭐, 보나 마나 망나니 왕자가 문제겠지.”
그 소란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어딜 봐도 범상치 않은, 온갖 화려한 무구로 몸을 감싸고 있는 이들.
“용사님,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세리아 님, 부디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원정대 모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들 다섯 명이야말로 마계 원정대의 주축, 마왕을 죽일 신탁을 받은 용사 일행이었기 때문이다.
용사 일란.
북부의 방패 고단.
빛의 성녀 세리아.
바람의 화살 카리오스.
그리고 샘의 현자가 키운 유일한 제자이자 18살 나이로 9써클에 오른 대마도사 클랑.
비록 이곳이 험악하기 그지없는 마계라 해도 이들, 용사 일행이 있는 이상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됐고.”
용사의 상징, 황금빛 찬란한 광채를 발산하는 용사의 검 아크를 든 일란이 음성을 낮췄다.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동해야지?”
그 은밀한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씨익- 평소 그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싸늘한 미소가 나왔다.
주변의 원정대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했다.
“곧바로 연결할게요.”
이동을 담당하는 클랑이 마력을 발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
마력의 발현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오히려 당황한 클랑의 음성만이 나올 뿐이었다.
“뭐해. 장난하지 말고.”
“재미없어. 빨리 이동해.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니까.”
평소 장난기가 많은 클랑이었기에 일행 모두가 그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 안 돼요. 마력 발현이 안 된다고요!”
하지만 클랑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다.
피시식- 마력을 발현하려고 하면 금방 연기와도 같이 흩어져 버렸다.
“잠깐!”
그제야 이상한 상황을 눈치챈 일란 또한 마력을 발현하려 했다.
그러나.
피시식-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속에 차오르는 막대한 마력은 금방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어어?!”
“저, 정말이잖아?”
일란과 같이 모두가 마력을 발현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시선은 성녀인 세리아에게 향했다.
그녀의 힘은 마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성력’이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신이 부름에 답해 주시지 않아요…….”
그러나 들을 수 있는 답은 절망적이었다.
기, 마력, 그리고 신성력까지. 인간들에게 주어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클랑,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분명 현자님께서 네게 따로 명령을 내렸다 하지 않았느냐.”
“네, 네네. 그랬어요. 분명 스승님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겠다고…….”
“그게 마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거야?”
“네…….”
“씨벌!”
결국 참다 못한 고단이 욕설을 내뱉었다.
“진정해라, 고단. 아직 모른다.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니…….”
냉철한 일란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드드드드-
그들을 찾아온 건 수상쩍은 진동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웬 진동이……?”
낯선 환경에 처한 원정대는 작은 변화에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예민한 반응이 아니었다.
쿠콰콰콰!
지면을 뚫고 기어 올라오는 괴생물체.
“쿠오오오!”
그것은 거대한 지렁이였다.
일반적인 지렁이와는 달리 거대한 아가리, 그리고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뾰족한 이빨.
원정대를 처음으로 맞이한 건 핏빛 대지의 포악한 마수인 클링카였다.
“하찮은 마수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지만 마수의 등장에도 원정대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었던 건 자연재해와 같은 것.
고작해야 덩치만 큰 지렁이의 등장은 오히려 반길 만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명색이 대륙의 대표로 뽑힌 이들이었다.
아서 왕자를 비롯해 몇몇 특별한 사정을 제외하면 대륙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것.
그런데 고작해야 지렁이를 닮은 마수?
“흐아압!”
“죽어라!”
실력에 자신 있는 몇몇 기사들이 앞으로 나아가 클링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만 보자면 당연히 클링카의 거대한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났어야 하지만.
카앙!
“큭!”
날카로운 검은 몸뚱이를 베지 못했다.
단단한 거죽에 의해 튕겨 나온 검, 그리고 그 반탄력으로 인해 비틀대며 물러서야만 했다.
“마, 마력이……?”
“이럴 수가!”
평소였다면 클링카를 베어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전해 주는 마력이 부여되지 못했다.
그들도 뒤늦게야 깨닫게 된 것이다.
초인적인 힘을 내어 주는 마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후오오오!”
클링카 무리는 흥분했다.
본래 먹이가 풍부하지 않은 황량한 장소. 그런데 그곳에 별반 저항도 하지 못하는 먹이가 알아서 들어온 것이다.
쿠콰콰콰!
모처럼 맛보는 특식에 흥분한 클링카 무리가 날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리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퍼지는 달콤한 피 냄새에 이끌린 무리가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도, 도망쳐!”
“으아아아악!”
원정대에 찾아온 건 공포였다.
대륙에서 잘나가던 기사도, 마법사도, 그리고 실력자라 칭송을 받던 이들도,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공포에 질린 채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의 그들은 도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까득까득.
