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Chapter 89
『원정대 마계 진입 58년.』
붉은 달 3개가 지배하는 마계의 핏빛 밤.
모닥불을 피워 낸 원정대원들은 둥글게 모여 전투와는 상관없는, 오롯이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검왕 드레이브. 그분과 한번 검을 맞대 보고 싶습니다.”
매번 돌아오는 질문.
대륙에 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병사 구엘은 그렇게 말했다.
“어엉?”
“검왕과 검을 섞어 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게 말이야 밥이야?”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구엘의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껏 나온 소원이라는 게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검왕과의 대련이라니.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아!”
하지만 이내 구엘이, 이 고지식한 검사가 얼마나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인지 깨달은 원정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식 지위는 십인장 구엘.
하지만 원정대원들은 그를 다른 명칭, ‘광검(狂劍) 구엘’이라고 불렀다.
검도(劍道)에 관해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사내.
덕분에 원정대원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력을 지니게 된 인물이었다.
그런 그였으니 현재 대륙의 최강자라 불리는 검왕과의 대련이 충분히 소원일 수도 있겠거니 받아들인 것이다.
“과연 지금 제 실력이 어느 정도에 올라왔는지, 현존하는 대륙의 최강자인 검왕과 대련하여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스릉-
그리 말한 구엘이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그 검은 명검이라 부를 만큼 제련된 건 아니나 핏빛 대지에서도 손꼽히는 강도를 자랑하는 그리아돈의 송곳니로 만든 검이었다.
“검왕과의 대련을 통해 제가 가는 길이 올바른지 확인할 수도 있겠지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히죽 웃는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원정대원들의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오싹- 대련을 생각하며 저리 행복한 미소를 짓다니. 과연 광검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 아닌가.
“검왕과의 대련. 좋지!”
구엘의 바람에 반응한 건 아서 왕자였다.
“그런데 그건 생각해 봤어?”
“무엇을 말입니까?”
“만약 지금 네가 지닌 힘이 이미 검왕을 넘어섰다면?”
“…….”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58년 동안 흉악한 마계를 헤치며 실력을 쌓았다.
비록 기간은 짧을지라도 마기라든지 실전 단련 면에서는 대륙의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그 시간은 범재도 천재로 둔갑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시간.
그렇기에 이미 구엘의 검술이 검왕을 뛰어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에이, 설마 그렇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실력을 쌓았어도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인 검왕과. 왕자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하지만 구엘은 아서 왕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짠데. 이걸 믿질 않네.’
상대는 농으로 받아들였으나 사실 아서 왕자는 진지하게 말한 것이었다.
왕자인 신분이었기에 대륙에 존재하는 강자들의 몸놀림을 견식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안목이 없는 당시의 눈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강이나마 비교는 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지금 구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검왕과 대적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지만.
‘뭐, 믿질 않으니 더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하지만 그 이상의 설득은 포기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목표가 있다면 더욱더 정진할 수 있을 테니.’
검왕이라는 목표가 있기에 구엘은 성장한다.
만약 그 목표보다 이미 높은 성취를 달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광검이라 불릴 정도로 열성적인 구엘의 단련은 끝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아서 왕자는 그 말을 삼켰다.
하지만 언젠가는 말할 수 있으리라.
사실은 그때 당시 이미 네가 검왕의 검을 꺾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회상한 아서 왕자가 웃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바람.
그러나 이런 아서 왕자의 소박한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계의 밤에 찾아온 불청객, 흡혈의 블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정신 지배라는 강력한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이 거대한 흡혈박쥐는 구엘을 비롯한 원정대원 일곱을 매혹하여 자신의 먹이로 삼았다.
마치 맛있는 것은 아껴 먹듯 나머지 원정대원들은 고스란히 남겨 둔 채 말이다.
*
‘그때는 그래도 나름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과거 회상을 멈추고 정면을 바라봤다.
“컥!”
눈앞에는 구엘이 그토록 원하던 검왕이,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이 형편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쾅, 콰쾅!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탄이 주위를 엉망으로 만든다.
놀랍게도 마법사인 은빛 가면의 사내는 근접전에서 검사인 검왕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면서 말이다.
“흐아아압!”
마탄의 폭발에 주춤 뒤로 물러나던 검왕.
그는 힘찬 기합성을 터뜨리며 양손에 쥔 대검을 휘둘렀다.
훙, 후웅!
마치 폭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거친 소음이 따라온다.
‘저게 그 폭풍의 검이로군.’
대륙을 살아가는 이라면 검왕 드레이브라는 이름과 그의 애검인 폭풍의 검 아조드는 한 번쯤 들어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저기 마력이 깃든 대검이 바로 검왕과 함께 불패의 신화를 써 나간 폭풍의 검 아조드일 것이다.
‘폭풍은 개뿔.’
하지만 정작 그 실체를 본 순간 실망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스톰브링어와 비교하면 저 검은 목검, 아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웅웅웅!
내 의지를 느꼈는지 아공간에 고이 보관된 스톰브링어가 검명을 토하며 ‘저딴 장난감 검과 비교하지 말라’는 불평을 시작했다.
‘동의.’
물론 녀석의 의지에 나도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고.
검은 수준 이하.
그렇다면 실력은?
미풍(?)의 검 아조드를 휘두르는 검왕이 다가오는 마탄을 튕겨 내기 시작했다.
따다다당!
본래는 충돌하는 즉시 폭발을 일으켜야 할 마탄은 고무공처럼 은빛 가면 녀석에게 되돌아갔다.
그것은 기의 운용으로 인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내게는 보인다.
검에 두른 기의 결이. 그 결은 마력으로 뭉쳐진 마탄과 충돌하는 순간 그 힘을 그대로 반사했다.
슈슈슈슉!
