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Chapter 88
“1,315호. 그리고 그라시아스.”
나는 내 양쪽 어깨를 차지하고 있는 봉제인형과 미꾸라지를 차례로 응시했다.
「말씀하십시오, 마신왕 폐하!」
「만수의 왕이시여!」
뭔가 비장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사뭇 심각한 음성으로 답하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에게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은 하나다.
“오늘부터 너희는 나를 대신해 펠리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도록 한다.”
사실 녀석들의 능력은 초월체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다.
신격이 아닌 이상에야 웬만한 적들은 비빌 수도 없는 수준.
그렇기에 녀석들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언제 위기에 처할지 알 수 없는 나약한 동생 펠리드였다.
「허업!」
「어찌 그런!」
갑작스러운 명령에 기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녀석들의 목적이라는 것이.
‘내게 붙어서 권력을 얻어먹겠다는 것일 테니.’
녀석들이 부르는 것처럼 나는 마계, 그리고 환계의 정점에 선 왕이다.
내게 붙어 있다는 건 후에 마계나 환계로 돌아갔을 시 그 권력의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어떻게든 옆에 딱 붙어 아양을 떨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 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내가 아닌 펠리드를 호위하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싫어?”
내가 물었고.
「제가 모셔야 할 분은 이 세상에서 오직 마신왕 폐하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찌 제가 만수의 왕 이외의 다른 존재를 모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계획을 지니고 있던 녀석들은 싫은 티를 있는 대로 냈다.
“아아, 물론 공짜로 해 달라는 건 아니야.”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내가 당장은 무척 바쁠 것 같아서 동생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 질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나를 대신해서 그나마 쓸 만한 너희가 펠리드를 보호해 주는 거야. 만약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건강한 동생을 보게 된다면 기분이 좋겠지? 기분이 좋으면 뭘 할까? 너희들에게 그에 맞는 보상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보상이라 한다면……?」
「꿀꺽!」
처음으로 꺼내는 보상이란 이야기에 녀석들 또한 관심이 생기는 듯했다.
“일단 1,315호, 네가 가장 원하는 게 뭐지?”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면…….」
슬쩍 눈치를 보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진 않는다.
아무리 솔직한 마족이라고 해도 그 욕망을 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71마신의 좌. 안드로말리우스의 이름을 이을 수 있도록 손을 써 보겠다는 거지.”
「으헉!」
얼마나 놀랐는지 그 감정의 여파가 고스란이 느껴질 정도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이냐? 네가 펠리드의 안전만 제대로 보장해 준다면 머지 않아 안드로말리우스의 이름을 이을 수 있을 걸.”
「마신왕 폐하의 명이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녀석은 곧장 공간을 넘어 펠리드에게 이동했다.
일단 한 녀석은 처리했고.
“…….”
나는 여전히 왼쪽 어깨를 지키고 있는 미꾸라지를 응시했다.
「만수의 왕이시여.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저 만수의 왕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같잖은 소릴 하네.”
이 자식이 나를 뭘로 보고.
나는 그라시아스가 지닌 욕망을 꿰뚫어보고 있다.
“너도 마찬가지야. 펠리드에 대한 보호에 힘을 써서 그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다면…….”
「…한다면?」
하하, 이 새끼 봐라?
바라는 게 없다고 하더니 누구보다 바라는 게 많은 것 같다.
“네 아비인 베헤모스를 넘어 일곱 군주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지.”
「…….」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슈욱!
조금 전 1,315호와 마찬가지로 공간을 넘어 펠리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을 뿐.
“그래. 차라리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게 낫지.”
모든 것을 꽁꽁 감추려 하는 사람들보다는 이쪽이 훨씬 다루기가 편하다.
‘골칫덩이 두 마리는 처리했고.’
항상 어깨를 차지하던 골칫덩이 둘은 처리했다.
이제 남은 건.
“저도 펠리드 폐하를 모시면 되는 건가요?”
내 바로 앞자리에 앉은 킬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그래 주면 좋고.”
물론 그건 순전히 내 욕심이다.
자신의 생명을 소모하긴 하지만, 강력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녀가 옆에 있다면 펠리드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수도 있을 테고.’
대륙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강력한 권능이니 충분히 신흥 종교를 이끌 수 있을 터.
종교와 왕의 권력을 합칠 수 있다면 신왕(神王)도 볼 수 있겠지.
물론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그것을 제외하고서도 그녀의 쓰임새는 참으로 많다.
보호, 회복, 어쩌면 부활까지.
“하지만 굳이 내 말을 따를 필요는 없어. 떠나고 싶으면 얼마든지 떠나도 돼.”
하지만 그녀를 강제할 명분은 없다.
그녀의 의지가 있어서 지금껏 날 따라다닌 것이지, 사실 당장 어디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인 것.
“이거 서운한데요.”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사뭇 서운하다는 말투로 답했다.
“그래도 그간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저를 내치는 건가요?”
“아니. 내치는 게 아니고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고.”
“그게 내치는 거죠. 저는 그래도 우리가 꽤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아… 그런가?”
“네, 그러니 갈게요.”
의외로 킬리아는 선뜻 결정을 내려주었다.
“아무래도 당신이 걸어가야 할 여정을 제가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 계집 상당히 눈치가 빠르다.
