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Chapter 91
“그러니까 네가 일원 중 하나를 쓰러뜨렸고, 나를 구했다는… 말이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은 검왕의 말에.
“거참, 의심도 많네. 딱 보면 보이지 않아?”
자연스레 틱틱대는 말이 나왔다.
이건 뭐 아무리 설명해도 믿질 않으니 말짱 도루묵이지 않은가.
“그래, 그렇지. 이렇게 증거물이 눈앞에 있으니 믿질 않을 수 없는데…….”
그의 눈빛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애송이가 일원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뭐, 그런 의미의 눈빛이다.
‘쯧. 내가 자식을 낳았으면 너만 한 아들이 1만 명은 있었다고, 인마.’
내가 동안(?)이어서 그렇지, 진즉 결혼했어도 검왕과 같은 아들이 수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을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의 축이 뒤틀린 결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오랜 세월을 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대륙에서는 그러한 티를 내지 않을 뿐.
“세상을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종종 생기곤 하거든. 그보다 내가 목숨을 구해 줬는데 뭐 없어?”
아직도 불신이 짙게 깔린 눈빛을 외면한 채 물었다.
어찌됐든 내 목적을 위해서는 녀석에게 빚을 지우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은혜라. 그렇군.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마땅히 그 은혜를 갚아야지.”
그리 말한 검왕은 생각할 것도 없이 품속에 감춰 두고 있던 단검 하나를 꺼냈다.
“내 애검인 아조드와 함께 제작된 아르카일세. 비록 대륙 10대 명검에는 들어가진 못했지만, 능히 그것들과 비견될 만한 예기를 지니고 있지.”
그리 말하며 단검을 든 손을 내민다.
“…….”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검왕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부담되는가? 사양할 필요 없네. 내 목숨값으로 충분히 지불할 만한 것이니까.”
“뭔 소리야.”
“으응?”
이 양반이 멋대로 생각하는 게 아주 소설가가 따로 없다.
“고작 이따위 쇳덩이로 목숨값을 대신하겠다고? 이 양반이 아주 양심에 털이 났네.”
“…뭐라?”
곧장 반응이 나왔다.
“아니, 그렇잖아. 힘들게 목숨을 구해 줬더니 고작 쇳덩이로 만든 단검 하나 던져 준다는 게 말이야, 밥이야.”
“고작 쇳덩이가 아닐세. 이것은 아조드의 형제 검으로…….”
“형제 검은 개뿔. 쇳덩이가 들어가도 족히 배 이상은 들어갔겠네. 그거야 말 짓기 좋아하는 대장장이들이나 형제니, 자매니 하는 거지.”
“…….”
“아니, 그럼 형제 검이 아니라 아조드를 달라고 하면 줄 거야?”
“…….”
“거봐. 내가 살려 주지 않았으면 아조드고 뭐고 다시는 사용하지 못했을 텐데. 이거 심보가 너무 고약한 거 아냐?”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말은 고분고분하지만, 이마의 혈관이 살짝 튀어나온 건 지금 녀석의 심정이 어떤지 대변하는 것이리라.
“그래. 진즉 그렇게 나와야지. 목숨겂이라 함은 무언가로 잴 수 없는 법.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그 대가를 물어보는 게 정당한 거지.”
“허허허…….”
아마도 한 성질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목숨을 살려 줬기에 애써 참고 있는 것 같다.
지가 화내면 어쩔 건데.
남들에게야 대단하신 검왕이지만, 내게는 그 명성이 전혀 소용이 없거든.
그저 내 목적과 용무를 위해 입을 놀릴 뿐이다.
“1년.”
“1년?”
“딱 1년만 제자 하나 가르치는 셈치고 함께 가자.”
“…….”
내 말에 검왕은 어떠한 답도 주지 않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군.”
그래. 이미 표정에서부터 답은 나와 있었다.
“한가하게 누군가를 가르칠 시간이 없어. 자네도 봤겠지만, 최근 대륙의 비밀 단체인 위대한 일원과 충돌을 벌이고 있어서 말이야. 이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그분들에게 알려야…….”
“아아,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나도 내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설마 목숨을 구해 줬는데 그냥 먹고 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검왕을 바라봤다.
“허어! 이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세. 대륙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이라 말이야. 고작 그따위 하찮은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단 말일세!”
