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Chapter 86
『마계 원정대 출범 4년 전 게르티아 황실 아카데미.』
두근두근.
아서는 흥분으로 인하여 멋대로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정원을 서성였다.
저벅, 저벅-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 채 이리갔다, 저리갔다, 얼마나 불안한지 손톱을 계속 잘근잘근 씹었다.
“설마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보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무리 소국이라고 해도 왕위 계승권자인 1왕자 아서의 용건 아닌가.
설령 부모가 눈앞에서 죽어 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그 초대에 응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의 권위가 소용이 없었다.
게르티아 황실 아카데미.
세 개 제국이 합심하여 만든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가 아닌가.
입학하기 위해서는 최소 공작의 위 이상의 자제여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소튼이라는 소국의 1왕자 신분이 지니는 권위라는 건 병아리 눈물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가 정원으로 부른 상대는.
‘오, 나의 사랑 플레아!’
소튼 왕국과 경계를 맞닿은 트리안 왕국의 왕녀인 플레아였다.
노골적으로 소튼 왕국을 무시하는 왕국의 왕녀.
심지어 가진 거라곤 출생밖에 없는 아서와는 달리 화염 마법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며 적색 마탑의 수많은 노마법사들에게 칭송을 받는 미래의 대마도사였다.
같은 왕족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리고 소튼 왕가 특유의 빼어난 외모를 제외하면 사실상 내세울 것 없는 상황인 것.
그러나 아서는 세상을, 실패를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여인이기에 왕위 계승권이 없지 않은가. 분명 차기 왕이 될 내게 시집을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어린 왕자는 어리석었다.
왕이 되면, 왕이라는 자리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 왕국이 트리안 왕국의 후작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리 멍청한 망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물론 대륙의 정세는 들여다보지도 않는 그는 그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플레아를 꾀어 낼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다가왔다.
저벅-
정원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
자기가 불러놓고 화들짝 놀란 아서는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입구 쪽을 응시했다.
‘오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정렬, 트리안 왕가를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는 눈부신 미녀를 말이다.
‘하악하악, 플레아. 이제 넌 내 것이다.’
이미 상상으로는 자식이 여덟에 손주까지 봤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상상만이 아니라 반드시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부른 거죠?”
아서를 발견한 플레아.
그녀는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듯 미간을 찡그린 채 물었다.
“오오, 고, 고맙소. 플레아. 나의 초대에 응해 주어서 진심…….”
“사족은 빼는 게 좋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이 있어서 말이죠.”
“하하… 그렇구료. 하긴, 요즘 적색 마탑의 인물들과 자주 접촉한다고 들었소. 아마 아카데미가 끝나면 그곳에 적을 둘 생각인가 보오?”
“그걸 묻기 위해서 나를 이곳까지 부른 건가요?”
어딜 봐도 불쾌함을 잔뜩 담은 음성.
‘이 찐따 새끼는 짜증나게 사람을 불러내고 지랄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대가 아카데미의 최대 문제아인 아서였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곳마다 추문이 이어지는 망나니 왕자.
심지어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도 자주 마찰을 일으켜 학생들은 물론 아카데미 내에서도 유령 취급을 받고 있는 머저리.
마음 같아서는 책상 서랍에 넣어 둔 그의 편지를, 정원으로 와 달라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소튼 왕국의 1왕자니까.’
경계를 맞대고 있는 왕국의 1왕자 아닌가.
혹여 왕국에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할 수도 있기에 기꺼이 그 편지를 받고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망나니 왕자가 그녀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니, 그럴 리가 있겠소. 어흠흠…….”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아서는.
털썩.
플레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건……?”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플레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오오, 나의 여신, 고결한 나의 숙녀여.”
어울리지 않는 중저음의 목소릴 낸 아서는 노래하듯(물론 그 노래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음색이었지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부디 나의 피앙새가 되어 주지 않겠소?”
