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Chapter 87
트리안 왕국의 이기적인 계집을 내버려 둔 채 공간을 넘었다.
‘보나 마나 주변 국가들이 가만히 두지 않겠지.’
전쟁의 반란으로 인해 국력이 소실될 대로 소실된 지금 트리안 왕국은 제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영토 확장에 안달인 주변 국가에서(어쩌면 펠리드 녀석이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를 좌시하고 있지 않을 터.
‘최대한 우리 쪽이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손을 써 놔야겠네.’
물론 내가 한 손만 거든다면 온전히 저 거대한 왕국도 삼킬 수 있을 테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무력으로 모든 왕국과 제국, 그리고 종족을 무릎 꿇렸을 테니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시시함’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방관자의 입장이어야 하지, 전면에 나서는 건 좀…….’
그래야 앞으로 성장하는 펠리드를 보면서 그나마 지루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슈슉!
상념을 거둠과 동시에 내 육신은 공간을 뛰어넘었다.
“대, 대공 전하!”
곧장 당도한 곳은 펠리드와 귀족 녀석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
“어찌 이리 빨리……?”
“혹, 무슨 문제라도?”
너무 빠르게 다녀온 나를 보며 당황하는 귀족들.
“문제는 무슨. 이미 처리하고 왔어. 그리고 거기에 더해 한 가지 부가적인 것도.”
“네!”
“그, 그럼 그들을 벌써 처리하셨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악하는 귀족들.
“말이 안 되긴. 그 하찮은 병력이 너희에게나 무섭지, 내게는 한낱 애송이들일 뿐이라서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
툭-
녀석들을 위해 나는 준비해 온 것을 회의장 중앙에 던졌다.
“헙!”
“이자는!”
“베론이 아닌가!”
그건 베론의, 정확히는 전쟁이 깃들어 있었던 이의 목이었다.
그래도 적의 수장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는지 다들 감탄사를 내뱉기 바쁘다.
“형님이 직접 움직이셨으니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정작 골머릴 썩이고 있던 펠리드는 그리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기쁘지 않아?”
나는 녀석에게 물었고.
“물론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긴 합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펠리드는 이윽고 말을 이어나갔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떻게든 혼자서 처리해 보려고 내게 이번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숨긴 보람도 없이, 결국 내가 해결해 버리니 녀석의 입장에서는 허무할 것이다.
‘짜식. 그래도 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조금 전까지는 조금 실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것 같다.
아마 다른 귀족 녀석들처럼 기뻐하는 기색만 만연했다면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당장 왕위에서 걷어찼을지도 모른다.
“그래. 모름지기 가장 위에 서 있는 이라면 그 정도 책임감은 지니고 있어야지. 합격!”
녀석에 대한 평가는 합격.
더는 시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펠리드”
“네, 형님.”
“아무리 봐도 네 주변에 인재가 너무 없는 것 같지 않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동의할 수밖에 없겠군요.”
“…….”
대화의 의미를 깨달은 귀족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눈앞에서 대놓고 무능하다고 욕하고 있는데, 누군들 기분이 좋겠는가.
그것도 녀석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내가 말하고 있으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 이 녀석들만으로는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그것이 설혹 뛰어난 왕재를 지닌 너라고 해도 말이야.”
아무리 펠리드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도 녀석을 받쳐 줄 만한 인재가 없다면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다.
그렇기에 비록 방관의 입장이라 해도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 있는 이 머저리 귀족들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터.
딱.
손가락을 튕겼고.
“어어!”
“이곳은……?”
두 사람, 아니 정확히는 두 명의 인간과 두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신왕 폐하!」
「만수의 왕이시여!」
내가 급히 소환한 녀석들은 타일로와 킬리아, 그리고 1,315호와 그라시아스였다.
무료한 여정에 조금이나마 흥을 돋우기 위해 데리고 다녔지만.
‘더는 녀석들을 품기가 곤란해서 말이지.’
차츰 등장하는 적의 전력이 강해지고 있다.
이제 신격, 판테온과 정면으로 맞서려고 마음먹은 이상 이 녀석들의 존재는 내게 짐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부터 펠리드의 곁에서 녀석을 돕는 게 좋지 않을까?
“형님, 이들은……?”
“어, 맞아. 본래는 좀 더 키워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네.”
그리 말하며 타일로를 응시했다.
사실상 내가 키우려는 목적에 부합되는 건 녀석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1,315호나 그라시아스, 그리고 킬리아의 경우에는 이미 완성된 상태.
사실상 어디에 데려다 놔도 자기 몫은 할 녀석들이었지만, 타일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 겨우 5성인가?’
물론 나이를 생각해 보면 엄청난 성취이긴 했지만, 적어도 녀석의 재능을 아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느릿한 성장 속도일 수밖에 없었다.
‘별 수 없지. 그나마 쓸 만한 정도로 키워 놓고 다시 움직여야지.’
원정대원들의 바람이 남아 있지만, 내게 정을 준 유일한 동생의 미래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
지잉-
환한 빛을 내던 붉은 별이 소멸했다.
그 순간.
「전쟁이 소멸했다…….」
별의 회의장.
그곳 상석에 앉은 옅은 황금색 빛을 발하는 신격이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고.
「뭣이!」
「그 전쟁이 소멸했다고?」
「무슨 그런…….」
별의 회의장에 자리한 수많은 신격이 경악성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쟁이 누구인가.
단순 무력으로만 보자면 판테온에서도 당해 낼 자가 많지 않다는 상위의 신격이 아닌가.
그런 전쟁이 소멸했다니.
「설마 판데모니움에서 나선 건가?」
의심할 수 있는 건 판데모니움뿐.