“글쎄. 내가 보기엔 그리 위험한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고작해야 초월의 영역에 든 모자란 놈들이 꾸미는 음모가 무얼 그리 대단하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군.”
내게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이 목숨값은 기회가 되는 대로 갚도록 하겠네.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
팟!
그리 말한 검왕은 지면을 박차며 높게 솟구쳤다.
발목을 붙잡고 있는 나를 피해 도망가려는 속셈이었겠지만.
터엉!
“크헉!”
멀리가지 못한 채 코를 부여잡고 떨어졌다.
“이게 무슨……?”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코를 뭉개 버린 지점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휙, 휘익.
하지만 그게 만져질 턱이 없다.
‘내 의지로 만든 벽이니까.’
그가 도주하려고 할 때나 물리력을 행사하지, 내 의지가 없으면 그 벽은 실체하지 않는다.
“…자네의 짓인가?”
“그럼. 여기서 나 말고 누가 있겠어.”
“마법인가?”
“마법이라면 네가 눈치채지 못할 턱이 없을 텐데.”
“설마……?”
“의지의 힘이지. 너도 초월의 영역에 발을 걸쳤으면 그게 뭔지 개념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맙소사!”
조금 전 목숨을 구해 줬다고 했을 때보다 더욱더 놀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의지의 힘이라 함은 초월의 영역을 넘어선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발휘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내가 발현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정말 자네가 저 위대한 일원을 쓰러뜨렸다는 말이로군.”
“쯧. 조금 전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저 머저리를 해치우고, 당신을 구해 줬다고.”
“어떻게 그리 어린 나이에…….”
“내가 동안이라서 그렇지, 생각보다 어리진 않아. 아마 첫사랑이랑 결혼했으면 너와 같은 장성한 아들이 여럿 있었을걸?”
“…….”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나 워낙 다양한 경험을 해 본 듯 동안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믿는 것 같다.
“제가 은자를 몰라뵌 것 같군요. 확실히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면, 보이는 나이가 전부를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태도를 바꿨다.
“이 넓은 영역에 걸쳐 의지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시다면 능히 대륙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함께 대륙을 수호하기 위하여 창단된 단체, 데펜시오에 함께 방문해 주시지…….”
“응, 안 해.”
“네?”
“안 한다고. 내가 이렇게 보여도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딴 한가한 대륙 수호 놀이를 할 것 같아?”
“놀이라니요. 그건…….”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한 건 1년 동안 내가 필요한 대상을 가르치는 것. 그것 외에는 네게 볼 일이 없어.”
“허어! 답답합니다. 어찌 이 위급한 상황을 단순한 놀이로 치부한단 말입니까. 그렇게 나오겠다면 저도 더는 목숨을 구원해 준 은혜를 생각지 않겠습니다. 부디 매정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시길.”
뭐, 어차피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식으로 흘러가도록 유도를 했다는 게 맞겠지.
“…….”
침묵을 지킨 녀석은 검 끝에 손을 가져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비록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
아마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무력으로 녀석을 제압한다 해도 타일로의 1년 선생직을 수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한 가지 제안 하나 할까?”
그래서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이 고집불통,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하여 자존심이 강한 그를 꾀어 낼 방법을 말이다.
“…….”
하지만 녀석은 당장에라도 검을 빼 들 것처럼, 고집으로 앙다문 입술을 보일 뿐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확 두들겨 패고 싶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터.
“만약 내가 선정한 제자의 재능이 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 그러니까 가르칠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보고 집어치워도 좋아.”
“…그게 정말입니까?”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새끼, 속이 환히 보인다.’
이 조건은 녀석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그 조건이라는 게 얼마든지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건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
아마도 녀석은 보는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언하면 곧장 그곳을 떠날 계획이겠지만.
‘그게 네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나는 녀석의 의중을 파악한 채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시간이 많지 않으니 당장 가시죠.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의욕이 살아난 듯 당장 뛰어가겠다고 하지만.
“의욕은 알겠다만 네 느려 터진 속도로 가면 한 세월이야. 그러니까…….”
말을 하는 도중에 나와 연결되어 있는 녀석의 흔적, 타일로의 존재를 찾았다.
본래 존재의 흔적을 찾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녀석에게는 특별히 붙여 놓은 게 있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딱!
그와 함께 마기를 발현하며 손가락을 튕겼고.
슈슉!