앞으로 있을 내 여정에 자신이 전혀 활용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저는 반대입니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눈치 없는 녀석도 있지만 말이다.
“…….”
나는 한심한 빛을 담은 눈동자로 타일로를 응시했다.
“저는 대공 전하를 따라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 제 수준이 미약하고 전하에게 보잘것없는 정도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단련하고 또 단련하여 전하를 보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용맹한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씨익 미소 짓는다.
아마 지금 당장의 그 각오가 상당히 잘 먹혔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쯔쯔. 멀었다, 멀었어.”
나는 녀석의 말에 혀를 찼다.
“재능이 뛰어나다, 뛰어나다. 말해 주니까 진짜 자기가 뛰어난 줄 아네.”
“네?”
“인마, 오를 나무가 있고, 못 오를 나무가 있는 거야. 아무리 네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단시일 내에 신격을 이룬 존재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시, 신격 말입니까?”
“그래. 앞으로 내가 상대해야 할 존재들이 신격들인데 아무리 네가 백날 단련하고 단련해도 단시일 내게 그들을 상대할 만한 존재가 될 수 있겠냐?”
“…….”
녀석은 할 말을 잃었는지 제대로 말을 잇질 못했다.
하긴. 내가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존재들이 신격이라고 말을 하질 않았으니 그것을 알 턱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인간이 신격을 상대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명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여기서 단련하는 게 좋을 걸?”
“하지만…….”
“하지만 뭐?”
“대공 전하가 없다면 그 누가 있어서 저를 단련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잠깐 어안이벙벙하다.
‘그런데 사실이긴 하잖아!’
하지만 저 겉멋든 말이 사실이라는 부분에서 조금 기분이 언짢다.
확실히 이 대륙에서 내가 아니면 녀석의 성장을 도울 만한 검사가 많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많지 않은 거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바람을 이루어 주면서 이 녀석도 단련시키고, 게다가 어느 정도 펠리드의 안전도 확보할 수 있겠지.’
그렇기에 이번 계획을 꾸몄다.
“그건 걱정하지 마. 이번에 방문할 곳에 있는 검사라면 충분히 널 단련시켜 줄 수 있을 테니.”
“저를 단련시킬 수 있는 검사 말입니까?”
하지만 여전히 타일로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하여간 의심은 많아서는.
“그래. 크리칼 산맥의 주인. 그 정도 사내라면 네 재능을 충분히 꽃피워 줄 수 있겠지.”
“크, 크리칼 산맥의 주인! 서, 설마……?”
“그래. 검왕(劍王) 그레이브. 그를 네 검술 선생으로 초빙할 생각이다.”
방랑하는 검왕 드레이브.
만 번의 결투에서 만 번 모두 승리하며 불패(不敗)의 사나이라 불리는 그를 왕국으로 모셔 올 심산이었다.
*
“그어어엉!”
숲을 떨어 울리는 고함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쿵쿵.
인간과 흡사하나 5m가 넘는 그 신장은 절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괴물.
“어휴, 또 너냐?”
녹색 피부를 자랑하는 오우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칼 산맥 깊숙한 곳.
다양한 종류의 마물이 출몰한다는 산맥을 가로지르며 만난 대부분의 마물은 오우거였다.
대륙의 마물은 별로 본 적이 없기에 처음에는 신기하게 보기도 했지만, 매번 이 근육질 덩어리 녀석이 나타나니 이제는 시시하다 못해 지루하다.
뿌드득!
근처에 있는 나무를 뽑아드는 저 행동까지, 어쩜 저렇게 먼저 등장했던 오우거들과 차이점이 없는지.
녀석은 터질 듯한 팔근육을 자랑하며 그 거대한 나무를 통째로 휘둘렀다.
후우웅!
바람을 가르는 맹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퍽!
가볍게 든 내 주먹과 충돌한 나무는 산산이 부서졌으며.
“꾸웩!”
그 충격파를 이겨 내지 못한 오우거 녀석이 형편없이 튕겨져 나갔다.
“흠. 이제 대충 다 온 것 같은데.”
교묘히 숨긴 누군가의 기감을, 그 존재의 흔적을 쫓아서 여기까지 왔다.
당연히 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산맥 깊숙한 곳에 터를 잡은 이라면 검왕 드레이브가 유일할 터.
공간 이동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소란을 일으키면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보통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자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괜한 분란을 일으키면 이번 계획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최대한 조심하면서 검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았…….”
마침내 찾고 있던 기감의 근원지, 낡은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어어?”
놀랍게도 오두막은 충격에 의해 산산조각 나 무너지고 있었다.
“커헉!”
그리고 검왕으로 짐작되는 중년의 사내가 튕겨져 나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이 대륙에서 검왕을, 불패의 사내를 이리도 쉽게 튕겨 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말인가?
스윽-
얼른 기척을 숨기며 자연에 동화되었다.
모름지기 가장 재밌는 구경이라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고 했다.
당장은 검왕의 목숨에 지장은 없는 것 같으니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검왕 드레이브.”
저벅- 부서져 버린 오두막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
‘저 녀석은……?’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어디 소속인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위대한 일원!’
검왕을 튕겨 낸 그는 과거 인연(?)이 있는 위대한 일원들과 마찬가지로 은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우리의 일원으로 합류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녀석은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듯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