판데모니움의 상위 신격이 전쟁과 겨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판데모니움 측에서 움직인 정황은 없다. 지금 그들은 내부의 문제로 무척 시끄럽거든. 외부의 일에 상위의 신격을 보낼 만한 상황이 아니다.」
황금빛 신격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판데모니움과 대화할 수 있는 최상위의 신격이 한 말이니 그 말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더 문제이지 않은가. 판데모니움이 아닌 누가 있어서 상위의 신격을, 심지어 전쟁을 소멸시킬 수 있단 말이지?」
보랏빛 신격의 말에 다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판테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가 판데모니움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그 누가 있어서 전쟁을 소멸시킬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혹, 고대의 잡종들의 소행이 아닐는지?」
은빛 신격이 조심스레 말했고.
「하하하. 모든 힘을 잃어버린 그 잡종들이 말인가?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 녀석들은 절대 전쟁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건 모르지. 얼마 전 광기가 탐식 당하지 않았던가. 혹 우리 몰래 신격을 흡수하여 과거의 힘을 되찾은 존재가 있을지도.」
「탐식이라. 흐음.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처음에는 고대신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지만, 뒤이은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신격들도 있었다.
「탐식이라. 확실히 가능성이 있어.」
그 말에 황금빛 신격이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그 현상이 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격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 듯한 반응을 확인했다. 물론 기존의 탐식과는 다른 형태라서 조금 헷갈리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을 염두에 둘 만한 수준인 것 같군.」
그 격의 특별한 권능으로 인해 신격의 생과 사를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는 황금빛 신격.
그는 전쟁의 소멸과 함께 느꼈었다.
격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힘의 작용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을 말이다.
기존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기에 탐식으로 생각하진 않았으나 봉인된 고대신이 또 어떤 탐식의 권능을 발휘했을지 모르니 그 부분도 생각해 봐야만 했다.
「그렇다면 큰일이로군. 전쟁을 이긴 것으로도 모자라, 그 격을 흡수했을 정도면…….」
「으음…….」
「확실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겠어.」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신격들이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최상위 신격 중 하나이자 현재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황금빛 신격 또한 마땅한 대처 방안을 내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쯧쯧. 고작 고대신 하나 때문에 이런 궁상을 떨고 있단 말이야?」
스으으으-
검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장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커헉!」
「이, 이 격은……!」
그 연기를 마주한 신격들이 급급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깊고도 어두운,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그 격은 하나의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대는… 분명 당분간 근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텐데?」
황금빛 신격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검은 안개 형상을 한 그 신격은 과거의 격렬한 전쟁에서 판데모니움에서 판테온으로 적을 옮긴 이였다.
덕분에 판테온의 신격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고, 얼마 전에는 분쟁을 일으키다 못해 언쟁이 붙은 신격을 소멸시키는 사달을 내고 말았다.
덕분에 황금빛 신격을 비롯한 최상위 신격들의 내부 회의를 거쳐 ‘근신’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
그런데 자신의 신전에 박혀 있어야 할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근신? 그거라면 이미 풀렸는데?」
「풀리다니. 나는 이에 대해서…….」
「이미 아길론 의회 결정이 떨어졌어.」
그리 말한 검은 안개 신격이 권능을 발현했고.
화르륵!
회의장 중앙에 불꽃으로 만든 명령서가 나타났다.
「현 시간부로 ???의 근신 명령을 해제한다…….」
명령서의 하단에는 권능으로 새겨진 아길론 의회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으음…….」
황금빛 신격은 침중한 의지를 내뱉었다.
현재 신격들의 ‘장’을 맡은 그에게 사전 공문 없이 근신 명령을 철회한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아길론 의회의 명령이니 더는 불만이 없겠지?」
화륵!
명령서를 지워 버린 검은 안개의 신격이 회의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말이야. 고작 멋대로 설치는 고대의 잡종 놈 하나 때문에 골머릴 썩고 있다니. 그런 게 있으면 내게 상의를 했어야지.」
검은 안개의 신격이 웃었다.
「웬만하면 내가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그 나대는 전쟁마저 소멸했으니 어쩔 수 없네. 그 존재에 대한 처리를 앞으로 내가 담당하도록 할게.」
「잠깐!」
하지만 황금빛 신격은 검은 안개 신격이 멋대로 행동하도록 놔두질 않았다.
「그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그대는 과거 운명의 법칙을 크게 비튼 전례가 있기에 중간계의 강림을…….」
「아, 그래? 하지만 어쩌나.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이미 의회의 허락을 맡았는걸.」
화르륵!
다시금 나타난 명령서.
「…….」
그곳에는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협적인 존재에 대한 처벌을 ???에게 맡긴다는 명령이 새겨져 있었다.
「윗분들은 말이야. 너의 그 답답한 방식을 좋게 보진 않아. 그러니까 이제 상황을 깨달았으면 그만 닥쳐 줄래?」
「…….」
황금빛 신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회에서의 명령이 떨어졌다면 그가 아무리 만류한다 한들 바뀌는 건 없다.
그만큼 의회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자, 그럼 오랜만에 중간계 나들이 좀 가 볼까.」
황금빛 신격을 누른 검은 안개 신격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림을 준비하였고.
슈우욱!
곧 그의 진체는 중간계로 향하는 통하는 차원의 통로를 지났다.
「이거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그가 얌전히 임무만을 달성하지는 않을 텐데…….」
주위에 모인 신격들이 다들 걱정하는 투의 말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금 전 떠난 신격, 판테온 내에서도 극 강경파에 속하는 ‘고통’은 과거에도 한 번 큰 문제를 일으켰던 존재.
「…….」
그의 반대, 온건파에 속하는 황금빛 신격은 아직 남은 의회의 명령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