그 마기는 나뿐만 아니라 검왕도 같이 공간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악. 씨발, 깜짝이야!”
곧장 도착한 곳은 별궁에 마련된 연무장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웃통을 벗은 채 한창 땀을 흘려 대고 있는 타일로였다.
녀석의 존재 흔적을 쫓아왔으니 당연히 녀석이 있는 곳에 당도한 것.
“설마 이건 마법……?”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검왕 녀석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의지의 힘까지 사용하는 마당에 깜짝 이동 마법까지 발현했으니 내 힘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의지의 힘도 쓰는 마당에 고작 마법이 대수일까. 그보다 소개할게. 타일로.”
“네, 네네.”
내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온 타일로.
“이 녀석이 네가 앞으로 1년 동안 가르쳐야 할 제자인 타일로.”
“헉! 서, 설마 이, 이분이 거, 거거검왕 드레이브?”
왕자인 나를 봤을 때보다 더 놀라는 표정이다.
하긴, 소튼 왕국의 왕자보다 검왕이라는 이름이 녀석에게는 훨씬 더 대단하게 다가올 테니까.
“그렇다. 하지만 아직 너를 가르칠 것인지 아직 판단을 내리진 않았다. 네 재능이 내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이라면 가르칠 것이라 제안을 받은 상태지.”
조금 전과는 달리 근엄한 모습을 보인 녀석이 힐끔 타일로를 응시했다.
“미안하지만, 너는 내가 가르칠 만한 수준의 재능이 지니고 있지 않군.”
말 그대로 형식적으로만 바라본 이후에 결정을 내렸다.
당연하지만, 나는 녀석이 그럴 줄 알았다.
“제안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잠깐!”
나는 급히 떠나려는 녀석을 제지했다.
“설마 조금 전 제안을 바꾸시려는 겁니까?”
녀석이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실망한 건 나야. 내가 말했지. 네 마음에 차지 않으면 거절하라고. 근데 너무 형식적으로, 아예 재능을 볼 생각도 없는 거 아냐?”
“…보나 마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글쎄. 그게 네 생각대로 될까?”
나는 옅은 웃음을 지었고.
“타일로.”
“넵!”
“네가 전에 보여 준 무결점의 검식 있지?”
“네, 여전히 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걸 지금 펼쳐 봐.”
“네? 하지만 그건…….”
“완벽히 따라하라는 게 아냐. 대충 흉내만 내 보라고. 나 몰래 열심히 따라해 오던 그거.”
타일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표는 내가 일전에 펼쳐 보였던 무결점의 검식이었다.
물론 그 경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녀석의 재능은 나조차도 인정할 만한 것.
그간 얼마나 자기만의 검식으로 만들었을지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바였다.
“알겠습니다.”
타일로는 군말 없이 그 말을 따랐다.
평소라면 말이라도 한마디 거들었을 테지만, 그 결과에 따라서 검왕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하긴. 나랑은 수준 차이가 너무 나니까. 눈높이 교육을 하려면 나보다는 이 녀석이 낫겠지.’
검왕보다 한참이나 뛰어난 영역에 도달한 나였지만, 가르치는 건 또 다른 영역이다.
워낙 실전 위주로 성장을 해 온 탓에 누구를 가르치는 건 서툴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검왕은 차근차근 검도를 밟고 올라왔을 테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나보다 더 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힘들게(?) 녀석을 데려온 것이기도 하고.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이 검식을 보고 결정하는 것으로 하지.”
“…그러지요.”
검왕은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일식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면 시간을 그리 많이 할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설픈 흉내라도 내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수련해 지칠 만도 하지만 검왕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일.
그렇기에 녀석은 감히 허투른 생각 없이 진중하게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스윽!
녀석의 검이 아주 느릿하게 수직으로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베기였고,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검식이었다.
하지만.
“무, 무슨!”
그 어느 때보다 경악한 검왕은 눈을 부릅뜬 채 타일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검식이란 말인가!”
녀석은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감탄사를 내뱉기에 바빴다.
‘그러게. 이 무슨 괴물 같은 재능이냐?’
심지어 나도 놀랐다.
어설프게 흉내라도 내면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벌써 이 정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놀랍게도 타일로는 어느새 성장하여 무결점의 검식을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깨달음을 첨가한 새로운 검로(劍路)를 만들어 낸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