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Chapter 85
“네놈은 누구냐!”
“근위병들은 뭐 하고 있었단 말인가!”
“건방진. 외부인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눈이 벌게진 녀석들이 침을 튀겨 가며 입을 놀린다.
스멀스멀-
자연스레 뿜어 대는 기세. 그것은 전쟁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하긴. 보통의 인간이면 신격에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하니까.’
신격이라는 게 그렇다.
토끼가 호랑이를 보면 자연스레 공포를 느끼듯 인간들 또한 초월의 영역에 있는 그들에게 자연스레 영향을 받는다.
나는 그것을 ‘격이 묻어난다고’ 표현하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트리안 왕국의 귀족들 또한 그 격이 묻어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빼앗긴 정도는 아니다.
‘생각이 있는 녀석이라면 격에 저항했을 테지만…….’
녀석들은 그러지 않았다.
정신력이 약한 건 둘째 치고, 그냥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뜻.
여기서 죽어도 억울하지 않은 배신자들이라는 말이었다.
“쯔쯔. 힘들게(?) 왕위에 앉혀 놨더니 고작 뽑은 게 저런 녀석들이란 말이지?”
나는 침을 튀기는 귀족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플레아에게 말했다.
나름 똑똑한 계집이라고 생각해 기껏 왕위에 올려 줬더니 아랫것들도 관리하지 못하다니.
솔직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죄송해요.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이 없었어요…….”
그나마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은 인정.
“뭐, 조금은 실망했다만 반성하는 기미가 있으니 봐줄게. 게다가…….”
나는 플레아의 발밑을 응시했다.
펠리드 것과는 다르게 조각조각 나뉜 소라 껍데기 펜던트가 보인다.
내가 이것을 전할 때 분명히 경고한 게 있었다.
딱 한 번. 인연이 있기에 딱 한 번 도와주겠다고 말이다.
전쟁 녀석이 나타나 반란에 성공했을 때도 사용하지 않았던 소라 껍데기 펜던트를 지금 사용했으니 더는 그녀는 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펜던트를 사용했으니 더는 내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그래서. 원하는 바가 뭐지?”
“…….”
플레아는 말없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귀족들을 훑었다.
“저 빌어먹을 배신자들을 처치하고, 왕국을 되찾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예요.”
“좋아. 그럼…….”
막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말할 무렵.
“죽엇!”
이 소란을 주동하고 있었던 귀족 녀석이 달려들었다.
어느새 뽑은 검을 휘두르는 녀석.
스스로는 가장 빠르게,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는지 모르겠지만.
‘느려.’
그와 나와의 시간은 다르다.
초월체들의 공격도 하품이 날 지경인데 고작해야 인간에 불과한 그의 공격이 내게 통할 턱이 있겠는가.
쉬이익-
너무도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 검에 손을 가져간다.
쩌엉!
내 손가락과 충돌한 검은 굉음을 내며 그 자리에 멈췄다.
“무, 무슨……!”
놀라는 녀석.
그도 그럴 게 전력을 다한, 나름 기까지 실은 검을 맨손으로,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막아 냈으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했냐?”
“이익!”
내 도발에 격분한 녀석은 장기 자랑을 시작했다.
쉬익, 쉬쉬쉭!
검이 흔들렸다 싶은 순간 수많은 잔영을 만들어 내며 내게 쇄도했다.
고속의 움직임으로 환영을 만들어 내어 상대를 헷갈리게 할 속셈인 것 같지만.
“그만 됐다.”
내게는 시시한 장난일 뿐이었다.
재롱을 보는 게 지겨워졌기에 손을 뻗었다.
직선을 그리는 가벼운 정권 찌르기에 불과한 동작이었지만.
콰앙!
그것은 녀석이 발현한 환영을 모두 꿰뚫고 가슴을 강타했다.
“커헉!”
실 끊어진 연처럼 튕겨 나간 녀석이 벽에 부닥치며 바닥에 엎어졌다.
저벅-
그런 녀석을 향해 다가가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지만.
“잠깐만요!”
플레아가 다급히 그를 제지했다.
“왜?”
“마무리는 제가 하게 해 주세요.”
그녀의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
사실 내가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너무도 간단한 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플레아가 복수할 기회는 없어지게 된다.
“그럼 목숨만 부지시켜 놓을게.”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는 플레아.
“감히!”
“건방 떨지 마라!”
하지만 여전히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녀석들이 소동을 피운다.
조금 전 당한 녀석을 제외한 모든 귀족이, 나름 힘 좀 쓴다 하는 녀석들이 사방을 점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퍼퍼퍼퍼퍽!
빠르게 움직인 내 주먹은 정확히 녀석들의 가슴에 적중했고.
뿌드득!
“컥!”
“끄악!”
녀석들의 가슴뼈를 으스러뜨렸다.
척추까지 이어지는 강렬한 고통에 녀석들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신음했다.
오랜 시간 동안 요양하거나 신전에서 치유를 받지 않는 이상, 한동안 운신하지는 못하리라.
“자, 이제 네 차례야.”
서걱!
나는 플레아를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 주었다.
“…….”
마침내 자유를 얻은 플레아는 침묵을 지킨 채 몸을 일으켰다.
저벅-
무거운 한 걸음을 뗀다.
“으으…….”
그녀의 걸음에 귀족들은 고통과 공포에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곧 있으면 찾아올 가혹한 시련을 느낀 것이다.
“쯧.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받은 만큼 돌려준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진 않을 텐데.”