주섬.
돼지 멱따는 노래와 함께 준비해 두었던 반지를 꺼내었다.
딸칵!
그것은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고가의 반지. 왕녀인 플레아도 몇 번 보지 못했을 정도의 귀한 반지였다.
‘오늘을 위해 왕가의 보물 창고를 털었지. 키키킥.’
놀랍게도 그것은 소튼 왕국에 전해지는 3개 보물 중 하나였다.
‘맙소사!’
그리고 플레아는 그 반지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챘다.
‘아티팩트잖아!’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미 4써클의 영역에 도달한 그녀는 마법적인 힘을 품은 아티팩트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다이아몬드 반지에는 아주 강력한 마법적인 힘이 부여되어 있음을 말이다.
꿀꺽!
그 순간 플레아는 눈동자를 좌우로 빠르게 굴렸다.
누가 봐도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고심이 깊은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하하하. 이 정도 반지라면 곧 넘어오겠지. 여자 중에 보석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단 말이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기다리는 아서는 그 눈을 보지 못했다.
“잠깐, 잠깐만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조금 전과는 달리 뾰족한 목소릴 낸 플레아는 무릎을 꿇은 아서를 유심히 응시했다.
‘설마 이 멍청이는 이 반지가 그냥 단순한 보석 반지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청혼을 위한 것이라지만, 이토록 강력한 마법이 부여된 아티팩트를 그냥 건넬 턱이 없다.
분명 이 모자란 망나니 왕자는 이 아티팩트의 가치를 모른다.
‘그렇다면…….’
협박해서 뺏는 것도 아니고, 이 아티팩트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찰나의 순간 그녀는 두뇌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스윽-
“오오!”
아서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내민 반지를 플레아가 가져갔다는 사실을.
“플레아, 나의 피앙새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요?”
청혼 반지를 받는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지만.
“아뇨, 아직은 아니에요.”
“으음?”
반지를 받아 든 플레아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주었다.
“하지만 반지를 받았다는 건…….”
“저는 좀 더 아서 왕자님을 알아가고 싶어요. 단순히 왕국 간의 정략결혼이 아니라 좀더 진지한 만남을 생각하는 거죠.”
“오오! 그런 심오한 뜻이?”
“네, 그러니까 이건 그 만남에 대한 약속의 증표라고 할까요……?”
그리 말하며 반응을 살피는 플레아.
“당연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대가 원한다면 그것보다 더한 것도 증표로 줄 수 있소.”
과연 예상했던 대로 망나니 왕자는 오히려 더한 것도 주겠다며 방방 뛰었다.
‘훗. 이런 작자가 왕위에 앉는다면 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보물도 알아보지 못한 머저리 왕자 같으니.
속으로는 아서를 맹렬하게 비웃었지만, 그녀는 가면을 쓸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해요. 아무래도 소튼 왕국과 트리안 왕국의 사이가 그리 좋은 게 아니니 지금 당장은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왕자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고.
“물론이오. 내 우리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간직하겠소.”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럼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
“버, 벌써 가는 것이오?”
“서운해 말아요. 우리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플레아는 남은 시간이 많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플레아는 적색 마탑의 장로인 그로인의 제자가 되어 아카데미를 급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아서는 알지 못했다.
정원에서의 만남이 플레아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청혼? 내가? 네게?”
오랜만에 당황하며 물었다.
“네, 설마 이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그녀는 내 눈앞에서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흔들었다.
‘반지?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그 순간이었다.
“어엇!”
플레아를 보는 순간에도 떠올리지 못했던 과거의 편린, 그 끔찍했던 흑역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 기억이 나신 건가요?”
“그래. 덕분에 떠올리긴 싫은 끔찍한 흑역사를 떠올리고 말았어.”
억겁의 세월에 묻어 버렸던 흑역사.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새삼 생각해 보니 내가 얼마나 머저리였는지 알겠다.’