덕분에 은빛 가면 녀석이 투척한 마탄은 오히려 녀석을 향해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잔재주는 여전하군.”
수십 개의 마탄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의 탄환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녀석은 태연했다.
스윽-
녀석이 한 행동이라곤 가볍게 손을 긋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팟!
마치 조금 전 그 모든 게 환상이었던 것처럼 수십 개의 마탄이 사라져 버렸다.
디스펠.
그 짧은 순간 마탄의 모든 마력식을 역식으로 풀어 간단히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녀석이네.’
마탄에 깃든 마력만 해도 9써클을 넘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 디스펠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은빛 가면 녀석.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정확히 말하자면 10써클의 영역에 있는 초월의 마도사였다.
“어디 그 잔재주에 한번 당해 보아라!”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검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스팟!
그의 육신이 사라졌다.
다시금 모습을 보인 곳은 은빛 가면의 뒤.
순식간에 뒤를 잡은 그의 검이 맹렬한 속도로 짓쳐 들었다.
“하하하!”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은빛 가면 녀석은 웃었다.
물론 웃는 이유가 있었다.
카앙!
“크흡!”
날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뒤를 잡고 공격에 성공했으나 그의 검은 은빛 가면의 보호막을 넘지 못했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네가 아무리 단련한다 해도, 수많은 시간을 거스른다 해도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닥쳐라!”
은빛 가면의 말에 검왕은 분노했다.
쿠쿠쿠쿠쿠!
그의 분노로 인해 대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최강이라 불릴 만하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과거 내가 했던 발언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
과거 구엘은 절대 검왕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구엘의 전력이 10이라고 한다면 지금 검왕은 거의 50~60에 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구엘이 4~5명 달려들어도 어찌할 수 없는 상대가 바로 검왕인 것.
다만 문제가 있다면.
카캉, 카카캉!
“크흑!”
그 대단하신 검왕의 공격이 은빛 가면이 펼친 보호막을 뚫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저건 기존의 마법과는 조금 다른데?’
검왕을 고전시키는 강력한 보호막.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 보자 마력의 결이 눈앞에 나타났다.
‘앱솔루트 쉴드를 아주 덕지덕지 발라 놨네.’
놀랍게도 그 보호막의 정체는 겹겹이 쌓은 9써클 마법 앱솔루트 쉴드였다.
무려 10중이다.
검왕의 공격은 충분히 앱솔루트 쉴드를 뚫을 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10중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보호막의 방해를 받아 점차 약해지는 위력은 10중의 막을 뚫지 못했다.
뚫지 못하면 다행이지.
“쿨럭!”
앱솔루트 쉴드에 깃든 강한 반발력에 내부가 진탕된 듯 검붉은 선혈을 쏟아 냈다.
“쯔쯔.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분이 고안하신 절대의 마법을 뚫을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다.”
오히려 공격하다 지친 검왕이 무릎을 꿇었다.
‘확실히 저 보호막을 뚫으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겠네.’
물론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기존 대륙의 사람들에게 저 보호막은 ‘절대’라 불릴 만큼 튼튼했다.
아무리 검왕이라고 해도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그 보호막 너머를 넘볼 수 없을 것이다.
“퉤!”
하지만 검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랄하고 있네.”
상당히 마음에 드는 발언이다.
일단 검왕의 첫인상은 합격!
“세상에 절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절대의 보호막? 얼마든지 깨부숴 주마.”
상처 입은 사자는 포효했다.
뚝!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오던 검왕의 기세는 뚝 끊긴 것처럼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고요함.
「그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호라?’
검왕의 의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육신만을 움직인 영역이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초월의 영역.
의지를 다루어 권능을 발현한다.
「거슬러 올라간 만큼 그의 업(業)은 쌓여만 갔고, 그 업은 태산만큼 거대했으니.」
웅웅웅!
미풍의 검 아조드가 검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야 하찮기 그지없는 검이었으나 대륙의 기준으로 보자면 명검이라 불릴 만한 것.
다행히 그 검은 의지를 품을 수 있는 그릇 정도의 쓰임새는 있었다.
「거슬러 올라간 그 모든 시간이 담긴 검을 담아 내니.」
마침내 의지가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것을 참(斬)하리라!」
의지의 검 참(斬).
아조드에서 뿜어져 나온 검의 의지가 그대로 은빛 가면의 보호막을 갈랐으나.
“…….”
달라진 건 없었다.
“으하하하하하! 시도는 칭찬할 만하나 현자님의 마법은 무적.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니라!”
9개의 보호막을 갈랐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 그 마지막 하나를 가르지 못하고 말았다.
“크흐…….”
만약 정상적인 몸상태였다면 충분히 10개의 보호막을 가르고 은빛 가면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교전을 치른 듯 몸 상태가 엉망이었던 검왕은 결국, 그 마지막 하나의 보호막을 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털썩.
모든 기력을 사용한 검왕이 쓰러졌고.
“고집도 이런 고집불통이 없군. 하지만 대계를 위해서라면 약을 사용하는 수밖에.”
검왕에게 다가간 은빛 가면.
뽕!
녀석은 아주 수상쩍은 액체가 찰랑이는 물약병의 마개를 땄다.
그 의도야 빤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설 차례라는 것이다.
팟!
공간을 뛰어 넘어 녀석과 검왕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누, 누구……!”
그제야 기척을 감지한 녀석이 경호성을 지르려는 찰나.
콰챠챠챵!
가볍게 뻗은 내 주먹이 겹겹이 쌓아 올린 녀석의 보호막을 형편없이 부숴 버렸다.
“자, 다시 말해 봐. 절대의 보호막?”
이리도 쉽게 깨지는 게 절대의 보호막은 무슨.
나는 경악하는 녀석을 향하여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