전쟁씩이나 되는 신격이 왔으니 그에게 투항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비록 적에게 투항했을지언정 그 분노와 굴욕을 예전의 주군, 플레아에게 풀면 안 되었다.
녀석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테지만.
‘간단히 왕위를 찬탈했을 때부터 배후가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물론 그 배후가 나라는 것을, 설마 전쟁의 신격을 처치할 줄은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기리탄 공작.”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처음 내게 덤볐던 중년의 귀족, 기리탄 공작이었다.
“크으…….”
“조금 전까지 그리 의기양양하더니 많이 의기소침해졌군요.”
“그, 그렇지 않다. 비록 지금은 이리 당했으나 그분께서 오신다면…….”
하지만 공작은 그 말을 잇질 못했다.
퍽!
플레아의 매서운 주먹이 뺨을 그대로 강타했기 때문이다.
“짐을 위협하는 게 고작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인가요? 참으로 비겁하고, 어리석군요.”
플레아는 이미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왔다는 건 베론을, 전쟁의 신격을 처리했다는 것을.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너희가 믿는 그 베론이란 기사와 병력들 있잖아. 진즉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어. 그러니까 그걸로 너희의 여왕님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리 말하며 나는 베론이 지니고 있었던 철검을 들어 보였다.
혹시 몰라 준비해 온 것이었는데.
“마, 맙소사!”
“베론 님이 당했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효과는 확실했다.
베론의 검을 본 녀석들은 당황하다 못해 경악했다.
“여, 여왕 폐하!”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귀족들이 여왕을 목 놓아 불렀다.
“지, 지금까지 뭔가에 씐 것처럼 앞을 보질 못했습니다.”
공작이 기지를 발하여 말하였고.
“그렇습니다, 폐하!”
“아무래도 정신을 지배당한 것이 아닌지…….”
“저희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귀족들이 공작의 말에 동조했다.
확실히 그게 가장 편리한 변명이긴 하다.
실제로 녀석들이 전쟁의 격에 노출되어 조금은 성향이 변한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호호호호!”
플레아는 웃었다.
“정신을 지배당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요? 아서 님께서 이미 이곳에 온 순간에 그를 처치하였을 텐데 왜 지금에서 와서 정신 지배가 풀린 거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네요.”
매우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귀족들의 되지도 않는 허점을 간파하여 그대로 붕괴시켜 버린 것이다.
“차라리 가만히나 있지. 당신들은 인재랍시고 뽑은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는군요.”
화르륵!
구속에서 해방된 그녀는 마력을 운용하여 불꽃을 생성했다.
“이건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영원의 불꽃이에요. 한번 불이 붙으면 대상을 잿 더미로 만들 때까지는 절대 꺼지지 않는, 웬만해선 사용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잔혹한 마법이죠.”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다.
지금 그녀가 피워 올린 불꽃에는 기이한 마력 방식이 적용되어 있어서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하지 않는 이상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기리탄 공작.”
“예, 예. 폐하.”
“죄를 지었으면 달게 받아요.”
“폐, 폐하!”
그리 말한 플레아는 불꽃을 던졌다.
그리고.
화륵!
마치 잘 마른 장작에 옮겨붙듯 영원의 불꽃이 기리탄 공작을 태우기 시작했다.
“끄으으아악!”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육신을 태운다?
그 고통은 차마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데굴데굴.
고통에 몸부림치던 기리탄 공작은 이리저리 굴렀지만.
“끄윽, 끄으윽…….”
가슴뼈가 짓뭉개진 덕분에 오히려 육신의 고통은 배가 되었다.
“어, 어찌 이리 잔혹할 수가…….”
“폐하, 손속이 너무 과하십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지랄하고 있네.”
결국, 그녀가 숨겨 두고 있었던 성질이 폭발했다.
“조금 전까지 내 뺨을 갈기며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줬던 것은 경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니 살려 달라고? 자비를 베풀어? 너희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우, 아주 신랄하다.
그러고 보니 언뜻 기억나는 과거에 플레아는 꽤 활발한, 아니 상당히 왈가닥 성격을 지녔던 것 같다.
그런데 자리가 자리다 보니 그간 얌전을 좀 떨었겠지.
하지만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 한가락 하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내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인정해 자리에 앉혔더니 뭐?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에라이, 똥물에 튀겨 죽일 녀석들아!”
화륵, 화르륵!
분노한 그녀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끄아악!”
“사, 살려…….”
영원의 불꽃은 빠른 속도로 귀족들을 태웠다.
장내에는 그들이 내뱉는 비명만이 가득했고.
“…….”
플레아는 그 모습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모두 지켜봤다.
‘대단하네. 하긴 이 정도 독심이 있으니 오빠를 죽여 왕위를 이으려고 했겠지.’
생각해 보면 오빠를 죽여 그 왕위를 찬탈한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꺼진 영원의 불꽃.
파스스-
그 자리에 남은 건 고열로 인해 검게 타 버린 잿더미뿐이었다.
“아서 님.”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플레아가 나를 불렀다.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전? 무슨 말을 말하는 거지?”
“과거 제게 했던 제안,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죠.”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데 그 제안이라는 걸 모르겠는데?”
내가 과거 어떤 제안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당시에도 그 말을 그냥 흘려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아서 님은 제게 정식으로 청혼했어요.”
“음, 그렇군. 청혼… 엉? 처, 청혼이라고?”
순간 놀란 난 되물었고.
“네, 당시에는 너무 당황해 생각해 보겠다고 넘겼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할게요. 정식으로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어요.”