잊고 있었던, 반지와 연관된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저것은 왕가의 보물인 ‘수호의 반지’였고, 그것을 훔쳐 냈다는 이유로 공개 석상에서 공작에게 얼마나 망신을 당했던지.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는 아버지도 대로하여(물론 주위의 비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팡이로 나를 쉴 새 없이 두들겨 팼었다.
‘그때부터였지. 망나니라는 단어가 내 수식어로 붙기 시작한 건.’
전에도 망나니라는 이미지는 있었지만, 대놓고 망나니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왕가의 보물을 몰래 훔쳐 내어 그것을 다른 여인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내 이름 앞에는 언제나 망나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당시에는 저도 상황의 여의치 않았는데, 이제는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뻔뻔하게도 계속 말을 잇는 플레아.
음. 새삼 이렇게 보니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녀의 뇌리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는지 알겠다.
“지랄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
“네? 설마 사내로 태어나 한 입으로 두말할…….”
“물론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야. 적어도 약속했다면 그게 무슨 일이든 반드시 지키지.”
그렇기에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대륙으로 돌아와 원정대원들의 바람을, 그 약속을 이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약속이라는 것도 대상을 봐 가면서 지키는 것.
플레아는 기울어 버린 트리안 왕국의 유일한 희망으로 날 본 것 같지만, 그건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가만히 있었다면 그나마 안면이 있는 인연으로 조금은 도와줬을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되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연기는 집어치워, 플레아. 너는 과거 내가 준 반지가 탐난 나머지 청혼을 고려하겠다고 거짓말하며 그날 이후 적색 마탑으로 떠났지. 아, 물론 적색 마탑으로의 이적이 당장 전해지지 않았을 테니 반지를 받고 바로 몸을 내뺄 계획을 꾸민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건…….”
“닥치고, 일단 내 말을 들어.”
아무리 과거의 내가 망나니였다지만, 돌이켜 보면 그 일로 인해 나는 모두에게 망나니라는 말을 듣는 머저리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너도 알고 있었겠지만, 그건 보통 물건이 아냐. 소튼 왕국에 전해지는 3개의 보물 중 하나인 수호의 반지지. 생각해 봐. 아무리 내가 1왕자라고 해도 왕가의 보물을 훔쳐 누군가에게, 그것도 여색에 빠져 전해 준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당시의 나는 머저리여서 그것까지 계산하지 못했지만, 너는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
“물론 네 목적이 뭔지는 알아. 과거의 청혼 이야기를 꺼내어 나를 어떻게든 옭아매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은데, 어리석었어.”
어리석다는 말 이외에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하찮은 동정심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 줬을지 모르겠지만, 보물에 욕심을 부리며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려고 했던 더러운 년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거든.”
전쟁으로 인해 권위를 잃어버린 왕가를 바로 세우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방식이 잘못되었다.
마치 과거 내게서 반지를 빼앗아 가려고 했던 것처럼 너무 머리를 굴렸단 말이지.
“제발, 제발!”
털썩.
별안간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도와주세요. 트리안 왕국은 이제 홀로 설 의지를 잃어버렸어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주변 국가들의 먹이가 되어…….”
“그래.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진정성 있게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차라리 처음부터 진심을 전하지.
이 계집의 잘못된 방식은 굳이 복잡하게 일을 꼬아 생각한 것이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지.’
스윽-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간청하는 그녀의 호소에 반응하지 않은 채 과거 그녀에게 주었던 수호의 반지를 빼앗았다.
“과거의 잘못은 이 반지를 돌려받는 것으로 끝낼게.”
이것으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덮는다.
물론 과거의 잘못은 덮어지겠지만, 그녀가 힘들게 유지해 오던 왕국은, 트리안 왕국은 무너질 테지만 말이다.
“아아아…….”
나는 울부짖는 그녀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겁던 발걸음에 가벼워진 것은 단순한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