거대한 아가리에 삼켜진 원정대원들.
1만에 달하던 대규모 원정대는 불과 몇십 분이 지났을 때는 고작해야 1천 5백으로 줄어 있었다.
그마저도 클링카 무리가 포식으로 인해 잠복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모두 전멸을 면치 못했을 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살아남은 원정대 중 일부는 허망한 시선으로 조금 피의 강을 이룬 지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1,000년이 지난 지금도 마계의 첫날은 잊을 수 없다.
마계 원정대를 주도했던 샘의 현자, 그리고 현자와 마지막까지 면담을 진행했던 수상쩍은 용사 일행의 행동.
그 모든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샘의 현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얼마든지 예언이 틀릴 수 있는 데다가 심증만 있었기에 따로 죄를 묻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언급이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드디어 듣고 싶었던 답을 들었다.
위대한 일원, 그중에서도 간부급이라 할 수 있는 얼음 덩어리 녀석이 마침내 샘의 현자를 언급한 것이다.
「녀석이, 샘의 현자가 너희에게 금제를 가한 거겠지?」
조금 전 나타난 눈동자.
아마도 그것이 샘의 현자가 일원들에게 가한 금제일 터.
“…맞습니다. 그분은 일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사소한 금제를 받아야 한다며 말했습니다. 특히 중요 간부들에게는 더더욱 강력한 금제를…….”
혹시가 역시!
과연 예상했던 대로 그 거대한 눈동자가 샘의 현자였다.
‘그런데 샘의 현자가 그리 강력한 존재였나?’
금방 의문이 떠오른다.
알려진 바로 샘의 현자는 본인의 무력보다는 예언, 그리고 끝없는 지식과 혜안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겪은(물론 파편에 불과하긴 하지만) 녀석의 무력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달랐다.
‘파편이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적어도 신격 이상이라는 소린데.’
고작해야 존재의 파편에 불과한 눈동자가 그런 힘을 발휘할 정도면 그 본체의 수준은 이미 신격을 넘어섰을 터.
신격이 강림한 것도 아니고, 그만한 무력을 지닌 이가 인간에 불과하다니.
아무리 내가 그러한 존재라지만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묻겠다. 너희가, 샘의 현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
줄곧 그것이 궁금했다.
대체 뭐 하는 단체이기에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꼭꼭 숨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
솔직히 그 정도 전력이라면 대륙을 제패해도 당장에 제패할 수 있을 터인데.
“…궁극적 목적은 외부의 존재에게서 대륙을, 인간을 수호하는 것. 우리는 그 숭고한 뜻을 위하여 협력… 컥!”
하지만 녀석은 끝까지 답을 잇질 못했다.
울컥 토한 선혈은 붉다기보다는 검게 죽어 있었다.
‘벌써?’
의지를 강제로 제압한다는 건, 특히나 내 강력한 의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건 인간에 불과한 빙마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육신과 정신은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외부의 존재? 그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 거지?」
“커, 커헉… 공허에서 태어난 존재… 별을 삼키는 자들…….”
번쩍!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 녀석들을 말하는 거군.’
관측자, 관리자, 지배자.
별을 삼킨다는 단어에서 곧장 그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 속해 있지 않은, 저 먼 곳에서부터 탄생한 무소불위의 존재들.
「지금 네가 말하는 외부의 존재라는 게 관리자나 지배자를 말하는 게 맞나?」
“…그렇습니다…….”
역시 맞다.
하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조금 이상해진다.
‘정말 숭고한 뜻을 지니고 있었네?’
내가 겪어 본 바, 관리자나 지배자 그 녀석들은 참으로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언제든 이 별을 삼켜 모든 존재를 멸할 수 있는 무식한 녀석들.
그런 녀석들에게 대비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 녀석의 말처럼 숭고한 뜻이 맞다.
‘다만 그 결과로 가는 과정이 문제긴 하지.’
정당한 행동을 한다고 녀석들이 일삼는 온갖 편협한 행동마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대의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과 살인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특히 그게 내 가까운 사람들을 위협하는 행위라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지.
“끄, 끄윽…….”
얼음 덩어리 녀석이 외마디 신음을 토했다.
추욱- 그러곤 이내 늘어진다.
“흠…….”
강제로 의지를 제압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내 실체를 마주하고서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많은 걸 물어보진 못했지만…….”
원하는 것은 얻었다.
본래 계획은 녀석들의 본거지를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샘의 현자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그것을 캐물을 필요가 없었다.
“어디 그 잘난 면상이나 한번 봐야겠네.”
워낙 유명해서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샘의 현자 아슬론.
북부 크루노아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녀석과 면담을 진행해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